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 신사

 


'''高麗(こま(じん(じゃ'''
고마 신사 | Koma Shrine


'''소재지'''
사이타마현 히다카시 니호리 833
(埼玉県日高市新堀833)
'''제신(祭神)'''
고마묘진(高麗明神)
사루타히코노미코토(猿田彦命)
타케우치노스쿠네미코토(武内宿禰命)
'''사격(社格)'''
구 현사(県社)
별표신사(別表神社)
'''창건'''
불명
'''예대제'''
10월 19일
'''홈페이지'''
http://komajinja.or.jp/
(한국어 페이지 보기)
1. 개요
2. 상세
3. 근현대의 고마 신사
4. 찾아가는 길


1. 개요


고마 신사는 일본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에 있는 신사이다. 고구려 보장왕의 후손으로 전하는 약광(若光)을 모신다. 약광을 모시는 절인 쇼덴인(聖天院, 성천원)[1][2] 이 이웃해 있다.

2. 상세


스루가, 가이, 사가미, 카즈사, 시모사, 히타치, 시모스케의 7국 고려인 1799명을 무사시국으로 옮겨서 처음으로 고마군(高麗郡)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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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일본기 권7 겐쇼 덴노, 레이키 2년(716) 5월조#

고마 신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속일본기에는 716년 히다카시 일대에 군(郡)을 설치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모여 살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약광이 이곳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었던 듯하다. 약광의 후예로 신사를 지켜 온 고마 가문의 기록에 따르면 약광은 748년에 사망했으므로 그 무렵 사당을 조성했다고 추정한다. 현재는 약광의 60대손 고마 후미야스가 궁사이다. 고마군이 설치된 5월 16일에는 매년 고구려 의상 퍼레이드 등의 행사를 연다. 고마군 건군 1300주년인 2016년에는 기념비를 세우는 등 성대한 행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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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 신사의 장승과 에마
한국에서 관심이 상당한 편이다. 신사로 들어가다 보면 돌로 된 장승 둘이 서 있는데 민단에서 기증한 것들이다. 원래 목장승을 세웠다가 자동차 사고로 손상되자 돌로 만들어 다시 세웠다. 에마에도 장승이 그려졌을 정도로, 신사의 마스코트 비슷한 취급을 받는 듯하다. 한켠에는 영친왕이방자 부부가 심은 나무가 있다. 주일대사들은 관례적으로 방문하는 듯하며, 한일 문화 교류 행사차 한국 연예인들이 찾아간 사례도 있다.[3]
신사에서 키우는 고양이의 이름은 나비냥인데, 한국에서 고양이의 이름을 나비로 많이 짓는 것에서 따온 듯 하다.
신사 본전 앞 대문에 걸린 편액에는 高,句,麗神社라고 쓰여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중응이 남긴 것으로,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 句를 작게 써 넣은 것이라고 한다.
출세를 하려면 꼭 참배해야 하는 곳으로 꼽혀 유력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곳을 참배하고 일본 총리가 된 사람들로 사이토 마코토, 와카쓰키 레이지로, 하마구치 오사치, 히라누마 기이치로, 하토야마 이치로, 고이소 구니아키가 있다.

2017년에 아키히토 덴노 내외가 고마 신사를 방문해 참배했다. 나루히토 덴노는 고등학생 때 방문한 적이 있다.#

3. 근현대의 고마 신사


고마 신사는 근대까지만 해도 지방의 토속 신사 중 하나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메이지 시대 들어 신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것은, 근대화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도래인과 일본에 성공적으로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고마 신사가 내선일체를 강조하기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1886년 지역 가계도와 고문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고마 신사와 한국과의 인연이 알려지자 일본 정부와 학계에서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일본에 망명해 있던 조중응은 1900년에 이곳을 방문해 신사의 내력을 확인하고 현판까지 써 주었다.
한국에 고마 신사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16년 매일신보에 소개되면서였다.[4] 조선총독부문화통치 방침을 세운 후 '내지 시찰단'의 명목으로 일제에 협조적인 조선의 유력 인사를 일본으로 보내 선전에 이용하곤 했는데, 이 시찰 코스에 고마 신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1921년 대구에서 출발해 일본 각지를 훑고 돌아온 경상북도 유림 시찰단은 다음의 감상을 남겼다.

고려촌(高麗村)[5]

에 도착하니 길거리에 남녀노소가 나와 맞아 주었다. 그들은 마치 멀리 있어 오래 보지 못한 친척을 만난 것처럼 기뻐하였다. (중략) 성천원(聖天院) 동쪽에 약광왕의 신사와 비각이 있다. 단원 일동이 신사에 참배할 때 흥환(興丸)씨[6]가 조선 사람들이 와서 참배한다는 내용의 글을 바쳤다. 도중에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지라 우리 단원들도 따라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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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유림내지시찰감상록(慶尙北道儒林內地視察感想錄)』

1940년 4월 고마 신사와 조선신궁은 서로 나무를 교환했다. 고마 신사에서는 벚나무를, 조선신궁에서는 잣나무개나리를 기증했다. 매일신보는 이 행사를 내선일체의 신목(神木)교환이라는 제목을 붙여 보도했다. 6월에는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이 찾아 참배했는데, 이 때의 기사에서도 고마 신사를 '내선일체의 산 교훈'이라고 쓰고 있어 고마 신사가 당시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알 수 있다.

미나미 총독은 바쁜 시간을 쪼개어 8일은 내선일체의 산 교훈으로 이름 높은 고려신사를 참배하였다. 고려신사 신전에 올라 경건한 참배를 마치고 기념식수를 한 후 사무소 응접실에서 아라이(新井) 고려촌장, 고마 아키쓰(高麗明津)[7]

사장(社掌)[8]을 위시하여 촌 유력자 10여 명과 간단한 오찬회를 열었다.

미나미: "조선은 와 본 일이 있소?"

고마: "없습니다."

미나미: "고향을 못 보았다니! 허허. 한번 꼭 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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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한번 오시요" 내선일체의 땅, 고려촌을 방문하여 따뜻한 대화. 미나미 총독, 고려신사 참배, 『매일신보』, 1940.6.11

1942년 11월에는 영친왕이방자 내외, 아들 이구 가족이 방문했다. 이방자와 이구는 이듬해 43년에도 재차 참배했다.

4. 찾아가는 길


JR 코마가와역에서 도보로 약 20분 정도 걸린다. 세이부 철도 코마역에서는 도보 45분. 코마역에서 코마가와역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중간에 내려서 걸어갈 수도 있다. 역에서 신사 바로 앞까지 가는 대중교통은 딱히 없으니 그냥 걸어가자.
[1] 쇼덴인과 고마 신사는 본래 하나의 건물로 취급 받았으나, 메이지 시대의 신불판연령으로 분리되었다.[2] 쇼덴인에는 재일교포 사업가가 세운 재일한민족무연지령탑과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신라의 태종무열왕, 백제의 왕인 박사, 고려의 정몽주, 조선의 신사임당, 그리고 단군왕검의 동상과 한국식 팔각정이 있다.[3] 관련 자료: 2009년 권철현 대사2015년 유흥수 대사2013년 배우 지창욱2014년 배우 조현재[4] 내지의 고려촌(1), 풍물이 상금방불, 『매일신보』, 1916.8.30[5] 고마군은 1896년 이웃한 군에 합병되어 단위 행정구역이 되었다.[6] 약광의 57대손인 고마 오키마루.[7] 약광의 58대손.[8] 신사에서 제사를 맡는 신관의 직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