미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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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계통의 종교미트라와 관련있다고 여겨진다. 이름이 유사하고, 둘 다 인도이란어파의 신격이라는 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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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역사 속의 미륵신앙 관련 인물
3. 여담
4. 가상매체의 관련 인물
5. 관련문서


1. 소개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불. 석가모니열반에 든 이후 56억 7천만 년이 되었을 때[1] 후에 부처가 될 것이라 수기(예언)를 받은 보살들이 거주하는 도솔천에서 이 세상으로 하생(下生)한다고 한다. 미륵은 하생하기 전까지 도솔천(兜率天)의 보살로 머물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있다.[2] 이 때문에 미륵을 보살이라고도 하고 부처라 부르기도 한다. 사실 이 부분은 좀 복잡한데, 미륵삼부경 중 미륵하생경과 미륵대성불경에서는 미륵이 수기를 받고 도솔천에 있다는 미륵불설을, 미륵상생경에서는 석가의 제자 미륵이 미래불이라는 미륵보살설을 따른다.[3] 근데 석가모니를 더 높이는 현 불교계에서는 관습이란 이름으로 그냥 미륵불/미륵보살을 혼용한다.
그리고 미륵불이 하생하는 장소는 용화수(龍華樹) 아래라고 한다. 이에 따라, 미륵 부처를 모신 법당을 특별히 용화전(龍華殿) 또는 미륵전(彌勒殿)이라고 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보통 불상들과 달리, 미래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명상을 하는 반가상이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설법하러 갈 때 움직이기 쉽도록 서 있는 입상이나 걸터앉은 모습의 좌상을 주로 취하고 있다. 여담으로 미륵은 입상으로 표현될 경우 협시보살들에 비해 키가 크게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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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하생경변상도>에 그려진 미륵의 모습. 일반적인 불화의 부처의 모습과는 확연히 자세가 차이가 있다.
미륵이 나타나면 이 세상에 그 가르침을 펼쳐 설법 한번에 모조리 깨우침의 경지에 들게 해 버린다 하며[4], 이러한 가르침에 따르면 미륵은 미래에 나타날 구원자인 셈이다. 이러한 먼치킨적인 스펙 때문에 흔히 석가보다 뛰어난 듯 묘사된다. 때문에 불교가 전파된 나라들, 특히 한국에서는 미륵 신앙이 발달하였으며 심지어 창조주와 동일시되기도 한다.[5]
허나 반대로 생각하면 미륵은 세상이 망할 때가 되어서야 등장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오히려 세상이 혼란할 때 나타난다고 생각되었으며, 이 때문에 먼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은 이들이 미륵을 사칭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도 진행 중. 지금도 삶이 어렵고 불안한 사람들을 상대로 미륵에게 조상을 천도해야 운이 풀린다며 설득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힘든 시기에는 미래불의 도래를 바라는 미륵 신앙이 유행했는데[6]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의 미륵보살 반가사유상[7], 화랑도[8], 후삼국시대의 미륵 신앙, 고려시대 향도의 매향 활동[9], 조선시대의 후천개벽 사상 등으로 이어졌다.
여담으로 한국 신화에 등장하는 미륵이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불 미륵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본래는 이름이 다른 거인신이자 창조신이었으나, 불교의 전래 후 본명 대신 미륵이라고 불리다가 결국 본명은 잊히고 미륵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것.
고려시대에는 호국을 기원하며 국가 단위로 제석을 주불로 하여 재를 올리는 제석궁(제석원)에서 제석재를 올릴 때 미륵불과 관련된 경전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유는 물론 미륵불이 가지는 초월자적인 포스의 영향도 있지만, 제석을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설멍한 경전 <섬자경>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다.[10] 물론 그 이전부터 미륵신앙과 토속신앙은 용화향도의 기록에서 보이듯 서로 섞이고 있었다.
이슬람교 시아파의 마흐디 신앙은 미륵 신앙과 흡사한 면모도 있다. 오늘날 시아파가 주류인 곳은 이란이지만 전통적으로 시아파 신학이 발전한 곳은 타지키스탄 일대이다. 타지키스탄 일대는 인도와 교류가 많은 것은 물론, 파미르 산맥 일대는 시아 이스마일파의 주요 근거지이기도 했다. 중세 쉬아파 학자들은 힌두 철학과 불교 철학 공부에도 적극적이었는데 특히나 불교 및 힌두교 영향이 농후하다. 한 예로 알리의 초상화가 불교 탱화의 영향으로 이란이나 바레인 등 시아파 국가들에서 그려져 숭배되고 있는데 수니파에선 우상숭배라며 기겁한다. 그리고 드루즈파는 환생 관련한 교리 때문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행했던 불교 혹은 마니교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종파로도 추정된다.[11] 드루즈들은 오늘날 시리아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거주하지만 드루즈교의 실질적 창시자 앗 다라지는 트란스옥시아나 출신의 이스마일파 신학자였다.
한국과 일본에서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비교적 많은 이유 관련하여 일본 불교계는 여호와의 증인 특유의 종말론과 휴거 사상이 미륵 신앙과 유사점이 많아 한국인과 일본인 입장에서 친숙하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백련교의 조직 구성과 여호와의 증인 종교 공동체 문화는 모두 외부에게 폐쇄적이고 종말론과 현실부정 이원론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서 매우 흡사하다.

2. 역사 속의 미륵신앙 관련 인물


  • 성왕(백제): 궁예보다 먼저 미륵을 자처했는데, 역시 견훤처럼 궁예의 포스에 밀려났다.
  • 무왕(백제) : 639년 미륵사를 창건했다. 서동요에 따르면 선화공주와 함께 창건했다고 하나 최근 발굴에 의하면 사택왕후의 요청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한다
  • 미시랑: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화랑. 얼굴을 하얗게 분장한 화랑은 단순한 젊은 인재가 아니라 미륵과 동일시되는 종교적 의미도 있었다.
  • 궁예: 미륵 신앙을 본인의 이미지에 덧입혀 이용한 대표적인 인물. 그의 주 세력권이었던 철원 등 한반도 중북부 지역에서는 아예 궁예미륵이라는 이름으로 토착신앙의 신이 되었다.
  • 견훤: 하지만 궁예의 포스에 밀려 기억되지 않는다.
  • 왕건: 역시 미륵신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인물.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그가 석총대사에게서 미륵의 상징물인 간자를 건네받았다는 전설을 차용한 장면이 나온다.[12] 또한 그가 삼국통일 후 새운 개태사의 주불인 삼존석불은 미륵불상에서 자주 보이는 입상(立像)을 취하고 있고, 전각이 설치된 현재도 전각의 현판을 보면 미륵불을 모신 전각의 이름인 '용화대보궁'으로 되어있다. 다만 학자에 따라 아미타불로 보기도 하며, 2015년 현재는 아예 극락대보전으로 이름을 바꾸고 아미타삼존이라고 소개하는 안내판을 놓았다.
사실 후삼국 시대 이전 각지의 호족들이 신라에 반기를 들면서, 거의 대부분의 호족들은 미륵신앙과 자신을 결부시켰다. 그 당시의 트렌드였던 것이다. 때문에 고려시대에 민간 주도로 만든 한국 특유의 거대 미륵불상이 전국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 포대화상: 당나라 말기 살았던 중국의 승려. 미륵의 화신으로 불렸으며, 그 영향으로 지금도 중국의 미륵불상은 우리나라와 달리 포대화상의 모습(껄껄 웃고 있는 배 나온 뚱뚱한 스님)을 하고 있다. 이 포대화상이 일본화된 것이 칠복신 중 하나인 호테이.

3. 여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불거져 나온 의혹 중 하나로,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이 미륵을 염두에 둔 작명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미르+K=미륵이라는 논리. 농담이 아니라 박지원이 실제로 이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여기에 최순실의 개명한 이름인 서원을 더하면 미륵서원이 된다는 추정도 있다.#

4. 가상매체의 관련 인물



5. 관련문서


[1] 다만 이 기간에 대해서는 불경이나 연구자마다 엄청난 이견이 있다. 57억 6백만 년설, 56억 7천만 년설, 8만 4천 세설 등... 이에 대해 한국의 대표적인 미륵 연구가 이종익은 저서 <미륵성전>에서 이러한 이론들을 바라문교나 고대 인도의 천계 관념이 들어갔기에 부처의 뜻에 위배된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2] 근데 이 부분이 논란이 많다. <미륵상생경>에 보면 이 도솔천의 천주를 미륵이라 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화엄경에서는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미륵을 '위대한 대왕'이라 부르는 구절이 있다. 거기다 정작 석가 본인은 전생에 이 도솔천에 있을 때 호명보살이라는 보살이었다. 어?[3] 사실 미래불 미륵과 석가 제자 미륵은 범어 이름이 다르다. 미래불 미륵은 마이트레야, 석가 제자 미륵은 티샤 마이트레야라고 한다. 근데 우리나라 같은 대승불교 문화권에서는 그냥 섞였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미륵불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 게, 미륵보살설의 근거 중 하나가 현우경의 바바리품에서 석가가 바바리의 제자 16인에게 미래불에 대한 설법을 하자 미륵이라는 수행승이 자기가 미래불이 되고 싶다 하자 석가가 이를 수락하는 구절이 있다.[4] 정확히는 처음에 96억, 그 다음 94억, 마지막으로 92억이 설법 한 큐에 깨닫는다고 한다.[5]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무속신화인 창세가를 비롯해 동북아 지역에서는 석가와 미륵이 서로 경쟁을 벌이는 설화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와 관련된 학술서로는 <석가와 미륵의 경쟁담*>이라는 책이 있다.[6] 힌두교의 시바 신앙과 같은 불교의 정토 신앙 또한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셋 다 사회가 혼란스러운 때에 특히 유행하며, 주요 신도층이 대부분 현시창인 피지배층인 경우가 많다.[7] 이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파되어 일본의 국보 1호를 비롯한 많은 불상들을 낳는다. 이때의 불상은 서서히 한국적 색채를 띠어가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불상으로, 삼국통일 이후에는 이러한 양식이 쇠퇴하고 인상이 넉넉한 불상을 주로 만들었다.[8] 화랑은 신라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인력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 도솔천에서 하생한 미륵과 일체화된 존재로도 여겼다. 김유신이 이끈 향도의 이름은 용화향도였고, 삼국유사 등에는 미륵 신앙과 화랑도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미시랑 설화가 등장한다.[9] 화랑도 각주에서 보이듯 향도는 미륵 신앙과 연관된 조직으로, 사천 매향비 또한 미륵 신앙을 기반으로 의식이 치러진 흔적이다.[10] 서울대학교 출판부, 안지원 저, 고려의 국가 불교의례와 문화 참조[11] 다만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 인기가 대단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도 인간이 환생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들의 환생관이 고대 그리스 세계관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12] 하지만 내레이션에서 '이 장면의 근거가 된 설화는 왕건세력이 조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