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이스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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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이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세관 공무원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이다.
1837년 6월 7일, 알로이스는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와 안나 마리아 시클그루버에게서 태어났다. 이때는 부모님이 정식으로 결혼한 상태가 아니어서 어머니의 성인 시클그루버를 썼다. 아버지가 가출하자 삼촌인 요한 네포무크 히틀러 아래에서 자랐다. 그러다 아버지인 요한 게오르크가 돌아옴과 동시에 성씨를 히틀러로 바꾸면서 알로이스는 알로이스 히틀러가 된다.
알로이스는 초졸 학력으로 어린 시절 구두닦이를 했고 자라서 세관 공무원이 된다. 1873년 첫 결혼을 했으나 자녀가 없었고, 1882년 두 번째 결혼을 했는데, 두 번째 아내는 결혼 전부터 알로이스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1884년 두 번째 아내 역시 사망한 후 그는 사촌누나의 딸이자 본인에게는 종질녀가 되는 클라라 푈츨과 결혼했다. 이 3번째 결혼을 통해 알로이스는 6명의 자녀를 얻게 된다.
알로이스는 세무서장으로서 먹고 사는 데 충분히 문제가 없는 중산층이었는데, 아들이 자신처럼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들인 아돌프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고, 이 때문에 아들과의 갈등이 심했으며 알로이스는 아들을 달래거나 애정을 주기는커녕 성적 문제로 아돌프를 굉장히 많이 구타했다. 거기다 술꾼이라서 항상 술을 마셨으며 술만 마시면 난폭해져 부인과 아들을 두들겨 팼다.[2] 반면 아내 클라라는 막내딸 파울라를 제외하곤 아돌프 이전의 아이들을 모두 병으로 잃어서 아돌프를 애지중지했다. 알로이스는 화가가 되려는 아돌프의 꿈을 무시하고 실업계 학교에 강제로 보냈지만, 아돌프는 적응을 못했기에 그의 죽음 이후 학교를 자퇴했다.
1903년 1월 3일, 65세의 전직 세무서장 알로이스 히틀러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쓰려져 사망하였다.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나이는 14세였고 여동생 파울라는 7세였다. 사인은 지금까지 정확히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히틀러 가문의 개인 주치의였던 에드바르트 블로흐는 뇌일혈로 진단했고,《나의 투쟁》에도 그렇게 쓰여져 있다. 이후 그의 아내 클라라도 1907년 사망하여 남편 곁에 묻혔다. 아돌프는 자기를 그렇게 때리던 아버지가 미웠는지 아버지의 사망에는 묵묵했으나 어머니의 죽음에는 눈물을 흘렸다. 그의 무덤은 1, 2차 세계대전 때도 멀쩡하게 보존되었으나 네오 나치의 성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2012년 철거되었다.
초졸 학력의 매우 가난한 사람이 세무서장이라는 자리에 올랐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승진이었다. 표현의 예를 들자면, 하층민인 농부가 자작작위에 올라간 정도로 자기능력으로 엄청난 출세한 것과 맞먹는다.
공적으로는 전형적인 19세기 말 공무원으로, 엄격하고 자제심이 강했으며, 직무에 성실해서 주변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입지전적인 출세를 가능하게 해준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해 깊은 충성심을 갖고 있었다. 제국의 다문화 이데올로기도 충실히 받아들였으며, 특히 '반유대주의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공적인 자리에서 잘 지켰던 자제력이 집안에만 들어오면 망가졌다는 것에 있었다.
한마디로 '''막장'''. 그가 식구들을 대하는 폭력적인 방식은 아들인 아돌프 히틀러의 인격이 뒤틀리는데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알로이스가 가족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도 폭력적이고 권위적이어서, 아내와 자식들을 대할 때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갔다고 한다. 술집에서 만취해서 돌아올 때가 많았던 것은 물론, 틈만 나면 집에서조차 독한 코냑과 브랜디를 입에 달고 살 정도로 심각한 술꾼이었다. 특히 퇴직하고 나서는 알코올 중독이 더욱 심해져 재직 때보다 술을 배 이상으로 많이 먹었다.[3]
가정에서는 막장 그 자체였는데, 아내와 자식들에게 잘해줄 생각은 전혀하지 않았고, 폭언과 폭력을 일삼았다. 자기 아들을 손가락질을 하면서 엄청나게 못마땅해 했고,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투정을 부리면 소리를 지르며 어린 아들에게 주먹질, 발길질, 뺨을 사정없이 갈겼고, 반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팼다. 그래서인지 어린 아돌프는 자주 얼굴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심할때는 코피나 오른쪽 고막이 터져서 피가 나온적이 있었다. 이를보고 달려와 말리려고 온 아내에게도 폭력을 휘둘러서 피를 본적이 많았다.
히틀러의 이복형 알로이스 주니어도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아예 가출하여 영국으로 간뒤 두번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않았고 독일로 오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히틀러 역시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가출하여 집에 들어가지 않은게 다반사였다. 이 때문에 불량가장이자 막장 부모였고 아내들과 자식들과는 불화가 심했으며 평생 나쁜 관계였다.
문화적, 민족적으로는 개방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제국이 표방하는 다민족, 다문화적 그 가치관을 자식들에게 주장했고 특히 알로이스의 근무지인 린츠는 체코인과 오스트리아인의 접경지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민족적인 가치관을 가졌고 결혼을 통한 혼혈도 많은 지역이였다, 때문에 반대로 히틀러가 극단적인 순수인종주의를 보이는 이유는 아버지의 다민족적인 가치관 자체에 대한 반항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2000년대에 방영한 환상특급에선 게르만 민족 우월론을 믿던 인물로 나온다. 과거로 간 한 여인이 어린 아돌프 히틀러를 유모에게 빼앗아가 강물로 투신자살하여 역사를 바꾸려고 했지만....유모가 거지 여인이 데리고 있던 비슷한 나이 갓난아기를 돈주고 사오고 아돌프라고 알로이스를 속여 알로이스는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게르만민족다운 모습이라고 좋아라 하는 것으로 나왔다. 그리고, 내레이션을 하던 포레스트 휘태커가 나와서 우리는 역사를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라며 ....그 거지 여인의 아들이 잔악한 아돌프 히틀러가 된 것도 결국 애비인 알로이스 탓이 컸다는 느낌을 주며 끝냈다.
1. 개요
알로이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세관 공무원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837년 6월 7일, 알로이스는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와 안나 마리아 시클그루버에게서 태어났다. 이때는 부모님이 정식으로 결혼한 상태가 아니어서 어머니의 성인 시클그루버를 썼다. 아버지가 가출하자 삼촌인 요한 네포무크 히틀러 아래에서 자랐다. 그러다 아버지인 요한 게오르크가 돌아옴과 동시에 성씨를 히틀러로 바꾸면서 알로이스는 알로이스 히틀러가 된다.
2.2. 성장과 결혼
알로이스는 초졸 학력으로 어린 시절 구두닦이를 했고 자라서 세관 공무원이 된다. 1873년 첫 결혼을 했으나 자녀가 없었고, 1882년 두 번째 결혼을 했는데, 두 번째 아내는 결혼 전부터 알로이스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1884년 두 번째 아내 역시 사망한 후 그는 사촌누나의 딸이자 본인에게는 종질녀가 되는 클라라 푈츨과 결혼했다. 이 3번째 결혼을 통해 알로이스는 6명의 자녀를 얻게 된다.
2.3. 아들과의 관계
알로이스는 세무서장으로서 먹고 사는 데 충분히 문제가 없는 중산층이었는데, 아들이 자신처럼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들인 아돌프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고, 이 때문에 아들과의 갈등이 심했으며 알로이스는 아들을 달래거나 애정을 주기는커녕 성적 문제로 아돌프를 굉장히 많이 구타했다. 거기다 술꾼이라서 항상 술을 마셨으며 술만 마시면 난폭해져 부인과 아들을 두들겨 팼다.[2] 반면 아내 클라라는 막내딸 파울라를 제외하곤 아돌프 이전의 아이들을 모두 병으로 잃어서 아돌프를 애지중지했다. 알로이스는 화가가 되려는 아돌프의 꿈을 무시하고 실업계 학교에 강제로 보냈지만, 아돌프는 적응을 못했기에 그의 죽음 이후 학교를 자퇴했다.
3. 죽음과 그 이후
1903년 1월 3일, 65세의 전직 세무서장 알로이스 히틀러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쓰려져 사망하였다.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나이는 14세였고 여동생 파울라는 7세였다. 사인은 지금까지 정확히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히틀러 가문의 개인 주치의였던 에드바르트 블로흐는 뇌일혈로 진단했고,《나의 투쟁》에도 그렇게 쓰여져 있다. 이후 그의 아내 클라라도 1907년 사망하여 남편 곁에 묻혔다. 아돌프는 자기를 그렇게 때리던 아버지가 미웠는지 아버지의 사망에는 묵묵했으나 어머니의 죽음에는 눈물을 흘렸다. 그의 무덤은 1, 2차 세계대전 때도 멀쩡하게 보존되었으나 네오 나치의 성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2012년 철거되었다.
4. 평가
4.1. 세무서장으로서의 평가
초졸 학력의 매우 가난한 사람이 세무서장이라는 자리에 올랐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승진이었다. 표현의 예를 들자면, 하층민인 농부가 자작작위에 올라간 정도로 자기능력으로 엄청난 출세한 것과 맞먹는다.
공적으로는 전형적인 19세기 말 공무원으로, 엄격하고 자제심이 강했으며, 직무에 성실해서 주변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입지전적인 출세를 가능하게 해준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해 깊은 충성심을 갖고 있었다. 제국의 다문화 이데올로기도 충실히 받아들였으며, 특히 '반유대주의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공적인 자리에서 잘 지켰던 자제력이 집안에만 들어오면 망가졌다는 것에 있었다.
4.2. 아버지로서의 평가
한마디로 '''막장'''. 그가 식구들을 대하는 폭력적인 방식은 아들인 아돌프 히틀러의 인격이 뒤틀리는데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알로이스가 가족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도 폭력적이고 권위적이어서, 아내와 자식들을 대할 때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갔다고 한다. 술집에서 만취해서 돌아올 때가 많았던 것은 물론, 틈만 나면 집에서조차 독한 코냑과 브랜디를 입에 달고 살 정도로 심각한 술꾼이었다. 특히 퇴직하고 나서는 알코올 중독이 더욱 심해져 재직 때보다 술을 배 이상으로 많이 먹었다.[3]
가정에서는 막장 그 자체였는데, 아내와 자식들에게 잘해줄 생각은 전혀하지 않았고, 폭언과 폭력을 일삼았다. 자기 아들을 손가락질을 하면서 엄청나게 못마땅해 했고,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투정을 부리면 소리를 지르며 어린 아들에게 주먹질, 발길질, 뺨을 사정없이 갈겼고, 반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팼다. 그래서인지 어린 아돌프는 자주 얼굴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심할때는 코피나 오른쪽 고막이 터져서 피가 나온적이 있었다. 이를보고 달려와 말리려고 온 아내에게도 폭력을 휘둘러서 피를 본적이 많았다.
히틀러의 이복형 알로이스 주니어도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아예 가출하여 영국으로 간뒤 두번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않았고 독일로 오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히틀러 역시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가출하여 집에 들어가지 않은게 다반사였다. 이 때문에 불량가장이자 막장 부모였고 아내들과 자식들과는 불화가 심했으며 평생 나쁜 관계였다.
4.3. 의외의 성향
문화적, 민족적으로는 개방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제국이 표방하는 다민족, 다문화적 그 가치관을 자식들에게 주장했고 특히 알로이스의 근무지인 린츠는 체코인과 오스트리아인의 접경지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민족적인 가치관을 가졌고 결혼을 통한 혼혈도 많은 지역이였다, 때문에 반대로 히틀러가 극단적인 순수인종주의를 보이는 이유는 아버지의 다민족적인 가치관 자체에 대한 반항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5. 매체
2000년대에 방영한 환상특급에선 게르만 민족 우월론을 믿던 인물로 나온다. 과거로 간 한 여인이 어린 아돌프 히틀러를 유모에게 빼앗아가 강물로 투신자살하여 역사를 바꾸려고 했지만....유모가 거지 여인이 데리고 있던 비슷한 나이 갓난아기를 돈주고 사오고 아돌프라고 알로이스를 속여 알로이스는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게르만민족다운 모습이라고 좋아라 하는 것으로 나왔다. 그리고, 내레이션을 하던 포레스트 휘태커가 나와서 우리는 역사를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라며 ....그 거지 여인의 아들이 잔악한 아돌프 히틀러가 된 것도 결국 애비인 알로이스 탓이 컸다는 느낌을 주며 끝냈다.
[1] 1882 ~ 1956, 1911년 장남 윌리엄 패트릭 히틀러가 태어나고 이후 1차대전때 첫 아내와 헤어지면서 둘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1920년 하인츠 히틀러가 태어났다. 하인츠는 1942년 전사하고 윌리엄 패트릭은 이복 숙부인 아돌프와는 달리 반(反) 나치주의자였기 때문에 미군에서 활동하였다. 윌리엄 패트릭이 죽고 현재 그의 네 아들은 한명빼고 모두 미국에 살아있으나 히틀러의 (방계) 후손을 남기지 않기 위해 독신으로 살고 있다.고 하나 사실 우연이라고 한다. [2] 파울라는 나이가 어렸기에 알로이스가 무관심해서 맞지 않았다.[3] 이때문에 사망 원인인 뇌일혈도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생긴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뇌일혈에 걸려 사망한 사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