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회열
1. 개요
해태 타이거즈에서 활약했던 前 야구선수.
2. 아마추어 시절
광주상고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서 한서고로 전학을 갔다. 한서고를 졸업한 후에도 프로에 지명을 받지 못했고, 불러주는 대학도 없었다.
3. 선수 시절
결국 1990년에 태평양 돌핀스에서 5백만원을 받고 연습생으로 입단을 했으나 그 해 말에 방출된 뒤 고향인 해태 타이거즈에 간신히 입단했다. 포지션은 내야 전 포지션을 뛰는 유틸리티 플레이어(야구).
매년 저조한 성적을 거뒀고 기대치도 높지 않아서 매년 마무리 캠프나 스프링 캠프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에게도 큰 기회가 찾아왔으니...''' 이종범이 1995년부터 방위병으로 소집되면서 원정경기를 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95년에 인생 시즌을 맞이했다. 수비에서는 원정경기에서는 유격수, 홈경기에서는 내야 유틸리티맨으로 활약했고, 공격에서도 해태 주전 선수 중 유이하게 규정타석을 채우며 356타수 94안타, 타율 0.264라는 당대 내야수치고는 좋은 성적을 내 이종범의 빈 자리를 제대로 메꿨다. 이 해 해태는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홍현우[2] 와 원정경기를 뛸 수 없는 이종범을 빼면 믿을 만한 타자가 전무했던 시기라 양회열의 활약은 그만큼 반가웠다.[3] 활약을 인정받아 KBO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에서도 비록 낙선하긴 했지만 김민호에 이은 2위 득표율을 기록했고, 연봉도 무려 3배가 오른 2,300만 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김종국과 장성호가 입단하고, 이종범이 전역하면서 그의 입지는 극도로 좁아졌고, BABIP의 신이 그를 외면했는지 공격력까지 다시 떨어지면서 1997 시즌이 끝난 뒤 해태에서 방출되었다.
4. 여담
- 이름이 당시 같은 팀에서 뛰는 정회열과 똑같아서 나름 기억하는 팬들도 있다고 한다.
[1] 광주상고 야구부 출신이었으나 주전자리를 잡지 못해서 한서고로 전학을 갔다.[2] 무려 신인왕에 .288 22홈런 81타점을 기록한 이동수를 제치고 수상한 것이었다.[3] 95시즌의 해태를 보면 ERA 1위, 타율 7위(8개구단 중)로 투타의 불균형이 극과 극을 달리던 시기였다. 이종범의 홈경기 출전 불가 외에도 그 전해만 해도 비록 규정타석에는 못미쳤으나 3할2푼을 치던 이순철이 갑작스런 노쇠화로 간신히 2할을 치는 타자가 되었으며, , 이건열, 정회열 등도 기대에 못미치는 활약을 했다. 이종범과 홍현우 그리고 그나마 1인분은 하는 양회열 외에는 OME급의 타선이었던 것. 야만없이지만 해태의 타력이 평균수준만 되었어도 95년도의 챔피언은 누가 될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