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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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704년의 역사[1] 와 28명의 국왕을 가진 나라였다. 평균 재위 기간은 25년으로 한국사 역대 왕조 중 가장 긴 편이었다. 참고로 이로부터 700여년 뒤의 왕조인 조선 왕조의 평균 재위 기간이 19년 2개월인 걸 생각해보면 매우 놀라운 재위 기간이다. 다만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3대의 계보가 상당히 비현실적인 것을 보았을 때 이 사이에 누락된 왕이 더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렇다면 평균 재위 기간은 조금 깎일 여지가 있다.
대다수의 왕들의 시호가 완전하게 전하지 않으며, 광개토대왕의 경우를 보건대 완전한 시호는 꽤 길었던 것으로 보인다.[2] 광개토대왕의 경우에는 그나마 광개토대왕릉비가 남아 있어서 완전한 시호가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흔히 왕이 묻힌 곳(장지명)으로 왕을 호칭하였다. 특히 그 가운데 광개토왕이 묻힌 '국강상'은 당시 수도이던 국내성 인근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서에 나타나는 고국원왕의 '고국원', 고국양왕의 '고국양'과 같은 곳으로 보인다. 고국원왕의 또 다른 호칭이 바로 국강상왕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가 국내성에 도읍하던 당시에는 국내성 인근을 가리켜 국강(國崗)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평양으로 도읍이 이전한 뒤에는 옛 수도라는 의미에서 고국원(故國原)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3] 왕이 묻힌 곳으로 왕을 호칭하는 방식은 훗날 고려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대표적으로 세종을 능의 이름을 따서 영릉(英陵)이라고 부른 것.[4][5]
삼국 시대가 정복 국가 시대라서 고구려에도 정복 군주가 상당히 많았는데, 고구려의 대표적인 정복 군주로 대무신왕, 태조왕, 동천왕, 미천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이 있다. 이 중 한국 역사에서 꼽히는 대표적인 정복 군주가 바로 광개토대왕.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37년으로 보고 있고 남한 학계의 대다수는 이 설을 따르고 있다. 북한과 남한 소수 학설에서는 일부 고구려 왕력이 삭제되었다고 주장하며 고구려 건국 연도를 기원전 300년 근처로 보고 있다. 당나라의 한 장수가 언급한 고구려 900년설을 따른 것. 그런데 사실 900년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일본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기원전 37년설을 따르기도 하고 위키백과 등에서 그렇게 서술되지만 삼국사기 초기 기사의 신뢰성 문제로 실제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태조대왕 대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6]
한편, 대부분의 고대 국가들이 그랬듯이, 왕위를 계승하는 형태에서 많은 변동이 일어났다. 대무신왕 때부터 산상왕 때까지는 형제간에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났지만, 산상왕 때부터 점차 왕권이 강화되고 국가의 기틀이 안정됨에 따라 특별한 일이 없다면 대개 고구려의 왕위는 부자간에 계승되기 시작하였다.[7]
여담으로 현재 고구려 왕실의 후손들이 바로 횡성고씨로 전국에 약 6000여명 정도 살고있다. 고구려의 초대 임금이였던 추모성왕을 시조로 삼고 있으며 중시조는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의 아들 고인승인데 바로 고구려 부흥운동 때 잠깐 임금으로 추대 됐었던 고안승의 형이다. 고인승은 나당연합군으로 고구려가 망하자 기타 왕족들처럼 당나라로 끌려가지 않고 강원도 횡성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다. 족보로만 따진다면 초대 임금 고주몽의 21대손이자 고구려 왕들 중 가장 유명한 광개토대왕의 9대손이 된다.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을 따르면, 고인승은 고주몽의 26대손이 된다.)
2. 계보도
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에 따른 가계도로, 일부《후한서》, 《위서》 등 중국 측 사서의 계보를 기입했다.
2.1. 태조 이전
재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유리명왕의 아들이나,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대주류왕의 3세손, 즉 손자라고 추정했다. 이유는 그래야 광개토대왕릉비에서 광개토대왕이 동명성왕의 17세손이라고 쓰인 것과 맞아떨어지기 때문. 여기에 따르면 태조대왕은 유리명왕의 고손자, 대무신왕의 증손자가 된다. 다만 17세손은 직계가 아닌 왕계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어서 여러모로 애매하다.
태조대왕의 즉위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다.
- 47년에 태어나서 53년부터 146년까지 총 93년을 재위했으며 심지어 165년에 사망해 무려 118세를 살았는데 과연 현실성이 있는가?
- 6대 국왕인데 왜 시호가 태조인가?
- 2대 국왕 유리명왕부터 5대 국왕 모본왕은 삼국유사에 해씨라고 나오는데 왜 6대 국왕 태조대왕부터는 고씨라고 기록되었나?
2.2. 태조 이후
2.3. 평양 천도 이후
2.4. 코마 씨
고구려 말기에 보장왕의 아들이라는 약광이 일본에 귀화하여 고려씨를 내려 받는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현무약광(玄武若光)이라는 자가 고려약광과 동일 인물이라면, 현무가 외척을 의미하기 때문에 약광이 왕족이 아니라는 설도 있기는 하다. 물론 현무라는 말을 반드시 외척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외척으로 해석할 경우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것. 아무튼 이처럼 약광이 보장왕의 아들이거나 왕족이라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고구려 왕실 인사에 대한 사료가 원체 부족해서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기도 힘든 게 현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기록에 남지 않으니... 그냥 왕이 된 사람들에 대한 기록만 남아있고,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다른 왕족이 언급되는 수준. 가령 태자 내정자였다가 요절한 조다라든가,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고구려를 갈아엎어버린 발기라든가...
3. 연표
4. 고구려의 왕호
고구려 임금의 공식 칭호가 멀쩡하게 남아있는 용례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이 유일하다. 여기서 '국강상'은 임금이 묻힌 장지명으로, '광개토경 평안'은 임금의 공을 기리는 훈적형 왕호[18] , 호태왕은 공식 존호나 시호 끝에 붙이는 ~신대왕, ~선제, ~명제 등과 같은 미칭으로 파악된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 전승되는 고구려 임금들의 여러가지의 이명들이 위에 언급된 양식의 일부가 파편적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는 단서가 된다. 다만 국초부터 제정되어 통용된 양식으로 보이지는 않고 일부 왕호는 당대에 쓰이지 않고 후대에 별칭으로 전해지거나 추봉된 왕호로 보이기도 한다.
4.1. 휘형 왕호
말 그대로 휘, 이름 그대로 지칭한 왕호를 일컫는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동명성왕을 추모성왕, 주몽왕 등으로 표기한 것이나 유리명왕을 유류왕, 대무신왕을 대주류왕 등으로 일컫은 것 등이 있다. 또한 마지막 임금인 보장왕 역시 나라가 망하고 존호가 전하지 않기에 이름으로 불린다.
4.2. 장지형 왕호
임금이 묻힌 곳을 부르는 발상은 묘호나 능호와 비슷한데 건국 시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가장 흔하게 찾을 수 있는 왕호 양식이다.
민중왕, 모본왕은 민중원, 모본원 등에서, 고국천왕,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등은 특정 하천에서, 소수림왕은 소수림에 묻힌 것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국강상성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부터 고구려 평원왕에 이르기까지 전해진 이명들 역시 대부분 묻힌 곳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4.3. 훈적형 왕호
대무신, 광개토, 평안, 장수, 문자, 명치 등등 고구려 중기, 광개토대왕 이래로 기록에 등장하는 왕호로 생애의 훈적(업적)을 기린 것으로 추정된다.
4.4. 기타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의 경우나 평양왕, 무양왕, 대양왕[19] 등 역시 일정한 기준이 있었을 것으로는 보이지만 추정이 어려운 왕호들도 있다.
4.5. 정체 불명의 왕들
5.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제후왕
신찬성씨록 3장 "제번" 편 참조
독음이 달린 포스트.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이미 성씨가 일본화되었기 때문에 굉장히 복잡하고 길다. 이는 고대 일본에서는 성씨를 우지(氏)와 카바네(姓)로 구분하였기 때문인데, 우지에 해당하는 부분을 현대의 성씨로, 카바네에 해당하는 부분을 가문의 유래나 등급으로 보면 편리하다. 연전왕 항목의 코마노아소미씨를 보면 코마가 우지에 해당하고 아소미가 카바네에 해당한다. 우지와 카바네 사이에 있는 조사인 노(の)로 구분하면 된다. 안류왕 항목의 카후치노미타미노오비토씨는 굉장히 긴데 우지에 해당하는 부분은 정확히는 '미타미'이고 카바네에 해당하는 부분은 '오비토'이다. 그럼 앞의 카후치는 왜 붙었나 하면 백제에서 유래한 미타미노오비토씨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 지리명을 붙인 것이다. 반면에 수모기왕 항목의 코마소메베씨와 코마히토씨는 카바네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순수하게 우지만 있어서 성씨가 짧다. 또 특기할 만한 성씨는 연나왕 항목의 카우노후히토씨인데 카우는 고(高)를 그냥 일본식으로 음독한 것에 불과하다(정확히는 현대가 아닌 고대 일본의 한자 발음이다). 즉 고씨를 그대로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코마(狛)라는 단어가 고구려계 성씨에 굉장히 많이 쓰인 걸 볼 수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 고구려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이름 뒤에 기(祁)가 붙은 왕이 많은데 이는 이름의 일부라기보다는 존칭일 가능성이 높다. 고대 한국어에서 기나 지를 이름 뒤에 붙여 존칭하는 용법은 삼국 공통으로 두루두루 나타난다. 또한 수모기왕의 수모 부분의 훈은 '스무'로 추모왕의 훈과 같기 때문에 추모왕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을 가리키는 표기일 가능성이 높다.
6. 여담
- 삼국사기상 태조대왕의 재위 기간과 생몰년이 매우 길다. (94년 재위, 119세) 또한 이후 왕인 차대왕, 신대왕 또한 '형제'로 기록되어 있으면서 지나치게 나이가 많다. 이는 후대의 기록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
- 시호가 굉장히 직설적인 왕들이 많다. , 땅을 넓혀서 광개토대왕, 오래 살아서 장수왕. 영양왕 같은 경우는 대하 사극 연개소문에서 영양'제'로 나와주시는 바람에 안그래도 웃긴 시호가 더 코믹. 잘보면 동, 중, 서천왕 시리즈도 꽤 규칙적인 작명 센스를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몇몇 왕의 경우는 장지 명에 따라 시호가 지어져있기 때문이다. 숲(소수림)이 근처에 있으면 소수림왕, 중천의 들에 장사지냈으니 중천왕. 이런 식으로 시호를 붙였다. 게다가 시호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도 있는데,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보이는 시호와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시호가 많이 차이난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28]
- 보장왕이 연개소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고나서 그의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는데 시호가 다름이 아니라 태양왕(...).
7. 참고 항목
8. 둘러보기
[1] BC 37~668, 서기 0년이 없으므로 705년이 아닌 704년이다. 마찬가지로 백제도 677년(678-1), 신라도 991년(992-1)이다.[2] 이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왕들도 마찬가지이다. 고려 태조의 시호는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인데, 후대로 내려갈수록 후대 왕들이 두 글자씩 덧붙이거나 한 것. 이 긴 시호를 줄인 것이 신성왕(神聖王) / 신성대왕이다. 아니면 묘호만 써서 태조라고 부르거나 왕이 묻힌 능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3] 羅神,「有關高句麗王號制度的幾點推測(고구려 왕호 제도에 관한 몇 가지 견해)」,『고구려 광개토왕과 동아시아』, 한국 고대사 학회, 2012년 참조.[4] 예를 들어 훗날 세종 시절의 일을 이야기하려거든, "영묘조(英墓祖)때 있었던 일인데…" 하는 식.[5] 다만 이는 세종의 묘호가 아들의 묘호와 시자(諡字)가 세(世)로 겹쳐, 구분을 용이하게 하기위해 폭넓게 사용된 면이 크다. 보통 -묘조(-廟祖)로 지칭하는건 묘호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선조→선묘조[6] 현행 한국 국사 교과서는 대무신왕의 이름까지도 등장하기는 한다.[7] 이렇게 왕위 계승 형태가 변동되는 과정에서 왕의 형제들이 왕위를 노리고 모반을 일으키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8] 명림홀도의 아내[9] 정확한 관계는 불명이나, 장수왕의 즉위를 고하기 위해 파견된 사신이 왕족인 고씨이고 장사(長史)라고 표기된 점을 볼 때 왕과 가까운 친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0] 양원왕의 외할아버지인 추군과 대립하던 세군의 외손자[11] 연정토의 아내[12] 보장왕의 아들로 추정[13] 일본명은 코마노코키시 쟛코 (高麗王若光)[14] 약광의 57대손[15] 약광의 58대손[16] 약광의 60대손으로 현재 코마 신사의 궁사를 맡고 있다[17] 79년 치세. 나이는 거의 98세.[18] 일각에서는 '"평안'" 부분을 임금의 휘, 본명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9] 보장왕의 추존된 아버지[20] 광개토대왕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인 호태왕(好太王)과 관련 있는지는 불명. 일본어 기준으로 台는 토(と)로 읽고 호(好) 자체도 시호에 많이 포함되는 글자여서 다소 불명확. 일단 호태가 고구려의 왕이었다고는 기록되어 있다.[21] 수서 기준의 고구려 관등으로 소사자의 다른 이름인 을사(乙奢)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22] 하지만 왕이 되기에는 세력이 너무 미미해서(어머니 신분이 천했거나 혹은 정쟁 등으로 왕위 계승 자격을 잃었거나) 혹은 왕이 되기도 전에 요절해버려서 기록에서 빠졌을 수도 있다. 조선 후기 족보에도 일찍 죽은 아들을 족보에 싣지 않은 사례가 많은데, 조선 후기 선산 출신의 무관이었던 노상추는 자신의 일기에 어린 아들 하나가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고 적은 기록이 있지만 정작 노상추의 집안인 선산 노씨 족보에는 그 아들의 이름은 커녕 존재도 수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래의 부련왕이 복귀왕의 아들이라 기록된 걸 보면 요절한 것 같진 않다. 한씨 미녀 설화가 거짓이 아닌 사실이라면 안장왕과 한씨 미녀 사이 소생의 아들일 수도?[23] 신찬성씨록의 훈에 의하면 추모는 '스무'라고 읽는다고 되어 있다.[24] 왕(王)이라고는 하는데 광개토대왕의 다른 표기인 호태왕(好太王)과는 일단 미묘하게 다르다[25] 호칭에 왕이 들어가있지만 신분은 국인(国人), 즉 신하다.[26] 栄井宿祢[27] 日置倉人[28] 물론 이 차이라는 것도 한문 표기 방식의 차이라는 것일 뿐이고. 한 사람의 이름을 표기하는 데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다른 한자를 써서 적는 것은 고려 시대까지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