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현우

 


'''홍현우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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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1'''
'''1993'''
'''1996'''
'''1997'''




'''1996 KBO 리그 출루율왕'''

보유 기록
최연소 홈런
만 17세 11개월 20일[43]
최연소 1,000경기 출장
만 25세 11개월 12일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5번'''
차영화(1982~1989)

'''홍현우(1990~2000)'''

정성훈(2002)
'''LG 트윈스 등번호 33번'''
김상호(1999~2000)

'''홍현우(2001)'''

박용택(2002~2020)
'''LG 트윈스 등번호 5번'''
안재만(1997~2001)

'''홍현우 (2002~2004)'''

안재만(2005~2007)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8번'''
소소경(2004)

'''홍현우(2005)'''

박정규(2006~2009)


[image]
해태 타이거즈 선수시절.
'''이름'''
홍현우(洪炫佑)
'''생년월일'''
1972년 9월 28일 (52세)[1]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광주광역시
'''출신학교'''
광주서석초-광주동성중-광주상고
'''포지션'''
'''3루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0년 고졸연고 자유계약 (해태)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90~2000)'''
LG 트윈스 (2001~2004)
'''KIA 타이거즈 (2005)'''
'''지도자 경력'''
광주동성고등학교 타격 인스트럭터 (2008~2009)
광주동성고등학교 감독대행 (2009)
동강대학교 타격코치 (2014~2015)[2]
동강대학교 감독 (2016~)[3]
'''응원가'''
'''LG 시절'''
The Fans - Ole Ole Ole[4][5]
1. 개요
2. 선수 경력
3. 은퇴 후
4.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통산 첫 150-150 가입선수'''
前 야구선수이자 90년대에 등장한 타이거즈의 레전드.
1990년도에 해태 타이거즈에서 데뷔하여 10년을 뛰고 FA로 이적해 LG에서 04년까지 4년간 선수생활을 했다. 마지막엔 다시 KIA로 넘어와 1년을 더 뛰고 2005년 은퇴. 등번호는 5번(해태) - 33번(LG, 2001) - 5번(LG) - 38번(KIA, 2005). 96, 97 시즌 해태가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통합 2연패를 했을때 타자진에서 이종범과 투톱을 이룬 선수였다.
이종범의 신인 시절 이전부터 이미 해태의 4번을 차지하던[6][7] '''해태의 최연소 4번타자'''였으며, 90년 중반 타이거즈의 제 2차 전성기에 이종범과 함께 타이거즈의 타선을 이끌던 이끌던 쌍두마차였다. 이로 인해 '''젊은그대'''[8]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이후 LG에서의 FA 부진으로 전성기인 해태 시절의 명성이 크게 퇴색했다.
시즌 페이스가 빠른 편으로, 초반에 마구 몰아치면서 매년 올스타전 즈음에 들어설 때는 홈런 순위 5위 이내에도 들곤 했다. 그러나 수비부담이 큰 2루수 및 3루수를을 주로 맡았을 뿐더러, 매년 전경기 가까이 출전하면서 체력부담이 크다보니 후반기에는 타율과 홈런이 상당히 줄어들어들곤 했다. 그래서 늘 홈런 10위에 들 정도로 기량이 빼어났지만, 동시대에 활약한 팀동료 이종범에게 1990년대 해태의 간판을 내주어야 했다. 또한 90년대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이었던 양준혁과 더불어 팀의 중심타자로서 선구안마저 뛰어난 전형적인 OPS형 타자이기도 했다.
이제는 지나간 얘기지만, 이 선수가 '''김기태'''[9], [10]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면? 90년대 해태의 중심타선은 80년대 김봉연-김성한-한대화로 이어지는 전설의 클린업과도 충분히 비교되거나 그 이상의 강타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고, 늘 부실했던 90년대 해태타선을 이종범과 함께 먹여살렸다시피한 해태타선의 살림꾼이었다.[11]
해태 타이거즈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유명하지만, LG 트윈스의 흑역사. 당시 한국 FA시장 최악의 먹튀로 평가받았으며, 이후 진필중 - 마해영 - 박명환으로 이어지는 LG의 FA잔혹사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잔털 하나없는 빡빡 민 머리[12]로 인해 '홍미륵'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본래 유명했던 별명은 젊은 그대.

2. 선수 경력



2.1. 해태 타이거즈 시절


[image]
광주상고를 졸업하자마자 프로에 입단해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주전을 꿰차 역대 최연소 나이 데뷔 홈런('''만 17세 11개월 20일''')[13], 최연소 1000경기 출장 (25세 11개월 12일)이라는 기록부터 7년 연속 100안타, 두자릿수 도루와 8년연속 두자릿수 홈런, 3년 연속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이 때만 해도 홍현우는 국내 최고의 내야수였다. 홍현우를 믿고 코칭스태프와의 관계가 미묘[14]했던 한대화LG 트윈스로 보내버릴 정도였으니 말이다.[15]
프로 첫 해에는 백업이었지만, 91시즌 중반부터 주전을 차지해 .292의 타율과 8개의 홈런을 뽑아내며 2루 주전자리를 확정지었으며, 이듬해인 92년의 활약을 통해 본격적으로 홍현우라는 이름을 알렸다. 2루수로서 0.333이라는 훌륭한 타율과 17홈런을 기록할만큼 준수한 장타력을 뽐냈으며 무려 97타점을 기록하며 리그 2위의 자리에 오른다.[16] 수비에서도 흠잡을 곳이 없었기에[17] 골든 글러브도 기대할 수 있었으나 성적이 엇비슷했을 뿐더러 한국시리즈 우승 버프를 제대로 받은 박정태에게 밀려 골든 글러브를 놓치고 만다.[18]
93년은 타격성적은 전 해에 비해 대폭 하락했지만 그해에 입단한 대졸신인 이종범과 영건 키스톤콤비를 이루었고 한국시리즈에서도 고비때마다 활약하며 그 해의 우승을 이끌었다. 93년에는 .262에 13홈런 61타점을 기록했다.[19]
94년부터는 한대화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272에 16홈런 72타점이라는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으며, 95년에는 .305 16홈런 65타점을 기록하며 이종범의 방위병 공백을 홀로 메꾸었다. 해태는 그해 4위를 기록하며 팀방어율 1위(3.06)과 팀타율 7위(.242)의 엇박자 행보를 보였는데, 그때 타선의 중심을 잡아준 선수가 바로 홍현우다. 그가 있었기에 해태는 비록 4위에 머물렀지만[20] 선동열, 이강철, 조계현 등 투수진과 더불어 명가의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21] 다만 올스타전 직전에 폭행시비가 나서 팬투표에서 선발되었지만 올스타전에 나가지는 못했다. 그 대신 주전으로 출전한 한화 이글스정경훈이 미스터 올스타를 받았다.
96년의 홍현우는 3루수 홍현우 뿐 아니라 자신의 통산 성적중에서도 '''커리어 하이'''인 0.332/0.453/0.533/0.986의 슬래시라인과 OPS, WRC+ 186.1, 17홈런 67타점 18도루를 기록하며, 팀의 8번째 우승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스탯티즈 기준으로 3루수로는 유일하게 두자릿수의 WAR/144를 기록하였다.(10.001) '''WAR자체가 역대 야수들 중 10위에 해당'''되고 WAR/144로 환산하면 9.555를 기록한 2010 이대호와 9.721를 기록한 1999 이승엽을 제치며, 그의 앞에 있는 선수는 이종범'''들'''[22]과 2015년의 에릭 테임즈, 2003년의 심정수, 1991년의 장종훈 그리고 80년대 초반 80경기 체제의 백인천과 100경기 체제의 장효조뿐이다. 간단히 말해 '''KBO 역대 야수들 중 10위안에 들만한 커리어를 기록하였다는 뜻.'''이다.[23]
거기에 96년의 홍현우의 기록이 더욱 가치가 높은 이유는 96년은 KBO 역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투고타저의 시즌이었다는 점이다. 0.346을 기록한 양준혁이 타격왕이었고 나란히 0.332를 기록한 이종범과 홍현우는 2, 3위였다.[24][25] 홈런이 약간 부족해 보이긴 하지만 투고타저였던 당시는 25~30개면 홈런왕을 하는 시기였고 홍현우의 17홈런은 9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그야말로 이종범과 함께 '''리그를 지배했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았다. 더욱이 96년 해태의 팀타율은 0.245였으며,[26] 이종범과 홍현우를 빼면 팀타율 .219였다는 점에서 타이거즈의 8번째 우승은 홍현우가 없었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이종범이 방위로 인해 초반 몇 경기에 출전이 불가능한 때에도 출전해 팀을 지탱한 팀 유일의 96시즌 전 경기 출전 선수였다. 97년 시즌에 그의 타율은 다소 하락했지만 장타력은 상승하여 처음으로 20-20을 달성하며 팀의 V9를 견인한다. 98년에는 이러한 페이스가 다소 식어, .269 15홈런 69타점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극악의 투고타저였던 93~97시즌 사이를 뛰었기때문에 홍현우의 누적기록 내지 비율기록은 요즘에 보기엔 낮아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전적으로보면 그는 매년 홈런과 타점 10위권 안에 안착했으며, 2루와 3루를 메인 포지션으로, 여차하면 유격수와 1루까지 커버할 정도로 폭넓은 수비실력을 보였다. 그런 그가 점점 주가가 올라간 것은 당연지사. 더욱이 이종범이 일본으로 진출하면서 그의 존재감은 상당히 뚜렷해졌다. 그리고 대망의 99시즌이 밝았다.
99년 시즌, 내야진 조정에 따라 신인 정성훈에게 3루를 내주고 다시 2루수로 전향한 홍현우는 2015년 야마이코 나바로[27]가 경신하기 이전까지 역대 2루수 한시즌 최다 홈런, 타점기록 이었던 34홈런 111타점을 쳐냈다. 비록 타고투저의 영향은 있었어도 2루수로만 시즌의 대부분인 123게임을 뛰면서[28] 30-30을 이루었으며 2루수로서 쳐낸 34홈런은 87년 김성래가 홈런왕을 달성하면서 쳐낸 22홈런과는 까마득한 차이가 있었다.[29] 말 그대로 전성기. 양준혁, 샌더스와 클린업을 이루면서 타이거즈와 자신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30]

이렇게 홍현우가 어마어마한 성적을 내게 된 것은 바로 위기감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97년즈음부터 리그에 30홈런타자가 하나 둘씩 등장하고, 98년에는 용병제도의 설립으로 타이론 우즈와 같은 거포용병들이 리그를 초토화 시키면서 타고투저의 경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끼며 무리하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장타력을 보강한 것. 그래서 홍현우의 99시즌을 이야기 할 때는 역대급 성적과 선수 생명을 바꿨다는 이야기들을 자주 들을 수 있다. [31] 이 여파였는지 FA 직전이었던 2000년은 부진했지만 그 이전의 압도적인 퍼포먼스와 젊은 나이 덕에 그해 FA 최대어로 떠올랐다.
해태시절의 홍현우의 플레이스타일은 삼진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삼진 수를 능가하는 볼넷을 얻어내는데다 장타력까지 갖추었으며, 타점도 상당히 쌓아올리는 전형적인 ops형 타자였다. 출루율왕을 차지한 1996시즌엔 이종범과 거의 차이가 없는 WAR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다만 적극적일 때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타격에 임했는데, 그로 인한 별명으로 홍병살이라는 별명이 존재했다. 그러나 1995시즌에 전경기 출장을 했음에도 병살타는 단 1개에 불과했으며, 병살타의 갯수가 두 자릿수를 기록한 것도 4시즌 정도에 불과하다. 그저 병살타 1위였던 97년이 해태의 마지막 우승의 해 였으며, 그로인해 굉장히 강하게 뇌리에 박히게 된 것.
타격만 비교하자면 90년대 최고타자로 꼽히는 이종범, 양준혁, 김기태, 장종훈그리고 당시 기준으로는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이승엽, 박재홍과 비교해본다면 조금은 부족했다. 그러나 이종범을 제외하면 수비 부담이 적은 1루수, 코너 외야수, 지명타자를 맡은 저들과 달리 수비 부담이 상당히 컸던 2루와 3루는 물론 내야 전 포지션을 커버가능한 전천후 내야수였다. 즉, 타격은 위에서 언급한 선수들에게 밀릴지 몰라도 그들이 할 수 없었던 '''수비'''가 가능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선수였다. [32] 거기에 고졸인데다 팀에서 빠르게 자리 잡은 덕분에[33] 29세라는 굉장히 젊은 나이에 FA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2000년 당시 생겨난 FA제도에서 최고의 주가를 달렸다.[34] 오히려 WAR을 본다면 18억을 지른게 아깝지 않을 정도 였다.
시즌 뿐 아니라 한국시리즈에서도 상당히 강했다.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이종범과 2승을 올린 조계현에 묻혔지만 그야말로 그 둘에 버금가는 활약을 펼쳤다. 3차전에서 광주상고 1년 선배인 박충식에게서 6회 솔로홈런을 터뜨리며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박충식의 181구 완투를 유도했으며, 5차전에서는 결승 타점인 희생플라이를 쳤다. 7차전에서는 이종범의 도루에 이어 적시타를 터뜨리기도 했다. 야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일 그의 홈런이 없었다면 기력을 모두 소모하지 않은 박충식의 존재만으로도 시리즈의 향방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96년 시리즈에서 1차전에서 현대의 선발 위재영을 흔드는 2점 홈런을 터뜨리며 승기를 잡았으며 97년 시리즈에서는 4차전에서 김용수를 상대로 0:2의 불리한 상황에서 추격하는 솔로홈런을 쳐냈다. .
종종 나오는 이야기가 비슷한 시기에 뛰었던 김한수와의 비교인데, 홍현우의 경우 2루수 출전 이닝이 커리어의 절반에 가까운 점에서 이미 김한수와의 비교는 무리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선수 생활을 3루수와 1루수로 보냈음에도 임팩트 있는 성적보다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승부를 보는 김한수이기에, 수비부담이 더한 2루까지 병행한 홍현우에게 누적성적에서 밀린다는 점에서부터 이미 비교가 힘든 상황. 새삼스럽지만, '''홍현우는 두 사람의 평균 OPS, wOBa 그리고 wRC+ 모두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비단 누적뿐 아니라 임팩트에서도 차이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 단적으로 김한수 커리어 하이가 99년인데, 홍현우는 그 해에 KBO에서도 역대급의 성적을 거두었다. 김한수 역시 분명히 훌륭한 3루수임에 변함이 없으나, 한대화-홍현우-김동주-이범호-최정으로 이어지는 3루수계보에 들어갈 만큼의 성적으로는 아쉬운 측면이 있다. 혹자는 홍현우는 30세에 들어서 곤두박질 쳤으니 단기 임팩트만 좋은게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홍현우는 20대 초반부터 10년간 거의 매해 리그에서 5위~10위권정도에 랭크 될 정도로 뛰어난 타자였기에 꾸준함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없다. 김한수는 타고투저 시즌에 대부분의 선수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총 14시즌동안 의미있는 성적을 낸 시즌이 홍현우의 10개의 시즌에 미치지 못하며, 한 시즌도 리그 5위권에 랭크되지 못했다. 즉, 임팩트나 누적이나 홍현우가 김한수에게 우위인 셈이다. 김한수가 내세울만한 것은 김한수가 커리어의 대부분을 3루수로 나와서 3루수로서 누적이 더 좋다는 것. 그러나 선수 개인에 대한 평가로 보면 포지션 변경으로 인한 적응 문제를 잘 극복하며 꾸준히 리그 최정상급의 내야수로 활약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올라간다.

2.2. LG 트윈스 시절


[image]
2000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어 4년간 18억의 거액[35] 을 받고서 LG 트윈스로 이적한다. 해태에서는 FA 보상 선수로 최익성을 받았다.[36]
그런데... ''' 그는 먹튀의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
LG에서 그의 성적은 처참할 정도였는데 통산 2할9푼을 왔다갔다하던 타격은 2003년(.238)을 제외하고 '''2할을 넘겨본 적이 없으며''' 4년 동안 221게임에만 출장하며 홈런은 '''14개''', 도루는 '''2개'''를 기록하는 등 진정한 추락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렇게 추락한 원인은 FA를 앞두고 무리하게 파워를 끌어 올리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미친듯이 했는데, 그것이 무릎 부상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37] 참고로 위키백과에 따르면 홍현우가 LG시절에 친 안타를 돈으로 환산하면 안타 1개에 약 '''1,117만원''', 홈런 1개에 '''1억5,714만원'''[38], 그리고 도루 1개에 '''9억원'''을 투자한 셈이라고 한다. 거기다 준주전으로 뛴 2003년을 제외하면 거의 매 시즌 부상 및 2군으로 허송세월을 보냈다.
사실, 박동희의 인터뷰에 따르면 금액은 SK가 LG보다 더 많이 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큰 무대에서 놀고 싶다는 마음에 LG와 계약했는데, 자신은 이것을 나중에 후회했다고 한다. 잠실 야구장이 워낙 넓다 보니 해태시절에는 타격 슬럼프에 빠져도 홈런 한방 치면 금세 회복이 되었는데, 잠실에서는 바로 펜스앞에서 잡혔던 타구가 유독 많아서 힘들었다고 고백했다.[39] 홍현우의 타격이라면 당시 가장 짧은 구장을 사용하던 SK를 선택하는게 맞았다. 도원구장은 좌우측이 91미터로, 홈팀인 SK가 195피홈런을 기록했던 구장이다.


2.3. KIA 타이거즈 시절


[image]
결국 2004 시즌 후 외야수 이용규와 함께 친정 팀 KIA 타이거즈에 투수 이원식소소경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친정 팀에서도 부상과 기량 저하로 인해 과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결국 2005 시즌 후 KIA에서 방출되어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40]

3. 은퇴 후


한때 순천시에서 스포츠센터(덤으로 찜질방)를 운영하다가, 광주동성고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윤여국[41] 당시 광주동성고 감독이 신병으로 쉬었을 때에는 감독 대행을 맡았다고 한다.
2009년 광주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해태 타이거즈 레전드 올스타중의 한 명(2루수)으로 선정되어 그라운드를 밟았다.[42] 참고로, 홍현우 전체 커리어를 3루수 위주라고 분류하느냐 2루수로 분류하느냐는 상당히 애매한데, 2루수로 분류할 경우는 2루수 출신 최다홈런 기록자(188개)가 된다. KBO에서 홍현우보다 더 많은 통산 홈런을 친 선수 중에 2루수로 분류되는 선수는 없다.
2014년 현재는 동강대학교 야구부 타격코치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야구부 감독은 해태시절 선배인 문희수이다. 그리고 가끔씩 광주지역방송인 광주CMB에서 KIA 타이거즈 홈경기 해설도 한다.
2015년 11월 4일 문희수에 이어 동강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0
해태 타이거즈
51
77
.169
13
3
0
1
5
4
0
8
.247
.244
1991
91
226
.292
66
17
2
8
29
36
3
28
.491
.367
1992
126
420
'''.333'''
(3위)
'''140'''
(3위)
25
3
17
'''97'''
(2위)
87
6
'''89'''
(3위)
.529
'''.447'''
(2위)
1993
123
446
.262
117
21
1
13
61
56
10
'''68'''
(4위)
.401
.355
1994
126
463
.272
126
20
2
16
72
'''70'''
(5위)
14
54
.428
.347
1995
125
465
.305
'''142'''
(2위)
24
1
16
65
63
'''34'''
(4위)
62
.465
.385
1996
126
443
'''.332'''
(3위)
'''147'''
(3위)
'''30'''
(3위)
4
17
67
'''83'''
(3위)
18
'''101'''
(1위)
'''.533'''
(4위)
'''.453'''
(1위)
1997
126
436
.271
118
29
0
22
'''79'''
(4위)
73
20
'''93'''
(2위)
.489
.395
1998
126
442
.269
119
24
1
15
62
80
13
'''82'''
(4위)
.430
.381
1999
129
487
.300
146
26
0
34
'''111'''
(4위)
99
31
67
.563
.382
2000
88
291
.234
68
16
2
14
50
42
12
67
.447
.374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1
LG 트윈스
60
182
.198
36
9
0
2
16
18
1
30
.280
.310
2002
25
68
.118
8
3
0
1
8
3
0
5
.206
.173
2003
97
286
.238
68
12
3
9
27
34
1
41
.395
.332
2004
39
95
.179
17
5
0
2
12
11
0
7
.295
.229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5
KIA 타이거즈
25
59
.220
13
3
0
1
1
6
0
3
.322
.258
<rowcolor=#373a3c> '''KBO 통산
(16시즌)'''
1483
4886
.275
1344
267
19
188
762
765
163
805
.453
.375
[1] 특이하게도 9월생임에도 학교를 1년 일찍 갔다.[2] 2015년은 수석코치 겸[3] 2015년 9월부터 감독대행직 수행[4] 날려라 날려라 날려라 홍현우~ 홍현우~ X2[5] 이 시기 현대박경완도 같은 노래였다. 단지 홍현우는 "날려라" 였고 박경완은 "홈런" 이였다.[6] 김성한, 한대화가 노쇠화로 서서히 실력이 저하되면서 4번타자를 하게되었다.[7] 프로 입단은 홍현우가 3년 빨랐지만, 홍현우가 고교 졸업 후에 바로 입단했던 반면 이종범은 대학을 거치고 입단하여 선수 경력 자체는 이종범이 더 길다. 나이도 이종범이 2살 더 많다(홍연우가 1년 일찍 입학했기에 1년 선후배 관계).[8] 이 별명이 유명해 게임에서도 자주 특성 이름으로 사용되곤 한다. 프야매에서는 앞서 말한 해태의 최연소 4번타자와 젊은그대가 커리어하이 홍현우의 전용 특성으로 구현되었다. 다만 해최4는 장타특성, 젊은 그대는 2루 도루 특성이라 효율성에 있어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편, 마구마구에서는 베테랑효과로 '''2루수 파워형 하점이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9] 김기태는 광주 출신에 광주일고를 나왔고 심지어 그 이종범과도 동네친한 형 동생이였다. 그러나 쌍방울 다음으로 지명권을 가진 해태가 김기태 대신 다른 호남 출신의 대졸 투수를 지명했고, 김기태는 신생구단 쌍방울에 먼저 지명되어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삼성, SK를 거쳐 은퇴하였으나 후에 감독으로 고향 팀 유니폼을 입게 된다.[10] 박재홍은 고등학교 졸업 후 연고 팀 해태의 구타문화와 열악한 환경 등으로 1차지명을 받고도 이를 거부하고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에도 해태 입단을 계속 거부하다가 결국엔 지명권 트레이드로 현대에 입단하게 된다. 결국은 나중에 KIA로 와서 2년간 죽쑤다 SK로 가긴 했지만...[11] 그나마 93년까지는 어찌저찌 짜임새있는 타선이였으나 94년 한대화가 LG로, 장채근이 쌍방울로 이적하고 91년 이후 노쇠화를 뚜렷하게 드러낸 김성한이 96년 은퇴하면서 정말 답 없는 타선으로 전락했다. 그나마 팀에 남아있던 이순철은 94년도를 기점으로 타율과 OPS가 급락했고, 그 분은 그래도 꾸준히 활약했으나 80년대 핵타선과 비교하면 상당히 아쉬운 수준이었다. 정말 이 시기의 해태 타이거즈 타선은 이종범과 홍현우 단 둘이 끌고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12] 머리숱이 워낙 적었기 때문에 20대 시절부터 가발을 쓰고 다닐 정도였다고. 결국 거추장스러웠던지 95년 2월 전지훈련 때 아예 빡빡 밀어버렸다고 한다. 다만 이후로도 머리를 기른 적은 있는 듯. 머리숱이 있는 채로 찍은 골든글러브 수상 사진도 있고, 96년 유니폼이 바뀌고 찍은 사진 중 구레나룻이 삐져나와 있는 사진도 있다. 아래 사진도 그렇다.[13] 홍현우가 1년 일찍 학교를 갔기에 가능했다. 2017년 김성윤의 데뷔 홈런 당시 중계를 하던 엠스플 측 자료화면으로 확인되었으며, '''원래 기록 소유자로 알려져 있던 최정보다도 더 빨랐다.'''[14] 골든글러브에 한해 기본으로 홈런 20개를 기록했던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해태 특유의 짠 보너스와 연봉으로 불만이 많았고, 김응룡과도 마찰이 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단적으로 93년도 올스타전당시 수비도중 손에 찰과상을 입어 쉬고있다가 자신의 타석을 깜박한 한대화를 '''덕아웃에서 구타하기도 했다.'''[15] 한대화가 선수시절을 보낼 당시는 3루 대신 2루를 주로 봤었다.[16] 이해에 기록한 97타점은 역대 만 20세 선수의 기록 중 최다이다. war도 3위로, 박정태를 앞섰다.[17] 당시 김성한이 수비연습을 할 때 정확히 자신의 글러브로 들어오는 공만 포구하고 나머지는 받지도 않았다고 한다. 머리 한대 씩 쥐어박힌 것은 덤이다. 그로 인해 그의 수비력이 일취월장하게 되었다고 한다.[18] 되돌아 볼때, 스텟으로 결산을 해보면 홍현우가 약간의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다. 해태가 우승했다면 홍현우, 해태와 롯데가 아닌 빙그레가 우승했다면 누구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중론이었다.[19] 1993년이 워낙 심한 투고타저였기 때문에 20홈런을 넘긴 선수도 김성래, 양준혁 둘 뿐인데다, 홍현우보다 홈런을 많이 친 선수가 앞의 둘을 포함해 장종훈, 이종범, 김동수, 강기웅, 이종두까지 7명밖에 없었다. 게다가 태평양, 쌍방울, OB, 롯데에서는 아예 13홈런을 친 타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만큼 펀치력에서는 리그 상위권의 성적을 보인 시즌이었다.[20] 당시 3위 팀과 4위 팀의 게임차가 3.5게임 이상 차이나면 준플레이오프는 치루지 않는다는 규정때문에 해태는 4위를 차지하고도 포스트 시즌에 나가지 못했다. 이 규정은 98년까지 존재하다가 양대리그에서 다시 단일리그로 바뀐 2001년 폐지되었다.[21] 단일리그가 시작된 89년 이후 4위 승률을 찍고도 포스트시즌 자체를 못치룬 팀은 95해태가 유일하다.[22] 오타가 아니다. 무려 WAR/144가 10이 넘는 시즌이 3시즌(94, 96, 97)이나 되며 이 3시즌 모두 96홍현우를 능가한다.[23] 3루수로는 WAR가 8.75로 8.82에 이은 2010년 7관왕의 이대호에 이어 2위지만, 2010년은 133경기 체제였고 1996년은 126경기 체제인지라 144경기 체제를 전제로하면 홍현우의 우위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홍현우는 후반기에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우위라고는 단정짓기 힘들다. 시즌 활약이 어느 정도였는지 그 느낌을 비교하는 거다.[24] 147/443의 홍현우와 149/449를 기록한 이종범, 역시 2모차이로 이종범의 승리였다.[25] 타이거즈 선수의 개별시즌 역대 최고 출루율은 타율 0.393에 0.452라는 출루율을 기록한 94년의 이종범이 아닌 .453을 기록한 96년의 홍현우라는 점도 특기할만한 사항.[26] 이종범홍현우를 빼면 딱히 좋은 타격을 보인 선수는 없었다. 이순철도 한창 하락세를 타면서 삽질하던 시기였고, 김종국 은 프로초년에도 멘도사였다. 이건열이나 박재용, 이호성은 2할 5푼 전후의 타격을 보였다. 장성호 는 그때까지만 해도 백업이었다.[27] 48홈런[28] 3루수로는 단 6경기만을 뛰었다. 이때문에 마구마구에서 초창기부터 엘리 홍현우의 포지션을 3루수로 정한 것에 대해 비판이 많았었다.[29] 다만 99년이 극악의 타고투저였고, 김성래가 홈런왕을 한 80년대는 극악의 투고타저였던 시기다.[30] 양준혁과 홍현우, 이 둘은 1년뿐이긴 하지만 같은 팀에서 뛰었다. 99시즌 해태에서 양준혁이 주로 3번, 홍현우가 4번을 쳤다. 그 일년간 둘이 합작한 기록은 자그마치 .312 66홈런 52도루 216타점. 00년 두산의 우동수가 있고 03년 삼성의 이마양이 있다지만 전혀 밀리지 않았다. 게다가 99년의 해태에는 전성기에 돌입하던 장성호와 .247/'''.408'''/.575 '''40홈런'''의 스텟을 기록한 트레이시 샌더스까지 있었다. 홍현우-양준혁 라인의 연속타자 50-50(홈런-도루)는 최초의 기록이다. 참고로 12년의 박병호-강정호가 56-41을 기록하긴 했다. 그리고 15년에 나성범-테임즈가 16년만에 75-63을 기록하며 이름을 올렸다,[31] 이 시기부터 매니 라미레즈를 보며 벌크업을 했다고 한다. 99시즌에 전성기를 맞았지만 이후 급격하게 추락한 것은 이 벌크업의 부작용인 무릎 부상일지도 모른다.[32] 단적인 예로 외야수와 지타를 번갈아가면서 뛴 양준혁의 누적 POS는 마이너스 50, 1루로 출장했던 이승엽은 누적 POS 마이너스 150이 넘어가는데 홍현우의 경우 23을 기록했다.[33] 2년차인 91년 시즌에 91게임을 뛰며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34] 2014년 FA자격을 얻은 최정의 상황이 홍현우와 비슷한 점이 많은데(3루수, 3할+20-20을 기대할수있는 성적, 30세가 되지 않은 나이, 3년연속 골든 글러브 수상) 그해 FA최대어로 평가받으며 4년 86억의 대박 계약을 맺었다.[35] 물론 100억을 넘기는 경우가 나오는 2020년 기준으로는 거액이라고 하면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계약 당시가 '''2000년'''임을 감안하자.[36] 결국은 보상선수인 최익성보다도 일천한 성적을 남겼다. 최익성은 그럭저럭 대타로서는 쓸만한 성적이라도 남겼다[37] 흔히들 LG 이적 후 부상이 찾아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부상은 FA 직전시즌인 2000 시즌에 당했다. 그리고 그 시즌에 커리어 로우급의 성적을 거두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FA 직전 시즌에 무릎부상으로 한 시즌의 성적이 바닥을 쳤으면 가치가 하락해야 정상인데 1999년에 보여준 퍼포먼스가 워낙 뛰어났고 고졸 데뷔라서 나이도 젊은 편이라 회복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LG가 저렇게 지른 것이다. 물론 당시에도 무릎부상을 우려하는 의견은 있었지만 그냥 묻혔다.[38] 웬만한 선수의 '''연봉''' 수준이다![39] 이거 때문에 홍현우의 사례는 둘째치고, LG는 '''우타거포 육성 실패'''라는 참담한 결과를 박병호정의윤을 통해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컨택형을 거포형보다 중시하게 된 것이다. 당장 LG 타자들의 대표격인 박용택도 타팀이었으면 300홈런은 무난히 넘기고 이 외에도 오지환, 유강남, 채은성, 이형종, 작뱅 등 수많은 중장거리형 타자로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선수들이 거포로 클 수 있었다는 아쉬움을 남기는 것을 보면..[40] 당시에는 홍현우에 대한 부활의 기대감이 있었지만, 결과가 이렇게 되버려서 KIA가 큰 손해를 볼뻔 했다. 하지만 트레이드 과정에서 저울추를 맞추기 위해 '''타율 .125'''에 장타력도 없는 발만 빠른 외야 유망주를 LG에서 내줬는데, 그게 바로 '''이용규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용규리그 최고의 리드오프로 각성하게 된다.[41] 광주상고의 언더스로 투수였으며 1979년 봉황대기 우승에 일조하며 MVP로 선정되었다. 당시 광주상고 유격수는 이순철. 성균관대와 실업야구팀 한국화장품을 거쳐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광주상고(광주동성고)를 거쳐 배명고, 전주고의 지휘봉을 잡았다.[42] 해태시절 홍현우는 3루 못지 않게 비등한 이닝으로 2루도 많이 봤으며, 자신의 최전성기 중 다수를 2루수로 보냈다는 점(92,99) 때문에 해태 레전드 2루수로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3루수에는 한대화가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네임밸류가 약한 차영화 대신 홍현우가 선정되었다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