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수대첩

 

'''살수대첩
薩水大捷'''

'''시기'''
612년 음력 7월
'''장소'''

고구려, 식성군 살수 유역[1]
'''원인'''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
'''교전국'''
[image] 고구려
[image] 수나라
'''지휘관'''
<^|1>을지문덕
고건무
우중문
우문술
조효재
위문승
장근
형원항
설세웅
왕인공
신세웅
'''병력'''
병력 규모 불명
약 30만 5천 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원정군 몰살'''
'''30만 2300명 사망, 실종'''[2]
'''결과'''
'''고구려의 대승'''
'''영향'''
전쟁 기조를 유지한 수나라의 멸망.
1. 개요
2. 배경
3. 상세
3.1. 살수대첩의 진행
3.2. 살수대첩의 분석
3.2.1. 살수대첩에 대한 오해: 수공?
3.3. 살수대첩의 결과
4. 살수대첩의 여파와 의의
5. 북한의 관점
6. 관련 문서
7.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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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살수대첩. 박각순. 1975년 작'''
612년(영양왕 23년),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의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이며 살수[3]에서 고구려의 '''을지문덕고건무'''(훗날 영류왕)의 주도 아래 이루어낸 대첩이자 '''한국전쟁사상 전설적인 승리.'''
한국인들의 상당수가 수공(水攻)하면 살수대첩을 떠올릴 정도로 인지도가 높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수나라군을 수공으로 쓸어 버린 것은 아니다. 들판에서 고구려와 수나라 정예병들이 정면으로 맞붙은 전형적인 야전이자 '''회전#s-2(會戰)'''이었다.

2. 배경


612년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이 시작되었고 113만 수(隋)군은 음력 3월 15일에 요하에 도달하였다. 수군의 전 병력이 탁군[4]을 떠나는 데만 40일이 걸릴 정도로 사상 유례 없는 초대규모 군대였음을 생각하면 대단히 진군속도가 빨랐다. 그러나 고구려군이 강력히 저항하여 요하를 건너는 데만 2개월이 걸렸다. 천신만고 끝에 요하를 건너 요동성 공성전을 시작했지만 또 다시 1개월이 넘도록 요동성 함락은커녕 큰 손실을 입고 음력 6월을 맞이하였다.
병력과 물자의 손실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시간'''이었다. 수양제는 지나치게 큰 병력을 끌고 와서 (설령 요동성을 바로 떨어 뜨릴 수 있다고 하여도) 겨우내 보급을 받으며 요동에 계속 주둔하기는 힘들었기에, 곧 겨울이 다가오면 힘들여 함락한 성들을 모두 뱉어내고 도로 본토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요동성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 하고 3개월이라는 금쪽같은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 버린 당시로서는 답이 없는 상황.
이에 수양제는 지지부진한 전황을 타개할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졌다. 전군에서 정예병을 추려 '''30만 별동대'''를 조직하여 우중문, 우문술의 지휘 하에 '''평양성으로 직행'''시키는 한편, 황해를 건너는 내호아의 '''수군과 합류'''하여 한 방에 평양성을 취하려는 대담한 작전이었다.

3. 상세



3.1. 살수대첩의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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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병사
성공한다면 위협적이었겠지만 '''보급'''에 문제가 많은 작전이었다. 당시 수군은 30만 별동대에게 100일 분의 식량과 피복, 병장기, 야전텐트 등을 분배하여 운반하게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병사 1인당 군장의 무게가 무려 석 섬(약 '''50 kg''')이나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 무식한 짐을 감당할 엄두를 내지 못한 수나라 병사들이 보급품을 길가에 '''버렸다.''' 특히 수나라 장수들은 군수품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어버린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수십만 병사들이 각자 작정하고 몰래 구덩이를 파 묻는 행위를 일일히 막을 방법은 없었다. 결국 별동대는 행군 중에 물자부족을 겪었다.
수군이 압록강 근처에 다다랐을 때 고구려에서는 을지문덕항복을 구실로 홀로 적군의 '''본진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별동대가 피로와 굶주림에 지쳐 있어 작전을 실행하는데 문제가 없음을 직접 확인하였다. 일찍이 수양제는 우중문우문술에게 을지문덕을 만나거든 반드시 잡아야한다고 몰래 명하였으나, 참군(參軍) 유사룡은 사신을 함부로 해치면 안 된다며 을지문덕을 그냥 보내주자고 주장하였다. 장수들은 마음을 바꾸어 을지문덕을 다시 불러오려 하였으나 을지문덕은 그대로 압록강을 건너가버렸다.
우문술은 군량부족을 이유로 퇴각을 건의하였지만 우중문은 아니었다. 수양제가 이미 지휘계통을 우중문을 첫번째로 지휘계통을 정리하였기 때문에 그의 의견대로 수군은 평양을 향해 진격하였고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의 피로를 가중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교전을 강요하면서도 수나라군대가 발을 빼지 못하도록 짐짓 패배하는 척 더욱 깊숙히 끌어들였다. 어느 날은 우문술의 군대를 상대로 하루에 7전 7패를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고구려의 페이스대로였다. 결국 을지문덕은 수나라군대를 평양성 앞 '''30리'''까지 끌고 오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평양성은 견고하여 지친 상태에서 함락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바다를 통해 상륙하여 호응하기로 했던 내호아고건무에게 철저하게 박살난 상태에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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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策究天文(신 책 구 천 문 귀신 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천문)를 깨달았고

妙算窮地理(묘 산 궁 지 리 신묘한 셈은 땅의 형편(지리)을 다하였도다

戰勝功旣高(전 승 공 기 고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지 족 원 운 지 원컨대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입조(入朝), 즉 항복을 약속하는 듯한 거짓항복 문서를 보낸다. 이때 을지문덕은 한 편의 를 같이 보내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이다. 언뜻 보면 띄워주는 내용 같지만, 당시 수군의 절망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철저한 조롱'''이었다.
우중문은 답신을 보냈으며, 을지문덕은 이에 대해 다시 답신을 보내기를 '수나라가 군대를 물리면, 자신이 왕과 함께 항복하겠다,'는 확인서한을 보냈다. 물론 그만한 지위에 올라간 우중문이 정말로 바보천치가 아닌 이상 이게 거짓말이라는 건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나 저러나 퇴각 밖에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체면치레, 즉 수양제에게 변명할 거리 하나를 간신히 챙겼다고 생각하고 우중문은 그제야 퇴각을 결심했다. 물론 이것은 수군을 조금이라도 더 철저하게 파멸시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준비시간을 벌려는 을지문덕의 계획일 뿐이었다. 우중문/우문술 30만 별동대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
수군의 별동대는 힘겨운 후퇴를 시작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평양성 코앞까지 유인하기 위해 거짓후퇴만 거듭했던 그때까지와는 반대로 '''본격적인 공세'''에 들어간다. 사면에서 공격하여 수나라 군대를 쳐부수기를 반복하였으며 수군은 방진을 치며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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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공격 속에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수군 별동대는 지금의 청천강 일대인 살수에 간신히 도착했다. 수군이 도하를 시작하여 총병력의 절반 쯤이 강을 건너는 순간, 고구려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 병력을 집중시켜 '''최후의 총공격'''을 개시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전에 이르기까지 군대의 방어력이 제일 취약한 순간은 도하 중일 때이다.[5]
가장 먼저 희생된 것은 수나라 후군이었다. 고구려군의 맹공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고 지휘관인 우둔위 장군 신세웅마저 전사할 정도로 철저히 박살났다. 그리고 후미의 이런 참담한 붕괴는 30만 대군 전체에 극도의 공포를 전염시켰고, 이 공포심에 사로잡힌 수군 장병들은 서로 도주하면서 연쇄적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군대는 최소한의 편제와 통제가 무너지면, 30만 대군이 아니라 300만 대군이라 할지라도 그냥 걸어다니는 인간세트에 불과하다.
별동대의 지휘관 중 설세웅은 백석산에서 빗발치는 화살비와 포위망을 돌파하며 고구려군 일부를 격퇴하는 무용을 떨치기도 했고, 또 다른 지휘관 왕인공도 고구려군 일부를 물리치는 수훈을 세웠지만, 전투 전체의 규모와 전황에 비하면 두 사람의 분전은 거의 의미가 없었다. '''30만 5천 명''' 중 살수(청천강)에서 빠져나와 압록강에 도착한 장병은 겨우 '''2700명'''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그 2700명도 하루 만에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450리를 도망쳐 왔다고 한다. 450리면 약 177km 정도에 해당하니 수나라의 군대는 대형을 유지하기는커녕 가지고 있는 무기, 갑옷을 전부 버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라는 생각으로 미친듯이 도망쳤을 것이다.

3.2. 살수대첩의 분석


교과서위인전에서는 살수대첩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넘어가느라 수나라군을 무력하고 가볍게 묘사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과도하게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는 것 외에는 실제 수나라 측에서는 모두 큰 오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 사람들 모두 중국 대륙 통일과정 중 벌어진 수많은 전투들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역전의 지휘관들이었다.
특히 113만이라는 사상 초유의 대군 앞에서 고구려가 요하 일대에 주력을 집중시킬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정예병 30만으로 수도 평양성을 번개처럼 직공하고 상대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수군이 이들을 지원한다는 것은 압도적 병력수의 이점을 활용한 꽤 훌륭한 구상이었다. 리스크를 극복하지 못하여 최악의 결과가 나왔지만 훗날 불세출의 명장이세민과 그 휘하 장수들이 요하 인근을 벗어나지도 못하였고, 이정과 함께 이 전략으로 회귀한 것을 생각한다면 구상 자체가 틀렸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수나라 군대의 '''기동''' 또한 매우 훌륭했다. 이 대전략을 위해, 별동대 30만 5천 명은 가려 뽑은 정예병답게 요하 서쪽에서, 요동 천산산맥, 압록강, 청천강 등이 놓여진 수백 km를 1개월 만에 주파하여 평양에 도달했다.[6] 그러나 이렇게 괴력을 발휘한 우중문의 별동대였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지친 상태에서 험준한 평양성을 함락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내호아의 수군(水軍) 역시 미리 상륙하였으나 박살난 상태다보니 호응하지 못한 것이다.
한편 우중문우문술에게 또 다른 기회도 있었다. 을지문덕이 거짓항복으로 정탐하러 왔을 때, 예의고 나발이고 팽개치고 그를 잡았더라면 수군의 입장에서는 유리한 양상이 되었겠지만 참군 유사룡이 만류하는 바람에 우중문과 우문술은 그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다. 다만, 이건 을지문덕이 독단으로 결정한 것도 아니고 파견나간 상황에서 아무 대비도 하지 않고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7]
요약하자면 수나라 군대는 의외로, 후대에 비해서도 고구려군의 맹점에 대해 의외로 높은 이해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을지문덕을 비롯한 고구려군 수뇌부는 수륙 양면으로 뻗쳐오는 수나라군의 양 팔을 최대한 끌어들여 절묘한 시간차를 두고 잘라냈으며, 살수대첩은 이를 갈무리하여 섬멸하는 통쾌한 일격이라 할 수 있다.

3.2.1. 살수대첩에 대한 오해: 수공?


고구려군이 '''수공'''을 펼쳤다는 주장도 있으나 근거가 약하며 실제로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수공설은 삼국사기, 수서, 당서 등 1차사료에는 등장하지 않고, 근대 이후의 기록에서나 나타난다.
고대의 토목기술로는 전쟁 중의 짧은 기간 내에 엄청난 격류를 만들어낼 ''''''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령 만들었다고 해도 타이밍 맞게 내려보내기도 힘들다. 현대의 기술력으로도 댐공사는 외딴 산골에 시멘트나 콘크리트 등 물량과 공사인원, 그리고 건설장비들을 대량으로 투입해야 하는 난공사로 악명이 높다. 훗날 고려사에서 여요전쟁 때 흥화진 전투[8]에서는 강감찬이 수공을 썼다는 이야기는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도 얼어 붙은 강물 위에 잠시 동안 물을 흘려 거란군의 대열을 흐트러 뜨리고 진행 속도를 늦추려는 정도로 평가되지, 무장한 인마(人馬)들을 무더기로 멀리 쓸고 갈 정도의 대규모 수공은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귀주 대첩 문서 참고.
이후 고구려군이 살수에서 전무후무한 대승을 거둘 수 있던 것은 '''보급''' 문제로 곤죽이 되고, 진격보다 어렵다는 '''후퇴''' 상황이며, 손자병법에서도 강조할 정도로 가장 위험한 상황인 '''도하''' 중 대규모 결전이 벌어지는 등 수군(隋軍)으로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들이 모두 겹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요소들은 거의 모두 을지문덕고건무에 의해 통제된 것이었다. 역사상 모든 명장들이 그러했듯, '''이미 이겨놓고 하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3.3. 살수대첩의 결과


'''수나라 30만 별동대가 2700여 명만 남고 모조리 증발하였다.''' 그리고 남은 수군 총병력은 즉시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으로 2차 고수전쟁은 종결되었다.
잔존병력들이 간신히 본진에 도착하자 수 양제는 대노(大怒)하여 우중문, 우문술을 쇠사슬로 포박하여 장안까지 끌고 갔고, 장안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을 서인(庶人)으로 전락시켜 감옥에 가두었다.[9] 특히 '''유사룡'''은 을지문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패전의 원흉으로 규정되어 참수되고 효수되었다. 사실 패전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내호아는 정작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고, 우중문/우문술도 죽음은 면했으니 괜히 애꿎은 유사룡만 패전의 희생양이 된 셈. 한편 별동대의 지휘관 중 하나였던 설세웅은, 추격해오는 고구려군을 맞아 종횡무진 활약한 공으로 패전의 책임을 묻지 않고 오히려 포상을 받고 승진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초라한 세리머니 하나라도 해야 조금이나마 얼굴이 설 정도로 참혹한 패전이었다는 얘기기도 하다.
수 양제는 이후 3차, 4차 침공을 계속 이어갔으나 끝내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렇게 무리한 원정 탓에 그 끝을 모르던 수나라의 국력은 어느새 고갈되었고, 온 나라가 도탄에 빠지며 대규모 반란이 거듭 일어나 수 양제는 교살 당하고 수나라는 '''멸망'''하고야 만다. 이로 인해 살수대첩 한 번으로 대제국을 말아먹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고구려-수 전쟁 항목 참조.

4. 살수대첩의 여파와 의의


살수대첩은 한국사의 모든 전쟁을 통틀어 '''단일''' 전투로 적에게 안겨 준 피해로는 단연 최고이고, 앞으로도 깨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손실률[10]은 그야말로 경이적인 수준이다. 30만 5000명 중 2700명만 살아 돌아 왔으니 '''99.11%가 손실'''된 것이며, 이는 칸나이 전투, 토이토부르크 전투 등과 함께 '''세계전쟁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철저한 궤멸'''이다. 참고로 임진왜란 때 왜군의 총병력은 19만 7700여 명, 정유재란 때는 14만 1400여 명이었다. 이순신, 권율, 곽재우명장들의 6년 간 전과를 다 합쳐도 살수대첩 단 한 번에 크게 못 미치는 수치인 셈이다. 물론 두 전쟁의 배경과 전투의 성격이 너무도 다르니 이런 식으로 단순비교할 사안은 아니지만, 숫자만 놓고 보면 살수대첩의 규모가 어느 정도 스케일이었는지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중국에서 한반도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는 성향도 자리잡게 되었다.

압록강을 건너 동쪽으로 옴이여,

현도(玄菟)ㆍ낙랑(樂浪) 향하도다.

신세웅(辛世雄)[11]

을 살수(薩水)에 조상함이여,

기자(箕子)를 평양에서 뵈옵도다.

-

기순(祁順)[12]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 중에서.

한나라 이후로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대제국 수나라 앞에서 고구려는 (제 아무리 전성기라 할지라도) 한 줌에 불과한 소국인데 끝내 그 대제국을 멸망에 이르게까지 했으니, 당태종당고종의 고구려 멸망에 대한 무서울 정도의 집착, 그리고 훗날 귀주 대첩으로 얻어낸 고려--의 100여 년 간 국제정치적 균형시기를 거쳐, 더욱 훗날의 명나라 초기[13], 명나라 중후기[14], 심지어 20세기[15], 21세기[16]에 이르기까지 등 중국은 한반도의 군사력에 대한 과대평가 및 예민한 반응[17]을 오래도록 이어오고 있다.
살수대첩은 당시에도, 그 오랜 후에도 중국인들에게 강렬한 기억이자,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낸 트라우마흑역사 취급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살수대첩으로부터 20여 년 후 당태종고구려를 침공하기 전에도 고구려의 고구려-수 전쟁 전승탑인 경관(京觀)을 철거하라고 주구장창 요구하여 끝내 이를 관철시키기도 했다.[18] 그 후 요동으로의 침공길에서는 요택에 무더기로 버려진 수나라 장병들의 유골을 추려 모아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당시 당나라 장병들이 다함께 크게 울었다는 기록도 있다. 앞선 수양제와 마찬가지로 당태종 또한 겨울이 오기 전에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하는 매우 촉박한 일정이었음에도, 굳이 이런 추모행사를 가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중국은 이 굴욕을 1950년에 이르러서야 같은 장소에서 청천강 전투로 갚았다.
한국사에 있어서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던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안주에 있었던 칠불사(七佛寺)라는 사찰에 대해[19] 수나라 병사가 청천강 강가에 늘어서서 강을 건너려고 하였으나 배가 없었는데, 문득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일곱 명의 승려가 옷을 걷어올리고 건너는 것을 보고 물이 얕은 줄 알고 군사를 지휘하여 다투어 건너다 물에 빠져 죽은 시체가 내에 가득하여 흐르지 않을 정도였다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 이후에 이곳에 절을 짓고 칠불사라 하였으며 그 일곱 명의 승려를 기려서 일곱 개의 돌을 세워 놓았다고. 또한 일제 시대의 문인 현진건1935년 쓴 단군성적순례라는 기행문에 보면 안주 현지에 수나라 군사들의 수몰(水歿)과 관련된 오도탄(誤渡灘)[20]이니 골적도(骨積島)[21]니 하는 지명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평안도_살수대첩이 있었던 곳에 자리잡은 안주읍성(펜저의 국방여행) 또한 조선 시대에 안주에 을지문덕의 석상이 세워지기도 했는데 현진건이 단군성적순례에서 언급하기도 했으며, 아직도 북한에 남아있기는 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들어진 시기는 단군성적순례에 따르면 '숭정기원(崇禎紀元) 220년 을미'로 조선 헌종 13년(1847년)으로 보이며, 원래는 을지문덕 사당에 모셔져 있었는데 사당이 없어지고 땅에 파묻혔다가 다시 파내 백상루 밑에 갖다 둔 것이라고 한다. #
살수대첩으로부터 800년 가까이 지난 후, 여말선초시대의 대신인 조준이 수많은 중원 젊은이가 고구려에서 물고기밥으로 사라졌다며 살수대첩을 얘기하는 칠언절구 를 남기기도 한다. 명 사신과의 연회 자리에서 즉석에서 이 시를 지어 양국의 자존심 싸움에서 이겼다는 설화도 있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명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며, 정도전, 정몽주에 비견될 정도로 똑똑했던 조준이 굳이 그런 어리석은 어그로를 끌 리도 없었다. 1391년 경, 조준이 명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薩水湯湯漾碧虛(살 수 상 상 양 벽 허 살수 강물 파도치며 허공에 출렁이니,

隋兵百萬化爲魚(수 병 백 만 화 위 어 수나라 백만 군사 고기밥이 되었것다.

至今留得漁樵話(지 금 류 득 어 초 화 지금까지 어초들의 얘깃거리로 남아,

不滿征夫一笑餘(불 만 정 부 일 소 여 지나는 나그네의 한바탕 웃음거리 되고도 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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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백상루(百祥樓)라는 정자에 이 시가 걸려 있었고, 수십 년 후 태종 시기 조선에 파견된 명 사신 축맹헌이 이 시를 보고 답시를 남겼다. 당나라가 끝내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들어 수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켰으면 성공했을 것[22]이라는 내용이다. 청천강을 내려다보는 정자에 이런 시가 걸려 있으니 축맹헌이 굴욕으로 느꼈던 모양이다.
이래저래 참으로 유서깊으면서도 한편으로 무척 오묘한 한중관계의 중요한 역사적 배경 중 하나가 살수대첩이라고 볼 수 있다.

5. 북한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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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관점도 남한과 대체로 일치하지만, 살수대첩이 '''요동 일대'''에서 일어났다고 본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는 북한판 국사 교과서인 조선력사의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적들은 겨우 대오를 수습해가지고 '''살수(소자하)를 건너''' 봉황성 30리 지점까지 다달았다…수나라 침략군이 살수를 건느기 시작하자 매복하고있던 고구려군은 일제히 떨쳐나서 전후좌우에서 적들을 무리로 족치는 통쾌한 섬멸전을 벌리였다. 그리하여 이 전투에서 고구려 군대는 침략군을 거의다 섬멸해버렸다. 살수 전투에서 살아돌아간 적들은 겨우 2700명뿐이었다. 이것을 우리 나라 력사에서는 《살수대첩(薩水大捷)》이라고 자자손손 긍지 높이 불렀으며 그것을 고구려의 강대성과 민족적 기개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조선력사

때문에 이와 관련해서 조선 시대 이래의 칠불사 역시 "봉건사가들이 청천강에 날조된 역사 이야기를 갖다 붙이면서 칠불사 전설도 꾸며 놓은 것"이라고 격하했고, 이름도 김일성이 칠렬사(七烈士)로 고치게 했다고 한다. #

6. 관련 문서



7. 창작물


이 당시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이 있다.
[1] 대한민국 학계는 현 북한청천강을, 북한은 현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자하를 살수로 주장하고 있다.[2] 약 2700명 생환[3] 남한은 청천강, 북한은 중국 소자하(현 라오허 강의 지류)로 본다. 다만 살수는 현재의 청천강이 아닌 다른 강이라는 설도 있다.[4] 현재의 베이징시. 삼국지의 인물 유비의 출생지이던 그 탁군이 맞다.[5] 무엇보다 도하 중에 뒤를 치면 답이 없다. 앞은 막혀 있고, 도하 중인 군대는 돌아와서 치기에 매우 부적합한 상황이요, 도하하지 않은 군대는 강을 건너려고 옹기종기 모여서 앞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6] 언급하였듯이 이세민은 아예 요하에서 벗어나질 못하여 압록강에 접근을 못했다.[7]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임기환 교수, 역사저널 그날 95화 - '살수대첩- 수나라 100만 대군 고구려를 침공하다' 편에서.[8] 귀주 대첩이라고 가끔 오인되는 전투이다.[9] 다만 우문술은 3차 고구려-수 전쟁 때 복권되어 참전한다.[10] '사상자'의 개념처럼 부상자를 포함하지 않은, 말 그대로 죽거나 실종되어 영영 돌아오지 않은 병력의 비율을 일컫는다.[11] 살수대첩 당시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으로 그가 지휘하는 수나라 제8군이 후방 엄호를 맡아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전멸했다.[12] 명의 호부낭중으로 1460년 진사에 합격했으며, 성종 7년(1476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13] 명 태조 주원장은 중국사상 역대급의 국력과 군사력을 가졌음에도, 태조정도전이 언제 요동에 쳐들어올 것이라는 경계심에 많은 대비와 온갖 압박을 했다. 해당 항목들 참조.[14]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명에 원병을 청하자, 처음에는 대신들이 하나같이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토록 강력했던 고구려의 후예가 어째서 왜구 하나 상대를 못 해 구원까지 청하냐.'는 식으로 면박이나 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 이것들이 사실은 요동 수복하려고 일본군 끌어들여서 합동으로 쳐들어오는 거 아냐?"라는 의심까지 샀다고.[15] 사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원병(중국 인민지원군) 요청에는 중국 공산당 내에서 반대의견이 매우 많았다. 그럴만한 것이, 20년 넘는 세월 동안 쉬지 않고 전쟁을 해 왔고, 2년 전 간신히 그것을 끝내고 전후복구가 시작되려는 판에 또 전쟁을 치르자니 부담이 너무 컸기에, 그냥 포기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순망치한의 고사를 들고 나온 저우언라이 등의 강력한 주장에 마오쩌둥이 동의하여 파병이 결정된 것이다. 그 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사상자는 (정확한 수치가 공개된 적은 없지만) 한국군의 사상자와 북한군의 사상자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최대 70~80만 명 선으로 추정한다. 이토록 큰 희생을 치르면서 굳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은 저우언라이가 주장한 순망치한, 즉 한미연합군의 한반도 통일시 요동 뿐 아니라 수도 베이징까지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중대한 결정의 근거는 1차적으로는 당시 - 물론 2020년 현재도 - 세계최강 미군이지만, 한국군의 잠재력에 대한 경계심 또한 포함된 것이다.[16] 2020년 현재에도 중국 인민해방군은 한국군을 상대로 한 북부전구 등 부대배치 및 전력증강에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러시아군, 미군 다음 순위의 가상적국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 베이징까지 오기엔 까마득하게 먼 러시아군/인도군/베트남군, 그리고 해상전에만 그칠 자위대와 달리, (통일)한국군은 육로로 약 1천 km를 주파하면 수도 베이징을 직격할 수 있기에 중국의 입장에서는 가장 큰 위협이 된다. 그래서 중국은 (내심) 한반도의 통일을 가장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기도 하다.[17] 한국군이 신무기, 특히 현무 순항미사일 등 장거리 타격수단을 갖춰 갈 때마다 중국은 여지없이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전력배치를 공개하는 등 맞대응을 보여주곤 한다.[18] 그리고 이것을 굴욕으로 받아들인 연개소문의 쿠데타의 명분이 되기도 한다.[19]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20] 칠불사 전승과 관련해 수나라 군사들이 강을 건넜다고 하는 지점.[21] 당시 몰살을 당한 수나라 군사들의 뼈가 쌓여서 이루어졌다는 섬. 청천강하중도이기도 하다. 현진건은 이곳을 당시 이역만리에서 몰살을 당한 수나라 군사들을 딱하게 여긴 당시 고구려인들이 그 시신을 수습해 무덤을 만들어주었던 것으로 해석했다.[22] 물론 수 양제는 정신 못 차리고 2번이나 '''더''' 군사를 일으켰으며, '''다 말아먹고 수나라까지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