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타다사부로

 


'''야마모토 타다사부로'''
'''山本唯三郎(やまもと たださぶろう'''
[image]
'''생몰년도'''
1873년 11월 8일~1927년 4월 17일
'''출생지'''
일본 오카야마현
1. 개요
2. 생애
3. 야마모토 정호군(山本征虎軍)과 『정호기』(征虎記)
3.1. 초기 일정
3.2. 정호군의 편재
3.3. 정호군가, 호랑이여 오라
3.4. 고원(高原)에서의 사냥
3.5. 영흥군의 표범 사살
3.6. 함경도에서 사살된 두 호랑이
3.7. 천태산의 수호(水虎) 사살
3.7.1. 수호에 대해
3.8. 호랑이 고기 시식회
3.9. 도시샤 고등학교의 호랑이 박제
4. 사다케 본 36가선 두루마리 그림(佐竹本三十六歌仙絵巻) 관련 일화
5. 몰락과 최후
6.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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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戦国の武将は陣中の士気を鼓舞せんが為めに朝鮮の虎を取りましたが、大正年代のわれわれは、わざわざ出掛けて行って申さば日本の版図内の虎を狩って戻りました。これにも深長な意味があると存じます[1]

전국시대의 무장은 진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조선의 호랑이를 잡았습니다만, 다이쇼 시대의 저희들은 일본의 영토 내에서 호랑이를 잡아왔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호기''' p. 90~91

야마모토 타다사부로. 다이쇼 6년(1917) 12월 20일, 도쿄 제국호텔 대연회장에서 열린 호랑이 고기 시식회에서 한 연설 중 일부.

야마모토 타다사부로는 메이지 시대에서 다이쇼 시대에 걸쳐 활동한 일본제국사업가이다. 1차 세계대전 시기에 조선업, 해운업 등을 통해 급격히 부를 축적한 인물을 뜻하는 후나나리킹(ふななりきん/船成り金)으로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로, 1917년 11월 12일 부터 동년 12월 3일까지 '''정호군'''(征虎軍), '''야마모토 정호군'''(山本征虎軍)이라 불리는 거대한 규모의 사냥팀을 조직해 한반도 내에서의 호랑이 원정 사냥을 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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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졸부(成金, 나리킨)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 이미지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 요정에서 나올 때 기생 한 명이 어두운 현관에 엎드려 신발을 찾으려 하자 100엔 지폐에 불을 붙여 현관을 비추고, 놀란 기생들 앞에서 다시 100엔 다발을 풀어 코푸는 시늉을 하며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부를 과시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의 만화가 와다 쿠니보(和田邦坊)가 이 일화를 듣고 그린 풍자만화가 바로 위의 그림으로, 굉장히 유명한 일화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00엔 지폐는 당시 일본의 최고액권으로 1914년 일본의 1인당 GNP가 72엔 남짓이었다.

2. 생애


1873년 오카야마 현 구메(久米) 군 츠루타 번(鶴田, 현 오카야마시 키타구)에서 츠루타 번의 인사인 사카사이 쇼세츠(坂斉正雪)의 3남으로 태어났으나 4살 때 어머니의 친족인 야마모토 타케지로(山本竹次郎)에게 입양되었다. 입양된 집안은 가난하여 칸스이고등소학교(環翠尋常小学校)에 다니면서도 대나무 공예와 두부 장사로 가계를 지원했으며, 10세의 나이에 일자리를 찾아 오사카로 가 낮에는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밤에는 영어 학교에 다니는 등의 고학을 하였다. 17세 때에는 ​​형의 도움으로 시즈타니학교(閑谷学校)에 다닐 수 있었고 그후 도시샤학원(현 도시샤대학)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형의 원조가 끊기어 중퇴하였고, 삿포로농학교(현 홋카이도대학)에 관비생으로 입학해 우유 배달 등의 일을 하며 학업을 계속하였다.
삿포로 농학교를 졸업한 후, 지도 교사였던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의 후원을 받으며 홋카이도 이시카리 평야(石狩平野)에서 진행한 개척 사업이 성공하여 대지주가 되었다. 이후 약 10년간 홋카이도 개척 사업에 종사하던 중 중국석탄 판매 사업을 시작하고 마츠마사 양행(松昌洋行)이라는 무역 상사를 설립해 석탄과 목재 무역에 종사하다 제 1차 세계대전의 개전에 선박 운송업을 강화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는데, 전성기의 자산이 약 4천만 엔이었다고 한다. 쌀파동이 일어나기 전인 1918년 1월 일본 내 쌀값이 백미 1석에 15엔이었고 당시 일반 회사인의 평균 월급이 18~25엔이었다고 하니출처 얼마나 엄청난 거액인지 알 수 있다.
1916년, 타다사부로는 오카야마 현에서 열린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3. 야마모토 정호군(山本征虎軍)과 『정호기』(征虎記)


한편 이 책에서 일본 고베(神戸)를 근거지로 두었던 송창양행(松昌洋行)의 주인으로 큰 부를 쥐었던 대자본가 야마모토 타다사부로는 제국주의 세력의 일원으로서 제국주의의 성과를 확인하고 그 영역을 더욱 확대하려는 야망을 거침없이 드러내기도 하였다. 대자본가답게 야마모토는 "칠, 팔만원의 큰돈"을 들여 이 사냥 행사를 진행하고 있음을 밝혔으며(<매일신보> 1917년 11월 18일자), "근래에 점점 퇴패(退敗)하여 가는 우리 제국 청년의 사기(士氣)를 드높히기 위해"(<매일신보> 1917년 11월 3일자)라는 명분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야마모토는 정호군의 총대장으로 불렸으며, 11월 14일에는 테라우치(寺内) 수상의 소개로 조선총독부의 하세가와 총독을 만나기도 한다. 또한 사냥을 마무리하고 경성의 조선호텔에서 열린 시식회에는 총독부의 야마가타 정무총감을 비롯한 120여명의 귀빈이, 12월 20일 도쿄의 제국호텔에서 열린 시식회에서는 대신 2명과 추밀원 의장을 포함한 200여 명의 일본 제국주의를 이끄는 인물들 상당수가 참석하였다.

-'''정호기''' p. 16~17

1917년 11월, 야마모토는 "근래에 점점 퇴패하여 가는 우리 제국 청년의 사기를 드높히기 위하여 칠, 팔 만원의 큰 돈을 들여 이같이 장쾌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며 거금을 들여 원정대를 이끌고 한반도호랑이 사냥을 나섰으나 세간에는 그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그가 출마한 1916년 중의원 선거 당선자인 '''야마야 토라조오'''(山谷虎三)에게 패해 낙선한 것에 대한 분풀이를 하기 위해 호랑이('''虎''')를 잡으러 가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소문과는 별개로 야마모토의 이런 사냥은 그의 이름을 따 '''야마모토 정호군'''(山本征虎軍)이라 불리는 등 대단한 주목을 받았는데, 겉으로는 조선총독부해수구제 정책과 같이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에 피해를 주는 해로운 짐승을 퇴치한다는 맥락을 내세워 조선인들의 환대를 받는 동시에 그 내면적으로는 '''자신의 부에 대한 과시'''와 강한 맹수인 호랑이를 사냥함으로서 백제에서 자식을 잡아먹은 호랑이를 사냥한 '''카시와데하테스'''(膳臣巴堤使),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호랑이를 사냥한 '''가토 기요마사'''와 같이 일본에는 없는 맹수인 호랑이를 사냥하여 예로부터 용맹하다고 일컬어지는 일본 무사의 용맹함과 정통성을 잇는다는 '''영웅심리의 발로(發露)''', 가토 기요마사가 활동한 시대와는 달리 일본의 영토가 된 조선에서의 자유로운 호랑이 사냥을 통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산과 고취''' 등. 복합적인 동기를 가져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기며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에 들 수 있는지를 시험받는 시기에 들고, 볼셰비키당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시베리아 출병을 앞두는 등 제국주의의 확산을 추구하던 당시 일본 제국의 사회적 분위기에 맞물려 지배층과 대중의 주의를 이끌어내게 된 것으로 분석된다. [2][3]
이 뿐만 아니라 야마모토는 자신의 사냥 행사에 특파원 형식으로 여러 신문기자들을 초청해 참여시킴으로서 당시의 주요한 언론 매체인 신문을 통해 자신의 성과를 즉각 보도하여 자신의 이러한 사냥에 대한 대중들의 보다 큰 관심을 이끌어 내었는데, 사냥에 참여한 일행 33명이 각자 서명한 것이 영인(影印)되어 실려있는 후술된 '''『정호기』'''의 마지막 두 페이지에서도 매일신보사, 중앙신문, 경성일보, 중외산업신보, 규슈일보사, 국민신문, 일본소년, 야마토신문, 히로시마중국신문사 등의 언론사와 '''심천풍'''(沈天風)[4], '''다무라 고토'''(田村江東), '''야마하나 요시키요'''(山塙芳潔), '''오타 시게루'''(太田茂) 등의 참여 언론인들이 확인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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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기』''' 원본 표지.[6]
가토 기요마사를 연상시키는 편겸창(片鎌槍)을 든 표지의 무사 그림은 야마모토의 호랑이 사냥이 일본 무사의 용맹함과 정통성을 잇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암시로 여겨진다.[7]
11월 10일 도쿄역을 출발해 같은 해 12월 10일 다시 도쿄역에 도착하기까지 야마모토의 약 한달에 걸친 원정 사냥에는 19명의 기자와 마츠마사양행의 본사와 지점의 수행 직원 10명이 동행했고 사냥꾼은 24명, 몰이꾼은 약 150명이 동원되었다.[8] 이후 야마모토는 사냥의 일화와 촬영한 사진들을 수록해 1918년 6월 10일 도쿄의 다이샨사(大參社)에서 '''『정호기』'''(征虎記)라는 서적으로 출간해 사냥의 후원자와 동행한 이들에게 기념으로 돌렸는데, 국립중앙도서관에 조선총독부 도서관에서 보관하던 판본이 청구기호 朝16-A22로 기록되어 있으며 국내의 호랑이 보호 단체인 (사)한국범보전기금이 일본의 인터넷 고서점에서 정호기 원본을 구하여 범보전기금 측과 엔도 키미오의 해제가 첨부된 번역본을 출간했다.[9]

3.1. 초기 일정


다이쇼 6년 11월 10일 아침. 차가운 비를 맞으며 도쿄역을 출발한 일행은 고베에서 2명, 오카야마에서 1명, 히로시마에서 2명이 모여 11일 아침, 시모노세키에 하차하여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8명과 합류해서 25명이 되었다. 춘범루(春帆樓)[10]

의 등 밑에서 잔을 기울이며 서로 명함을 돌릴 때, 창 밖에서는 우박이 내렸다. 접시를 반쯤 비우고 앞으로의 일을 위해 축배를 들려 하자, 승선을 알리는 기적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일조(日朝)연락선을 타고 12일 아침 부산 부두에 섰다.

-'''정호기''' p. 157

11월 10일 오전 8시 반에 도쿄를 출발한[11] 야마모토의 일행 12명은 경유지에서 일행이 늘어 다음날인 11일에 목적지인 시모노세키에 도착했을 때에는 25명이 되었다. 이후 연락선 사쿠라호에 탑승해 시모노세키를 떠나 12일 오전 9시에 부산에 도착했고, 10시 반에 부산역을 출발, 오후 9시에 환영 인파가 운집한 남대문역(서울역)에 도착한 뒤[12] 이틀간 경성에서 머물며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13] 정무총감의 초대를 받아 조선호텔 객실에서 조선에서의 맹수로 인한 피해 사실을 들었다.[14][15][16]

3.2. 정호군의 편재


경성에서 6명이 추가로 합류해 일행은 31명이 되었고 15일에는 지원부대를 원산으로 옮겼다. 주위에서 우리를 가리켜 '정호군(征虎軍)'이라 하였다.

여기서 전략군인 1반을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일행이 조선으로 건너기에 앞서 맹수를 처리하기 위해 일본인과 조선인 중 실력 좋은 포수를 뽑아 함경남북도와 강원도, 전라남도 등 4도에 배치했다. 일행이 원산으로 이동할 무렵, 포수들은 벌써 각 부서에 배치되어 본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은 8개로 나누었다.

-'''정호기''' p. 161

경성에서 기자와 수행원 6명이 합류해 31명이 되고, '''정호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야마모토의 일행은 원산으로 이동하기 전 미리 사냥조들을 각 반당 3여명의 포수와 10여명의 조선인 몰이꾼으로 구성된 8개 반으로 나누어 1반에서 5반은 함경남북도에, 7반과 8반은 전라남도에, 6반은 별동대로 금강산에서 곰 사냥을 하도록 해 두었는데,[17] 각 반에 배치되어 있던 포수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제1반(단천대): '''강용근'''(姜龍根), '''최순원'''(崔順元), '''김현식'''(金鉉植)

제2반(북청대): '''이윤회'''(李允會), '''최재순'''(崔在順), '''노경오'''(盧敬伍)

제3반(성진대): '''백운학'''(白雲鶴), '''심여근'''(沈汝根), '''홍영강'''(洪永姜)

제4반(고원대): '''혼다 사다노부'''(本田貞信), '''임봉화'''(林鳳華), '''박대현'''(朴大玄)

제5반(영흥대): '''기쿠타니 리키조'''(菊谷力藏), '''박창태'''(朴昌泰), '''이상호'''(李相晧)

제6반(강원대): '''박삼보'''(朴三甫), '''이춘재'''(李春在), '''김광오'''(金光伍)

제7반(능주대): '''곤도 고이치'''(近藤孝一), '''박서방'''(朴書房), '''이진환'''(李進煥)

제8반(광주대): '''김관일'''(金寬日), '''김원사'''(金元四), '''최재주'''(崔在珠)

-'''정호기''' p.162

포수 중 일본인은 명단에는 포함되지 못한 1명을 포함해 4명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 포수들이나 동원된 조선인 포수들 대다수는 당대에도 이름난 인물들이었는데, 특히 1반의 주장인 '''강용근'''은 함경남도 지사의 추천을 받아 발탁된 인물로 조선 제일의 호랑이 사냥꾼으로 불리며 야마모토의 사냥에 동원되기 전부터 이미 백여마리의 호랑이를 잡았다고 일컬어지는 인물이었고 2반의 주장인 '''이윤회'''는 강용근과 함께 조선왕조 궁내부(宮內府)에서 정식허가를 받은 엽사로 몰이사냥을 통해 하루에 꿩 108마리를 잡은 인물이었다.[18] 그런만큼, 실력이 탁월하고 지리에 능통한 조선인 포수들은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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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에 모인 11명의 포수들. 두번째 줄 왼쪽 네번째의 검은 옷을 입은 인물이 '''강용근''', 그 왼쪽 옆의 흰 두건을 두른 이는 '''백운학'''.[19] 맨 뒷줄 중앙은 사진 속의 유일한 일본인으로 제4반에 소속되어 11월 29일 큰 멧돼지를 잡았으나[20] 알 수 없는 이유로 명부에는 들지 못한 일본인 포수 '''미야타 도미자부로'''(宮田富三郞).[21]

3.3. 정호군가, 호랑이여 오라


경성에서 원산으로 이동하는 기차에 동행한 기자들인 '''야마오카 조슈'''(山岡超舟)와 '''다무라 고토'''(田村江東)가 각각 '정호군가'와 '호랑이여 오라'라는 노래를 만들었는데, 두 노래 모두 일제의 침략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22]

차 안에 동행한 야마오카 조슈[山岡超舟]는 군가를 만드는 재능이 있었다. 제목은 <정호군가>로 했다.

제1절

때는 다이쇼 6년,11월의 열흘째 아침.

치요다[千代田]의 황궁에 절을 하고, 나아가자 야마모토 정호군

긴 육백삼십리, 바다로 길로 꿈을 넘어서

조선을 향해 용감하게, 나아가자 야마모토 정호군

군을 나누어 8분대로, 전사가 되어라

조선 반도 산속 깊이, 나아가자 야마모토 정호군

도깨비 상관의 업적, 보아라 지금이다

호랑이의 위세로 밀어붙이자, 나아가자 야마모토 정호군

제2절

지금 북풍을 맞으며, 장백산맥의 달은 어두워라

피에 굶주린 맹호들, 쏘아라 야마모토 정호군

적으로는 표범도 들개도 늑대도, 곰 또한 몇 백 마리 늘어나도

두려움 없이 한 번에, 쏘아라 야마모토 정호군

우리편은 150명, 언제나 사그라지지 않는 그 용맹함에

팔도 산천은 놀라 안색을 잃어, 쏘아라 야마모토 정호군

일어서라 총잡이여 사냥해라 몰이꾼들, 일본 남자의 투지를

보여라 사냥감으로 뒤덮일 그날까지, 쏘아라 야마모토 정호군

-'''정호기''' p. 164

똑같이 다무라 고토[田村江東]는 <호랑이여 오라>라는 신작을 만들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일이여

지금은 야마모토 정호군

호랑이여 오라

호랑이 덤벼라 호랑이 덤벼라 철포를 짊어지고

가자 북쪽의 눈 속으로

호랑이여 오라

일본 남아의 담력을 보여주자

루스벨트[23]

그 무엇이랴

호랑이여 오라

호랑이 덤벼라 표범 덤벼라 늑대도 곰도 덤벼라

안 나오면 쏘겠다 오연발로

호랑이여 오라

올해는 조선 호랑이를 모두 사냥하고

내년에는 러시아의 곰을 사냥하세

호랑이여 오라

그날 밤의 연화를 시작으로, 초대받았을 때나 행국으로 피곤할 때에는 소리높여 이 군가들을 합창했다.

-'''정호기''' p. 165~166


3.4. 고원(高原)에서의 사냥


15일 원산에 도착한 정호군 일행은 다시 열차를 타고 16일 고원(高原)으로 이동했다. 고원역에는 환영문이 설치되어 있었고 환영 인파들에 의해 환영회가 열렸는데, 이때 관내 순시 중이던 함경남도 지사를 만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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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역을 출발한 야마모토 정호군. 맨 앞이 정호군 깃발을 든 기수.[24]
환영회 후 정호군 일행은 말에 탑승해 선두에는 창과 정호군기를 앞세우고 말 하나 당 종자(慫者)가 붙은 50여명의 인원이 되어 고원역을 출발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사냥 일정을 시작했다. 고원역에서 약 8km를 이동해 장흥리(長興里)의 인가가 없는 곳에서 쉬고 다시 출발해 마남령(馬南嶺)이라는 봉우리와 추마상덕(秋馬上德)이라는 산맥이 이어진 산골짜기에 들어섰을 때 일행 중 숙소로 갈 사람은 산을 돌아서 먼저 숙소로 돌아가게 하고 남은 인원들은 두 개의 대(隊)로 나누어 산에서 내려와 정호군을 안내한 제4반의 '''혼다 사다노부'''(本田貞信)를 안내자로 하여 본격적인 사냥에 앞선 시험삼아 마남령을 올랐다.[25]
마남령을 오르며 혼다 사다노부가 표범이 나타나면 즉시 잡겠다며 자신의 계획을 말하자 이 말에 일행 모두 흥분하여 언성을 높혔고, 뒷봉우리를 돌아 봉우리를 내려올 때 마남령 아래 골짜기에서 사람들의 소리에 놀란 호랑이 하나가 뛰쳐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쏘았으나 잡지는 못했다. 이후 마남령을 내려와 서쪽으로 다시 8km를 이동해 숙소로 삼은 수동면(水洞面)의 미둔리(彌屯里)에 도착해 민가에 나누어 묵었다.[26]
다음날, 아침 7시부터[27] 약 7km를 이동해 험한 봉우리가 늘어선 정성봉(正誠峰) 자락의 방화동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여기서 관전하는 기자들은 산허리에 머무르고 몰이꾼들은 말발굽 모양의 산병선(散兵線)을 만들어 계곡 깊숙히 숨게 한 뒤 공포탄 사격을 시작으로 일제히 산봉우리를 향해 몰이를 시작했다. 이때 산허리 부근에서 멧돼지로 추정되는 검은 형체 두 개가 나타났으나 둘 모두 사람이 없는 봉우리를 넘어가 잡지 못했고, 몰이꾼들의 식사 후 다시 몰이를 시작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미둔리로 돌아왔다.[28]

3.5. 영흥군의 표범 사살


18일, 정호군 본대는 미둔리 마을 이장 김병한(金柄漢)과 마을 주민들의 환대와 배웅을 받으며 고원으로 돌아왔다. 이후 영흥행 기차를 타기 위해 역에 도착하자 영흥에서 사냥 중이던 제5반의 포수 '''기쿠타니 리키조'''(菊谷力藏)가 표범을 잡았다는 전보가 들어왔으나 영흥에 도착해서 확인하기로 하고 기차에 올랐을 때, 추마상덕 방면으로 사냥을 나갔던 혼다 사다노부가 노루와 꿩을 가져와 기차에 던져넣고 다시 사냥을 하러 떠났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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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 제5반의 기쿠타니 리키조가 영흥군 의흥면 용신리에서 사살한 아무르표범[30]
오후 7시에 영흥역에 도착한[31] 정호군 일행은 사살된 표범을 확인하고 기념 촬영한 뒤 표범을 원산으로 보냈고, 영흥역에 운집한 일본인과 조선인 수백명의 환영을 받으며 보통학교에서 열린 환영 행사에 참석했다.[32]
영흥에서 사냥하던 제5반은 멀리 떨어져있어 다음날인 19일에는 5반에 합류하지는 않고 용흥강 주변의 물새를 사냥하고 정자리(亭子里)에 있는 조선의 발상지 유적을 관람한 뒤, 숙소로 돌아와 표범을 잡은 일화를 듣고 오후 9시 20분에 원산역으로 돌아왔다.[33]

기쿠타니 포수는 16일, 용신리 산중에 들어가 우연히 맹수의 발자국을 발견했고 17일 오전9시경에는 더 커다란 무언가를 보았다. 방금 지난 듯한 흔적을 보고 표범이라는 확신이 들어 사냥감에서 멀리 떨어진 곳부터 천천히 접근하는 진형을 짜고 11시가 되어서 몰이꾼과 포수의 배치를 끝냈다.

(중략)

이쪽의 계획을 알 리 없는 표범은 소나무 아래로 달려가 포효하며 단번에 포수를 물어뜯으려 했으나 부대의 2연발로 인해 머리가 깨지며 숨이 끊겼다.

기쿠타니는 과거, 일 년에 호랑이 다섯 마리, 표범 두 마리를 잡은 눈부신 업적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영흥에 살고 있는 우리 부대 후방수비의 상등병이다.

-'''정호기''' p. 174


3.6. 함경도에서 사살된 두 호랑이


영흥에서 원산으로 돌아온 정호군 본대는 함흥으로 가는 배를 3일간 기다리며 첫째날에는 작은 증기선을 타고 문천(文川)의 바다로 나가 물새를 사냥한 뒤 그날 밤에는 사냥감인 노루와 기러기를 시식했고 둘째 날에는 석왕사(釋王寺)에서 휴식을 취했는데, 이때 제3반의 주장인 '''백운학'''(白雲鶴)이 암호랑이 하나를 잡았다는 긴급 전보가 들어왔다.[34]
본대는 셋째날인 22일, 오후 12시에 원산을 출항하여 서호진(西湖津)으로 향해 23일 오전 5시에 서호진에 도착. 서호진에서 열차를 타고 오전 7시에 함흥에 도착했는데,[35] 1반에서도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보가 들어오자 두 호랑이를 신창에 두고 대기하도록 지시한 뒤 함흥 반룡산 공원 소나무숲에서 열린 환영식에 참석했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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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룡산 공원에서의 환영회.[37]
다음날인 24일 오전 8시부터[38] 본대는 십수대가 연결된 탄광차를 타고 오로리(五老里)로 이동한 뒤 오로리에서 다시 말을 타고 가는 식으로 이동해 함흥탄광에 도착하여 탄광을 시찰하고 함흥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정오에는 새로 부임한 도지사와 '''오가와'''(小河) 경무부장의 초대를 받아 도청에서 오찬을 가졌고 이날 밤에는 함흥탄광회사에서 연 연회에 참석했는데, 함흥탄광회사의 대주주였던 야마모토는 상석에 나란히 앉았다.[39]

백운학은 제3반의 주장으로서, 10일 성진에 상륙한 뒤 바로 산으로 올라가 10리를 이동했는데, 우연히 신구동에 주둔하고 있는 헌병분소에서 서학면의 한 마을에 맹호가 나타나 사람과 가축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내용의 정보를 접했다.

(중략)

백운학은 호랑이와 약 40걸음 정도의 단거리를 확보하며 첫탄을 등에, 두 번째 탄을 복부에, 세 번째 탄을 경추에 맞추어 쓰러뜨렸다.

-'''정호기''' p. 177

26일, 백운학이 호랑이를 성공적으로 잡았다는 정보가 재차 들어왔고, 정호군 본대는 함흥을 떠나 신창으로 향해 오후 7시에 신창에 도착해[40] 신창의 숙소 뒷마당에 3반과 1반이 잡은 두 호랑이의 사체를 놓고 확인할 때. 마침 1반에서 호랑이를 사살한 포수 '''최순원'''(崔順元)이 숙소에 도착하자 그에게서 호랑이를 잡은 일화를 들었다.[41]

최순원은 제1반의 일원이었지만 굳이 따로 행동하기 위해 주장 강용근과 헤어지고 11일 신포에 상륙해 도보로 북청과 이원(利原)을 지나 북쪽의 죽암동으로 들어갔다. 부하로는 박문선(朴文善)과 한석조(韓錫祚)가 있었다.

(중략)

호랑이와 떨어진 거리가 약 300걸음, 충분한 사정거리가 아니었으나 시험삼아 한 발 쏘았더니 운 좋게 등에 명중했다.

호랑이는 격렬한 아픔에 포효했고 그 소리는 온 산을 뒤흔들었다. 몰이꾼 한 명이 공포에 질려 넘어지자 호랑이는 그 순간을 틈타 가까이에 있던 바위굴로 힘껏 도망갔다.

바위굴은 입구의 직경이 2척이 조금 안 되었다. 큰 바위의 지지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굴이 있었다. 곧바로 일곱명의 몰이꾼을 불러 돌로 입구를 막으려 했으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최순원이 혼자서 돌을 굴려서 입구를 막자 호랑이는 오도 가도 못하고 바위굴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중략)

인부들을 동굴 안으로 들어가게 했으나 모두들 들어가려 하지 않아서 총탄을 한번 더 쏘아 완전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겨우 이 호랑이를 동굴 밖으로 끌고 나올 수 있었다.

'''정호기''' p. 179~181

[image]
11월 20일 함경북도 성진시 인근에서 백운학에게 사살된 호랑이와 11월 21일 함경남도 단천군 인근에서 최순원에게 사살된 호랑이.
우측이 야마모토 타다사부로, 좌측은 최순원.[42]
호랑이를 잡은 이야기를 들은 야마모토는 최순원을 불러 상으로 은잔 하나를 주며 술을 따라 건넸고, 이에 최순원은 기뻐하며 자리를 떳다.

3.7. 천태산의 수호(水虎) 사살


신창에서 호랑이를 확인한 정호군 본대는 27일 오전 10시에 북청으로 향해 오후 2시 20분에 북청에 도착했다.[43] 북청의 보통학교에서도 환영행사가 열렸고, 다음날 28일. 중평리로 향하던 중 함흥에서부터 동행한 7~8명의 헌병이 노덕면에서 해수를 사냥하겠다고 하며 본대에서 이탈했고 본대는 6km를 걸어 중평리에 도착한 뒤 식사 중 대덕산[44]에 미끼로 매어둔 돼지가 무언가에 물려갔으며, 돼지를 찾던 중 길이 약 15cm의 커다란 호랑이 발자국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듣게되자 식사를 중단하고 대덕산으로 이동했다.[45]
대덕산 등반 후 하산 중 노루 두 마리를 발견했으나 서로 쏘겠다고 하는 사이 한 마리는 도망치고 다른 하나도 상처를 입고 도망쳤다. 그렇게 정호군은 빈손으로 숙소로 돌아왔으며, 노덕면으로 사냥을 나간 헌병들도 빈 손으로 돌아왔다.[46]
29일에는 새벽에 일어나 동덕산(東德山)으로 이동해 참가 기자들로 이루어진 갑지대(甲枝隊)는 산 왼편으로 등반하고 을지대(乙枝隊)는 인부들을 데리고 서쪽의 서마답령으로 올랐으며 헌병대는 북쪽으로, 정호군기를 든 본대는 산 정상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곳마다 사람 소리에 놀란 꿩과 산새들이 날아올랐으나 잡지 않았다. 이후 갑지대 뒤에서 십여마리의 노루가 긴 열을 이루어 횡단하는 것을 발견하여 사격하고 몰아 노루 한 마리를 잡은 뒤 산 정상으로 올라 우연히 발견한 정상 인근의 호랑이굴을 살펴보았고, 산 정상의 본대로 집합하며 을지대가 노루 두 마리를 잡았다는 소식을 알렸다.[47]
이후 북쪽으로 10리 떨어진 귀락령(歸落嶺)에서 사냥하고 있는 1반의 사냥터로 이동하려 했으나 1반의 주장 '''강용근'''(姜龍根)에게서 10여일간 단천과 북청에서 사냥했으나 호랑이를 찾을 수 없어 마을의 웃어른을 찾아뵙고 잡은 노루 세마리와 산양 세마리를 드린 뒤 남쪽으로 이동한다는 전보를 듣고 자세한 이야기는 밤에 듣기로 하고 산을 내려왔다.[48]
동덕산을 내려왔을 때 곰을 사냥하기 위해 금강산으로 보낸 제6반과 동행한 기자들이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금강산 사진만을 촬영해왔으나 6반의 도착을 전후로 하여 전라남도에서 사냥하던 제7반의 '''곤도 고이치'''(近藤孝一)가 26일 천대산(天臺山) 부근에서 수호(水虎) 한 마리를 잡았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밤이 되었을 때 야마모토는 식당에서 강용근과 2반의 주장 '''이윤회'''(李允會)를 만났다.[49]

밤이 되어 식당에서 강용근을 만났다. 제1반과 제2반의 주장들이다. 52세에 얼굴은 붉고 키가 컸으며 수염은 정리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그는 털옷을 두르고 있었다. 조선 제일의 명포수라고 하는 만큼 이름과 명예를 걸고 제1반의 수장으로 뽑혀 제 손바닥 보듯, 함경남북도의 산백과 계곡을 다 뒤졌으나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했다. 강용근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앉았다.

(중략)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또한 모두 침통해 했다.

뒤에 제2반의 이윤회가 있었다. 이윤회는 44세로 강용근에 비해 작은 몸집이지만 침착하기로는 그 누구도 따를 자가 없다. 제1반과 제2반은 귀락령에서 접촉하고부터 연립해서 행동했다. 포획물로 노루 두 마리와 산양을 들고 왔다.

(후략)

-'''정호기''' p. 189

[image]
중앙이 야마모토 타다사부로. 좌측이 강용근, 우측이 이윤회.[50]
야마모토에게 노루 두 마리와 산양을 넘긴 강용근과 이윤회는 마을에 묵지 않겠다고 말하며 정호군 일행이 경성을 떠날 때 까지 적어도 호랑이 하나는 잡겠다는 맹세를 하고 다시 산으로 향했다. 다음 날 30일. 떠난 강용근과 이윤회의 소재가 분명하지 않아 쫓아갈 수 없어 정호군 본대는 사냥을 끝내기로 하고 오전 9시에 중평리를 출발해 오전 11시에 북청에 도착해[51] 물새 사냥을 했고, 12월 1일 오전 10시에 북청을 출발한 뒤 오후 2시 반에 신창에 도착해[52] 4반의 포수 '''미야타 도미자부로'''(宮田富三郞)가 29일 문천군 운림면 신풍리에서 멧돼지를 잡았고 5반의 기쿠타니 리키조가 30일 영흥군 인흥면 선산리에서 곰을 잡았다는 전보를 들은 뒤. 다음날인 2일 오후 7시 반에 원산진에 도착한 정호군은 숙소에 사냥감들을 모아 기념 촬영했다.[53]
[image]
원산의 숙소 여관 뒷마당에 쌓아두고 촬영한 포획물.[54]
12월 3일 오전 9시 45분.[55] 정호군은 원산역을 출발해 오후 6시에 남대문역에 도착했고, 경성에서 이틀간 체류하고 있을 때 정호군을 해산하지는 않았지만 5~6명 정도가 정호군에서 빠졌으며 야마모토는 전라남도에서 보내진 수호를 확인했다.[56]

3.7.1. 수호에 대해


[image]
11월 26일 능주(綾州)의 천태산(天台山)에서 사살되어 능주에서 기념 촬영한 수호.
몰이 중 수호에 의해 머리에 부상을 당한 우측의 몰이꾼이 붕대를 감고 있다.[57]

남쪽에서 잡아온 수호를 보다.

수호는 100년이나 50년에 한 마리 나올까 말까 한 매우 희귀한 동물로 호랑이와 표범의 잡종이다. 포수인 곤도 고이치는 15일부터 능주(綾州)에 머물면서 열흘째 되는 날에 화순(和順), 나주(羅州), 장흥(長興)의 경계가 되는 천태산(天台山)에서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천태산으로 들어가 이틀간 수색 끝에 호랑이굴을 발견했다.

(중략)

수호는 그 생김새가 표범과 닮았으나 반점과 꼬리가 역시 일반 표범과는 다르다. 포획한 수호는 전체 몸길이가 약 9척 5치로 털가죽이 매우 아름다웠다.

-'''정호기''' p. 196

호텔에 도착한 야마모토는 남쪽에서 보내온 수호를 보았다. 제7반의 기념사진을 보면, 수호는 커다란 표범인 것 같다. 왜 이것이 수호인가? 수호라는 것은 100년에 한마리, 50년에 한 마리 나올까 말까한 아주 희귀한 것으로 호랑이와 표범의 혼혈이라고 한다.

(중략)

흑백사진으로는 영흥의 표범도 능주의 표범도 같아보이지만 수호의 꼬리가 굵어 보이며 더 큰 것 같다. 한국의 여러 사람들에게 수호를 물어봤으나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이 그 누구도 없었다.

- '''정호기''' p. 71

수호(水虎)는 정호기 본문 내에서 호랑이와 표범의 잡종인 것으로 언급되는 동물이나 엔도 키미오가 해제한 '''야마모토 타다사부로의 『정호기』'''에서는 수호의 꼬리가 조금 더 굵고 커 보인다고 말할 뿐. 장흥에서 촬영된 수호의 모습과 영흥에서 사살된 표범 사이의 큰 차이를 찾지 못했음은 물론 한국인들에게 수호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수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한국범보전기금 측의 정호기 해제에서도 수호는 단순히 큰 표범을 오인한 것으로 보인다고 서술한 동시에 범보전기금의 정호기 국내 출판 기념 강연 자료에서도 수호의 사진 자료는 Hunters and a dead Leopard라는 설명이 붙는 등. 표범과 호랑이의 잡종이라는 정호기 본문의 설명과는 달리 정호기에서 등장한 수호는 표범으로 취급되고 있다.

3.8. 호랑이 고기 시식회


경성에서 사흘간 체류하며 하루는 운동회를 벌이기도 한 정호군은 12월 7일. 주빈석에 야마가타 이사부로 정무총감을 초대하는 등 경성의 귀빈 120여명을 조선호텔에 초대해 포획한 야생동물을 이용한 요리로 시식회를 열었으며, 이때 내놓은 요리는 다음과 같았다.

간 오리고기 요리

찐 숭어 스프

멧돼지 고기를 갈아 젤리로 싼 요리

호랑이 고기를 채소와 함께 양주를 넣어 익힌 요리

찐 염소 고기와 생야채 곁들임

잣 빙과(氷菓)

'''정호기''' p. 197

조선호텔에서 시식회를 연 다음날 정호군은 배웅을 받으며 화물칸에 포획한 사냥감을 가득 채워 남대문역을 떠나려 하던 중 혼다 사다노부가 뒤늦게 승냥이 한 마리를 보냈는데, 여기까지 정호기에 기록된 정호군이 사냥한 포획물을 총산해 보면 호랑이 두마리, 표범(수호 포함) 두 마리, 곰 한 마리, 멧돼지 세 마리, 산양 다섯 마리, 승냥이 한 마리, 노루 아홉 마리와 다수의 기러기와 청둥오리, 꿩 등이 있었다.[58]
[image]
12월 20일 제국호텔에서 열린 호랑이 고기 시식회.
이후 다시 부산을 거쳐 12월 7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후쿠오카, 규슈, 고베 등을 거쳐 12월 10일 도쿄역에 다시 도착한 야마모토는 같은달 20일에 제국호텔에서 호랑이 고기 시식회를 다시 열었는데, 여기에는 정치가인 덴 겐지로(田健治郎), 나카쇼지 렌(仲小路廉), 고노 토가마(河野敏鎌), 스에마쓰 겐조(末松謙澄). 육군 대장인 가미오 미츠오미(神尾光臣), 실업가인 오쿠라 츠루히코(大倉鶴彦)를 비롯한 200여명의 고관과 명사들이 참석했으며 식당 안밖을 호랑이 사냥의 태마로 맞추기 위해 대나무 밭으로 꾸미고 호랑이와 표범, 곰과 노루의 박제를 배치시켰다.[59] 이때 내놓은 요리는 아래와 같다.

1. 함경남도 호랑이의 차가운 고기(푹 익힘, 토마토케첩으로 마리네 함)

2. 영흥 기러기 스프

3. 부산 도미 양주 찜(국물과 함께)

4. 북청 산양 볶음(야채 곁들임)

5. 고원 멧돼지 구이(크랜베리 소스. 샐러드 곁들임)

6. 아이스크림(작은 과자 곁들임)

7. 과일, 커피

-'''정호기''' p. 199

신사숙녀 여러분.

때는 벌서 연말을 향하고 있어 공사다망하실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기 이 자리에 매우 희귀한 고기를 냅니다. 덧붙여, 많은 분들께서 이와 같이 자리에 참석해주셔서 진심으로 영광이라고 생각되는 바입니다.

(중략)

전국시대의 무장은 진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조선의 호랑이를 잡았습니다만, 다이쇼 시대의 저희들은 일본의 영토 내에서 호랑이를 잡아왔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순원이 잡은 호랑이를 이 자리에 옮겨왔으며, 바로 여기있는 이 두 마리 중 오른쪽에 있는 호랑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일본 최고의 호텔에서 여러분 앞으로 호랑이 고기뿐만 아니라, 가죽과 뼈를 그대로 술에 담아서 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 이쯤에서 참석하신 모든 분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진배를 하겠습니다.

술을 받으시면 한 번에 마셔주시고 혹시 몇 방울이 남았다면 호랑이를 위해서도 건배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호랑이 또한 사후의 영광으로써 감사의 뜻을 표할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다이쇼 6년(1920년) 12월 모일

제국호텔에서 개최한 포획물 시식회 석상 인사 개요

야마모토 타다사부로

-'''정호기''' p. 88~91

야마모토는 시식회에서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침공해 호랑이를 사냥한 가토 기요마사와는 달리 일본의 영토가 된 조선에서 호랑이를 잡아왔음을 강조하며 제국주의를 고취시켰고, 참석자들은 요리에 호평하며 호랑이 사냥을 주도한 야마모토를 크게 칭찬하였다. 시식회 이후 야마모토는 시식회에서 내놓은 이외의 호랑이 고기와 정기를 뽑아 호골정(虎骨精)으로 이름 붙인 뼈를 선배와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60]

3.9. 도시샤 고등학교의 호랑이 박제


나는 교토로 당장 출발해 고색창연한 도시샤 표본관으로 갔다. 거기서 야마모토가 기증한 두 마리의 호랑이와 표범 박제와 대면했다. 네 마리 전부 유리 상자에 넣어져 보존되고 있었다.

호랑이는 두 마리 전부 중간 크기로 젊은 호랑이였다. 표범은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었고 어디를 봐도 호랑이와의 혼혈인 수호라는 기록은 없었다. 아마도 일본의 동물학자가 수호라는 것을 부정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어쨌든, 네 마리 모두 교토의 시마즈[社島]제작소에서 제작한 것으로 훌륭한 박제였다.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있는 호랑이 박제와 비교하면 도시샤 박제의 모피는 퇴색도 거의 없었다. 직사광선을 피해 매우 소중히 보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호기''' p. 79

1980년에서 1985년까지 한국을 6년간 방문하며 자료를 수집해 일제 강점기 당시 한반도에서 시행되었던 해수구제 정책을 밝혀내고 정리한 서적인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를 집필해 1986년에 출간한 일본의 동물 문학 집필가인 '''엔도 키미오'''가 1986년에 나고야 NHK 방송의 PD로부터 야마모토 정호군이 사냥한 호랑이의 박제가 도시샤 고등학교에 보관되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도시샤 고등학교를 방문해 표본을 직접 확인했으나, 이 박제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가 저술한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에 실리지는 않았다.[61]

즉시 기무라 교수를 통해 도시샤 고등학교가 있는 교토교토대학교 자연사박물관의 모토가와 교수에게 연락을 취해 주도록 부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토가와 교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도시샤 고등학교를 직접 방문했으며, 그 표본관에 아직도 보관되어 있는 한국 호랑이와 표범, 반달가슴곰 등 표본 사진을 직접 촬영했다는 것이었다! 모토가와 교수는 촬영한 사진 파일을 함께 보내왔다. 또 야마모토가 1920년 표본을 제작한 후 도시샤 고등학교에 기증하면서 함께 보낸 송장을 교토대학교 도서관에서 찾아 복사해 보내주었다.

-'''정호기''' p. 30

[image]
왼쪽부터 서울대학교 이항 교수, 기무라 준페이 교수, 도시샤 고등학교 교사 다카시 니만, 교토대학교 박물관 교수 모토가와 마사하루.
도시샤 고등학교 표본 유전자 시료 채취와 표본 촬영을 마치고 기념촬영.[62]
이후 2008년 4월 25일 서울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포유류 계통 및 계통지리 국제심포지엄"에서 서울대학교의 이항 교수와 기무라 준페이 교수가 참석한 각국의 학자들. 특히 일본 학자들에게 소속된 대학이나 지역 박물관에 한국 호랑이 표본이 있는지 찾아볼 것을 부탁하며 한국 호랑이 유존체 탐색을 도운 도쿄 국립과학박물관 연구자인 히라타 하야토시에게는 야마모토 타다사부로에 대한 자료 수집을 요청했다.[63]
얼마 후 그는 도시샤 고등학교 졸업자들을 소개하는 도시샤 인물지에 실린 야마모토에 관한 정보를 발견하여 기무라 교수에게 전달했는데, 여기에 실려있던 야마모토가 사냥한 동물들을 박제, 골격 표본화 하여 모교인 도시샤 고등학교에 기증했다는 정보를 교토대학교 자연사박물관의 모토가와 교수로 부터 재차 확인 받아 2009년 11월 25일, 이항 교수와 기무라 교수가 도시샤 고등학교를 방문하여 표본들을 직접 확인했고,[64] 2010년 3월 30일 사진기사를 동행하여 박제들을 촬영함과 함께 박제 표본의 유전자 시료를 채취했다.[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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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샤 고등학교의 호랑이와 표범 박제 표본.

박제품 내역: 호랑이 1, 수호 1, 표범 2, 승냥이 1, 곰 1, 멧돼지 머리 2, 산양 머리 1, 이상 9점.

골격제 내역: 호랑이 1, 수호 1, 이상 2점.

피혁류 내역: 반달가슴곰 가죽 1, 멧돼지 가죽 2, 노루 가죽 1, 담비 가죽 4, 이상 8점.

(다이쇼 9년(1920년) 10월 19일)

-'''정호기''' p. 33

야마모토 타다사부로가 도시샤에 보낸 표본 송장 내역.

2009년의 방문 당시 반달가슴곰 가죽 이외의 다른 가죽들을 제외한 송장에 실린 모든 표본들을 확인 후 『정호기』의 기록과 야마모토의 송장, 실제 표본 두수 상황을 대조했을 때 각 기록사이의 차이가 발견되었는데, 정호기에는 두 마리의 호랑이를 잡은 것으로 되어있었으나 송장에는 호랑이 박제와 골격 표본 각 1점, 수호 박제와 골격 각 1점으로 되어 있으며. 실제 표본관에는 성체 호랑이 박제와 골격 표본 각 1점. 그리고 정호기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 새끼 호랑이 박제과 골격 각 1점으로 호랑이 표본이 4점 존재하여 송장에 기록된 수호는 정호기에 기록되지 않은 새끼 호랑이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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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기에 기록되지 않은 새끼 호랑이 박제와 골격 표본.
연구자들의 도시샤 고등학교 방문 이후로는 문화재자리찾기 대표인 김영준(혜문스님)이 도시샤 고등학교에 방문하여 표본들의 존재를 언론에 알렸으며, 2016년 도시샤 측에 해당 표본들의 반환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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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자리찾기 대표 김영준과 도시샤 고등학교 호랑이 박제 표본.

4. 사다케 본 36가선 두루마리 그림(佐竹本三十六歌仙絵巻) 관련 일화


"네, 고향인 오카야마 시에 도서관과 농업학교를 세워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엄청난 부를 축적한 사람답게 아키타 현의 사다케[佐竹] 집안이 가지고 있던 36가선(歌仙) 두루마리 그림도 샀다고 합니다.

12겹의 옷을 입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오노 고마치[小野小町]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미남이라던 아리와라노 나리히라[在原業平]의 그림도 그 두루마리에 있다. 기품있는 왕족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가인(歌人)의 모습과 시 한 수가 흐를 듯한 가나(カナ)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사다케 36가선 두루마리 그림은 팔려고 했으나 너무 고가여서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 그림을 산 것이 바로 조선에서 호랑이 사냥을 끝내고 돌아온 직후의 야마모토였던 것이다. 그러나 2년 뒤 그도 그것을 팔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정호기''' p. 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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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의 시인 '''다이라노 가네모리'''(平兼盛像)의 그림과 시가 그려진 36가선 두루마리 그림 중 일부. MOA 미술관 소장
야마모토 타다사부로의 부에 대한 과시는 대규모의 원정 사냥에 그치지 않았는데, 1917년 11월 5일 도쿄 미술클럽에서 경매에 부쳐졌으나 그 가격이 너무 고가였기 때문에 1개 업체로는 입찰하지 못해 도쿄와 간사이의 9개 고미술상이 공동으로 합동 입찰하여 35만 3천 엔에 낙찰받았으나 아무도 구입하려 하지 못할 정도의 고가였던 가마쿠라 시대의 초상화인 '''사다케 본 36가선 두루마리 그림'''(佐竹本三十六歌仙絵巻)을 원정 사냥을 끝내고 돌아온 직후 시점에 현재 가치 약 40억엔의 가격으로 구입할 정도였다고 한다.[67]
그러나 2년 후인 1919년, 1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무역량이 줄자 무역업을 통해 세를 불린 야마모토의 사업도 도산할 위기에 처해 이 36가선 두루마리 그림도 처분하게 되었으나 높은 가격으로 아무도 구입하려 하지 않자 미츠이(三井) 그룹의 창설을 지원한 사업가인 '''마츠다 다카시'''(益田孝)를 후견인으로 하여 본래 2개의 두루마리에 나누어 각 18개의 그림이 수록된 두루마리의 그림을 36개로 나누어 일본의 부호들에게 추첨으로 나누어 팔아 처분했는데,[68] 그 이후로 이 사다케 본 36가선 두루마리 그림은 아직까지도 분할되어 보관되고 있으며 나눠진 각 그림들 대다수가 현재 일본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5. 몰락과 최후


1916년 낙선한 이후 이전에 다녔던 도시샤대학에 8만 엔, 오카야마 시립 도서관의 공사및 시설비로 1만 8천 엔, 고향인 구메 군의 야마모토 실업학교 설립에 20만 엔을 기부하는 등 사회기부사업에도 손을 댔으나 1920년 다시 나간 중의원 선거에서 낙선. 본업인 사업도 제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불황을 입어 순식간에 재산을 탕진하였고 1927년, 위경련으로 54세에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한다.

6. 참고 문헌



[1] http://www.tanken.com/toragari.html[2] 정호기 p. 18[3] 정호기 p. 22~23[4] 1890~1946.3.6 본명 '''심우섭'''(沈友燮)으로 소설가 심훈의 맏형. 언론인, 방송인으로 활동했으며 정호군 취재 당시에는 매일신보 기자였다. 이후 태평양 전쟁 시기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순회강연반 연사가 되어 함경남도 지역에서 연설을 하고 조선임전보국단에도 참여하는 등. 일본 제국에 협조한 행적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언론/출판 부문에 포함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한국어 위키백과 심우섭(1890년))[5] 정호기 p. 21~22[6] 정호기 p. 11[7] 정호기 p. 23[8] 정호기 p. 73[9] 정호기 p. 15~16[10] 시모노세키에 있는 요정집 이름이다.[11] 정호기 p. 92[12] 정호기 p. 92[13]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양자. 원래는 야마가타의 여동생의 아들이다.[14] 정호기 p. 50[15] 정호기 p. 92[16] 정호기 p. 158[17] 정호기 p. 161~162[18] 정호기 p. 209[19] 정호기 p. 54[20] 정호기 p. 190[21] 정호기 p. 100[22] 정호기 p. 53[23]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말한다.[24] 정호기 p. 106[25] 정호기 p. 106~107[26] 정호기 p. 167~168[27] 정호기 p. 93[28] 정호기 p. 169~171[29] 정호기 p. 172[30] 정호기 p. 114[31] 정호기 p. 93[32] 정호기 p. 172~173[33] 정호기 p. 173~174[34] 정호기 p. 175[35] 정호기 p. 93[36] 정호기 p. 175~176[37] 정호기 p. 127[38] 정호기 p. 94[39] 정호기 p. 176[40] 정호기 p. 94[41] 정호기 p. 177~178[42] 정호기 p. 181[43] 정호기 p. 94[44] 1921년 10월 21일 수호랑이가 사살된 경주 구정동의 대덕산과는 다른 산이다.[45] 정호기 p. 181~183[46] 정호기 p. 183~184[47] 정호기 p. 184~186[48] 정호기 p. 186[49] 정호기 p. 186~188[50] 정호기 p. 145[51] 정호기 p. 94[52] 정호기 p. 95[53] 정호기 p. 189~191[54] 정호기 p. 147[55] 정호기 p. 95[56] 정호기 p. 192~195[57] 정호기 p. 151[58] 정호기 국내 출간본에서는 당시 혼다 사다노부가 포획해 보낸 동물을 늑대로 서술하고 있으나 실제 도시샤 고등학교에 보관되어 있는 박제 표본은 승냥이 박제 표본으로서, 혼다 사다노부가 포획해 보낸 동물 또한 늑대가 아닌 승냥이인 것으로 여겨진다.(2019년 11월 30일 한국범보전기금 주최 세미나 '''문화하는 호랑이 "호랑이에 대한 한민족의 기록과 기억, 그 의미"'''에서 확인.)[59] 정호기 p. 198~199[60] 정호기 p. 200[61] 정호기 p. 30[62] 정호기 p. 41[63] 정호기 p. 29[64] 정호기 p. 29[65] 정호기 p. 40~41[66] 정호기 p. 34~35[67] 정호기 p. 78[68] 정호기 p. 78~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