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세르 아라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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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손에 올리브 가지를 다른 한 손에는 자유를 위한 전사의 무기를 들고 여기에 왔습니다. 내 손의 올리브 가지를 던져 버리지 않게 하십시오,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에 전쟁이 벌어졌지만 그곳에서 평화가 다시 살아날 날이 올 것입니다.
-1974년 11월 13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아라파트가 한 연설中 -
1. 개요
팔레스타인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2. 상세
1929년 이집트 왕국 카이로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카이로 푸아드왕립대학에서 교육 받고 토목기사로 일했다고 한다. 1956년 이집트군 장교로 수에즈 전쟁에 참가한 경력도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48년 1차 중동전에 참가하면서 부터였다. 학창시절 팔레스타인 학생동맹을 주도한데 이어, 1959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의 모태가 된 대 이스라엘 투쟁단체인 '알 파타'를 창설했다.
1969년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즉 PLO를 창설하면서 의장이 되었다. 요르단과 레바논, 시리아 등지로 거점을 옮기며 '이스라엘의 멸망'을 목표로 잇단 항공기 납치와 주요 시설 파괴 등 수십차례에 걸쳐 대이스라엘 무장투쟁을 하였다. 이러한 무장활동은 아라파트에게 팔레스타인의 대표라는 위상을 주기도 했지만 테러리스트라는 악명도 안겼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체포위기에 몰렸을 때마다 뛰어난 변장술로 위기를 넘겨 중동의 오뚝이, 9개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특히 이스라엘의 암살시도를 40차례나 받았는데도 그때마다 잘빠져나가 이스라엘 입장에선 골치아픈 인물이었다.
1972년에 PLO 산하 과격단체 '검은 9월단'의 이스라엘 선수단 살해 사건으로 국제 여론이 악화되자 아라파트는 국제 테러에 개입을 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뒤 1988년 팔레스타인 독립선언 이후 협상전략으로 돌아섰고 1993년과 1994년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를 인정하는 오슬로 협정과 카이로 협약을 각각 체결해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중동평화 정착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1995년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을 3단계[1] 로 나눈 제2차 오슬로 협약을 마련하여 독립국가의 길이 형성되나 싶더니만...
제2차 오슬로 협약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1995년 11월 14일에 라빈 총리가 암살당하고 강경파들이 들어서면서 오슬로 협정이 사실상 폐기되고, 1996년 예루살렘 성전산 터널 공사 사태를 계기로 1997년에 백악관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정상회담에 마지못해 앉았으나 유대인 정착촌 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했고, 대신 테러 용의자들을 풀어 이스라엘 안전 유지활동을 중지시켜 회담이 결렬됐다. 2000년에 7월 캠프 데이비드 중동평화협상이 결렬되고 가을에 팔레스타인 자치 보장이 안될 시 최후통첩을 시사했으나, 아리엘 샤론 리쿠드당 총재가 템플마운트를 방문해 허사가 됐다. 이듬해 9.11 테러에 따른 미국 주도의 '테러와의 전쟁'을 계기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해 자치권을 박탈함으로써 그동안 이루어낸 노력이 허사가 되었다. 같은 시기 이스라엘은 라말라를 공격하여 이스라엘 공군의 공습에 부서진 라말라의 자치정부 청사에 사실상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2] 같은 시기에는 강경파 독립운동조직 '하마스'의 대두와 도전에 시달리기도 했다.
2004년에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토하고 쓰러지자 프랑스 군병원으로 옯겨졌으나, 평생을 바래 온 완전 독립국가 건설을 못 보고 75세로 사망한다. 사후 독살 의혹이 있었으나 프랑스 연구진의 결과로는 유언비어였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러나 이후 여러차례에 걸친 유럽 여러나라 연구기관들의 독립적 연구 결과에서 폴로늄 중독에 의한 사망을 강하게 시사하는 결과가 발표되었다. 사실 이 의혹이 도는 이유가 아라파트가 청사에 갇혀살며 이스라엘 정부의 검사를 거친 음식만 먹었기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제기하는 것이다. 실제로 근 10년만에 유족과 자치 정부가 유해를 꺼내 스위스 법의학센터로 보낸 결과 상당량의 폴로늄 210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의 공작이 아니냐, 엄밀히 말하자면 이스라엘 첩보기구 모사드를 의심하고 있지만 이스라엘 측에서는 부인하고 있다.[3] 본인은 예루살렘에 묻히길 원했으나 이스라엘 정부의 결사반대로 못하고 이집트에서 장례식을 치룬다음 서안지구 라말라에 묻혔다. 가족으로는 아내 수하 알타윌과[4] 딸 자흐와가 있다.
그의 후계자들인 파타당은 아라파트의 상징과도 같던 캐피예를 여전히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하는[5] 팔레스타인 온건파 정당으로, 지금도 이스라엘과의 공존 방안을 모색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개막장 짓거리와 내부 부정부패 때문에 지지율을 크게 잃어, 결국 하마스에게 밀려난다.
3. 여담
4. 둘러보기
[1] A지역은 안전 지역으로써 팔레스타인 완전 자치 구역, B지역은 위험한 지역으로 팔레스타인 부분 자치 지역, C지역은 극히 위험한 지역으로 이스라엘 완전 지배 지역. 이 3개로 나누어 점차 C지역을 B-A로 바꾼다는 협정이었다.[2] 이 당시 이스라엘 총리인 아리엘 샤론은 아라파트가 자치정부 청사에서 나온다면 생명을 보장못한다는 선언을 하여 사실상 나오기만 하면 죽는다고 협박했다.[3] 실제로 이스라엘 정부는 1997년에 하마스 지도자들을 독살하려고 하다가 들켜서 실패했다. 수십차례 아라파트를 암살하려 기도한 것으로 알려진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아라파트가 자연사 하도록 내버려 뒀으리라 믿기가 더 어려울 정도.[4] 근데 아내와의 나이차가 34세나 난다.[5] 단, 캐피예를 매는 방식만큼은 아라파트의 유일한 상징으로 아무도 흉내내지 않았다.[6] 분란의 땅에 평화를 이식한 협약의 체결자들을 말한다. 93년, 9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넬슨 만델라와 더불어 야세르 아라파트, 이츠하크 라빈 총리, 남아공 대통령 클레르크가 공동 선정되었다. 그만큼 중요한 협약들이 같은 해에 체결되었다는 이야기. 여하간 이 4명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지며 존경받을 만한 인물은 역시 만델라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