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레너
1. 생애[2]
1.1. 선수 생활
1.1.1. 클럽
레너는 TSV 슈바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센터 포워드로 활동했으며, 8살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소속팀은 1935년에 가울리가[3] 바이에른에서 11위를 거두며 강등당했고, 1938년에 가울리가에 다시 올라왔지만 다음 시즌에 다시 강등당했다. 이에 실망한 레너는 더 성적이 좋은 지역 라이벌 BC 아우크스부르크로 이적하고 싶어했지만 소속팀에서는 당연히 이를 막았다. 결국 1940년, 군대 문제로 베를린에 갔고 2년간 블라우바이스 90 베를린 소속으로 보낸 후 다시 슈바벤으로 복귀했다.
2차 대전 이후 2시즌 동안 슈바벤에서 58경기에 출전, 19골을 넣었고 1947년에 빅토리아 아샤펜부르크로 이적하였다. 동시에 지역 스포츠 사무실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5시즌간 40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넣었다. 레너는 1951년에 야샤펜부르크의 선수 겸 감독이 되었으며 1952 시즌에 은퇴하였다.
그의 친정팀 TSV 슈바벤 아우크스부르크는 홈구장의 이름에 그의 이름을 헌정, 에른스트 레너 슈타디온으로 이름 붙여 그를 기념하고 있다.
1.1.2. 국가대표
레너의 국가대표팀 데뷔전은 1933년 11월, 스위스를 상대로 치렀으며 독일은 2대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 빠른 스피드로 관중들의 눈을 사로잡았지만 득점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레너는 이탈리아 월드컵의 모든 경기에 참가하였고, 3,4위전이었던 오스트리아와의 시합에서 2골을 넣으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특히 레너가 넣은 선제골은 25초 만에 기록된 골로 당시 월드컵 기록이었다.[4] 마티아스 하이데만의 슈팅을 오스트리아의 골키퍼 플라처가 제대로 방어를 하지 못했고, 레너가 재차 슈팅으로 골을 기록하였다.
그 이후에도 득점포를 꾸준히 가동하여 1940년에는 독일 대표팀 최다 득점자로 올라섰고 31골의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1955년 프리츠 발터가 경신하였고 2006년까지 독일 대표팀 내에서 10위 안에 드는 기록이었다.
1.2. 이후
빅토리아 아샤펜부르크와 다름슈타트의 감독을 맡은 이후에는 지역 스포츠 사무실에서 계속 일했다고 전해진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당대 최고의 스피드 윙어. 더불어 기술과 킥이 뛰어났다. 특히 그는 코너킥에서 위력을 발휘했는데 월드컵 지역 예선 에스토니아전에서는 후반에 코너킥으로만 두 개의 어시스트를 올린 적도 있다. 그래서 유럽 최고의 비프로 선수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5]
그의 아웃사이드 포워드로서의 플레이 방식은 내가 원하던 방식이다: 항상 공을 잡을 준비가 되었고, 경기의 외곽에서 다른 외곽까지 가동범위를 넓혔으며, 훌륭한 드리블러에 양발 슈터였다.
헬무트 쇤(1978, Fußball 중에서)
3. 수상
3.1. 클럽
- 가울리가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우승 1회: 1942(블라우바이스 90 베를린)
3.2. 국가대표
3.3. 감독
- 헤센리가 우승 2회: 1962, 1964(SV 다름슈타트 98)
3.4. 개인
- 독일 공로훈장 공로십자장: 1971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나치 독일 시대의 최상위 지역 리그. 여기에서 우승하면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 진출할 수 있었다.[4] 지금도 역대 월드컵 3위 기록이다.[5] 당시 독일 축구계가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