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그린스펀

 



[image]
'''제13대 연방준비제도 의장'''
'''성명'''
'''앨런 그린스펀'''
'''Alan Greenspan''' KBE
'''국적'''
미국 [image]
'''출생'''
1926년 3월 6일
미국 뉴욕 주 뉴욕
'''학력'''
조지 워싱턴 고등학교 (졸업) (-1943년)
줄리어드 스쿨 (1943-1944년)
뉴욕대학교 비즈니스 스쿨 (편입) (경제학 / B.A.) (1944-1948년)
뉴욕대학교 (경제학 / M.A.) (1948-1950년)
뉴욕대학교 (경제학 / Ph.D.) (-1977년)
'''정당'''

'''경력'''
외교협회 외교정책기구 이사직
미국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1974년 – 1977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1987년 8월 11일2006년 1월 31일)
1. 개요
2. 상세
3. 여담


1. 개요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재임 기간 : 1987년 8월 11일 - 2006년 1월 31일

2. 상세


앨런 그린스펀[1](Alan Greenspan, KBE, 1926년 3월 6일 ~ )은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경제 관료이다. 유대인 부모 밑에서 자란 그는 본래는 음악인이 꿈이어서 1943년 '''세계 최고의 음악대학교인 줄리어드 스쿨'''에 입학했다. 하지만 진로를 바꾸어 뉴욕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게된다.1987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처음 이사회 의장으로 발탁된 그린스펀은 이후 조지 H.W.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연임되었다. 그의 자리는 2006년 1월 31일, 벤 버냉키에게 넘어갔다.
그의 연준 의장 당시의 정책 성향은 "연착륙"[2]과 '''"일부"''' 탈규제(deregulation)[3] 로 대표된다. 연준 의장으로 임명되자마자 1987년 주가 폭락 사태를 빨리 회복시켜 주목을 받았으며, 90년대 경제 붐의 중심에 서면서 "마에스트로"[4]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2001년 닷컴버블 사태의 주요인물로 지목되면서 그간 쌓아올린 업적과 명성을 잃게 된다.[5] 주택시장 활성화와 미국 서민들의 주택 마련을 돕는다는 목적으로 허가를 내준 부실주택대출 파생상품이 미국 경제를 지탱하는 한 축으로 자리잡았지만 →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6]의 가장 큰 원인이 되어, 세계 금융경제를 말아먹은 인물로 맹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2008년 10월 미 하원의 감독과 정부개혁위원회(House Committee on Oversight and Government Reform)가 주재한 청문회에 출석하여 국회위원들의 집중포화를 받았으며 "나는 실수했다(I made a mistake)"라는 명언을 남기고 자신의 연준 의장으로서 주도한 19년 동안의 정책이 잘못된 것임을 시인했다. 다음은 그가 청문회에서 정책적인 실수를 인정한 결정적 부분의 인용.
왁스맨: "Were you wrong?"
그리스펀: "Well, partially. But let’s separate this problem into its component parts. I took a very strong position on the issue of derivatives and the efficacy of what they were doing for the economy as a whole, which in effect is essentially to transfer risk from those who have very difficulty — have great difficulty in absorbing it to those who have the capital to absorb losses if and when they occur"
왁스맨: "Well, where do you think you made a mistake, then?"
그리스펀: "I made a mistake in presuming that the self-interest of organizations, specifically banks, is such that they were best capable of protecting shareholders and equity in the firms. (중략) I discovered a flaw in the model that I perceived is the critical functioning structure that defines how the world works. I had been going for 40 years with considerable evidence that it was working exceptionally well. (중략) But just quickly to say that the overall view that I take, of regulation, is that I took a pledge when — I took an oath of office when I became Federal Reserve Chairman. And I recognized that you do with that — what I did is I said that I’m here to uphold the laws of the land, passed by the Congress, not my own predilections."
요약해보자면
첫 번째 질문인 '네 정책은 잘못되었는가?' 라는 물음에 '자기 자신에게 일부 잘못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라는 것으로 시작한다. 잘못이 '일부'인 이유는 자기 결정 하나에 시장이 좌지우지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파생상품 등이나 복잡한 상황이 얽혀있는 상황은 결국 폭탄돌리기이고, 리스크가 적으면서 다 좋기만 한 선택이란 없기 때문이란 이야기가 첫 번째 문답.[7]
그래서 실수가 뭐냐? 라는 두 번째 질문에는 그리스펀이 인정한 그 자신의 실수는 '사리사욕을 찾는 기관(기업)들, 특히 은행들이 자기네 주주들과 자산 보호에는 유능할 것이라고 믿은 것' 이며, 자신이 믿었던 세상 돌아가는 방식의 중요한 기능을 하는 구조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라고.
마무리는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편애에 따른 결정이 아니라 의장으로 임명받을 때 했던 맹세를 따른 결정이고, 사욕이나 개인의 감정에 따른 결정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즉, 간단히 요약하자면 1) 전부 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최소한 일부 눈에 띄는 잘못 하나는 인정함. 2) 내 정책의 근본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었음. 3) 그래도 내 개인의 사욕을 챙긴 결정은 아니었음."정도가 되겠다.

3. 여담


본래는 음악인이 되고 싶어하여 1943년 줄리어드 스쿨에 입학하여 클라리넷, 색소폰등을 연주했지만 본인이 느끼기엔 프로로써 성공하기 힘들하고 느껴 진로를 바꿨다고한다, 당시 밴드의 매니저가 후에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 후보 법률 자문역이 되어 이를 인연으로 정책연구팀장직을 맡게되었다고한다.
앨런 그린스펀은 아인 랜드의 ‘합리적 객관주의(objectivism)’를 배우기 위해 젊은 날 아인 랜드 스터디 클럽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랜드는 그린스펀의 경제학에 깊은 영향을 미친 정신적 스승이다. 그린스펀은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는 동안 뉴욕에 있던 아인 랜드의 아파트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는 1977년 51세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10년 후에 Fed 의장이 된다. 그는 “랜드를 만났을 때, 나는 애덤 스미스식의 자유기업인으로서 그녀의 이론적 구조와 효율적인 시장론에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능률적이고 실용적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8] 이유를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아인 랜드는 내 시각이 자기모순적이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줬다”, “아인 랜드를 통해 경제는 심리를 비롯한 가치·태도·믿음과 다른 비이성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배웠다.”, “만약 아인 랜드가 없었다면 나는 은둔의 경제학자가 되어 말도 안 되는 전망이나 내뱉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랜드는 그가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경제 자문회 의장으로 지명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격동의 시대(The Age of Turbulence)",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Capitalism in America)”가 있다.

[1] 실제 그의 성은 '그린스팬'(원어 발음 /ˈɡriːnspæn/)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으나, 외국어·외래어 한글 표기를 심의하는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 위원회에서 Greenspan의 발음을 잘못 파악해서 한글 표기를 '그린스펀'으로 잘못 정하는 바람에 한국어에서는 '그린스펀'이 표준 표기가 되고 말았으며, 따라서 그린스펀이라는 표기가 퍼지게 되었다. 일단 외래어 표기법상으로도 '그린스팬'이 맞긴 한데, 어떤 단어에 대해서 심의된 한글 표기가 따로 존재하면 그 심의된 표기를 표준 표기로 하므로 이 경우는 '그린스펀'이라는 잘못된 표기가 최종적으로는 맞는 표기가 된다….[2] 금리를 인하하거나 인상하는 등 중요한 정책을 시행하기 전, '''언론을 통해 미리 시장에 수차례 신호를''' 넣어 부정적인 여파를 최소화하겠다는 의도이다.[3] 모든 규제를 삭제해 시장을 아무런 보호장치없는 "정글"로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사람의 경제철학의 근간이 된 스승 아인 랜드아인 랜드/이념 항목을 참조해보자.[4] 밀턴 프리드먼은 그전까지의 의장들이 저지른 실책들을 꼬집으며 그린스펀 이전의 연방준비제도는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나은 수준의 기관이었다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5] '''"20%"'''라는 고금리 정책으로 임기 동안 갖은 욕을 먹었던 폴 볼커는 반대로 '''"일부"''' 재평가받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하지만 재조명 수준은 아니고, 일각의 폴 볼커 정책 지지자들이 모처럼 목소리를 낸 것일 가능성도 있다. IMF 사태의 여파가 직격한 98년 전반기 우리나라 상황을 생각해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IMF와 마국 재무부 관리들은 '''시중의 자금을 금융권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명분 하에 '''연 29.5%'''라는 살인적인 수준의 고이율을 '''강요'''했는데, 여유자금이 충분한 사람들은 이를 기회삼아 10년 이상의 장기 계약상품으로 돈을 쓸어담을 수 있어, 해당 정책을 어느 정도 지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난으로 실직 후 자영업자가 되어 생계를 유지해야 할 대다수 실직자분들이 29.5% 고이율을 지지할 수 있을까?[6] 2000년의 닷컴버블 이후 전세계 경제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초대형 악재이다. 모 광고문구처럼 닷컴 버블이 커피라면 이쪽은 T.O.P[7] 그리스펀 입장에서 딱히 틀린말은 아니다. 특히 그의 19년간의 정책을 전부 이야기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문제는 그의 삽질이 쌓이고 쌓여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몰아서 터졌다는 거고, 바꿔 말하면 서브프라임 사태에 대해서는 참으로 큼직한 책임을 지고있다는 말이 된다.[8]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 강의는 원래 '''"윤리학"''' 강의 내용이었다고 한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으로 분리돼 자리잡은 건 훗날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