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근
權近
(1352 ~ 1409)
1. 소개
여말선초의 문신. 초명은 권진(權晉)이며, 자가 가원(可遠)이고 다른 자는 사숙(思叔)이다. 참고로 11살 차이 나는 그의 동생 권우는 초명이 권원(權遠)이다. 호는 양촌(陽村). 다른 호로 소오자(小烏子)가 있는데, 이는 '새끼까마귀'라는 뜻으로 권근이 키가 작고 얼굴이 거무스름했기 때문에 스스로 지은 호라고 한다.
2. 일생
고려 말 조선 초의 신진사대부로 분류되며, 명문 안동 권씨의 후손으로 정주학을 익혀 고려에 소개한 권부의 증손이자 검교정승 권희의 아들로 태어났다.젊은 시절 이색과 정몽주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경학과 문학의 양면을 잘 조화시켰다. 그의 장례를 치를 때도 이전같은 불교식 의례가 아니라 주자가례에 따라 장사를 치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공민왕 때 나이 열여덟으로 과거에 급제했는데 호명에 따라 대궐 뜰에 들어가자 왕이 노해 "저렇게 어린 아이가 어떻게 과거에 급제했느냐?"라고 묻자 이색이 "장차 크게 쓰이게 되면 어리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에 이숭인, 하륜 등 그 정도 나이에 급제한 사람이 그렇게 드물지 않은데, 열여덟에 어린아이라고 할 정도였으면 권근이 특별히 동안이었거나 공민왕이 그때 유난히 기분이 안 좋았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권근이 키가 작았다고 하니 공민왕이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어쨌거나 당시 고려에서는 문사를 뽑아 명나라 남경에서 행하는 과거에 응시토록 했는데, 권근이 두 번이나 향시에 급제했으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명나라에는 가지 못하고 성균직강, 예문응교로 임명되었다. 우왕 때 예의군부정랑, 전교부령을 역임한 후 좌사의대부로 임명되었다.
1389년에 첨서밀직사사에 이르러 문하평리 윤승순과 함께 사신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는데, 그 때 공양왕이 즉위하자 명나라에서 가져온 문서의 글이 원인이 되어 유배되었다. 그때 이성계의 구원으로 모면하고 이색의 일파와 같이 청주옥에 갇혔다가 마침 수해로 용서를 받고 익주에 있으면서 입학도설을 저술했다.
권근은 외교적으로는 다른 신진사대부들 처럼 친명사대의 입장을 고수하였지만, 사전개혁에서는 조준, 정도전 등의 사전혁파론과 달리 이색과 함께 수조권의 중첩 폐단을 바로잡는 일전일주론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1390년에는 주원장에게 이성계가 명나라를 공격한다는 거짓말을 한 윤이, 이초 등의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정몽주의 도움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이처럼 고려말에는 스승 정몽주와 정치적 입장을 같이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1393년에 정총과 함께 정릉의 비문을 짓고 중추원사가 되었다. 정도전이 표전문 사건을 일으키면서 골치를 썩을 때 권근이 자진해서 명나라로 가서 표전문 사건을 해결하기도 했다. 이때 지은 것이 '응제시'이다. 후에 손자인 권람이 이 시에 주를 달았는데 그것이 응제시주이다.[1] 이후 정도전은 권근도 견제세력으로 보았는지 이 일이 있고난 후 권근을 탄핵하기도 했다. 물론 태조가 일 잘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며 각하했다.
1차 왕자의 난 이후엔 이방원의 세력에 섰으며 태종의 딸 경안공주와 아들인 길창군 귄규의 혼인으로 둘은 사돈지간까지 되었다. 이후 정몽주의 신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태종이 즉위한 후에는 세자 양녕대군의 교육을 맡기도 했다.
문집으로 양촌집이 있으며, 그가 지은 입학도설은 처음으로 그림을 넣어서[2] 학문의 원리를 설명한 책으로 후에 이황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권근은 조선 최초의 대제학이었고, 권근의 친손자가 조선 세조의 수하인 권람이고,[3] 외손자는 역시 세조의 수하이자 문장가인 서거정이며, 임진왜란 때 활약한 명장 충장공 권율과 왜적들과 싸우다 1592년에 순절한 충민공 권종이 6대손이다.
3. 기타 일화
-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다시 제작할 때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 역사 인물을 평가하면서 광개토대왕의 백제에 대한 복수를 '아무리 그래도 오래전 일인데 너무 혹독하게 복수한거 아님?'이러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는데 이후 학자 안정복이 '고구려왕 고국원왕이 죽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럼? 당연히 복수해야지 논평이 왜 이러냐'고 깠다.(...)[6]
- 계백이 황산벌 전투에 출전하기 전에 일가족을 몰살시키고 비장한 각오로 출정한 것을 너무 잔혹하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근데 역시 안정복이 병법을 모른다며 깠다.(...) 이는 부자유친과 대의멸친의 사상이 충돌한 것이다. 본시 권근이 이 논평을 한 일각에 설에 따르면 부자유친을 지켜 설령 계백이 죽더라도 처와 자식들이 신라에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게 권근의 생각이었다. 계백같은 백제 귀족들의 가족들은 후일 신라 문무왕기에 5두품에 편입된 것을 보면 된다. 반면 서거정. 최부, 안정복의 생각은 병법을 모른다기보단 이후 신문왕 시절 당시 신라와 옛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들이 대문의 난 이후 왕권강화책으로 삼한의 여럿 귀족들이 숙청된걸 염두에 둔 셈으로 비판했던 것이다.
- 여말선초의 뛰어난 성리학자이자 주요인물이지만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지 못했다 하여 변절자 소리를 듣게 되며 후대 평판이 좋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이다.
- 조선의 학자들 가운데 당 태종이 과대평가받아 왔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인데, 당 태종이 여자인 선덕여왕을 신라 왕으로 책봉했으니 이후 측천무후가 나타난 것은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것도 논리가 조금 이상한데, 오히려 당 태종은 선덕여왕을 처음에 무시하고 왕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측천무후는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분명한 것은 당 태종의 치세가 당 태종의 치세로 끝난 것은 사실이나 적어도 선덕여왕 임명으로 측천무후가 집권했다는 이야기는 좀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사실 이는 조선시대쯤 가면 성리학에 심취해 여자 왕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기 때문에 과거 신라에서 왕을 세운 것을 비판하기 위해 선덕여왕과 조금이라도 관계되었던 사람들(선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진평왕, 그걸 말리지 않은 당시 신라의 신료들 등)을 다 까는 중에 한 말이다.
-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 이인임 일파에게 숙청되어 귀양을 가 있었는데 왜구가 무섭긴 무서웠던지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로 진포 해전에서 승리하자 온갖 찬사를 첨가한 시를 쓴 적이 있다. 제목은 하최원수파진포왜선<賀崔元帥破鎭浦倭船>('진포에서 왜선을 깨뜨린 최 원수를 축하하며'). 순풍을 받은 배는 새들도 못 따라간다느니, 주유가 적벽에서 불놓은 일이야 애들 장난거리라느니 등등의 찬사로 가득차 있다. 최무선 문서에 시의 전문이 올라와 있다.
- 여말선초의 신진사대부답게 불교까 성향도 강해서, 동국사략에서 이차돈을 깠었다. 불교를 공인하게 한 신라 이차돈의 간교한 계략에 의해 신라시대의 종교 갈등이 심해졌다고 썼다. 정도전의 저서 불씨잡변에 서문을 써주기도 했다. 다만 그의 동생은 출가한 스님이었고 동생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불교까 성향이 타 신진사대부에 비해 특출나게 강했다 볼 순 없다.
4. 사극에서
- 용의 눈물 - 이정웅
여기서는 범이방원파에 속하는 시기가 약간 앞당겨진 편. 정도전의 사병 혁파 당시 하륜의 제안을 받은 이방원이 양딸을 들여 권근의 아들에게 시집보낸다. 참고로 아들 권규가 실제 역사에서 태종의 3녀 정안공주와 결혼한 것은 1403년. 어쨌든 실제 역사보다 일찍 이방원의 사돈이 됐기 때문에, 권근이 명나라로 갈 당시 정도전은 "권근은 이방원의 사돈이니 죽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신덕왕후의 장례 당시 다른 억류된 사신들 4명이 상복을 입고 곡하는 데 참여하지 못했다가, 4명이 전부 참형당하는 모습을 설장수와 함께 눈앞에서 지켜보며 슬퍼하는 것으로 나온다.
5. 관련 문서
[1] 표전문 사건 때 이거 지은 이들은 죄다 명나라로 끌려갔는데, 명나라는 정도전을 데려오라고 했지만 권근이 자기가 가겠다고 자청해서 정도전 대신에 갔는데 억류 생활이었지만 황제와 직접 시도 주고받을 정도로 화기애애했다. 심지어 그 주원장이 억류된 사신들보고 "권근이 맘에 들어서 너네들도 풀어줄게" 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가는 날 당시 조선은 현비(신덕왕후)의 장례 기간이라 이를 추모하기 위해 권근을 제외한(권근은 황제가 하사한 옷을 입었다.) 나머지는 죄다 흰복을 입어서 "남의 나라 일로 왜 상복 입냐?" 해서 권근 빼고는 남았다가 처형되는 사건이 있었다. 다만 이면에는 권근이 정도전과 척을 진 태종 편이고 나머지는 정도전 편이라서 그랬다는 설이 있다.[2] 그래서 교육학에서는 한국 최초로 삽화를 삽입한 교재라고 한다. 삽화가 있는 세계 최초의 교재로 널리 인정받는 것은 1658년에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가 쓴 세계도해인데, 입학도설이 쓰인 것은 1390년으로 270여년 더 이르지만 세계도해는 여러 국가에서 쓰인 반면 입학도설은 유배지에서 일부 아이들의 교육용으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교육학적면으로는 크게 인정받지 못한다.[3] 권람의 아버지이자 권근의 아들인 권제는 판서까지 지낸 관리였으나, 사적으로는 술과 여색에 심지어는 권람에게 학대까지 가했던 내놓은 자식 취급이다.[4] 원래는 강북에서 그냥 갖고 온건데 권근이 강남에서 가져왔다고 말해버렸다. 그 후 안드로메다행[5] 다만 권근이 말한 강남은 현재 중국의 강남 지방이 아니라 그냥 중국을 말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세종어제 훈민정음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을 강남이라고 부른다."라고 나와있다. 당시 사람들이 중국을 통틀어 강남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6] 사실 오래전 일이라고 하기는 조금 그런 것이, 고작 20여년 정도 지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