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재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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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위원회 의장'''
''창당''

'''초대
변희재'''

권한대행
인지연


'''변희재'''
'''邊熙宰 | Byun Hee-jae'''
<colbgcolor=#00001b><colcolor=#fff> '''출생'''
1974년 4월 22일 (49세)
'''출신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거주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본관'''
원주 변씨[1]
'''신체'''
183cm, 85kg, B형
'''소속 정당'''

'''학력'''
서울반포초등학교
반포중학교
경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 / 학사)
'''병역'''
육군 병장 만기전역(카투사)
'''종교'''
무종교(무신론)
'''현직'''
미디어워치 대표고문
'''링크'''
/ [2] /
1. 개요
2. 활동
2.1. 보수 논객
2.2. 정치활동
2.4. 19대 대선 및 그 이후
3. 사건사고/논란
4. 여담
5. 선거이력
6.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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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우익 운동가, 정치인, 언론인.

2. 활동


서울 용산구에서 태어나 서초구 반포동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3] 반포중학교, 경문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해서 1994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였다.[4] 74년생 재수생이라 학력고사수능을 다 본 희귀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병역카투사로 마쳤다.
1999년 '''안티조선 운동'''에 동참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8년 월간조선의 기사로 소위 최장집 사상논쟁이 일어나자, 강준만, 고종석, 김정란, 진중권, 김규항, 홍세화 등이 한국사회에서 가장 비중있는 매체인 조선일보를 '무소불위의 언론권력'이라면서 동시다발적으로 비판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이 일었고, 여기에서 변희재는 처음에는 무명의 행동대원 정도였지만 곧 왕성한 활동으로 인터넷상에서 '''안티조선 운동의 전사'''라는 평가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우연한 계기로 시작돼서, 명확한 노선과 행동강령이 없었던 안티조선 운동은 언론환경의 변화나 조선일보의 영향력 쇠퇴보다는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는데 활용되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안티조선 운동에 동참했던 지식인들은 2002년 대선 이후 각자의 신념에 따라서 뿔뿔히 흩어지게 된다.
그 뒤, 안티조선 운동과 인터넷미디어의 폭발적인 성장 속에서 변희재는 1999년 창립된 진보성향의 인터넷 언론 대자보를 포함해서 다양한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면서 인터넷 출신 논객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게 된다. 이때, 사사로운 자리에서는 자신의 서울대 미학과 선배인 진중권을 띄워주는 글도 여러 차례 기고하기도 했다. "진중권은 이 사회에 보기드문 상식적인 좌파이자, 유쾌하게 세상을 사는 분"이라고 띄워주면서 심지어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가 자신의 학문적 길라잡이라고 칭송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는 대자보가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하자, 아예 친노 사이트 서프라이즈로 자리를 옮겨서는 노무현을 찬양하면서 한나라당과 조선일보를 사정없이 공격하는 글들을 무수히 쏟아내었다.
그러나,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그리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를 거치면서 점점 비노로 기울기 시작했고, 분당 이후 쪼그라든 새천년민주당을 대놓고 지지하던 브레이크 뉴스로 활동공간을 옮기면서부터는 비노의 선봉장으로 활동하면서 '''"호남을 무시하지 말라!"''' 같은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브레이크 뉴스를 떠나서 2006년 9월 인터넷 우익언론 빅뉴스]]를 창립하면서 사실상 극우전향하였다. 변희재는 당시 진보진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론이 사회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자, 대안으로 조선일보와 함께 실크세대론을 집중 제기하였다. 실크세대론은 요약하면 '20대 창업론', '20대 CEO론'으로 '기성세대의 도움 없이 20대 스스로 일어서자', '기회는 충분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특히 장본인인 20~30대 사이에서 88만원 세대론 만큼의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사실 88만원 세대론도 정작 진보/좌파 성향 학자들한테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통계, 실증 연구가 전혀 없이 그냥 끼워 맞춘 이야기에 불과하며 오히려 한국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20대와 50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세대갈등으로 치부해서 정작 중요한 상위 1%와 99% 사이에 있는 계급갈등이 가려졌다는 것이다.[5] 인터넷 상에서도 88만원 세대론에 상당히 많은 반론이 쏟아졌으며 개혁진영에서는 2012년 대선 뒤에 지나치게 세대갈등론에 집착해서 20~30대만 주목하다가 50대를 모두 놓쳐서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실제로 한국 사회의 노인빈곤율, 노인자살률은 OECD 국가들 중에서 압도적으로 최악이다.[6] 이런 상황에서 기성세대를 모두 기득권으로 규정하는 세대갈등론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위 수저계급론이 등장하였다.
빅뉴스와 실크세대론이 인터넷상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 했지만 변희재는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면서 조중동의 집중 조명 속에서 일약 '''청년''' 우익논객으로 우뚝 서게 된다.[7]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는 뉴라이트 수준의 우파로 변신해서 활동폭을 넒혀 나갔다.
특히 노무현 서거 당시 '''노무현 장례에 국민 세금을 1원도 투입해서는 안 된다'''라는 발언으로 본격적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는 동시에 장례식 때에는 고인을 건드리면 안된다는 불문율을 깼다는 점 때문에 대중의 큰 공분을 샀다. 이 때 인터넷 언론 '와이텐뉴스'[8] 아나운서인 전유경이 변희재를 두고 듣보잡이라고 부르고, 이후 변희재 + 듣보잡을 합친 변듣보는 한동안 변희재의 별명으로 쓰이게 됐다.[9]
안티조선 운동을 같이 하는 등 한때 좋은 관계였던 진중권한테 듣보잡이라고 까이자 명예훼손 소송을 걸면서 난타전을 벌인 것도 이 시기이다. 이 소송 자체는 진중권이 명예훼손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변희재의 승리로 끝났다. 이때부터 상대를 자극하는 언사로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이 늘어났고 이에 격분한 인사, 단체들의 소송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변듣보 소송 이후로는 변희재의 연전연패로 지금까지 벌금과 배상금을 꽤 물었다. 이때문에 주식 갤러리 등지에서는 변TM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
이후 빅뉴스를 미디어워치로 확대개편하면서 단순한 보도 언론에서 논문 검증 등으로 활동폭을 넒혔다.
변희재 본인이 훗날 인터뷰에서 밝힌 전향 계기는 한국사회의 여론을 쥐락펴락하는 조선일보에 대한 반감으로 안티조선에 동참했던 개혁진보 성향의 지식인들과 시민단체들이 정작 새로운 미디어 권력으로 떠오른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지지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서라고 한다. 당시 오프라인 언론사의 기사를 자기들 입맛대로 이용해서 조회수와 영향력을 높혀가는 네이버의 행태에 분노해서, 주변 인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오히려 '인터넷을 키워서 조선일보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식의 논리로 무시하더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위 민주언론 운동을 한다던 최민희 민언련 대표를 포함한 시민운동가들한테 폭언을 들었다는 주장도 인터뷰에서 했다.
그리고 인터넷 언론과 포탈사이트의 문제점에 관한 칼럼을 쓰자 소위 개혁매체들은 하나같이 싣기를 거부했고, 조선일보에서 연락이 와서 '안티조선'이라던 자신의 신념을 접고 투고하였고 이러면서 기존에 같이 하던 주변의 개혁/진보 성향 인사들과는 완전히 연이 끊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변희재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에 안티조선보단 안티포탈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문제는 변명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개혁/진보 성향을 계속 고수하면서도 인터넷언론의 폐해와 포탈사이트의 여론독점에 관해서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많기 때문이다.
한편 안티조선 운동 초창기부터 무조건 안티조선 = 노무현 = 진보개혁식의 기계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다가 2003년 민주당 분당 이후 점점 반노무현으로 돌아서면서 "나는 반노무현 = 반진보 = 보수우파"식의 논리로 전향했다고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치평론가 유재일의 의견에 따르면 정의를 위한다는 진보, 혹은 친노세력에게 매력을 느끼고 친노활동가로 활동하면서 진보의 민낯과 온갖 추태를 보고 환멸을 느낀 뒤 보수로 전향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면서 유재일은 두 가지를 한탄하는데 하나는 왜 친노를 진보와 같게 생각하여 진보의 추태를 보고 친노까지 패대기치는가. 또하나는 "그래, 그거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저쪽으로 넘어가냐?"[10]
[image]
2013년 일베저장소에 인증을 남겼을 때 사진이다.
이전에 본 항목에 극단적인 표현이 있을 정도로 우파 성향의 일부 커뮤니티를 제외하고 주로 진보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까이는 인물이다. 허나 5.18 폭동설 등 주장하는것이 비슷한 일베저장소에서 아주 인기가 높고 일베왕이란 별칭을 얻은 사람
2014년 1월 14일 박종진의 쾌도난마 방송에서 호남지역에 대해 과도한 비방을 한 것으로 인해 3월 12일에 채널A로부터 '''영구 출연정지조치'''를 받았다.
트위터에 밝힌 바로는 기아 타이거즈(!!!) 팬이다.[11]
저서로 《변희재의 청춘투쟁》이라는 자서전이 있고, 강의석이 제작한 애국청년 변희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2.1. 보수 논객


각종 토론회에서 기존의 우익 성향 패널들과 달리 자세한 팩트 자료와 논리적인 어법을 구사하는 보기 드문 인물이다. 대표적으로 곰TV 사망유희 토론에서 NLL을 주제로 진중권과 대결을 한 후 진중권이 직접 졌다고 발언했을 정도로 그 실력을 실감케하였다. 다만 진보성향 측에 공격적인 발언을 많이 하거나 논란이 될 만한 언행을 자주하기에 진보 성향 사람들에겐 매우 이미지가 나쁜 편이다.
특히 위에서 설명했듯이, 일베저장소와의 연관성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미지가 나빠진 사건 중 하나로 5.18 민주화운동의 재조사를 요구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는데, 2013년 100분 토론 당시 5.18 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고 표현하며,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닐수도 있으니까'''라고 덧붙였다.
'''5.18 북한군 개입설은 김대령 박사가 유네스코에 등록된 공식 자료를 이용해 충분히 개연성있게 정리한 주장'''이라고 하였다. 물론 저 김대령이라는 사람은 그리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게 중론.
정치색을 지우고 최대한 간결하게 보자면 가장 주목도가 높은 이슈를 끌고와서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에게 포커스가 오게 하는 방식을 많이 추구했다. 말하자면 최대한 이곳저곳 건드리며 이슈 몰이를 하는 스타일. 그런데 이거 진중권이 유명해진 방식이다. 변희재가 우파버젼 진중권 다운그레이드라는 소리를 괜히 듣는게 아니다.
2016 미국 대선이 결판나기 전에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고, 힐러리에 일방적으로 우호적 보도만을 거듭했던 국내 언론을 비판했던게 그나마 돋보이기도 했다.#
같은 우파 논객인 정규재와는 관계가 참 미묘하다. 둘은 한 때 토크파티나 강연회에도 동반출연할 정도로 돈독한 관계였고, 저서인 '변희재의 청춘투쟁' 발간 당시 정규재TV[12]에 출연해 저서 홍보영상도 찍곤 했다. 그런데 전희경 논문표절 문제가 터졌을 때 정규재를 비롯한 몇몇 보수 인사들이 그녀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고, 변희재는 전희경과 옹호자들을 지독하리만치 디스했다. 특히 정규재를 향해선 '대기업의 사주를 받고 그들을 옹호해주는 나팔수', '그동안 같은 진영이었기에 함께 활동했던 거지만 기회주의자들과는 이제 연을 끊어야할 때' 등 수위높은 비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정규재TV에 출연하여 'JTBC 태블릿PC조작 논란'에 대해 주장하기 위해 약 1시간 가량 출연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해 다시 또 공동전선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탄핵 인용 후 얼마 못 가 대선 후보로 각각 조원진홍준표를 지지하면서 변희재와 정규재는 다시 갈라섰다. 뿐만 아니라 변희재는 같은 보수세력인 조갑제, 신혜식, 주옥순, 장기정 등을 거짓 보수세력으로 규정하고[13] 바른정당은 물론 자유한국당마저도 보수를 사칭하는 반애국세력이라고 비난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극기 집회를 주도하며 함께했던 동지들과는 하루 아침에 등을 돌리게 된 셈이다. 특히 신혜식과는 '신의 한수' 스트리밍을 함께 하며 돈독한 사이로 비쳐졌으나 탄핵정국 이후 그저 서로 쌩까고 지내는 수준을 넘어서 엮였다 하면 서로를 죽일듯이 물어뜯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보석으로 풀려나온 뒤 미디어워치TV를 통해 유튜브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태블릿pc에 대한 끝없는 집착, 타 보수세력에 대한 날선 비판 등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듯한 모습을 자주 보이며 과거 보수의 아이콘으로 불리던 시절의 모습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보수의 통합을 원하는 네티즌들은 정통 보수를 자처하는 변희재가 보수진영을 더더욱 분열시키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는 중. 더구나 보수진영의 유튜브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뛰어난 언변 및 논리로 수십만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유튜버들이 늘어나면서 토론의 대가로서의 상징성도 옅어진 상태. 때문에 유튜버들을 저격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2.2. 정치활동


우파 성향의 커뮤니티에서 많은 지지를 받아왔기 때문인지 2013년 12월, 일베저장소에 비슷한사이트 수컷닷컴을 개설했다. 일베저장소, 정사갤 등의 극우 성향 유저들을 끌어 모으려는 전략인 듯하다. 이러한 지지세력을 등에 업고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서울특별시 관악구 을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0.74%(578표)의 득표율로 낙선했다. 이후 극우 여성 유튜브 ''유스'' 에 의해서''변타500''으로 불리며 조롱거리가 되였다.당시 당시 관악 을 지역구는 국회의원이었던 이상규가 통진당 해산 판결로 의원직을 잃는 바람에 보궐선거가 열렸는데 변희재는 여기에 출마한 것.[14][15]
변희재가 출마를 선언한 이유는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 잘 나와 있다. 기사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의외로 출마에 대한 나름의 명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명분이 타당하냐 아니냐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개헌에 대한 반대 입장이나 국회의원들의 지역 이기주의에 대한 비판 등을 들어보면 단순히 출세욕에 사로잡혀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16] 재미있는 점은 극우로 분류됨에도 동성애에 대해서는 지나친 권력화에 대한 경계 뿐, "태생부터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는 등 중립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점이다.
여튼 변희재는 출마선언 후 좌파 정당 못지 않게 새누리당을 비판하면서 선거운동을 벌였으나 결국 이렇다할 임팩트를 주지 못하고 군소후보의 한계를 절감해야 했다. 변희재식의 전략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지는 싸움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극단적인 강경 우익은 다른 세력의 도움이 없는 한 중간층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앞서 인터뷰 기사에도 있듯이 변희재 스스로도 당선보다는[17]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알리고 나름의 지지층을 얻기 위해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세과정을 보면 이런 목적을 달성했는지도 의문이 드는데, 예를 들어 변희재의 지원 유세를 했던 자칭 스님인 성호가 '빨갱이는 죽여도 돼'와 같은 과격한 연설을 해서 물의를 빚고 현장에서 시민들과 싸움을 벌였는데도 이를 말려야 할 변희재는 사태를 방관해 비난을 샀다. 비록 당선이 안 되더라도 한 표라도 더 득표를 해서 몸값을 올려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있던 표마저 등돌릴 수 있는 악재를 그대로 방치한 것.
결국 그의 첫 번째 정치 실험은 0.74%(500표대)라는 초라한 득표율로 마감하였다.

22분 30초부터 확인가능.
변희재는 박근혜 탄핵 찬성파 인물이었다. 2016년 11월 19일 황장수의 뉴스 브리핑 방송에서 보수가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스탠스는 김무성을 압박해서 박근혜 대통령을 빨리 탄핵하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2.3.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박근혜가 파면된 이후 과격한 발언을 쏟아내는 다른 친박 인사들과 달리 의외로 조용하게 대응하고 있다. 자신의 페이스 북에 '박근혜에게 적용된 기준으로 대통령의 파면 여부를 판단하면 살아남을 대통령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도 의외로 내각제 개헌에 반대하고 새로운 보수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3월 31일 박근혜가 구속된 이후 봉하마을에서 벌어진 친박집회의 시위에 참가해서 노 전대통령이 640만 불을 받은 것을 수사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2.4. 19대 대선 및 그 이후


변희재는 무소속으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할 때부터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현재는 자유한국당)이 진정한 보수가 아니라면서 제대로 된 보수 우익세력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새누리당 지지를 접고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계획한 것으로 보이는데, 마침 박근혜가 파면된 이후 탄핵에 반대했던 친박세력을 중심으로 기존의 새누리당과 동명이당인 새누리당이 결성되자 변희재도 바로 여기에 합류하였다.
당초 새누리당은 변희재와 정미홍 등이 참여한 경선을 통해 19대 대선후보를 선출할 계획이었으나 자유한국당의 조원진 의원이 탈당 후 새누리당에 합류하자 경선없이 바로 조원진을 대선후보로 추대하기로 합의하였다. 결국 조원진이 새누리당 당적으로 대선후보로 등록하였으며 변희재는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회 전략기획본부장을 맡았다.
19대 대선 선거기간 동안 조원진 후보가 이렇다할 주목을 받지 못하자 친박세력 일부가 그나마 보수표 결집을 기대할 수 있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의 지지를 천명하였다. 하지만 진작에 자유한국당에 등을 돌린 변희재와 정미홍 등은 홍준표 지지를 선언한 친박 인사들을 배신자라고 강하게 비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갈등의 골이 깊어져서 변희재를 비롯하여 끝까지 조원진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 같이 탄핵반대를 외쳤던 권영해, 정광용, 정광택, 신혜식, 주옥순, 장기정 등을 거짓 보수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들과 갈라섰다. 그리고 변희재는 자유한국당 경선에서 홍준표에게 밀린 후 홍준표 지지 유세를 하고 다녔던 김진태 의원도 태극기팔이라고 비난했다.
2017년 5월 10일 대선이 치러지면서 탄핵정국은 일단락되었지만 박사모측의 갈등과 혼란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대 대선 직후인 5월 13일에 열렸던 친박집회에서 벌어진 싸움과 비난전은 친박세력 내부의 갈등과 분열양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선 후 새누리당 내분이 격화되어 친 조원진 세력들이 대거 출당조치되었다. 새누리당에서 제명된 변희재는 같이 제명된 조원진, 정미홍, 허평환 등과 함께 친박 신당을 창당할 뜻을 밝혔으며 2017년 7월 조원진을 대표로 한 대한애국당이 창당되었다. 창당 이후 초대 정책위의장을 맡았고, 이후 당 최고위원 선거에서 1위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한애국당 역시 당내에서 '''또''' 갈등이 불거지는 바람에 변희재는 허평환, 정미홍 등과 사이가 벌어졌으며 변희재는 자신의 페이스북 등을 통해 최고위원, 정책위의장, 서울시당 위원장 직을 사퇴한다고 밝혔다. 2017년 12월 현재에는 변희재와 당대표 조원진도 갈등을 빚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분에 대한 정확한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로 고소고발을 주고받을 정도로 분위기가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정미홍은 12월 8일에 대한애국당을 탈당했으며, 변희재는 12월 19일자로 대한애국당에서 제명당했다.[18] 변희재는 이에 불복하여 재심을 청구했으나 결국 기각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대한애국당/2017년 문서 참조.
2018년 3월 23일 열린 제 40대 대한의사협회장 선거에서 최측근인 최대집 후보가 당선됐다. 그동안 잇따른 고소고발과 벌금형에 시달리던 변희재에게 '''마르지 않는 캐시카우'''인 의사협회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것.
2019년 이후로는 일본 극우와의 연대활동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19] 구속 당시에 호소문이 월간 하나다에 실리기도 하였으며 하나다측에서도 변희재를 소개한 적이 있다. 변희재의 유관단체[20]가로세로연구소가 과거 한 인터뷰에서 사쿠라이 요시코를 게스트로 초청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친박신당에 입당했다. 서울 강남구 갑 출마설이 돌았지만 결국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2020년 12월 19일 김병주 의원이 발의한 스티브 유 방지법을 지지하면서 스티브 유가 그의 유튜브 채널에서 했던 극우 발언을 옹호하는 보수 지지자들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이는 유승준을 더이상 괴롭히지 말자고 이야기했던 윤서인의 태도와 반대의 스탠스를 취한 것이다. 변희재는 김병주와 정치색이 다르지만, 국가 안보에 도움이 되는 법안이기에 옹호했으며, 그러면서 이명박, 황교안과 같은 군 면제자들이 보수를 해쳤다고 언급했다.

3. 사건사고/논란




4. 여담


  •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겨우 약 500표를 얻자 인터넷에선 변타500이라는 칭호가 새로 붙었다. .
  • 보수 내에서 진중권 카운트로 평가받는다. 실제로도 진중권은 변희재랑 엮이는 족족 좋은 꼴을 못봤다. "사망유희 토론 패배"[21],명예 훼손 벌금 300만원,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 표절 의혹 등등[22]. 이정희와의 경기동부연합과의 관계에 대한 논쟁 [23]도 있다. 진중권의 한예종 강의료 부당수령도 처음 의혹을 제기했던 것도 변희재 @@ 이후 사실로 판명되어 문화부에서 진중권의 부당수령에 대해 회수 결정하였다. (조선)문화부, 진중권의 한예종 강의료 1700여 만원 회수키로 이 때문인지 진중권이 반문으로 전향하여[24] 상당수 보수 인사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는 현재에도 진중권을 줄기차게 까고 있다.
  • 여담으로 광주광역시 지역 연고의 기아 타이거즈의 팬이다. 변희재의 정치 성향으로 볼 때는 믿기지는 않지만... 다만 과거 80~90년대 해태는 잘 이기고 우승 많이해서 생긴 팬덤까지 더해져 전국구 인기를 자랑하긴 했다. KIA 타이거즈로 바뀐 뒤에도 타이거즈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더해 의외로 친 호남 성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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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송에서 종이를 구겨 집어던지는 장면이 각종 커뮤니티에 '종이비행기 빨리접기 기네스 기록 소유자.gif' 등의 이름으로 퍼진 적이 있었다.

5. 선거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15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19대 국회 서울 관악 을)[25][26]
무소속
578 (0.74%)
낙선 (5위)


6.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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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재의 자서전으로, 내용 중 '그런 모순의 괴로움을 견디면서 하는 게 운동'이라는 구절이 알려져 있다. 변희재가 인터넷으로 알게 된 한 대학교 페미니즘 운동가에게 "가부장제를 비판한다면서 아버지의 돈을 받아 학교 다니고 페미니즘 운동을 해도 되는 건가?"라고 질문하자 저 대답이 나왔다고. 이 구절은 이후 페미삼총사에서 풍자하면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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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주 변씨 21세손 '熙'자 항렬이다.[2] 다만 블로그는 2015년 4월 이후로 소식이 올라오지 않고 있다.[3] 인천광역시 강화군 출신이라고 되어있는 자료들이 있는데 이는 그의 현 거주지인 인천 강화군 불은면을 출생지로 오인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4] 진중권이 같은 학교 같은 과의 11년 선배다(...).[5] 대체로 개혁진보 성향의 학자들은 한국사회의 계급갈등의 핵심을 '''부동산'''으로 본다. 상류층의 부동산 불로소득에 따른 경제적 격차가 사교육을 통한 학벌 세습으로 굳어지면서 개천에서 용나는게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고용없는 성장이 청년실업을 초래하면서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분석하는 경향이 다수이다. 즉 땅부자와 서민의 갈등이 핵심인데, 엉뚱하게 우석훈의 세대론 때문에 청년 vs 기성세대의 전선이 그어지면서 집없는 설움에 울고, 가계 월세에 고통받는 평범한 중장년층들까지 적으로 돌리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6] 2017년 기준으로 OECD 자살률 평균이 12.1명 수준인데, 한국은 24명이며 노인만 따로 분류하면 무려 53.3명이다. 특이한게 외국에선 60대 이후로는 자살률이 내려가는데 오히려 한국에서는 급상승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인 가구의 43% 정도가 빈곤층이라는 현실 때문으로 풀이된다.[7] 조중동과 보수진영은 2002년 대선 패배 이후 "보수는 고리타분한 노인네, 무식한 꼰대들"이라는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 청년보수를 계속 찾았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수혜를 본게 서울대 출신으로 (당시 기준으론) 팩트를 가지고 논리로 싸우는 방법을 알던 변회재다.[8] 비슷한 이름의 YTN과 일절 관련 없는 인터넷 언론사다.[9] 하지만 전유경의 듣보잡 발언으로 변듣보라는 별명을 얻게 되어 이미지가 추락하게 된 변희재는 전유경 아나운서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해 사과를 받아냈다고 한다.[10] 그러나 2019년 들어서 유재일도 민주당에게 등을 돌리고 바미당 같은 보수우파 쪽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변희재더러 나쁘다고 할 입장이 못 된다.[11] 사실 반호남 정서는 없고 오히려 친호남에 가까운 인물이다. 이러다 보니 그를 지지하는 우파 세력들로부터는 '은근슬쩍 김대중을 지지하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도 받고 있다.[12] 최근 박대통령 인터뷰를 한 그 인터넷 방송이다.[13] 조갑제는 안철수를 지지를 한다는 이유로 신혜식과 장기정과 주옥순은 홍준표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갈라섰다.[14] 참고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면 관계 법령에 따라 300인 이상 500인 이하의 추천서가 필요하다. 고로 딱 그만큼만 득표했다는 뜻이다.[15] 저 관악구 을은 '''이해찬'''을 배출한 지역구인데, 18대 총선에서 김희철 前 구청장이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 19대 총선에서 이상규 통합진보당 후보가 당선된 지역구이다. 허나,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오신환을 당선시켰다. 이어진 20대 총선에서도 마찬가지.[16] 인터뷰를 진행한 딴지일보 기자도 인터뷰 말미에 이런 관점에서 나름 변희재를 높게 평가했다.[17] 스스로 지지율이 1~2% 정도 될 것으로 예상했다.[18] 변희재 제명에 대한 팩트는 미디어워치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2017년 12월 현재 대한애국당의 내분에 대한 사항은 미디어워치등 이해관계가 있는 극소수 매체를 제외한 다른 언론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같은 시기 바른정당과 통합을 둘러싼 국민의당의 내분이 언론에 연일 대서특필되는 것과 대조적. 두 당의 위상 차이를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19] 변희재 이하 미디어워치 측에서는 일본 자유(보수)세력이라고 한다.[20] 물론 변희재가 갈등을 겪은뒤로는 조금 어폐지만[21] 변희재가 진보 유명 논객인 진중권을 패배시킴으로서 차세대 보수 논객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게한 사건이였다. [22] 이에 진중권이 변희재를 1억의 민사 고소를 주장했지만 결국 고소하지 않았다.[23] 3월달 진중권과 변희재는 이정희와 경기동부연합의 관계등에 대해 격돌하는데 변희재는 진중권의 의정과 소통이 뛰어나며, 이건 경기동부연합 문제가 아니라 이정희를 악용하는 운동권 문제라는 이정희에 대한 우호적 평가와 분석에 대해 비판하며 이정희는 경기동부연합의 기획상품이라고 분석했다. 5월달 진중권조차도 이정희에 대해 경기동부연합의 마리오네트(실로 조종하는 인형)라며 3월달 발언했던 기존의 옹호에서 태세전환하면서 사실상 진중권이 틀렸고 변희재가 제대로 분석했다는 것으로 결론났다.[24] 물론 반문으로 전향했을 뿐 정치적 스탠스까지 바꾼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진중권의 대다수 발언이 반정부적이다보니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생각으로 보수 성향 인사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 것.[25] 전임자 이상규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로 의원직 상실.[26] 이 당시 선거운동을 배경으로 그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애국청년 변희재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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