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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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토니오 프란체스코 그람시(Antonio Francesco Gramsci)는 이탈리아 왕국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정치인이다. 이론 측면에서 자본주의 국가를 정치사회와 시민사회로 구분하여 문화패권(Egemonia culturale)의 중요성을 역설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설자로서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의 파시즘에 대항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옥중수고(Quaderni del carcere)》가 있다."낡은 것은 죽어 가는데도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속에 위기가 존재한다. 바로 이 공백 기간이야말로 다양한 병적 징후들이 출현하는 때다(La crisi consiste appunto nel fatto che il vecchio muore e il nuovo non può nascere: in questo interregno si verificano i fenomeni morbosi più svariati.)."
2. 생애
4살 때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으며, 이 때 척추를 다쳐서 키가 150cm 정도에 멈췄다.[2] 사고의 영향이었는지 평생 몸이 병약한 편이었는데, 얼마나 건강이 나쁘고 외모가 볼품없었는지 코민테른에서 그를 대중간부로 세우기 주저했을 정도. 심지어 그람시가 어렸을 때는 밤에 자다가 죽으면 바로 장례를 치르려고 어머니가 매일 정장을 입혀서 재웠다고 한다. 그렇게 허약한 신체를 가졌으면 실내에서만 히키로 지낼 법도 한데, 그의 집안이 가난한데다 먹여살릴 식구는 또 많아서 11세때 학교를 중퇴하고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독학을 이어간 끝에 장학금을 받아 토리노 대학에 진학하여 인생이 피나 했는데, 다시 나쁜 건강이 그의 발목을 잡아 시험 몇 번 보고난 후 대학생활을 포기했다.[3] 그런 본인의 상태와 어울리지 않게 키 큰 러시아 미인 바이올리니스트와 혼인에 성공 이번에야말로 인생의 승리자가 되나 했으나... 시대가 불운하게도 그람시는 신혼 초부터 정치생활하느라 바빴고, 나중에는 투옥되어 영영 가버린 바람에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은 그람시와 떨어져 계속 러시아에서 살아야 했다.
1913년 이탈리아 사회당에 입당했다. 입당 후엔 토리노의 노동자들을 이끌어서 이탈리아 사회당 내 좌파 세력을 결집한다. 대학 중퇴 후 사회당 기관지인 아반티 토리노 지국에 입사했는데 당시 토리노 지국장은 무솔리니였다.[4] 거기서 이런저런 내부 갈등을 겪다 때려치고 나와 1919년 이탈리아 공산당의 기관지 신질서를 창간한다. 1921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인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립한다. 동지들이 기고한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싸늘한 표정으로 "이것도 글이라고 써 왔느냐"라고 반문하는 냉혹한 편집장이었다고. 애초에 마르크스도 그렇고 이 시절 마르크스주의 글쟁이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신랄한 편이긴 했다. 그러나 편집을 마치고서는 젊은이들과 산책하면서 즐겁게 토론하는 사람이었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파시스트 정당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5] 그에 비해 그람시의 이탈리아 공산당은 활발하게 반파시스트 운동을 벌인다. 일례로 의회에서 만난 무솔리니가 그람시와 친한 척해 보겠답시고 악수하려 손을 내밀었을 때 냉랭하게 무시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이탈리아 공산당에 질릴대로 질린 무솔리니 정부는 결국 파시스트 국민당 외의 모든 당의 정당 활동을 금지시킨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공산당의 리더인 그람시를 투옥시켜버린다. 이때 신질서 창간 동기 중 움베르토 테라치니를 비롯해[6] 공산당 주요 인사 20여 명이 함께 투옥되는데 그것이 1926년이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창립된지 딱 5년 후 일어난 일.
'''우리는 이 자가 20년 동안 두뇌를 쓰지 못하게 해야 된다'''[7] 라는 말과 함께 20년 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옥중에서 오히려 두뇌를 더 활발하게 쓰면서''' 왕성한 저술 활동을 벌였다. 대표작은 <옥중수고>로 총 29권, 2848페이지에 달한다.[8] 그렇게 감옥 내에서도 뼛속까지 공산주의 혁명가였던 그람시는, 애초에 좋지 않았던 건강 상태의 악화 끝에 뇌출혈로 1937년에 사망하고 만다. 1937년은 그가 투옥당한지 11년째 되는 해. 무솔리니는 뭐가 두려웠는지 그람시의 사망이 완전히 확인되고서도 며칠 뒤에야 그람시의 사망을 공식 발표한다.
사회당 입당인 1913년부터 그의 이탈리아에서의 본격적인 혁명가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할 때 13년을 감옥 밖에, 11년을 감옥 안에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세계에서 행동 반경이 가장 좁은 혁명가가 아닐까 추정된다. 그러나 짧은 자유생활동안 제3인터내셔널에도 참가했고(그 때 아내를 만나서 혼인) 비엔나에도 들락거렸으며, 무솔리니가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을 무렵에도 열심히 도망 다녔다. 그가 감옥 안에 있지 않았더라면 역사가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3. 사상과 평가
후세의 좌파 진영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여 정치학/사회운동론/문화이론 발전의 단초를 놓은 이론가"와 "결과적으로 패배한 혁명가"라는 상당히 상반된 평가를 받는 마르크스주의자. 그리고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가 파시즘의 희생자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적 계승자 중 하나로 간주되는데, 특히 경제주의[9] 와 전위주의[10] 를 지양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혁명의 조건으로 노동계급의 헤게모니 획책을 강조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좌우는 물론이거니와 신좌파와 구좌파에서도 갈리고, 다시 신좌파 내부에서도 지향에 따라, 구좌파 내부에서도 레닌이나 트로츠키를 고평가하느냐 룩셈부르크를 좀 더 낫게 보느냐 등 관점에 따라 상이한 결론을 내놓는다. 일례로 알튀세르의 후예들은 그람시를 저평가하지는 않지만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등이 그람시를 극복하여 발전시켰다고 보며, 마오주의자들도 그람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오의 모순론과 이를 계승한 이론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반면 마르크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자들이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경제/전위보다 문화/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한 그람시에게서 부르주아 엘리트의 냄새를 강하게 맡는 모양. 이쪽은 페이비언 사회주의나 사민주의에 본능적인 적대감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반응이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좌파들이 보기엔 극히 보수적인 정치학계에서 별 비판없이 그람시의 몇몇 개념을 받아들여 널리 쓰고있는 상황.
'''헤게모니'''와 시민사회, 수동혁명, 기동전·진지전, 유기적 지식인[11] 등의 개념을 창안하거나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헤게모니의 경우 좌우를 막론하고 정치학이나 사회학을 다루는 이라면 익숙해져야하는 중요 개념. 시민사회 개념도 도입은 헤겔 등이 먼저 했지만, 지금 널리 쓰이는 방식으로 처음 확장시킨 것은 그람시이다. 여담으로 이탈리아판 백괴사전에 "죽도록 지루하다"라는 평이 있을만큼, 교과서나 책에서 접할 때마다 싫어지고도 남을 발언을 많이 했다.
한국에는 <옥중수고>, <남부 문제에 관하여 외>, <대중문학론>을 비롯 많은 책이 번역되어 있다. 아마 한국에서 그람시를 접한 이라면 밥 제솝의 책이나 조희연 교육감의 논문 등을 스쳐가면서라도 읽어봤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에는 그람시 분석서인 <그람시의 군주론: 그람시 마키아벨리를 읽다>, <그람시와 한국 지배계급 분석: 그람시의 역사적 블록 개념과 한국적 적용을 중심으로>,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그람시 산문선>이 연달아 출판됐는데, 그람시에 대해 알아볼 사람은 이 쪽도 참고해 볼만하다.
그람시는 특히 세계를 변혁하려는 사람-사회주의자가 이른바 유기적 지식인이 되어 대중의 '상식'에 익숙해질 것을 주문했다. 그는 상식이 노동계급이 세계를 관망하는 시각을 형성하며, 사회구조는 상식의 변화에 따라 변동한다고 보았다. 사회주의자 지식인이 상식이 형성되는 원인을 냉철히 분석하고,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상식을 노동자 계급의 새로운 질서로 바꿔낼 때 비로소 사회는 변혁된다는 것이다. 듣자마자 짐작할 수 있듯 대중의 상식 전반을 바꾼다는 것은 무척이나 길고 지난한 과정이기에, 그람시는 단번에 정부를 때려잡고 모든 것을 갈아엎는 원샷의 기동전이 아닌,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진지를 바탕으로 서서히 사회문화 전반과 지난한 싸움을 벌이는 사상의 참호전을 벌여야 한다고 역설하게 된다.
이런 그람시의 주장을 계승해 시민사회와 진지전을 강조하면서 노동계급의 자생하는 투쟁과 이것을 지원하는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 문화이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두고 그람시주의자라 부르기도 한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는 신그람시주의자로 분류되고, 매우 넓게는 안토니오 네그리도 여기에 포함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그람시의 영향이 어디까지인가는 평자에 따라 시각이 다를 것이다.
그람시의 옥중수고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한 Macat Politics Analysis의 영상.
4. 기타
알바니아계이다.
많은 글을 쓴 만큼 그가 쓴 몇몇 구절들이 지금까지도 널리 알려져 사랑받는다.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12] , '''"나는 무관심을 미워한다. 산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을 편든다는 것이다."'''[13] 등.
그의 장애는 의학적으로 왜소증에 포함하고 있다.
엉뚱하게 한국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핵심어로 등장한다. 극중에서 소지섭이 하지원에게 그람시의 계급론을 어설프게 들먹이면서 하지원과 조인성의 사랑도 계급 때문에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라고 미숙하게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이 드라마 때문에 이름조차 생소하던 이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의 책이 잠시 특수를 맞은 적도 있었다.
[1] 성별은 남성이다[2] 후일 그람시가 상당히 유명해진 후, 그의 실물을 본 적 없던 사람이 그람시가 인사했을 때 "그럴 리 없어, 안토니오 그람시는 거인이라야 해, 이렇게 작지 않다고!"라며 절규했다는 에피소드가 그람시가 쓴 편지에 나온다.[3] 이탈리아의 대학은 학년제가 아니고 시험이 전부 통과되어야 졸업. 참고로 대학 시험을 치면서도 몇 번 기절했다.[4] 그 베니토 무솔리니가 맞다. 2차대전 시기 파시스트로 활약한 인물들 중에는 1차대전 종전 후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하다 파시즘이 대두되자 전향한 인물들이 많다. 후에 그람시가 무솔리니에게 죽는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인연.[5] 그람시의 정치상 라이벌인 아마데오 보르디가는 파시스트 정당을 듣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떼로 잡혔는데 좋은 말발 덕분에 배심원을 녹여서 나왔다.[6] 팔미로 톨리아티는 모스크바에, 안젤로 타스카는 프랑스에 있었다.[7] 담당판사로부터 이탈리아에서 가장 위험한 두뇌라는 평을 받았다.[8] 1948년부터 일부 간행되기 시작했고 최초 편집본은 신질서 동인인 팔미로 톨리아티 판본이다. 현재 널리 알려진 것은 75년 제라타나 판본. 그람시의 저작으로 출판된 것의 대부분이 이것의 발췌본이다.[9]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10]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은 (직업활동가들을 통해) 외부에서 도입된다.[11] 유기적이라는 단어가 그람시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학자나 활동가들은 "생물체처럼 전부를 구성하는 각부가 밀접하게 관련된 지식인" 등의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학계에서 에밀 뒤르켐의 "유기적 분업" 등을 통해 유기적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음을 고려할 때 큰 오류는 아니라는 평도 있다.[12] 의역에 가까운 표현이다. 본래는 프랑스의 작가 로맹 롤랑(Romain Rolland, 1866년 1월 29일 ~ 1944년 12월 30일)이 사용한 표현인 "Pessimisme de l'intelligence, mais optimisme de la volonté.(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에서 유래한다. 관련 내용.[13] 산레모 가요제에서 낭독되어서 최근에 갑자기 더 유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