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글르몽
Aiglemont
프랑스 북동부 아르덴주의 코뮌으로, 아르덴 데파르트망의 중심지인 샤를빌메지에르 동편 근교에 위치한다.
높이 200~300m여의 고지대에 위치한 코뮌이다. 서쪽 경계를 따라 흐르는 뫼즈 강이 샤를빌메지에르 시가지와 에글르몽을 분단한다. 코뮌의 북부는 경사진 산지이며 남쪽 절반에 대부분의 인구가 거주한다. 아르덴 ''데파르트망 루트''(한국으로 치면 지방도 내지 OO시도 개념이라 할 수 있다.) D58호선을 통해 샤를빌미지에르와 연결된다.
1256년에 쓰여진 고서에 에글르몽이란 지명이 처음 등장하며, 이때에는 'Eslemon''라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기(1291년)의 문헌에는 'Aguilo Monte'란 표현이 쓰였으며, 16세기에 들어서 현재의 지명이 정착되었다.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라틴어 Aqua가 어원이란 추측이 가능한데, 실제로 코뮌 관내에 호수가 있음을 고려할 때 물이 있는 산(Aqua+montagne)에서 점차 독수리 산(Aigle+montagne)으로 어휘 변화를 겪었음을 알 수 있다.[1]
이미 5세기 경에 로마인-갈리아인 정착지가 있었던 장소이다. 1931년 발굴을 해본 결과 동전, 도기류, 보석 등이 발견되어 거주지가 존재했음이 입증되었다.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 집권 당시 농업이 발전하였으며, 'Manicourt'(마니쿠르)란 명칭을 갖게 되었다. 16세기에 이르기까지 마을은 계속 확장하여 주변에 교외 주택 지구도 있을 정도였다고. 근처에 규모가 상당한 교회가 있었는데, 이 주변 지역은 'Champeau'(샹포)라 따로 분리하여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1521년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가 이탈리아 전쟁 와중 아르덴 지역을 기습 침략하면서 마니쿠르와 샹포 지역도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주택가 전체에 걸친 화재가 발생하여 두 마을은 아예 사라지다시피 하였다. 에글르몽은 원래 두 마을 근처에 있는 작은 지역을 부르는 말이었으나 1580년 교회를 이곳에 재건하면서 다시 형성된 거주지의 이름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 동안 인구가 크게 늘어 500명을 돌파하였으며, 뒤이은 산업 혁명의 물결 속에서 부품 제조업이 발달하여 근로자가 유입되었다. 북쪽 산지에는 채석장도 건설되어 1954년까지 운영을 계속하였다.
1903년 장-샤를 포르튀네 헨리가 당시 유행하던 '자유주의 공동체'(운동가들이 모여 거주하거나 활동하는 공간이자, 일종의 '약속된 실험실'이라 할 수 있다)를 참조하여 무정부주의자들의 공간인 ''L’Essai''를 설립한 곳이다. 포르튀네는 당시 정부에서 위험 인물로 간주되어 있었고, 따라서 최외곽의 음지로 여겨지던 아르덴의 산간 마을까지 온 것이다.
현재에는 집터와 흔적만 남았으나 스페인의 아나키스트들에게도 영향을 끼친 장소라고 한다.
1. 개요
프랑스 북동부 아르덴주의 코뮌으로, 아르덴 데파르트망의 중심지인 샤를빌메지에르 동편 근교에 위치한다.
높이 200~300m여의 고지대에 위치한 코뮌이다. 서쪽 경계를 따라 흐르는 뫼즈 강이 샤를빌메지에르 시가지와 에글르몽을 분단한다. 코뮌의 북부는 경사진 산지이며 남쪽 절반에 대부분의 인구가 거주한다. 아르덴 ''데파르트망 루트''(한국으로 치면 지방도 내지 OO시도 개념이라 할 수 있다.) D58호선을 통해 샤를빌미지에르와 연결된다.
2. 지명의 유래
1256년에 쓰여진 고서에 에글르몽이란 지명이 처음 등장하며, 이때에는 'Eslemon''라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기(1291년)의 문헌에는 'Aguilo Monte'란 표현이 쓰였으며, 16세기에 들어서 현재의 지명이 정착되었다.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라틴어 Aqua가 어원이란 추측이 가능한데, 실제로 코뮌 관내에 호수가 있음을 고려할 때 물이 있는 산(Aqua+montagne)에서 점차 독수리 산(Aigle+montagne)으로 어휘 변화를 겪었음을 알 수 있다.[1]
3. 역사
이미 5세기 경에 로마인-갈리아인 정착지가 있었던 장소이다. 1931년 발굴을 해본 결과 동전, 도기류, 보석 등이 발견되어 거주지가 존재했음이 입증되었다.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 집권 당시 농업이 발전하였으며, 'Manicourt'(마니쿠르)란 명칭을 갖게 되었다. 16세기에 이르기까지 마을은 계속 확장하여 주변에 교외 주택 지구도 있을 정도였다고. 근처에 규모가 상당한 교회가 있었는데, 이 주변 지역은 'Champeau'(샹포)라 따로 분리하여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1521년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가 이탈리아 전쟁 와중 아르덴 지역을 기습 침략하면서 마니쿠르와 샹포 지역도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주택가 전체에 걸친 화재가 발생하여 두 마을은 아예 사라지다시피 하였다. 에글르몽은 원래 두 마을 근처에 있는 작은 지역을 부르는 말이었으나 1580년 교회를 이곳에 재건하면서 다시 형성된 거주지의 이름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 동안 인구가 크게 늘어 500명을 돌파하였으며, 뒤이은 산업 혁명의 물결 속에서 부품 제조업이 발달하여 근로자가 유입되었다. 북쪽 산지에는 채석장도 건설되어 1954년까지 운영을 계속하였다.
3.1. 아나키즘
1903년 장-샤를 포르튀네 헨리가 당시 유행하던 '자유주의 공동체'(운동가들이 모여 거주하거나 활동하는 공간이자, 일종의 '약속된 실험실'이라 할 수 있다)를 참조하여 무정부주의자들의 공간인 ''L’Essai''를 설립한 곳이다. 포르튀네는 당시 정부에서 위험 인물로 간주되어 있었고, 따라서 최외곽의 음지로 여겨지던 아르덴의 산간 마을까지 온 것이다.
현재에는 집터와 흔적만 남았으나 스페인의 아나키스트들에게도 영향을 끼친 장소라고 한다.
4. 이모저모
- 프랑스의 말단 행정단위인 코뮌으로서는 흔치 않게 공식 웹사이트를 가지고 있다.#
- 프랑스어 Aigle은 독수리를 뜻하는 단어로 코뮌 문장에도 독수리 모양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독수리가 나와서 지어진 지명은 아니라고...
- 볼거리로 꽃 수목원 및 연장 2.95km의 둘레길이 존재한다.
- 샤를빌메지에르와 라 그랑빌을 잇는 버스 노선이 지난다.
5. 갤러리
6. 참고문헌
7. 관련 문서
[1] L’origine du nom de notre village(우리 마을 이름의 유래), 에글르몽 공식 웹사이트(aiglemont.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