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광

 

1. 개요
2. 상세
3.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보장왕의 아들로 고구려 왕족이라 전해지는 인물. 고구려 말기에 야마토 정권 치하 일본에 망명해서 현재의 사이타마현에 정착해 고구려 유민의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가 특별한 이유는 그의 후손인 고마(高麗) 씨가 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후손들도 자신들이 고구려계라고 생각한다.

2. 상세


고구려가 을상 엄추(奄鄒) 등을 보내 조(調)를 바쳤다. 대사는 을상 엄추이고 부사는 달상 순, 이위 현무약광(玄武若光)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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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권 27 덴지 덴노조 666년 기록

종오위하(從五位下)[1]

, 고려약광(高麗若光)[2]에게 왕성(王姓)[3]을 내려 주었다.

從五位下高麗若光賜王姓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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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일본기 권 3 몬무 덴노조 703년 기록

약광은 한국 측 사서에는 전하지 않고, 일본서기속일본기에만 전한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666년에 고구려에서 태대형 현무약광(玄武若光)이라는 자가 야마토 정권에 사신으로 온 내용이고, 속일본기의 기록은 일본에서 약광에게 고려왕씨를 하사했다는 것이다. 다만 현무약광과 고려약광이 동일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그 외에는 대체로 가문의 전승이나 설화 따위가 주를 이루는 듯. 참고로 현무를 외척이란 뜻으로 보면 약광은 왕족이 아니라 왕의 외척이다.
약광이 고구려 왕족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이 되지 않으므로 약광 또는 후손들이 왕족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사칭했을 수도 있다. 다만 고구려 관련 사료가 부족해 교차검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삼국사기에도 고구려 왕족은 거의 왕만 기록하고, 다른 왕족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기록했기 때문에 약광이 등장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고구려와 꾸준히 교류한 야마토 조정을 상대로 보장왕의 아들이라고 사칭하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4]
아무튼 왕족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고구려 유민임은 확실해 보인다. 일본은 716년 도카이도 전역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추려서 모두 1799명을 무사시(武蔵) 지역에 이주시키고 고마군(高麗郡)을 설치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황무지가 많던 간토 지역을 개간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고마군이 설치될 때에 약광도 무사시로 이주해 그들의 수장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약광 사후 후손들은 그를 제사지내기 위해 사당을 세웠는데, 후일 고마 신사로 발전했다. 전승에 따르면 약광은 나이 들어 백발에 흰 수염이 무성한 모습이 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이 그를 '시라히게(白髯) 님'이라고 불렀다 한다. 옛 고마군 지역에는 시라히게 신사들이 여럿 있다.

3. 대중 매체에서


김성한 작가가 쓴 소설 요하살수대첩 시기부터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고구려가 멸망할 때는 이미 백발 노인이 되어버렸다.[5]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구원군을 요청하러 일본으로 떠난 후 소설이 종료된다.

[1] 일본어로는 히로키이츠노쿠라위노시모츠시나(ひろきいつのくらゐのしもつしな).[2] 일본어로는 코마 노 쟛코(こま の じゃっこう).[3] 왕성을 코키시 카바네(こきし かばね)라고 읽는다. 코키시는 카바네의 일종이다. 카바네(かばね)란 종실에서 성을 하사할 적에 성씨에 붙여서 겨레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코키시(코니키시)란 카바네가 하사된 사례가 의자왕의 아들 선광왕이 쿠다라(百濟)란 성씨를 하사받으면서 하사받은 것 말고 달리 없으므로 다른 나라의 왕족에게만 주는 카바네인 듯하다. 한면 '코키시(코니키시)'는 백제 왕호 '건길지'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4] 야마토 조정이 인정한, 수천 규모 유민들의 수장이라면 설령 왕족이 아니더라도 상당한 가문 출신으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5] 작가는 위의 시라히게 전승을 채용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