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히딘 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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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히딘 빈 하지 무함마드 야신 (Muhyiddin[1] bin Haji Muhammad Yassin) , 1947.5.15 ~
말레이시아의 정치인. 현재 제8대 총리이며, 통일원주민당(PPBM) 대표 [2] 이자 파고 선거구의 국회의원이다.
2. 생애
무아르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는 말레이인, 자바인, 부기스인 혼혈이다. 말라야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조호르 주정부 산하 기관에서 활동했다.
3. 정치 활동
졸업 직후인 1971년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에 입당했으며, 1976년 파고 지역당 청년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에는 조호르 주당 청년위원장으로 선출되어 1987년까지 재직했다.
1978년 31세의 나이에 국회의원(파고 선거구)에 당선되었다. 1982년 재선에 성공했고, 1984년 오스만 사앗 전 주수상을 꺾고 UMNO 파고 당협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평범한 일개의 국회의원에 불과했던 무히딘은 이 때부터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86년 3선 연임이 가능했지만, 차기 커리어 차원에서 조호르 주수상직에 나서기로 결심했고, 이에 따라 주정에 전념하기 위해 국회의원 출마를 포기했다. 대신에 조호르 주의원(부킷스람팡 선거구)으로 도전했는데 야권이 후보를 내지 않아 후보 등록일 전후로 무투표 당선되었다. [3] UMNO를 포함한 국민전선(PN)이 조호르 주의회를 장악했고 무히딘은 곧바로 조호르 주수상에 선출되어 1995년까지 재직했다.
연방정부에서 커리어를 쌓기 위해 1995년에는 주의원 연임을 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주의원직을 요구하는 주수상 임기도 자연스레 만료되었다. 대신에 파고 선거구의 국회의원 후보로 다시 출마해 9년 만에 복귀했고, 당선 직후 마하티르 빈 모하맛 내각의 청년체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연방정부에 입각했다. 1999년 재선 이후에는 국내무역소비부 장관으로 옮겨갔으며,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 총리 취임 이후에도 유임되었다가 2004년 총선 이후 농림농업기반사업부 장관으로 옮겨갔다. 2008년 제12대 총선 이후 국제무역산업부 장관으로 옮겨갔으나, 당시 BN의 충격적인 패배[4] 를 겪으면서 압둘라 총리는 당내 사임 압력을 받게 되었다. 결국 제3기 압둘라 내각은 1년만 존속했고, 후임 나집 라작 부총리가 총리직을 계승하면서 무히딘은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간 총리, 부총리 직은 UMNO에서만 내왔고, UMNO가 BN의 일원으로서 1957년 독립 이래 50년 이상 장기집권해왔기 때문에, 총리직은 부총리들이 승계했었다. 즉 "부총리 = 차기 총리"라는 공식이 성립된 셈인데, 당 내의 거물급 인사로서 빠르게 성장한 무히딘은 이를 통해 나집의 유력한 후계자가 되었다.
하지만 2008년 총선에서의 패배에서 보았듯이 부총리직은 순탄치 않았는데, 말레이 민족주의 색채가 점점 약해지기 시작하면서 정부에서는 부미푸트라 정책의 완화를 내걸었다. 그러나 이슬람주의 정당인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이 야권연합인 인민동맹(PR)의 일원인 등 이는 자칫 말레이인 표 분산의 원인이 될 수 있었고, 이를 감안한 무히딘은 취임하자마자 초·중등학교의 이과 교육을 영어에서 말레이어로 되돌리는 조치를 취했다. 이 정책은 마하티르 시절 말기인 2003년에 영어 실력 향상 및 인재 양성을 명분으로 도입되었는데, 별 효과를 보지 못했고 오히려 말레이어 쪽으로 발전을 하지 못하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물론 이는 공립학교에서만 해당되며, 사립학교는 여전히 영어나 말레이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2013년을 끝으로 PMR을 폐지했다. 사실 2010년에 먼저 제안하기는 했는데 이유는 고등학교 입학 시험이나 마찬가지인[5] PMR이 너무 시험 위주라서 학생들의 진로 결정에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2014년부터 PT3를 대신 도입했는데... 문제는 시험만 보고 끝인 PMR과는 달리 이런저런 과제물 투성이라서 당시 저학년 과정을 거친 학생들 사이에서 평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언급했던 말레이 표 분산을 우려한 탓인지, 2010년 3월 31일 국회 질의 시간 때 림킷시앙 민주행동당(DAP) 의원[6] 이 무히딘에게 "말레이시아인이 우선이다(Malaysian first)"라고 외칠 것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무히딘은 "말레이인이 우선이다(Malay first)"라고 외쳤고, 이 때문에 중국인 등 타 민족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7] 해당 발언을 빌미로 무히딘을 인종차별적이라고 비난하거나 강경보수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말레이인 민심을 감안할 때 크게 문제가 될 발언은 아니다. 발언 직후 중국인/인도인 버전 퍼르카사[8] 를 조직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밝히면서 타 민족의 반발을 누그러뜨렸다.
그러던 2015년 중순 나집 총리의 횡령 의혹이 불거지기 시작했고, 이는 훗날 소위 1MDB 게이트의 도화선이 된다. 이에 무히딘은 나집 총리에게 해당 의혹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는데, 이후 7월 28일 개각 때 경질되었다. 해당 논란 전후로 마하티르 전 총리도 나집 총리를 겨냥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는데, 무히딘은 일전부터 마하티르계로 분류되어 왔다. 어쩌면은 별로 이상하지도 않을 일.
다만 해당 스캔들은 재야권발 가짜뉴스도 판치는 만큼 걸러볼 필요가 있으며, 무히딘이 과연 진심으로 나집에게 해명을 요구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언급했듯이 무히딘은 자리가 자리인만큼 나집의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를 감안하면 무히딘 본인이 빨리 권력을 이양 받기 위해 명분삼아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혹은 마하티르에 휘둘렸다고도 볼 수 있는데, 마하티르는 권력욕이 매우 세서 역대 총리들에게 심심찮게 태클을 걸어왔다.
여하튼 부총리직에서 경질되면서 총리직도 물건너간 듯 싶었고, 일단 UMNO 부대표직은 계속 유지하고 있었으나, 2016년 6월 최고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당에서 제명되었다. 표면상의 이유로는 "당헌·당규 위반"이었지만, 진짜 이유는 무히딘이 당대표직에 도전하면서 나집 정권에 위협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으로 보였다. 사실 무히딘은 부총리직에서 경질되자마자 UMNO를 비판하는 발언들을 꾸준히 내뱉었는데, 물론 이는 대한민국이라도 충분히 당으로부터 제명될 수 있는 이유에 해당되기는 하다. 하지만 나집 정권은 2015년 연말부터 버르시 집회 등 내외의 도전에 직면해 왔으며, 설상가상으로 2016년에는 전당대회까지 있었는데 총리직 복귀를 노리던 마하티르가 무히딘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워[9] 권력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설이 나돌았다. 당연히 나집에게는 제1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고 결국 무히딘을 아예 '''제명'''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던 것. 덤으로 마하티르의 아들로 크다 주수상이었던 무흐리즈 마하티르도 동시에 경질되었다.[10]
이후 마하티르 전 총리 등과 함께 통일원주민당(PPBM)을 창당했고 대표에 올랐다. 신 야권연합인 희망동맹(PH)에 참여한 것은 덤. UMNO 내 마하티르계 인사들이 창당한 정당이고 마하티르 총재, 무흐리즈 부대표 이렇게 구성되어 있고 무히딘이 거기에 샌드위치마냥 끼어있던(...) 탓에 마하티르의 1인 사당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최소 DAP나 PKR 등과는 달리 1인 사당으로 보기는 어렵다. 사실상 UMNO를 대신하겠다고 밝힌 만큼 당 지도부를 독재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 참고로 무히딘은 2018년 14대 총선 전까지 PPBM의 유일한 현역 의원이었는데, 그래놓고 총선 때 PH의 의석 배분에서 52석으로 가장 많은 의석을 탐낸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4대 총선에서 PH가 예상 밖의 대승을 거두었고 BN의 61년 집권에 종식을 가했다. 마하티르 전 총리는 최초의 야권 총리(...)로 복귀했고, 무히딘은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 부총리직은 PKR의 대표였던 완 아지자 완 이스마일이 차지했지만, 이는 PH가 4당 배분 형태인 탓에 PPBM 혼자서 독식할 수는 없기 때문. 거기다가 완 아지자가 당시 수감된 안와르[11] 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당초의 약속대로 마하티르는 2년 간 총리직을 맡고 안와르에게 권력을 이양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마하티르가 1기 시절인 1998년 안와르를 경질했고, 그의 부인인 완 아지자가 이듬해 국민정의당(현 인민정의당)을 창당했다. 이전부터 앙금이 불거지다가 경질된 것이었고 이게 쉽사리 풀릴 리도 없는데, 실제로 총리직에 복귀한 후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껄끄럽지 못했다. 마하티르도 다시 은연에 권력욕을 드러내면서 안와르에게 이양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일각에서는 PKR의 부대표로 안와르의 당내 정적 중 하나인 아즈민 알리를 대신 선호했다는 설도 나돌았다. 물론 아즈민이 섹스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정치 활동에 큰 악재가 되었지만, 이를 두고 아즈민을 경계하던 안와르의 공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실 마하티르 입장에서는 버젓이 정치를 하고 있고 크다 주수상으로서 커리어를 쌓으며 차기 총리감에 오른 자신의 아들인 무흐리즈를 가장 선호할 수밖에 없다. 즉 속으로는 세습을 강행하고 싶었겠지만, 민주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 설령 그랬다가는 "여기가 북한이냐?"는 식의 비야냥을 들을 것이 뻔하고, 따라서 아랫동네에서 그랬듯이 바지사장을 중간단계로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 그렇게 거론된 사람은 사실상 무히딘 한 사람 뿐이었고, 이 때문에 마하티르의 후임은 무히딘이 될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꽤 있었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4. 총리
2020년 2월 24일 마하티르는 돌연 총리직 사임을 선언했다. 이유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으나, 직전 UMNO, PAS, PKR 내 아즈민계 인사들과 회동을 가졌는데, 이 때문에 PH 내부에서 DAP, PKR, PAN 대신에 이들과 손을 잡고 재집권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PPBM 총재직도 사임해서 무히딘이 대행하게 되었고, 이런 설과 무관하지는 않았지만 곧바로 PPBM을 PH에서 탈퇴시켰다.
하지만 여야를 불문하고 여론은 마하티르의 사임을 반대했고, 이에 마하티르는 "국민이 원하면 복귀하겠다"며 여야를 불문한 거국내각을 제안했다. 그러나 UMNO와 PAS는 DAP와의 협력을 거부했고, 대신에 조기총선을 요구했지만 흐지부지되었다. 결국 거국내각은 무산되었다.
그렇게 BN, PAS, GPS 등 야권과 PKR에서 경질된 아즈민계 의원 11명[12] 이 연대를 선언함에 따라 마하티르는 이들의 지지를 얻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것 처럼 보였고, 이에 일종의 배신감을 느낀 PH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면서 안와르를 총리 후보로 입후보하면서 맞섰지만, BN(42석)+PAS(18석)+GPS(18석)+GBS(3석)+PPBM(25석)+아즈민계(11석) = 117석으로 양측의 첨예한 갈등 끝에 마하티르가 이들의 지지를 얻어 재취임할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 사태에 질린 압둘라 이브니 술탄 아흐맛 샤 국왕은 보다 못해 무히딘을 총리 후보로 지명했고, 졸지에 총리직 복귀를 시도하려다가 되레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마하티르는 위기감을 느끼고 다시 안와르와 손을 잡았고, 이에 PH도 입장을 바꾸어 마하티르를 다시 총리 후보로 입후보했다. 그러자 마하티르는 사임 의사를 철회했고, PPBM 총재직 사임도 안 했다며 입장을 180도 바꿨다. 여기에 무히딘 대행은 무효라면서, 무히딘의 모든 결정(PPBM을 PH에서 탈퇴시키고 대신에 국민연합을 결성한 행동 등)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내놓았다. 여기에 마하티르, 무흐리즈 부자를 포함한 마하티르계 의원 3명도 추가 합류해 무히딘 총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반발했지만,[13] 이미 국민연합(PN)이 비공식적으로 결성된 상황에서[14] 3월 1일 제8대 총리로 취임한다.
취임 후 1주일 만에 내각을 발표했는데, PH처럼 특정 정당이 온전히 장악하지 못 하고 있어서 향후 논란을 피하기 위해 부총리직은 일단 비워두었다. 대신에 선임장관을 4명 두었고, 재무장관에도 CIMB 은행 총재인 자프룰 아지즈를 임명하는 파격행보를 보였다.[15]
하필 취임 시기가 코로나 19로 혼란스러운 정국이었는데, 초기 잠잠하던 말레이시아는 확진자 수가 급증해 심각한 혼란 상태에 빠졌다. 결국 초강수로 통행금지령을 떨어뜨렸고, 3월 18일부터 2주간 시작되었다.[16] 매우 엄격한 통제로 경제적 우려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 지장까지 받으면서 불만의 목소리도 있지만, 다들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 오히려 덕분에 신규 확진자 급증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면서 동남아에서 신규 확진자 수가 베트남 다음으로 적은 나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17] 물론 여기에는 누르 히샴 압둘라 보건국장의 활약이 컸다는 점도 있지만.[18]
이렇게 국민적인 인기를 끌고 있지만 앞날은 영 밝지는 않다. 언급했듯이 총리 취임 과정에서 논란이 있었고, 마하티르는 여전히 이를 인정하지 않고 무히딘을 어떻게든 끌어내리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기 전당대회 카드를 꺼냈지만, 코로나 정국의 와중에 강행되기는 어려워 보였는지 불신임을 상정하기도 했지만 되레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결국 5월 18일 불신임 투표 결과 무히딘 측이 과반이라 부결되었지만, 행여나 가결되었으면 노무현 탄핵 당시와 비슷한 상황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무히딘 본인이 PPBM 소속이라 그런지 각료의 절반을 PPBM에서 임명했는데, 이에 일부 UMNO 인사들의 반발을 직면하고 있다. PN 내부에서도 UMNO가 39석으로 의석이 가장 많은데, 왜 UMNO 위주로 임명하지 않았냐는 것. 물론 이러한 행위는 일종의 선민사상으로 간주되어 썩 좋은 소리를 듣지 못 하고 있다.[19] 설상가상 무히딘의 지역 기반인 조호르도 PN이 집권했지만, UMNO와 PPBM 의원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해 상황이 썩 좋지는 않은 상황이다.
다만 일부에서는 마하티르와의 권력 투쟁 결과에 따라 PPBM이 UMNO로 도로 복귀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UMNO의 조직력은 여전히 막강해서, 역사적으로도 UMNO 탈당파들이 만든 정당들은 오래 가지 못 하고 망해서 도로 UMNO 앞에 백기투항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1987년 마하티르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한 틍쿠 라잘레이 함자가 창당한 정신46(S46). 거기다가 일부 UMNO 인사들의 주장을 추려보면 향후 15대 총선 때 UMNO가 PAS와는 단일 후보를 내도[20] PPBM과도 단일 후보를 낼 지는 미지수. 오히려 UMNO+PAS와 PPBM이 따로 냈다가 역으로 말레이·무슬림 표가 분산되어 PH가 어부지리 승리를 거둘 수도 있고, 반대로 승리하더라도 PPBM은 S46처럼 폭망할 수도 있어서 그야말로 양날의 검.[21]
당연히 PH 지지자들은 무히딘을 총리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 아예 "뒷로비 정부(kerajaan pintu belakang/backdoor government)"라고 비하하고 있는 중이다.
5월 28일, 마하티르계 의원 5명이 결국 PPBM에서 '''경질'''되었다. 얼마 후 샤흐루딘 모하마드 살레 근로부 차관이 차관직에서 사임했는데, 이에 일각에서는 샤흐루딘이 무히딘 지지를 철회하고 마하티르를 지지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일단 별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무히딘 지지 입장을 재천명했다. 하지만 일각에서 예상하던 대로 결국 마하티르로 지지가 넘어갔고, 결국 7월 샤흐루딘 또한 PPBM에서 제명되었다. 이들은 얼마 후 조국투사당(PEJUANG)을 창당했으나, 이 중 사이드 사디크는 혼자 합류하지 않고 대신에 말레이시아 통일민주연합(MUDA)을 결성했다.
4.1. 추락하는 인기
하지만 무히딘 치하에서 그럭저럭 순조롭게 넘어갈 줄 알았던 나집 전 총리 관련 재판은 7월 28일 나집 전 총리가 징역 12년 형을 선고 받으면서, BN, 특히 UMNO와 지지자들에게는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결국 UMNO는 곧바로 입장을 발표하며 PN이 향후 정식으로 등록될 경우 UMNO는 합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이후 BN과 GPS가 최종 합류 거부를 선언하면서 PN은 빠르게 분열된다.
그리고 논란의 재판 다음 날, 무사 아만 전 사바 주수상은 자신이 과반의 지지(33/65)를 얻었다고 선언하면서, 본인이 샤피 압달을 대신해 주수상직에 복귀하는 것이 맞다고 밝혔다. 그러자 곤경에 처한 샤피 주수상은 주하르 마히루딘 주지사와 회동을 갖고, 아예 작심하고 주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치르는 결정을 한다. 분노한 무사는 해당 결정이 잘못되었다면서 주하르와의 회동을 원했지만, 주하르는 무사와의 회동을 거부하고 샤피의 손을 들어준다.
그렇게 9월 28일 조기 총선이 치러지게 되고, 단합된 PH-WARISAN-UPKO 연합과는 달리 여권은 이런저런 분열로 인해 좋지 못한 환경에서 선거를 치르게 되었으나, 예상 외로 여권연합이 73석 중 38석을 차지해 단독 과반 의석을 획득하면서 주의회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UMNO와 PPBM이 주수상 선출 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는데, UMNO는 선거 책임자인 붕 모흐타르 라딘을 차기 주수상으로 추천했지만, PPBM은 무히딘이 낙점한 하지지 누르를 추천했고, 이로 인해 선거에서 이기자마자 갈등이 벌어진 것. 결국 합의 끝에 하지지를 주수상으로 선출했지만, 여기서 한 발을 뺀 UMNO 지도부도 숱한 비판을 받았고, 양측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크게 남기고 말았다.[22]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의도치 않게 터진 '''코로나 2차 감염 사태'''인데, 말레이시아의 날(Hari Malaysia)이기도 했던 9월 16일 사바 동부의 한 교도소에서 발생한 집단 감염 사태로 인해 갑자기 '''62명'''의 신규 확진자를 기록했고, 이후에도 사바 동부를 중심으로 주 전체에 바이러스가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런 와중에도 선거는 강행되었고, 말라야에서 지지 유세 차 건너온 정치인들 일부와, 말라야로 건너간 일부 사바인들로 인해 말라야에도 서서히 확진자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허나 상당수는 이번 일이 심각하게 커질 줄 몰랐고, 정부에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사바에서 말라야로 온 이들은 2주 자가격리를 할 필요가 없다"고 밝히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결국 10월이 시작되자마자 신규 확진자 수가 '''3자리 수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인구도 많고 인구 밀도조차 높은 수도권(슬랑오르, 쿠알라룸푸르, 푸트라자야)을 중심으로 '''대규모 참극'''이 벌어지고 만다. 이 때문에 예전처럼 전국 완전봉쇄를 다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막상 여기서도 또 혼선을 빚게 되고, 급기야 확진자 수가 '''4자리 수'''를 기록하는 '''비극'''으로 이어지고 만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결국 수도권과 집단 감염 지역 등을 중심으로 통제를 부분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문제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는 것.
당연히 지지율은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1차 감염 사태 당시 단호하고 적극적인 대처로 나름 방역 모범국 소리를 듣기도 했던 말레이시아였지만, 2차 감염 앞에서는 이런저런 혼선을 빚고 뒤늦은 입장 발표, 말바꾸기 논란까지 떨어지면서 국가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말았다. 당장 한 순간의 실수로 추락한 코 앞의 아랫동네가 있는데 문제는 그 전철을 밟고 만 것.[23] 특히 일전에 "확진자 수가 3자리 수로 돌아오면 전국 봉쇄가 불가피하다"고 밝히던 것은 언제고, 막상 그보다 더 심한 상황이 터졌는데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한 태도는 여론의 뭊매를 맞을 수밖에.
결국 PH 지지자들은 온라인에서 "#MuhyiddinOut" 등의 해시태그를 달면서[24] 무히딘 퇴진 운동을 벌이고 있고, 안 그래도 안와르가 스스로 정부를 구성할 원내 충분한 지지를 얻었다고 선언하는 등 정치도 불완전한 와중에 일까지 터졌으니, 제대로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그나마 저 무히딘 퇴진 운동도 온라인에서 야권 지지자들이 벌이는 정도에 그치면서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 싶었지만...
언제 축출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자 최후적으로 '''계엄령'''을 검토하려다가 전국이 발칵 뒤집혔고, PH는 물론이고 UMNO 내부에서도[25]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제대로 곤란해졌다. 당연히 국왕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덤. 물론 상당수가 계엄령이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희박하게 여겼고 실제로 이루어지지도 않았지만, 하필 이런 논란으로 인해 이제는 여기저기서 제대로 사임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확진자 수가 끝도 없이 폭증하다가 할리마 모하메드 사디크, 리나 하룬, 함자 자이누딘, 자히디 자이눌 아비딘 등 일부 장·차관들까지 감염되는 일이 벌어졌고, 결국 2021년 1월 13일부터 다시 봉쇄령(일명 MCO/PKP 2.0)을 내렸다. 하지만 소 읽고 외양간 고친다고, 이미 일은 다 벌어지고 나서야 뒷북을 친다는 비판이 나왔고, 그마저도 1기(3월 ~ 4월)에 비해서 상당히 완화된 봉쇄라서[26] 봉쇄 같지도 않다는 비난이 쇄도하고 있다. 일부 UMNO/BN 의원들조차 비판하고 있으며, 나집 '''전 총리'''마저 '''그럴 바에는 아예 하지를 말라'''고 일침을 날렸을 정도.[27]
[1] 드물게 Mahiaddin이라고도 하는데 본인의 주민등록증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고 밝혔다. 딸 이름도 나즈와 마히아딘(Najiwa Mahiaddin)이지 나즈와 무히딘(Najwa Muhyiddin)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도 어지간해서 Muhyiddin이라고 하지, Mahiaddin이라고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가령 UMNO 공식 문건에서 한 번 Mahiaddin이라고 한 적은 있었다). 이게 14대 총선을 앞두고 투표용지에 Mahiaddin이라고 인쇄된 일이 있었는데, 본인이 직접 Muhyiddin으로 적어달라고 선관위에 부탁했다.[2] 취소선을 친 이유에 대해서는 후술.[3] 취소선을 친 이유는, 2008년까지 BN이 원내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절대적인 세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 이후로 세가 급격히 기울어 후술하듯이 2018년 자그마치 '''61년'''의 정권을 내주게 되었다.[4] 과반 의석을 확보해 정권을 유지하는 데 문제는 없었으나, 1974년 이후 원내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상실해 단독 개헌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추락했다. 이는 1969년 총선 이후 두 번째인데, 마침 안와르 이브라힘이 복귀를 코앞에 두고 있었던 시기였던 탓에 야권 표가 결집해 BN이 충격적인 패배를 기록한 것.[5] 말레이시아는 영국식 교육제를 따라서 고등학교가 없는 대신 중학교가 5학년까지 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는 대한민국의 중학교와 동일하며, 4학년부터 5학년까지를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역할을 하는 셈. 사실 한국도 일제강점기 때는 이랬다.[6] 딱히 당 내 별 공직을 맡지 않은 탓에 그냥 그가 맡고 있던 국회의원직만 적어 놓았지만, 전후로도 림킷시앙은 DAP의 실권자이다.[7] 당장 해당 영상의 댓글을 보면 중국인들의 비난 댓글을 수두룩하게 볼 수 있다. 정말로 여담이지만 말레이시아 인터넷은 중국인들의 입김이 세며, 이들이 말레이 민족주의 관련 영상/게시물에 테러를 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8] 말레이인 민족주의 단체.[9]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 특히 하원의원이어야 한다. 하지만 마하티르는 2004년을 끝으로 의원직을 그만 두었다.[10] 샤피 압달 최고위원도 제명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그는 제명된 것은 아니고 단지 최고위원직에서 해임되었을 뿐이다. 그는 이후 UMNO를 탈당하고 사바유산당(WARISAN)을 창당했으며, 2018년 총선 이후 사바 주수상에 취임했다.[11] 물론 얼마 안 가 석방되었다.[12] 정확히는 12명이지만, 왜 11명이냐면 바루 비엔이 총리 지지 문제를 두고 무소속 잔류를 선택했기 때문.[13] 특히 가장 격렬하게 반발했던 이는 전 청년체육부 장관인 사이드 사디크로, 대놓고 "부패 세력과 협력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 "부패 세력"은 UMNO를 지칭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후 PPBM 탈당파들이 창당한 조국수호당(PEJUANG)에 합류하는 듯 싶었으나, 결국 이마저도 철회하고 말레이시아 통일민주연합(MUDA)을 창당하면서 BN, PH와도 다른 독자 행보를 걷게 된다.[14]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이었으며, 법적으로 등록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는 UMNO 인사들이 직접 밝혔으며, 본인들은 BN이나 국민의 협약(MN) 정도만을 인정한다고 했다. 하지만 후술할 이유로 정식 등록이 될 때에는 BN은 이미 빠져 있었다.[15] 다만 의원내각제인 말레이시아에서 비(非)의원 공무원은 입각할 수 없다. 대신에 상원의원 일부가 임명직인데, 이에 자프룰 임명에 명분을 주기 위해 그를 상원의원에 임명했다. 실제로도 이렇게 장관이 된 사람들도 많은데, 주로 낙선자 구제 차원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다고, 이렇게 임명된 사람은 딱 한 번만 연임할 수 있다.[16] 이후 2주씩 연장되었다. 일단은 6월 9일에 끝날 방침이나, 사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으면 또 연장될 수 있다. 한 기사의 분석에 따르면, 신규 확진자 수가 한 자리 수로 떨어질 때까지는 연장이 불가피하다고 한다.[17] 싱가포르는 초기 대응에서 성과를 거두었으나 방심한 틈을 타 확진자 수가 급증해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고, 8~9월에 들어서 간신히 수습하는 중이다. 인도네시아나 필리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18] 반대로 아담 바바 보건부 장관은 잦은 실언, 실책으로 평이 좋지 않다.[19] 다만 이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UMNO는 독립 후 무려 '''61년''' 간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이 때문에 비록 22개월에 그쳤지만 권력을 상실한 것은 큰 충격 그 자체였다. 오랜 세월동안 누리던 권력을 하루 아침에 빼앗겼으니. 이렇다 보니 PN의 일원으로서 일단 권력에 복귀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신들이 위라고 주장해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20] 이들은 아예 국민의 협약(Muafakat Nasional; MN)이라고, 일단 공식적으로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2019년 공식적인 연대 자체는 선언했다. 이미 14대 총선 패배 이후부터 PH의 독주를 막기 위해 재보궐선거마다 꾸준히 단일 후보를 내왔다.[21] 당장 무히딘 본인도 2004년부터 득표율이 떨어지고 있어, 그 전에는 70% ~ 80% 남짓을 득표했으나 2013년 66.01%를 기록해 70%대가 무너졌고 2018년에는 55.21%로 60%대조차 무너졌다. 향후 잘못하면 과반 득표도 못 할 수 있는 상황.[22] 의석 수만 따져도 UMNO가 PPBM보다 더 많지만, PN과 BN으로 따지면 PN이 더 많다. 이 때문에 곤란할 수밖에 없었던 것.[23] 그나마 싱가포르의 경우, 저 감염자 상당수가 외노자 합숙소에서 벌어진 것이며,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저 외노자 감염 사태도 9월에 들어서 진정되다가, 이제는 외노자 합숙소에서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은 날도 등장하는 등 말레이시아와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다.[24] 물론 모두가 PH인 것은 아니고, PPBM을 반대하는 일부 UMNO 지지자들도 있다.[25] 그냥 일개의 의원들 사이에서만 나온 게 아니라 몇몇 최고위원을 포함한 '''지도부'''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 심지어 모하마드 하산 '''부대표'''조차 반대 입장을 밝혔다. 즉 같은 여당 내에서도 반대에 직면하게 된 것.[26] 예를 들어 1기 때는 열 수 없던 시설들을 2기 때는 제한적으로 열 수 있다던가 하는 등...[27] 이 때문에 나집을 극도로 혐오하는 MalaysiaKini 댓글러들조차 '''이건 맞다'''고 옹호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일부에서는 차라리 나집이 낫다고 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