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케플러

 


<colbgcolor=#00001b><colcolor=white> '''본명'''
<colbgcolor=#ffffff>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국적'''
신성 로마 제국 [image]
'''출생'''
1571년 12월 27일
신성 로마 제국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바일데어슈타트
'''사망'''
1630년 11월 15일
신성 로마 제국 바이에른 주 레겐스부르크
'''학력'''
튀빙겐 대학교
'''직업'''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점성술사
'''종교'''
개신교(루터교회) → 결별[1]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그라츠 시절
2.3. 프라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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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지막 점성술사이자 첫 천체물리학자."

'''- 칼 세이건'''

점성술이라는 딸이 먹을 것을 벌어주지 않았다면 어머니인 천문학은 굶어죽었을 것이다.[2]

독일천문학자. '''갈릴레이와 함께 과학혁명의 선구자이자 천체역학의 창시자.'''
주요 업적으로는 행성 운동을 표현하는 케플러의 법칙이 있다.[3]

2. 생애



2.1. 초기


요하네스 케플러는 1571년 12월 27일에 신성 로마 제국 바일 데어 슈타트에서 칠삭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하인리히 케플러는 용병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나는 선술집의 딸로 참견쟁이였다. 집안도 가난한데다 칠삭둥이로 태어나 체격이 작고 병약했으며, 4살 때에는 천연두를 앓는 바람에 후유증으로 근시에 복시까지 겹쳤고, 내장 기관도 약했고, 손가락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케플러는 6살 때 1577년 '''대혜성'''을 목격했고, 천문학을 알게 되었으며 수학적으로 엄청난 재능을 가졌다. 뛰어난 지적 능력 덕분에 뷔르템베르크 계몽정책의 장학금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1589년에 케플러는 튀빙겐 대학교 신학부에 입학했으나, 하라는 신학은 안 하고 미하엘 매스틀린 밑에서 천문학을 배웠다. 이 때 매스틀린을 통해 접하게 된 지동설은 케플러가 지동설주의자로 된 큰 계기가 되었다. 이후 케플러는 23살 때 대학을 졸업하고 그라츠의 지역 수학자이자 교수로 부임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웅얼거렸고, 빈번히 강의 주제를 벗어나 옆길로 빠졌으며, 그라츠에서의 2번째 해에는 수강생이 1명도 없었을 정도로 말 못하게 지루한 강의였다.

2.2. 그라츠 시절


케플러는 플라톤의 정다면체들이 행성의 궤도에 꼭 들어맞을 것이라고 추측[4], 이것에 대한 이론과 지동설의 옹호를 섞어 《우주의 신비를 담은 우주 구조론의 선구자: 기하학의 다섯 정다면체를 통해 고찰한 천구의 놀라운 비례와 천체의 숫자·크기·운동 주기의 자세한 원인에 대한 증명》(통칭 '우주 구조의 신비')라는 책을 썼다. 이 플라톤적 우주론은 틀렸지만,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지동설을 대놓고 옹호한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자기 이론을 인정받고 싶었던 케플러는 유럽 각국의 천문학자들에게 책을 막무가내로 보내는 동시에[5] 뷔르템베르크 공작에게 "보석으로 모형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도 거룩한 기하학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하고 여차하면 공작의 잔으로도 쓸 수 있게 하겠다"면서 연구 후원을 신청했다. 그러나 신청서는 '''"값싸게 종이로나 만들어 짜샤"''' 와 함께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image]
케플러가 구상한 우주모형.
공작의 잔으로 쓰기는 어려워보인다(...).
케플러가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보낸 책들을 보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나도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지만, 물리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아직 논리의 타당성을 증명할 수 없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그런데, 책을 받은 사람들 중 니콜라우스 라이머스(이하 우르소)라는 작자 때문에 케플러는 '''신우주설 제창자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이후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와 함께 일하게 된다. 하지만 티코의 곁에는 이미 크리스티안 쇠렌센 롱고몬타누스, 프란츠 텡나겔, 요하네스 뮐러 등 여러 부하 천문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케플러의 존재감은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신경질적이었던 케플러는 아버지뻘 되는 티코에게 버럭버럭 대들었고, 얼마동안 같이 일하던 두 사람은 사이가 틀어져 케플러는 그라츠로 돌아가 버렸다.
그라츠 시절 케플러가 수학 교수 외에 맡은 일 중 하나가 예언과 부합하도록 점성력(占星曆)을 고치는 것이었는데, 터키의 침공과 추운 겨울을 예견했던 게 맞아 떨어지면서 명성을 얻고, 나중에는 황제 루돌프 2세의 재정적 지원까지 얻게 됐다.[6]

2.3. 프라하 시절


티코 브라헤가 죽은 후 브라헤의 관측 자료를 넘겨받은[7][8] 케플러는 루돌프 2세의 보호 아래 황실 수학자가 되어 안정을 얻은 뒤 자료 분석에 몰두했다.
유명한 케플러의 법칙 발견자로, 케플러가 처음 구하고자 한 목표는 지구의 궤도였는데 브라헤의 자료에 의하면 조금은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피타고라스를 비롯한 수천 년 가까이 대부분의 천문학자들이 완전한 원이라고 믿어왔던 지구의 궤도가 완전한 원이 아니라는 것을 믿기 힘들었던 케플러는 일단 지구 궤도는 접어두고 화성 궤도 연구로 방향을 돌렸다.
화성의 궤도를 구하기 위해 8년 동안 복잡하고 지루한 계산을 70여 차례나 되풀이했고, 결국 화성의 속도가 일정하지 않고 태양에 접근할 때 더 빨라지고 멀리 있을 때에는 느려진다는 케플러의 제2 법칙(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을 발견했다.
화성의 궤도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나온 수치가 브라헤의 관측 중 10회에서는 2'(분)의 차이로 일치했으나 다른 두 차례의 관측 자료에서 8'의 오차가 생겼기 때문에 고심을 거듭하다 결국 원형 궤도를 포기하고 타원 궤도 개념을 도입했고 이는 나머지 오차를 없애는 쾌거를 이뤘다.
1609년, 위의 두 법칙을 담은 '새로운 천문학(신천문학)'[9]을 출간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이용해서 새로운 발견을 했다는 소식을 접한 케플러는 쾰른의 에른스트 공작에게서 빌린 망원경을 이용해 광학 망원경 연구를 시작했고, 접안렌즈가 오목렌즈인 갈릴레이식과는 달리, '''접안렌즈가 볼록렌즈인 케플러식 망원경을 발명해냈다'''. 오늘날 천체 망원경 중 굴절 망원경은 대부분 갈릴레이식보다는 훨씬 넓은 영역을 볼 수 있는 케플러식이 선호되고 있다.
케플러는 갈릴레오가 망원경의 정확성을 의심받을 때 황실 수학자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갈릴레오를 보증해 주었고, 이것은 갈릴레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자신에게도 망원경을 보내 달라는 케플러의 요구를 번번히 무시했다. 이것은 과거 갈릴레오와 튀코가 혜성을 두고 논쟁을 했을 때, 갈릴레오는 혜성이 대기현상에 불과하다고 했고 튀코는 혜성이 토성보다 멀리에서 오는 천체라고 주장했는데, 이때 케플러가 튀코의 역성을 들었기 때문에 속좁은 갈릴레오가 케플러를 무시한 것이라고 추측되곤 한다.[10] 갈릴레오는 케플러를 무시했을 뿐 아니라 그의 행성운동법칙도 무시했다.
1618년 케플러는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행성 궤도의 긴 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내용의 제3법칙을 발표했고, '우주의 조화'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이에 대한 증명은 뉴턴이 했다.[11]
이후 행성 운행표를 출간하면서, 자신의 후원자였던 루돌프 2세를 기리는 뜻의 <루돌프 행성 운행표(루돌프표)>를 제목으로 붙였다. 이 표는 기존 코페르니쿠스의 것에 비해 행성의 위치를 30배나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해 주어 항해자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그 외에 기하학에서 케플러의 추측을 내놓았는데, 스스로는 수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했으며 이는 400년 뒤인 1998년에 미국의 수학자인 토머스 헤일스가 컴퓨터를 통해 증명했다.
말년에 들어서면서 30년 전쟁의 와중에 모든 후원자들을 잃고 가난으로 고생했으며, 후원자들과 돈을 구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 했다. 결국 추운 계절에 밀린 급료를 받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병을 얻게 되어 1630년 11월 15일에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성벽 밖 공동묘지에 묻힌 그의 무덤은 30년 전쟁 때 손실되고 말았다.
그가 죽던 때 하늘에서 유성우가 내렸다고 한다. 천체물리학의 기초를 연 학자의 죽음다운 사건. 케플러가 죽은 날짜는 황소자리 유성우와 사자자리 유성우가 관측될 무렵이므로, 아마 그 둘 중 하나 혹은 둘 모두였음직하다.
'꿈(Somnium)'이라는 초기 SF로 여겨지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실제 케플러의 생애와 유사했는데 거기서 자신의 어머니가 마녀라는 내용이 있었고 그걸 진짜로 믿어버린 사람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모친이 마녀로 몰려서 체포되었고 케플러는 모친이 마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성공하여 풀려났지만 후유증으로 그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1] 기독교 신앙을 버린 건 아니고, 교회일치운동이라 해서 개신교가톨릭을 화해시키려다 이단혐의를 받고 개무시를 받은 결과 자신의 신앙을 토대로 루터회와 결별하였다. 그러나 죽기 전까지 "나는 개신교와 가톨릭을 화해시키려고 했다"라고 유언한 것으로 보아, 믿음을 버린 것은 아닌 것 같다.[2] 원래 천문학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천체의 움직임을 분석해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점성술에서 유래하였다. 당시까지도 천문학과 점성술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상태로, 천문학자들에게 점성술은 일종의 생계수단이기도 했다. 케플러도 천체관측을 통한 미래 예언이 몇 번 맞아떨어지는 바람에 유명해지면서 황제의 후원까지 얻게 되었다.[3] 발표 당시에는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가설/추측 수준이었지만, 추후 아이작 뉴턴이 뉴턴 역학을 만들면서 이것이 모두 옳다고 증명하면서 '법칙'으로 확정되었다.[4] 예를 들자면, 수성의 궤도는 정사면체에 들어맞는다든지.[5] 갈릴레오 갈릴레이, 티코 브라헤, 니콜라우스 라이머스 등이 저 책을 받았다.[6] 사실 케플러는 뛰어난 고전 점성술사이기도 했다. 현대 점성술과는 다르다. 하지만 케플러 자신은 점성술이 아무런 가치 없는 쓰레기이고 그의 고객들은 멍청이라고 생각했다.[7] 티코 브라헤 문서에서는 케플러가 자료를 탐내고 있었고, 몇몇 학자들은 이를 노린 케플러의 독살설을 제기하기도 했다는 얘기가 실려있으나 만찬에서 화장실에 가는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생각해 급한 용무를 오랫동안 참다가 방광염에 걸리고 음식과 음주를 자제하라는 충고를 무시하는 바람에 악화되어 사망했다.[8] 티코 브라헤는 숨을 거두기 전에 자신의 관측 자료를 케플러에게 물려준다고 유언했다.[9] 책 이름에 nova가 들어간다고 '천문학 신성'이란 제목으로 너무 자주 오역당하는데, 라틴어에서 nova는 그냥 새롭다는 뜻의 형용사다. 즉 영어의 new 와 같다.[10] 실제로 갈릴레오는 케플러와 비교해서 인격적으로는 결함이 있는 편이었다. 내연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딸을 둘이나 낳고 자기 앞길에 거슬릴까봐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고, 결국 두 딸은 애비없는 자식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혼처도 못 구하고 수녀원에 들어가야 했다. 반면 케플러는 평생 가난과 고독으로 고통받았지만 가족을 저버린 적은 없었다. 천연두와 가난으로 아이들을 잃을 때마다 하늘이 무너지는듯 슬퍼했고, 어머니가 마녀로 몰렸을 때도 다른 일을 다 미뤄두고 어머니를 전투적으로 변호해서 마녀가 아님을 입증하여 풀려나게 만들었다.[11] 증명 : 공전 궤도가 완벽한 원형이라고 가정했을 때, 장반지름을 a, 주기를 p라 하면 $$F=GMm/r^2=mv^2/r$$이고 이는 $$GM/r=v^2, r=a$$이라 가정했으니 $$Gm/a=v^2, v=2\pi a/p$$이니 $$Gm/a=4{\pi}^2a^2/p^2$$, 이 때 $$a^3=GMp^2/4{\pi}^2$$이므로 $$a^3$$는 $$p^2$$에 비례한다. 하지만 이 증명은 공전 궤도가 완벽한 원형이라고 가정했을 때이며, 태양계 행성의 공전궤도는 타원이라는 케플러 제 1법칙에 위배된다. 따라서 더욱 정확한 증명은 미적분을 활용해야하며, 이것은 대학교 수준의 수학과 물리학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