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와르 이브라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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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B Datuk Seri Anwar bin Ibrahim
1947.8.10~
말레이시아의 정치인으로 한때는 이슬람 운동가였으나 1982년 당시 총리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의 권유를 받고 여당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에 입당하였다. 1993년 미국의 부통령에 해당되는 부총리직에 오르면서 권력 2인자이자 후계자로 등장하지만 5년만에 실각하여, 지금은 야당인사로 변신하였다.
현재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또한 종종 "말레이시아의 민주화 투사"라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후술을 읽어보면 실제 민주화 운동가와는 거리가 멀다.
풀라우피낭의 부킷머르타잠 출신이다. 말레이시아 자체에서는 다수민족이자 원주민이지만 피낭에서는 소수민족인 말레이인 출신이다. 그의 조상 중에 인도인이 있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으나 검증된 바 없다.
뭐 피낭의 사회적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이슬람 운동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이슬람 단체인 말레이시아이슬람학생민족연합의 대표로 일했었고 말레이시아이슬람청년운동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다. 이 시절 빈곤퇴치운동 등의 활동을 하면서 정부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코로 퀘티아우 고렝 원샷을 해야 했던 적이 있었으나 풀려났다.
1982년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당시 총리의 권유를 받고 UMNO로 입당하였다. 이후에는 친정부 성향으로 변했으며, 강경한 친말레이적 교육방안 등으로 사실상 마하티르의 독재에 협력했다. 마하티르 입장에서는 이러한 안와르를 예뻐할 수밖에 없었고 이 와중에 여러 장관직을 맡으며 내각의 주요 실세로 떠오르다가 1993년 가파르 바바 당시 부총리의 사임으로 그 직을 이어받는다. 당시에는 마하티르의 주요 후계자로 각광받...기는 했지만...
당시 기사
1998년 9월 2일 갑작스럽게 부총리직이 박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결국 권력실세에서 파멸되었다. 18일 후 경찰에 구속되었고 모진 고문을 받다가 결국 수감되어, 2008년까지 정계 복귀를 박탈당한다.
당시 정부는 안와르의 숙청 이유를 동성애 및 부패혐의 등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는 검증된 바 없으며 본인은 이를 부인했다. 때문에 안와르가 왜 몰락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유력한 설로는 정치적 대립이다. 당시 아시아에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이에 대한 해결책을 두고 마하티르와 파열음이 발생했는데, 이 때 안와르의 방안이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마하티르는 외환위기에 대해 서방의 음모로 보고 외환 유출을 막기 위해 자본시장을 틀어막았지만, 안와르는 이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 결과 마하티르는 차기 권력유지에 위험을 느껴 정치적 숙청을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안그래도 1998년 말레이시아는 APEC 정상회담을 개최했고 이 와중에 외국에서 온 관리들에게 당시 살벌한 말레이시아의 인권실태가 비춰지면서 마하티르는 불리한 입지에 놓이게 되었다. 바로 신공항(동년 5월 개항)에 도착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그의 아내인 완 아지자를 먼저 만나지를 않나, 외국 정상들 앞에서 물대포를 쓰면서까지 대규모 시위진압을 강행하지를 않나... 하여튼 마하티르의 독재가 문제가 되면서 앞으로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했다.
한편 아내인 완 아지자는 인민정의당(PKR)을 창당하였고 당시 중학교를 갓 졸업한 딸 누룰 이자는 이에 충격을 받고 후에 대학 졸업과 함께 PKR의 수뇌부에 올라 아버지의 석방을 위한 투쟁을 하였다. 이들의 전략이 어느정도 먹혔는지 2008년 총선에서 야당이 개헌저지선을 넘기는 사상 최초의 이변을 남겼고, 이 여파로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 당시 총리는 사퇴했다.
곧바로 연말에 복귀되었으며 2013년 총선에 야권연합 총리후보로 도전했지만 아슬아슬하게 패했다. 그러나 야권연합의 득표율이 51%로 여권연합의 47%를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의석수는 여권이 60%를 가져가면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었다. 안와르 일대는 이에 반발했으나, 얼마 못 가 승복했다.
2015년 다시 구속되었으며, 결국 재수감되었다. 2018년 총선은 원래 본인이 나가려 했으나, 덕분에 무산되었고 그것도 줄곧 본인을 대신하던 아내가 나갔지만 정작 자신을 탄압한 마하티르가 야권에 가담하면서 마하티르를 총리 후보로 밀기로 했다. 이로써 애증 관계였던 두 지도자는 약 20년 만에 정치적 의기투합을 하게 되었다.
마하티르는 선거 당시 집권하면 안와르를 빠른 시일 내에 석방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었다. 5월 10일 총선에서 마히티르가 다시 수상이 되면서, 조만간 안와르가 석방되어 수상이 될 가능성이 유력해지고 있다. 결국 5월 16일에 사면을 받아 출소했고, 같은 해 10월 13일에 열리는 느그리슴빌란 주의 Port Dickson 지역구 하원 재보선[1] 에 출마한다. 해당 지역구가 여당의 텃밭임을 고려했을 때 무난히 당선될 것이라는 전망이며, 안와르가 하원이나 상원의 의원으로 당선될 경우 총리직을 그에게 넘겨주겠다고 마하티르가 일전에 공언한 만큼 곧 총리에 오를 듯.
결국 재보궐선거에서 전체 44,136표 중 31,016표(71.3%)를 얻으면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어 재등원에 성공했다. 마하티르는 최소 2년 이상 총리직을 지키되 총리직을 안와르에게 넘기겠단 약속은 꼭 이행하겠다고.
하지만 정작 마하티르가 사임한 이후 희망동맹이 분열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총리직이 UMNO과 손잡은 무히딘 야신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현재 말레이시아 정치인들 중에서 논란이 가장 많은 사람들 중 하나다. 애초에 정치인이라면 논란이라는 게 당연히 존재하지만, 안와르는 겨우 그 정도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일전 동성애나 부패는 제껴두더라도 극우 인사라는 의혹은 피할 수 없는데, 예전에는 부미푸트라 정책을 "구태적인 정책", "외국 투자자들이 등을 돌릴 것"이라고 비판하는 등 다소 진보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나중에는 우경화해 "우리나라 군대에 외국인이 있다"는 등 보수우파적으로 변했다. 또한 PKR의 풀라우피낭당도 "외국인에게 토지를 임대하지 마라"라는 입장을 밝힘으로서, 흔히 알려진 민주화, 진보좌파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단순히 보수우파라고 하기도 뭣한 게, 당장 야권연합의 협력 파트너인 민주행동당 등이 극우적이라 본인도 이에 맞춰서 변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뭐 형식상으로는 중도좌파지만 유럽 같았으면 극우라고 봐도 무관하다. 거기다가 야권연합이 2018년 총선에서 집권 시 외노자 전원 추방을 공약하는 등, 민주화를 운운하는 단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주장을 내걸고 있다. 당장 한국만 봐도 자유한국당이 최근 들어 외노자 제한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이나, 이것도 억지에 가깝다는 비판이 많으며, 심지어 친박 극우 성향의 변희재는 "다문화 정책을 한국식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거기다가 2013년 술루 사건 당시 안와르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실제로 이것이 당시 총선에서 얼만큼의 영향력을 미쳤는 지 알 수는 없다. 피해 지역인 사바 주는 친여권 성향이 강하며, 특히 술루족들의 공격 지대인 산다칸 일대는 더욱더 친여적이다.
YAB Datuk Seri Anwar bin Ibrahim
1947.8.10~
1. 개요
말레이시아의 정치인으로 한때는 이슬람 운동가였으나 1982년 당시 총리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의 권유를 받고 여당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에 입당하였다. 1993년 미국의 부통령에 해당되는 부총리직에 오르면서 권력 2인자이자 후계자로 등장하지만 5년만에 실각하여, 지금은 야당인사로 변신하였다.
현재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또한 종종 "말레이시아의 민주화 투사"라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후술을 읽어보면 실제 민주화 운동가와는 거리가 멀다.
2. 생애
풀라우피낭의 부킷머르타잠 출신이다. 말레이시아 자체에서는 다수민족이자 원주민이지만 피낭에서는 소수민족인 말레이인 출신이다. 그의 조상 중에 인도인이 있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으나 검증된 바 없다.
뭐 피낭의 사회적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이슬람 운동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이슬람 단체인 말레이시아이슬람학생민족연합의 대표로 일했었고 말레이시아이슬람청년운동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다. 이 시절 빈곤퇴치운동 등의 활동을 하면서 정부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코로 퀘티아우 고렝 원샷을 해야 했던 적이 있었으나 풀려났다.
3. 정치 활동
1982년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당시 총리의 권유를 받고 UMNO로 입당하였다. 이후에는 친정부 성향으로 변했으며, 강경한 친말레이적 교육방안 등으로 사실상 마하티르의 독재에 협력했다. 마하티르 입장에서는 이러한 안와르를 예뻐할 수밖에 없었고 이 와중에 여러 장관직을 맡으며 내각의 주요 실세로 떠오르다가 1993년 가파르 바바 당시 부총리의 사임으로 그 직을 이어받는다. 당시에는 마하티르의 주요 후계자로 각광받...기는 했지만...
4. 실각
당시 기사
1998년 9월 2일 갑작스럽게 부총리직이 박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결국 권력실세에서 파멸되었다. 18일 후 경찰에 구속되었고 모진 고문을 받다가 결국 수감되어, 2008년까지 정계 복귀를 박탈당한다.
당시 정부는 안와르의 숙청 이유를 동성애 및 부패혐의 등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는 검증된 바 없으며 본인은 이를 부인했다. 때문에 안와르가 왜 몰락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유력한 설로는 정치적 대립이다. 당시 아시아에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이에 대한 해결책을 두고 마하티르와 파열음이 발생했는데, 이 때 안와르의 방안이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마하티르는 외환위기에 대해 서방의 음모로 보고 외환 유출을 막기 위해 자본시장을 틀어막았지만, 안와르는 이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 결과 마하티르는 차기 권력유지에 위험을 느껴 정치적 숙청을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안그래도 1998년 말레이시아는 APEC 정상회담을 개최했고 이 와중에 외국에서 온 관리들에게 당시 살벌한 말레이시아의 인권실태가 비춰지면서 마하티르는 불리한 입지에 놓이게 되었다. 바로 신공항(동년 5월 개항)에 도착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그의 아내인 완 아지자를 먼저 만나지를 않나, 외국 정상들 앞에서 물대포를 쓰면서까지 대규모 시위진압을 강행하지를 않나... 하여튼 마하티르의 독재가 문제가 되면서 앞으로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했다.
한편 아내인 완 아지자는 인민정의당(PKR)을 창당하였고 당시 중학교를 갓 졸업한 딸 누룰 이자는 이에 충격을 받고 후에 대학 졸업과 함께 PKR의 수뇌부에 올라 아버지의 석방을 위한 투쟁을 하였다. 이들의 전략이 어느정도 먹혔는지 2008년 총선에서 야당이 개헌저지선을 넘기는 사상 최초의 이변을 남겼고, 이 여파로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 당시 총리는 사퇴했다.
5. 복귀 이후
곧바로 연말에 복귀되었으며 2013년 총선에 야권연합 총리후보로 도전했지만 아슬아슬하게 패했다. 그러나 야권연합의 득표율이 51%로 여권연합의 47%를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의석수는 여권이 60%를 가져가면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었다. 안와르 일대는 이에 반발했으나, 얼마 못 가 승복했다.
2015년 다시 구속되었으며, 결국 재수감되었다. 2018년 총선은 원래 본인이 나가려 했으나, 덕분에 무산되었고 그것도 줄곧 본인을 대신하던 아내가 나갔지만 정작 자신을 탄압한 마하티르가 야권에 가담하면서 마하티르를 총리 후보로 밀기로 했다. 이로써 애증 관계였던 두 지도자는 약 20년 만에 정치적 의기투합을 하게 되었다.
마하티르는 선거 당시 집권하면 안와르를 빠른 시일 내에 석방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었다. 5월 10일 총선에서 마히티르가 다시 수상이 되면서, 조만간 안와르가 석방되어 수상이 될 가능성이 유력해지고 있다. 결국 5월 16일에 사면을 받아 출소했고, 같은 해 10월 13일에 열리는 느그리슴빌란 주의 Port Dickson 지역구 하원 재보선[1] 에 출마한다. 해당 지역구가 여당의 텃밭임을 고려했을 때 무난히 당선될 것이라는 전망이며, 안와르가 하원이나 상원의 의원으로 당선될 경우 총리직을 그에게 넘겨주겠다고 마하티르가 일전에 공언한 만큼 곧 총리에 오를 듯.
결국 재보궐선거에서 전체 44,136표 중 31,016표(71.3%)를 얻으면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어 재등원에 성공했다. 마하티르는 최소 2년 이상 총리직을 지키되 총리직을 안와르에게 넘기겠단 약속은 꼭 이행하겠다고.
하지만 정작 마하티르가 사임한 이후 희망동맹이 분열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총리직이 UMNO과 손잡은 무히딘 야신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6. 논란
현재 말레이시아 정치인들 중에서 논란이 가장 많은 사람들 중 하나다. 애초에 정치인이라면 논란이라는 게 당연히 존재하지만, 안와르는 겨우 그 정도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일전 동성애나 부패는 제껴두더라도 극우 인사라는 의혹은 피할 수 없는데, 예전에는 부미푸트라 정책을 "구태적인 정책", "외국 투자자들이 등을 돌릴 것"이라고 비판하는 등 다소 진보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나중에는 우경화해 "우리나라 군대에 외국인이 있다"는 등 보수우파적으로 변했다. 또한 PKR의 풀라우피낭당도 "외국인에게 토지를 임대하지 마라"라는 입장을 밝힘으로서, 흔히 알려진 민주화, 진보좌파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단순히 보수우파라고 하기도 뭣한 게, 당장 야권연합의 협력 파트너인 민주행동당 등이 극우적이라 본인도 이에 맞춰서 변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뭐 형식상으로는 중도좌파지만 유럽 같았으면 극우라고 봐도 무관하다. 거기다가 야권연합이 2018년 총선에서 집권 시 외노자 전원 추방을 공약하는 등, 민주화를 운운하는 단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주장을 내걸고 있다. 당장 한국만 봐도 자유한국당이 최근 들어 외노자 제한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이나, 이것도 억지에 가깝다는 비판이 많으며, 심지어 친박 극우 성향의 변희재는 "다문화 정책을 한국식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거기다가 2013년 술루 사건 당시 안와르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실제로 이것이 당시 총선에서 얼만큼의 영향력을 미쳤는 지 알 수는 없다. 피해 지역인 사바 주는 친여권 성향이 강하며, 특히 술루족들의 공격 지대인 산다칸 일대는 더욱더 친여적이다.
[1] 이 지역구 현역 의원이 '''안와르의 국회 재등원을 위해 사퇴'''했다. 흠많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