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핼리
Edmond Halley
에드먼드 핼리
1656년 11월 8일 ~ 1742년 1월 14일, 85세
'''뉴턴의 친구'''
영국 출생의 수학자, 물리학자, 기상학자, 그리고 훗날 '''핼리 혜성'''으로 불릴 천체의 출현을 예측한 것으로 유명한 천문학자이다.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핼리 혜성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그 밖에도 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656년 영국 런던 근교 '해거스톤(Haggerston)'에서 비누를 만들어 파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수학에 소질을 보였고 그래서 부유한 부모님의 지원 아래 옥스퍼드 대학까지 진학하여 무난한 시절을 보냈다.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의 최초 관장 겸 왕실 천문학자(Astronomer Royal) '존 플램스티드(John Flamsteed 1646-1719)'[1] 의 조수로 시작했으며 후에 플램스티드를 도와 나온 결과물 중 하나가 '플램스티드 명명법'[2] 이다. 아직 20살이 넘지 않은 청년 천문학자의 거대한 커리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항해시대가 시작되면서 유럽인들은 남반구의 존재를 서서히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허나 대항해시대에는 알지도 못하는 항해길에 안전하게라도 가려고 대부분 아프리카의 해안선을 따라가는 항해길을 따랐고, 거기에 개척의 성격이 강하다 보니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남반구의 별자리 지도를 만든다는 건 무리였다. 16세기가 종말을 고하려 해도 늘 연구가 가능한 북반구 별자리 지도에 비해, 남반구 별자리 지도는 드문 드문 단편의 정보만 있을 뿐 완성되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성립되고 식민지의 개념이 잡히면서 남반구를 좀 더 안전히, 더 멀리 탐험할 수 있는 남반구 별자리의 완성이 간절했다.
당시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존 플램스티드는 망원경을 이용한, 좀 더 정확한 북반구 별자리를 연구하고 있었다. 천문대를 들락날락하던 핼리는 플램스티드로부터 망원경을 통한 별자리 연구를 계속해서 권유 받고 있었고, 그래서 남반구 별자리 지도를 망원경을 사용해 완성하자는 계획을 낸다. 당시 영국의 왕이던 찰스 2세와 아버지, 그리고 동인도 회사의 투자를 받아 1676년 11월 남대서양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영국령 세인트헬레나섬을 방문하는 '제1차 헬레니안 항해'를 떠난다. 거기서 망원경을 통해 남반구 별자리를 채워넣기 시작했는데 다음 해 1월에 영국으로 항해하기 전까지 341개의 별들의 경위도를 작성한다. 그 밖에 섬에서 관찰을 하면서 한가지 재미있는 천문 현상을 목격하는데, 바로 수성의 태양 횡단(Transit of Mercury). 핼리는 수성의 횡단을 통해 진자(振子) 운동을 목격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후 태양계의 정확한 거리 계산법을 유출해 낸다.
1678년에 영국에 돌아왔을 때는 바로 정리해서 발표 하지 못했는데 이유는 다름 아닌 로버트 훅.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천문학자 겸 정치가 요하네스 헤빌리우스(Johannes Hevelius 1611-1687)는 '''망원경 없이''' 연구 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훅이 헤빌리우스의 연구는 망원경 없이 했으니 무효라는 발언을 한다. 잘못하다간 무의미한 외교전으로 번질 수도 있기에 플램스티드의 추천을 받아 폴란드 그단스크로 핼리가 영국 왕립협회 특사 중 하나로 파견된다. 결론은 헤빌리우스가 눈이 워낙 좋아서, 이미 사람의 시야를 앞서가던 망원경과 기타 관측 장비가 없어도 정확하게 별자리를 집었던 것. 싱겁게 일이 끝나자 영국으로 돌아와 그해에 1678년에 남반구의 별 341개를 정리한 'Catalogus Stellarum Australium'를 발표, 영국 천문학계의 떠오르는 일약 스타가 되었고, 이 논문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또한 영국 왕립협회의 회원이 된다. 이게 만으로 22살 때 이야기. 그 덕에 남반구의 튀코 브라헤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image]
'Catalogus Stellarum Australium'의 일부
16세기 유럽의 천문학자들은 나날이 축적되는 연구와 발전하는 망원경, 관측 도구 덕에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공전한다는 것을 이해하고는 있었다. 다만 그걸 수학적으로 계산하려들면 이상하게도 공전주기에 계산이 안 맞아 당대 수학계의 난제로 유명했다. 그 때문에 반박을 하려고 해도 정확하게 들이밀 수 있는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증명'''이 없었고, 그로 인해 당시까지 천동설은 견고한 반석 위에 올려져 요동도 안 했고, 때문에 천동설을 제창하던 일부 천문학자들에게 비난 받아왔다.
다시 말해 지구의 태양 공전주기를 정확히 계산해 내는 사람은 그때까지 아무도 없었다.
풀릴 듯 안 풀릴 듯한 이 문제는 당대 학자들에게 있어서 핫이슈였다. 그중에 핼리, 크리스토퍼 렌(1632~1723, Sir Cristopher James Wren)[3] 그리고 로버트 훅, 이렇게 셋이 담화 도중에 렌이 재미 삼아 누가 먼저 지구의 공전주기를 계산할지£40[4] 내기를 건다. 하지만 대략적인 이해와는 별개로 근거가 될 수학적 자료가 전무했기에 누구도 진전이 없었다. 거기에 훅이 자신의 용수철 연구를 통해 공전 문제를 풀 수 있다며 나댄 것도 있고.
1684년 8월 8일 핼리는 캠브리지 대학을 방문하는데 거기서 같은 왕립협회의 회원이던 뉴턴을 다시 만나게 된다. 뉴턴은 왕립협회에서 안면은 있었으나 13년 가까이 직접 만나보지 못했는데, 이유는 13년 전에 뉴턴이 발표한 '빛에 대하여'란 논문에 갑자기 훅이 자기 연구를 도둑질해 갔다며 공식적인 표절 의혹을 제기한 것. 아는 사람들은 노친네 병 도졌네라는 식으로 쳐다 봤지만 왕립협회 고참이 정식으로 제기한 문제를 '''절차상''' 그냥 넘어갈 수 없었기에, 억울한 뉴턴이 토라져 은둔해 버린 것. 거기에 훅이 쓸데없는 인신공격을 해서 뉴턴이 후에 앙심을 품게된 건 덤이고.[5] 물론 근거가 없는 채 끝났지만. 핼리가 추측하기에 만유인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문제를 풀면 실마리가 풀리리라고 생각했지만 만족할 만한 계산법이 없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뉴턴에게 질문을 던진다.[6]
그런데 이놈의 책이 안 팔린 걸 넘어서 왕립협회의 운영까지 흔들게 된 것. 그러다 보니 이 위대한 발견을 당장 출판할 길이 없게 됐다.[7] 결국 핼리의 계속되는 설득에 3년 뒤인 7월 5일 1687년에 우여곡절 끝에 뉴턴을 도와 프린키피아를 출판하고 당시 협회 직원이던 핼리에게 날라온 왕립협회 발 편지 한 장.
그 밖에 핼리는 현대 기상학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는데, 전에 '제1차 헬레니안 항해'가 워낙 성공적이어서 영국 왕실에서 지원을 받아 1680년대 초에 '제2차 헬레니안 항해'를 떠났는데 거기서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1686년 '무역풍, 몬순, 적도 근처 대양과 바람의 물리적 관계 유출에 관하여(An Historical Account of the Trade Winds and Monsoons, Observable in the Seas between and near the Tropicks, with an Attempt to Assign the Phisical Cause of the Said Wind)'라는 논문에서 현대 개념의 날씨 지도를 발표한다. 날씨 지도가 상용화 된 건 18세기 들어서지만 핼리가 만든 날씨 지도가 현대의 날씨 지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일. 함께 지구 자기장에 관해서도 연구했다.
[image]
잠수종을 개량해 근해에서 폐선 인양 사업으로 돈을 벌기도 했으며
성격이 둥글둥글한 편이었는지 별 다른 정적도 없었고 학자로 누릴 수 있는 모든 명예를 누렸으며, 말년엔 스승이던 플램스티드의 왕실 천문학자 자리를 이어받아 편하게 살다가 1742년 1월 14일, 저녁 식사를 하고 자신이 좋아하던 와인을 한잔 청해 마신 다음 그렇게 하늘로 갔다, 향년 85세.
[image]
1986년 핼리 혜성
요하네스 케플러가 말했던 것처럼, 16세기 전후까지 천문학은 점성술이라는 딸이 먹여 살린다고 할 정도로 천문학자들은 학문과 미신의 경계를 넘나 들었다. 천문 현상중에 고위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심각한 재앙의 징조로 받아들여졌던 게 혜성의 출연이었다. 동서고금은 물론이며 문화적으로 교류가 전무했던 북남미 원주민들에게까지 천체관측에서 혜성의 출현은 재앙의 징조로 여겨졌다. 왕조에게 있어서 반란의 징조로 여겨지곤 했고, 타락한 인류를 벌하기 위한 신의 경고로 해석하기도 했으며, 거기에 가끔가다 겹치는 재앙은 인과관계 역전의 오류로 인한 오해로 인해, 혜성을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천벌로 여기기도 했다. 물론 천문학자들은 혜성 출연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자세한 기록들을 남겼지만, 아무래도 교통·통신의 발달이 더뎌 학문적 교류가 전무했고, 그래서 혜성에 대한 정보는 한곳에 집중되기보다는 산발적으로 여기저기에 남겨졌다. 물론 점성술사들이 그걸로 점도 치고 입에 풀칠도 해야 하고 해서 살을 덧댄것도 있고. 16세기 즈음 과학이 좀더 성숙해지고 미신의 경계에서 천문학이 점점 벗어나면서 혜성 또한 단순히 '재앙'의 징조가 아닌 과학적 관찰이 요구되었다. 다만 이것도 여러 가설만 존재할뿐 명확한 답은 없었는데, 로버트 훅도 용수철을 이용해 혜성을 이해하고자 했던 천문학자 중 하나. 혜성의 문제는 결국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집필하기 전까진 풀리지 않았는데, 여기서 결정적 해법을 찾은 게 바로 핼리다.[9]
프린키피아의 출판을 도우면서 핼리는 중력을 통한 여러 행성들의 공전 궤도 연구를 시작했는데, 여기서 혜성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고대 이집트 때까지 올라가는 자료들을 규합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최근 기록이며 자신이 직접 목격하기도 했던 1682년의 혜성의 궤도가 1607, 1531, 1456년에 기록된 혜성의 궤도와 매우 흡사하거나 엇비슷하다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한 자료와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참고하여 1705년 '혜성에 관하여 Synopsis Astronomica Cometicae'를 발표, 나아가 1456, 1531, 1607 그리고 1682년의 혜성은 75~6년의 공전주기를 가지는 동일한 혜성이며 이후 1759년 3월에 혜성의 지구 귀환을 당시 기준으론 '''예언'''했다. 재앙을 부른다던 혜성을 과학적 그리고 수학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증명하며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물론 헛소리 한다는 비난도 받았고. 하지만 뉴턴의 연구가 전 유럽으로 퍼지며 이해가 더해지자 핼리의 '예언'에 학자들은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 '혜성에 관하여'가 출판된 지 50년이 넘었고 핼리 사후 17년이 지났지만 대중과 학계는 핼리의 예언을 기억했고, 유럽 각국에서는 혜성이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연구 항해를 떠난다.
그리고 1759년 3월 13일, 과연 핼리가 예언한 그대로 하늘에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혜성이 지나갔다. 천문학이 마지막 점성술의 큰 족쇄에서 풀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날, 과학의 승전일. 이후 이 '혜성'을 이전부터 관측되긴 했지만 핼리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로 '핼리 혜성'이라고 부르게 된다.
에드먼드 핼리
1656년 11월 8일 ~ 1742년 1월 14일, 85세
1. 개요
'''뉴턴의 친구'''
영국 출생의 수학자, 물리학자, 기상학자, 그리고 훗날 '''핼리 혜성'''으로 불릴 천체의 출현을 예측한 것으로 유명한 천문학자이다.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핼리 혜성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그 밖에도 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2. 생애
2.1. 유년기
1656년 영국 런던 근교 '해거스톤(Haggerston)'에서 비누를 만들어 파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수학에 소질을 보였고 그래서 부유한 부모님의 지원 아래 옥스퍼드 대학까지 진학하여 무난한 시절을 보냈다.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의 최초 관장 겸 왕실 천문학자(Astronomer Royal) '존 플램스티드(John Flamsteed 1646-1719)'[1] 의 조수로 시작했으며 후에 플램스티드를 도와 나온 결과물 중 하나가 '플램스티드 명명법'[2] 이다. 아직 20살이 넘지 않은 청년 천문학자의 거대한 커리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2.2. 청년 천문학자
대항해시대가 시작되면서 유럽인들은 남반구의 존재를 서서히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허나 대항해시대에는 알지도 못하는 항해길에 안전하게라도 가려고 대부분 아프리카의 해안선을 따라가는 항해길을 따랐고, 거기에 개척의 성격이 강하다 보니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남반구의 별자리 지도를 만든다는 건 무리였다. 16세기가 종말을 고하려 해도 늘 연구가 가능한 북반구 별자리 지도에 비해, 남반구 별자리 지도는 드문 드문 단편의 정보만 있을 뿐 완성되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성립되고 식민지의 개념이 잡히면서 남반구를 좀 더 안전히, 더 멀리 탐험할 수 있는 남반구 별자리의 완성이 간절했다.
당시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존 플램스티드는 망원경을 이용한, 좀 더 정확한 북반구 별자리를 연구하고 있었다. 천문대를 들락날락하던 핼리는 플램스티드로부터 망원경을 통한 별자리 연구를 계속해서 권유 받고 있었고, 그래서 남반구 별자리 지도를 망원경을 사용해 완성하자는 계획을 낸다. 당시 영국의 왕이던 찰스 2세와 아버지, 그리고 동인도 회사의 투자를 받아 1676년 11월 남대서양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영국령 세인트헬레나섬을 방문하는 '제1차 헬레니안 항해'를 떠난다. 거기서 망원경을 통해 남반구 별자리를 채워넣기 시작했는데 다음 해 1월에 영국으로 항해하기 전까지 341개의 별들의 경위도를 작성한다. 그 밖에 섬에서 관찰을 하면서 한가지 재미있는 천문 현상을 목격하는데, 바로 수성의 태양 횡단(Transit of Mercury). 핼리는 수성의 횡단을 통해 진자(振子) 운동을 목격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후 태양계의 정확한 거리 계산법을 유출해 낸다.
1678년에 영국에 돌아왔을 때는 바로 정리해서 발표 하지 못했는데 이유는 다름 아닌 로버트 훅.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천문학자 겸 정치가 요하네스 헤빌리우스(Johannes Hevelius 1611-1687)는 '''망원경 없이''' 연구 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훅이 헤빌리우스의 연구는 망원경 없이 했으니 무효라는 발언을 한다. 잘못하다간 무의미한 외교전으로 번질 수도 있기에 플램스티드의 추천을 받아 폴란드 그단스크로 핼리가 영국 왕립협회 특사 중 하나로 파견된다. 결론은 헤빌리우스가 눈이 워낙 좋아서, 이미 사람의 시야를 앞서가던 망원경과 기타 관측 장비가 없어도 정확하게 별자리를 집었던 것. 싱겁게 일이 끝나자 영국으로 돌아와 그해에 1678년에 남반구의 별 341개를 정리한 'Catalogus Stellarum Australium'를 발표, 영국 천문학계의 떠오르는 일약 스타가 되었고, 이 논문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또한 영국 왕립협회의 회원이 된다. 이게 만으로 22살 때 이야기. 그 덕에 남반구의 튀코 브라헤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image]
'Catalogus Stellarum Australium'의 일부
2.3. 1684년, 기적의 해
16세기 유럽의 천문학자들은 나날이 축적되는 연구와 발전하는 망원경, 관측 도구 덕에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공전한다는 것을 이해하고는 있었다. 다만 그걸 수학적으로 계산하려들면 이상하게도 공전주기에 계산이 안 맞아 당대 수학계의 난제로 유명했다. 그 때문에 반박을 하려고 해도 정확하게 들이밀 수 있는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증명'''이 없었고, 그로 인해 당시까지 천동설은 견고한 반석 위에 올려져 요동도 안 했고, 때문에 천동설을 제창하던 일부 천문학자들에게 비난 받아왔다.
다시 말해 지구의 태양 공전주기를 정확히 계산해 내는 사람은 그때까지 아무도 없었다.
풀릴 듯 안 풀릴 듯한 이 문제는 당대 학자들에게 있어서 핫이슈였다. 그중에 핼리, 크리스토퍼 렌(1632~1723, Sir Cristopher James Wren)[3] 그리고 로버트 훅, 이렇게 셋이 담화 도중에 렌이 재미 삼아 누가 먼저 지구의 공전주기를 계산할지£40[4] 내기를 건다. 하지만 대략적인 이해와는 별개로 근거가 될 수학적 자료가 전무했기에 누구도 진전이 없었다. 거기에 훅이 자신의 용수철 연구를 통해 공전 문제를 풀 수 있다며 나댄 것도 있고.
1684년 8월 8일 핼리는 캠브리지 대학을 방문하는데 거기서 같은 왕립협회의 회원이던 뉴턴을 다시 만나게 된다. 뉴턴은 왕립협회에서 안면은 있었으나 13년 가까이 직접 만나보지 못했는데, 이유는 13년 전에 뉴턴이 발표한 '빛에 대하여'란 논문에 갑자기 훅이 자기 연구를 도둑질해 갔다며 공식적인 표절 의혹을 제기한 것. 아는 사람들은 노친네 병 도졌네라는 식으로 쳐다 봤지만 왕립협회 고참이 정식으로 제기한 문제를 '''절차상''' 그냥 넘어갈 수 없었기에, 억울한 뉴턴이 토라져 은둔해 버린 것. 거기에 훅이 쓸데없는 인신공격을 해서 뉴턴이 후에 앙심을 품게된 건 덤이고.[5] 물론 근거가 없는 채 끝났지만. 핼리가 추측하기에 만유인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문제를 풀면 실마리가 풀리리라고 생각했지만 만족할 만한 계산법이 없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뉴턴에게 질문을 던진다.[6]
뉴턴에게 어떻게 계산했냐고 물었더니 20년 전에 이미 계산이 끝났다고 했다. 핼리는 뉴턴에게 당장 증거를 보여달라고 했지만 뉴턴이 갑자기 20년 전 자료를 찾을 수도 있는 것도 아니고, 다음 날 다시 써서 가져다 주겠다고 했다. 흥분한 핼리는 다음 날이 오길 고대했고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훅처럼 또 당했구나 하며 실망하기 시작한다. 그때 들리는 편지 배달소리, 그렇게 뉴턴의 '''위대한 논문'''의 초본이 핼리의 손에 쥐어졌다. 내용에 충격과 감복받은 핼리는 단숨에 뉴턴에게 달려가 옛 일 일랑 잊고 왕립협회에서 당장 출판하자고 했다. 뉴턴을 설득한 다음 단숨에 왕립협회에 보고한 다음, 협회에서 당장이라도 출판하자는 회답을 기다렸는데, 돌아온 답은...'지구의 태양 공전 말입니다, 인력의 거리 제곱에 반비례하면 어떤 궤도가 나올 거 같습니까?
''''타원''''
'!!!'
그랬다! 돈이 없었다, '''진짜로!''' 매해 왕립협회에서는 각계에서 지원 받는 운영금을 출판을 통해 벌어 학회를 꾸려 왔다. 거기서 남는 이윤은 왕립협회 직원의 봉급으로도 사용되었고. 1684년 왕립협회에서는 그해 야심차게 준비한 책 '물고기의 역사 De Historia Piscium/History of Fish' 출판에 1년치 운영금을 몽땅 부어 넣었다.돈이 없어...
그런데 이놈의 책이 안 팔린 걸 넘어서 왕립협회의 운영까지 흔들게 된 것. 그러다 보니 이 위대한 발견을 당장 출판할 길이 없게 됐다.[7] 결국 핼리의 계속되는 설득에 3년 뒤인 7월 5일 1687년에 우여곡절 끝에 뉴턴을 도와 프린키피아를 출판하고 당시 협회 직원이던 핼리에게 날라온 왕립협회 발 편지 한 장.
논문 출판 축하 드립니다.
은,
앞으로 '핼리' 씨 1년치 봉급£50[8]
'물고기의 역사' 책으로 대신 하겠습니다.
-왕실협회 드림
2.4. 기타, 말년
그 밖에 핼리는 현대 기상학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는데, 전에 '제1차 헬레니안 항해'가 워낙 성공적이어서 영국 왕실에서 지원을 받아 1680년대 초에 '제2차 헬레니안 항해'를 떠났는데 거기서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1686년 '무역풍, 몬순, 적도 근처 대양과 바람의 물리적 관계 유출에 관하여(An Historical Account of the Trade Winds and Monsoons, Observable in the Seas between and near the Tropicks, with an Attempt to Assign the Phisical Cause of the Said Wind)'라는 논문에서 현대 개념의 날씨 지도를 발표한다. 날씨 지도가 상용화 된 건 18세기 들어서지만 핼리가 만든 날씨 지도가 현대의 날씨 지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일. 함께 지구 자기장에 관해서도 연구했다.
[image]
잠수종을 개량해 근해에서 폐선 인양 사업으로 돈을 벌기도 했으며
성격이 둥글둥글한 편이었는지 별 다른 정적도 없었고 학자로 누릴 수 있는 모든 명예를 누렸으며, 말년엔 스승이던 플램스티드의 왕실 천문학자 자리를 이어받아 편하게 살다가 1742년 1월 14일, 저녁 식사를 하고 자신이 좋아하던 와인을 한잔 청해 마신 다음 그렇게 하늘로 갔다, 향년 85세.
3. 혜성과 핼리
[image]
1986년 핼리 혜성
요하네스 케플러가 말했던 것처럼, 16세기 전후까지 천문학은 점성술이라는 딸이 먹여 살린다고 할 정도로 천문학자들은 학문과 미신의 경계를 넘나 들었다. 천문 현상중에 고위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심각한 재앙의 징조로 받아들여졌던 게 혜성의 출연이었다. 동서고금은 물론이며 문화적으로 교류가 전무했던 북남미 원주민들에게까지 천체관측에서 혜성의 출현은 재앙의 징조로 여겨졌다. 왕조에게 있어서 반란의 징조로 여겨지곤 했고, 타락한 인류를 벌하기 위한 신의 경고로 해석하기도 했으며, 거기에 가끔가다 겹치는 재앙은 인과관계 역전의 오류로 인한 오해로 인해, 혜성을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천벌로 여기기도 했다. 물론 천문학자들은 혜성 출연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자세한 기록들을 남겼지만, 아무래도 교통·통신의 발달이 더뎌 학문적 교류가 전무했고, 그래서 혜성에 대한 정보는 한곳에 집중되기보다는 산발적으로 여기저기에 남겨졌다. 물론 점성술사들이 그걸로 점도 치고 입에 풀칠도 해야 하고 해서 살을 덧댄것도 있고. 16세기 즈음 과학이 좀더 성숙해지고 미신의 경계에서 천문학이 점점 벗어나면서 혜성 또한 단순히 '재앙'의 징조가 아닌 과학적 관찰이 요구되었다. 다만 이것도 여러 가설만 존재할뿐 명확한 답은 없었는데, 로버트 훅도 용수철을 이용해 혜성을 이해하고자 했던 천문학자 중 하나. 혜성의 문제는 결국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집필하기 전까진 풀리지 않았는데, 여기서 결정적 해법을 찾은 게 바로 핼리다.[9]
프린키피아의 출판을 도우면서 핼리는 중력을 통한 여러 행성들의 공전 궤도 연구를 시작했는데, 여기서 혜성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고대 이집트 때까지 올라가는 자료들을 규합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최근 기록이며 자신이 직접 목격하기도 했던 1682년의 혜성의 궤도가 1607, 1531, 1456년에 기록된 혜성의 궤도와 매우 흡사하거나 엇비슷하다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한 자료와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참고하여 1705년 '혜성에 관하여 Synopsis Astronomica Cometicae'를 발표, 나아가 1456, 1531, 1607 그리고 1682년의 혜성은 75~6년의 공전주기를 가지는 동일한 혜성이며 이후 1759년 3월에 혜성의 지구 귀환을 당시 기준으론 '''예언'''했다. 재앙을 부른다던 혜성을 과학적 그리고 수학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증명하며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물론 헛소리 한다는 비난도 받았고. 하지만 뉴턴의 연구가 전 유럽으로 퍼지며 이해가 더해지자 핼리의 '예언'에 학자들은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 '혜성에 관하여'가 출판된 지 50년이 넘었고 핼리 사후 17년이 지났지만 대중과 학계는 핼리의 예언을 기억했고, 유럽 각국에서는 혜성이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연구 항해를 떠난다.
그리고 1759년 3월 13일, 과연 핼리가 예언한 그대로 하늘에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혜성이 지나갔다. 천문학이 마지막 점성술의 큰 족쇄에서 풀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날, 과학의 승전일. 이후 이 '혜성'을 이전부터 관측되긴 했지만 핼리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로 '핼리 혜성'이라고 부르게 된다.
[1] 영국 출생의 천문학자로 천왕성이 발견되고 명명되기 이전에 최초의 관찰 기록 중 하나를 남겼으며 40년이 넘는 천문학 연구를 통해 핼리의 유성 문제를 돕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으며 훗날 핼리가 기록한 남반구 별자리 지도 + 튀코 브라헤의 연구물 + 40년 관찰을 통해 총 3000여 개의 별자리 지도를 당시 왕립학회의 회장이던 뉴턴과 핼리가 훔쳐 오다시피해서 강제로 출판하게 됐다. 겸손했던 건지 아님 부끄러웠던 건지 출판된 책 3-400권을 태웠다고 한다. 결국 숨진 후에 부인에 의해 정식으로 출판되었다.(Historia Coelestis Britannica 1725) 그리니치 천문대의 최초 연구 기록발표물임과 동시에 현재에도 사용되는 천문학 책 중 하나이다. 또한 '플램스티드 명명법'이 여기서 나왔다.[2] 새로 발견된 별의 이름 명명 기준법 중 하나. 어떤 별이 발견된 성좌의 라틴어 소유격과 아라비아 숫자를 붙여서 붙이는 명명법으로 18세기에 영국에서 보이는 천구의 별에 주로 사용되었다. 페가수스자리 51(51 Pegasi)등이 대표적. 다만 비슷한 명명법에 굴드 명명법이라는게 있어서, 남반구에서 별자리 이름과 아라비아 숫자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별 이름은 대부분 이쪽으로 분류된다.[3] 천문학자이면서 영국 시티 오브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을 설계한 건축가로 더 유명하다.[4] 2015/12/15 한화 약 400만 원[5] 훅이 작고한 이후 뉴턴이 왕립협회의 회장이 되었는데 이때 훅에게 오래전부터 앙심을 품고 있던 뉴턴은 훅의 생전 유일의 공식 초상화를 '''직접''' 태워 버렸다고 전해진다. 진실에 가까운 전설? 덕에 현존 하는 훅의 초상화는 후에 지인들과 자료에 묘사된 모습으로 그려진 '''추정 초상화'''다. [6] 참고로 핼리와 뉴턴이 만나기 몇 년 전에 존 플램스티드가 뉴턴과 만나 핼리와 비슷한 요지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다. 플램스티드가 답을 얻지 못한 이유는 대화와 토론만 하고 뉴턴에게 답을 안 물어봐서. [7] 결정적 이유로, 보면 알겠지만 대중서를 지향했어야 하는데 전부 라틴어로 쓰여있다.[8] 2015/12/15 한화 약 500만 원[9] 뉴턴 역시 혜성을 연구하긴 했지만 워낙 헛지거리에 쓴 시간이 많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