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열
1. 소개
대한민국의 야구인.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 재직 중이며, 해태 타이거즈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KIA 타이거즈 등등 프로 팀에서의 코치를 역임했다.
2. 선수 시절
본디 포지션은 포수로, 동국대 재학 시절 국가대표에도 선발되고, 팀의 4번타자로 활약하는 등 공수주를 두루 갖췄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프로입단 이후 1루에는 김성한이 있어 주전에서 밀렸다.[2] 본 포지션인 포수로의 전환도 해봤었지만 입단 동기생인 장채근에게 또 밀려 포수로도 많은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고, 그 대신 대학 시절 톱타자로 뛸 정도의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살려 수비전문선수로 유격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소화한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선수생활 내내 끼어보지 않은 글러브가 없다고(…),
즉 '''크보 역사상 거의 최초의 유틸리티맨'''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당시 선수들의 말에 따르면 말이 좋아 올라운드 플레이어지 사실상 떠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김성한이 없었다면 해태왕조의 1루수는 이건열이 되었을 것이며 더 큰 선수가 되었을 것이라 한다. 1991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팀이 빙그레 한용덕에게 막혀 1점 차로 뒤지고 있을 때, 동점 역전 연타석 홈런을 때리기도 했다.
한편, 89년(좌타자 조재환과 병행)과 91년에 주전 우익수를 맡았지만 다음 해 과 포지션을 맞바꿔 좌익수로 옮겼다가 94년부터 1루수로 옮겼고 해태왕조의 막바지 시절 팀의 4번타자로 활약하기도 했었지만, LG 김태원의 투구에 얼굴을 맞고 부상당했다. 시간이 지나고 김성한과 김상훈이 은퇴하면서부터는 주전 1루수로 나섰지만, 그해 2차 2라운드로 영입한 신인 장성호가 있었고 결국 세대교체 차원에서 1년만에 주전자리를 뺏기고 쓸쓸하게 은퇴한다.[3]
김종모와 함께 마산아재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려고 헬멧 쓰고 외야 수비를 본 적이 있다.[4]
고교-대학 직계 선배 김성한처럼 동국대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관련 포스팅
3. 지도자 시절
3.1. 타격코치 시절
은퇴 후 일본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고, 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SK 와이번스 창단 당시 1군 타격코치로 한 시즌을 보냈다. 이후 2001년에는 친정팀인 타이거즈의 타격코치로 영입되었다.
하지만 이 시절 지도자로써의 평가는 상당히 나빴다. 2003년까지 KIA 타격코치를 맡다가, 시즌 후 LG 트윈스의 새 감독으로 부임한 해태 선배 이순철을 따라 LG 1군 타격코치로 옮겼지만 당시 한창 비밀번호를 찍고 있던 당시 감독이던 이순철과 함께 무능하다고 세트로 까였고, 결국 2005 시즌 후 LG에서 해임. 이후 2006년 시즌을 앞두고 서정환 감독의 부름을 받아 다시 KIA 타이거즈의 타격코치로 영입되었지만 KIA 타선을 죄다 말아먹었다고 욕만 먹었고,[5] 결국 팀이 최하위로 쳐진 2007년 시즌 중 2군 타격코치로 좌천당한 뒤 시즌 후 KIA와 재계약에 실패했다. 2008년 한 해 동안 잠시 화순고 감독을 역임했다가 2009년 2군 타격코치로 친정팀 KIA 타이거즈에 복귀했다. 2010년 시즌 도중 팀 타격 부진으로 코칭스태프 개편을 통해 1군 타격코치로 승격되었다.
타격코치 시절 평가가 좋지 않았던 데다가 타이거즈에서만 세 번이나 잘리고도 복귀에 성공했는데, 조범현 감독의 광저우 아시안게임 대표팀 전지훈련에 가서 배팅볼 투수까지 한 걸 보면 처세술과 생존비법이 상당한 인물인 듯 싶다. 허나 조 감독에게 호출당해 억지로 갔다는 지피셜이 있긴 하다. 어찌됐건 인망 자체는 코칭스태프들 사이에서는 나쁘지 않았던 모양.
여담이지만 이대수의 은인. 고교졸업 후인 2000년 1월 쌍방울 레이더스에 연습생으로 입단했으나 당시 이대수는 쌍방울 신고선수로 등록되기 전의 신분에서 쌍방울이 해체되었고, 쌍방울 선수단을 모아 SK로 재창단한 어수선한 상황이었는데 신고선수 등록 전에 구단이 해체되어 버린 상황이라 한순간에 무적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이대수는 고향 군산으로 내려간 뒤 현역 입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6] 이대수의 고교 선배이기도 한 이건열 코치가 "얘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하면서 연습생 테스트에 추천했고, 덕분에 SK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고 한다.
타격코치 시절에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낸 게 거의 안 보여서 팬들에게는 이강철, 백인호와 함께 역적 3인방 취급을 받았다. 술에 취해 이종범에게 은퇴 권유를 한 것을 시작으로, 2011년 후반기 타격 부진 때문에 욕을 먹었다. 특히 SK와 준플레이오프에서 21이닝 무득점에 그치면서 그야말로 최악의 분위기. 조범현 감독이 사퇴하면서 모두 짤리길 기대했으나, 선동열 감독 부임 후에도 1군 타격코치 자리를 유지하면서 끝까지 살아남아 그 처세술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2011년 KIA 타격을 살리는 데 큰 공헌을 한 히라노 켄 타격 코치와 싸워서 쫓아낸 일이 알려지면서 2012년 장타력 대폭락의 주범으로 지목되며 까였다. 일설에 따르면 선수들이 일본인 코치보다는 한국인 코치를 따랐으며, 정식 보직은 2군이었지만, 감독의 지시로 1군에 동행하는 이건열 코치에 대한 히라노 코치의 항의가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기아 타선은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2012 시즌 팀 홈런 54개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개인홈런 1, 2위인 '''박병호(31개)와 최정(26개)를 합친 것보다 적었고''', 당연히 까였다.
2012년 6월부터 수석코치 이순철의 부상으로 기아 타선을 사실상 혼자 전담하다시피하면서 더더욱 폭풍 어그로를 끌었다. 특히 그중 압권은 SK와의 2연전에서 2연속 영봉패. 결국 6월 13일자로 백인호 작전코치와 함께 2군으로 내려갔다. 1군 타격코치는 이순철 수석코치가 겸한다고 한다. 다행히 퓨처스리그 남부리그 2위를 하던 중이었던 KIA 2군은 순위변동 없이 시즌을 마쳤다.
흔히 이건열과 이강철을 무능하다는 이유로 동시에 쳐 냈다고 오해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실제로는 시즌 종료 후 코치진들과 같이 모두 제주도에서 워크샵을 가졌고 얼마 못 가서 동국대 감독으로 가게 된 것인지라, 당시 선동열 감독과 사이가 크게 틀어지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 넥센의 수석코치로 자리를 옮긴 이강철 투수코치 역시 이런 식으로 선 감독과의 관계가 나빠졌다.
공석이 된 2군 타격코치는 박철우 2군 감독이 맡게 되었으며, 동시에 한화에서 해임된 한대화가 2군 감독직으로 부임했다.
3.2. 화순고 감독 시절
2008년 한 해만 화순고 감독으로 일했다. 특별한 건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특별히 뭔가 알려지기에는 고교야구 감독으로서 2년이라는 시간은 신입생 한 명 졸업까지 키워내지 못할 기간이라 너무 짧기도 하고. 하지만 '''이 때 당시의 업적은 어떤 고등학생을 투수로 전향시킨 것.'''
3.3. 동국대 감독 시절
2012 시즌이 끝나고, 모교인 동국대학교에서 야구부 감독으로의 오퍼가 들어오자 KIA 코치직에서 물러나 자리를 옮겼다.[7]
동국대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로는 평가가 좋아졌다. 전임 윤재호 감독의 금품수수로 인해 어수선해진 팀 분위기를 다잡고, 2013년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에서 우승을 하며 좋은 출발을 보였다. 실제로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무던한 편이라 선수들이 잘 따른다고. 한 야구부원의 말에 따르면 이런 타입의 인물이 화를 내면 더 무섭기 때문에 알아서 잘 하고 있다 한다. 춘계리그에서 홍익대를 상대로 우승한 데 이어 제68회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동의대를 꺾고 우승하며 동국대 야구부는 2013년부터 대학 최강자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향후 타 대학 선수들의 장래를 위해, 그리고 주전들이 졸업하는 내년을 대비해 2013년에 더이상의 우승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10월에 열린 전국체전 야구 일반부 결승에서 단국대를 상대로 연장 끝내기 안타로 우승하며 '''한 해 동안 3관왕'''을 하는 엄청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2014년 들어서도 주력 선수들이 졸업하고 김선현(김선빈의 동생)이 동계훈련 도중 무릎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해 휴학하고,[8] 개인적으로도 8월 중순 부친상을 당한 가운데에서도 춘계리그에서 건국대를, 제69회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인하대를 상대로 결승에서 승리하며 연이어 제패했다. 기세를 몰아 제7회 KBO총재기 전국대학야구대회에서 경성대를 상대로 승리하며 '''2년 연속 전국대회 3관왕'''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전국체전 야구부 결승에 다시 진출, 인하대를 꺾고 '''4관왕'''을 달성하며 작년 돌풍을 뛰어 넘었다. 대학야구 무대에서는 이제 완전히 지도력을 인정받은 상태다.
한편으로 2013년부터 팀을 엄청난 꼬락서니로 추락시킨 추태를 보여준 KIA 타이거즈 선동열 감독과 대비를 이루며 2014년 시즌 후 선 감독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후임 감독 후보로도 간간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선동열 감독이 재계약하고, 선동열 감독이 사퇴한 후에는 김기태 감독이 선임되며 없던 일이 되었다. 사실 KIA 팬 내부에서 이건열에 대한 여론은 팀에 있었을 시절의 무능함과 좋지 못한 뒷소문 전과 때문에 여전히 좋은 편은 아니다. 그냥 '서로 신경쓰지 말고 동국대에서 오래오래 명장으로 지내시면서 친정팀에 좋은 대학 선수들이나 공급해주시길(…)'는 정도.
한편 동국대를 강팀으로 이끈 공로가 좋게 평가되면서 2015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의 야구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2016년 5월 제71회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중앙대에게 승리를 거두며 팀을 2년만에 다시 정상에 올려놓았다.[9] (박승수는 준수한 좌완투수였으나 혹사의 여파인지 2019년 드래프트에 미지명되었다.)
2016년 이후에는 해태 시절 팀메이트였던 장채근 감독이 이끄는 홍익대가 승승장구 하는 반면 동국대는 예년의 모습에는 못미치는 상황.
2014년 동국대학교 야구부 선수 중 2할 초반대의 타율을 기록하던 타자가 있었는데 이듬해 신인 드래프트에서 예상대로 9라운드까지 지명이 되지 못했다. 프로도 아닌 대학 야구에서 2할을 치는 타자를 데려갈 팀은 없으므로. 그 때 이건열 감독이 자신의 고향팀인 KIA 타이거즈에게 '''연습하는 걸 보니 재능이 있다. 아직 공격에 눈을 못 뜬 것 뿐이지 공을 못 치는 건 아니다. 수비는 매우 잘한다'''는 말과 함께 이 선수를 추천했다. 그리하여 이 선수는 10라운드로 KIA 타이거즈에 입단하게 되는데...[10]
'''바로 이 선수가 2016년 KIA 타이거즈의 주전 중견수이자 1번 타자 김호령이다.''' 관련 기사 참고.
2018년부터는 동국대에 교양 야구강좌가 개설되면서 해당 과목의 담당 지도 또한 하고 있다.
이처럼 선수시절에는 그저그런 선수였고 프로 코치로서도 평판이 좋지 못했지만, 아마야구 감독으로는 2년 연속 3관왕, 4관왕이라는 실적을 남기고 좋은 선수들을 꾸준히 배출해내는 등 명지도자로서 야구인생 제2막을 성공적으로 장식하고 있다.
4. 연도별 성적
5. 관련 문서
[1] 판관공파 31세 건(建) 항렬. 아버지 이준행(李準行)은 30세 행(行) 항렬.[2] 이건열이 회고하기를 1루 연습하러 미트를 들고 나가면 김성한이 '아따 니는 저기(외야)로 가라잉~'하며 내쫓았다고...주전들이 나태해졌다 싶으면 코끼리 김응룡 감독은 김성한을 1루수비에서 빼고 이건열을 투입시키는 자극요법을 사용하기도 했다.[3] 사실 그것 말고도 팀 선배인 이순철, 고교후배 조계현, 또다른 팀 동료인 송유석 정회열 등과 같이 전지훈련지에서 항명을 일으킨 것도 한 몫 했다.[4] 2018년 동국대학교 교양수업인 '실전야구 초급'에서 밝힌 바로는 그 전 이닝에 수비하다가 다리에 벽돌을 맞아서 머리는 보호하자는 마음으로 쓰고 나갔다고 한다.[5] 당시 윤석민, 한기주, 김진우, 신용운이 버티던 투수진에 비해 팀 타선의 경우 '김기아' 라고 불릴 정도로 죄다 침체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종범은 노쇠화 기미를 보였고, 이재주와 송산이 4번타자로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이 당시 KIA 타선에서 그나마 잘 쳐주던 선수가 이용규와 장성호.[6] 이대수는 이후 군 입대를 미루다가 결국 최종적으로 고교 시절 체벌로 인해 생긴 청각 이상 때문에 재검을 통해 군 면제를 받았다.[7] 당시 고교,대학 야구 지도자들이 뇌물수수로 인해 줄줄이 경찰에 잡혀가면서 동국대 감독 윤재호, 배재고 감독 이광은, 한양대 감독 천보성, 연세대 감독 정진호 등의 아마추어 지도자들이 소속 팀에서 줄줄이 해임되었다.[8] 상당히 치명적이었던지 김선현은 프로 진출을 포기하고 전공인 체육교육 방면으로 진로를 완전히 틀었다.[9] 다만 8강전부터 결승전까지 2학년 에이스 박승수에게 3연투를 지시하고 327구를 던지게 한 것이 드러나 기존의 대학야구 지도자들과 다를 것 없이 한 선수를 혹사한 바탕에서 명성을 쌓은 게 아니냐는 비판을 모면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관련 기사를 참조.[10] 103명 중 102등. 하지만 103번째로 지명된 선수(서울고 박윤철)가 연세대로 진학하면서, 사실 꼴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