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하펠

 

'''에른스트 하펠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알프레드 리들
(1990~1991)
(감독대행: 디트마르 콘스탄티니)

'''에른스트 하펠
(1991~1992)'''
(감독대행: 디트마르 콘스탄티니)


헤르베르트 프로하스카
(1993~1999)



''' 오스트리아의 축구감독 '''
''' 이름 '''
'''에른스트 하펠'''
'''Ernst Happel'''
''' 본명 '''
에른스트 프란츠 헤르만 하펠
Ernst Franz Hermann Happel
''' 출생 '''
1925년 11월 29일 /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 사망 '''
1992년 11월 14일 (향년 66세) /
오스트리아 티롤주 인스부르크시
''' 국적 '''
오스트리아
''' 신체 '''
178cm
''' 직업 '''
축구선수(수비수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SK 라피트 빈(1942-1954)
라싱 클뢰브 드 파리(1954~1956)
SK 라피트 빈(1956~1959)
''' 감독 '''
ADO 덴 하흐(1962~1969)
'''페예노르트 로테르담(1969~1973)'''
세비야 FC(1973)
클뤼프 브뤼허 KV(1975~1978)
'''네덜란드 대표팀(1978)'''
KRC 하럴버커(1979)
스탕다르 리에주(1979~1981)
'''함부르크 SV(1981~1987)'''
FC 티롤 인스브루크(1987~1991)
오스트리아 대표팀(1991~1992)
''' 국가대표 '''
51경기 5골(오스트리아 / 1947~1958)
<color=#373a3c> ''' FIFA 월드컵 준우승 감독 '''
미헬스(1974)(1978)데어발(1982)
1. 개요
2. 축구인 생활
2.1. 선수
2.2. 감독
3. 여담


1. 개요


오스트리아축구선수 출신 감독.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오스트리아 축구 역사상 이론의 여지 없이 가장 위대했던 감독. 여러 클럽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려 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감독중에 하나에 속한다. 최초로 4개국에서 우승을 경험한 감독이었으며.[1] 1970년1983년에 각각 페예노르트함부르크 SV에서 유러피언 컵에서 우승했는데 이는 최초로 두 개 이상의 클럽에서 빅 이어를 들어올린 감독기록이 되었다.[2]

2. 축구인 생활



에른스트 하펠의 타계 20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2012년, ORF 방영.)

2.1. 선수


[image]
라피드 빈 시절의 모습.
1938년에 라피드 빈의 유소년팀에 입단해 선수생활을 시작하여 1942년에 선수로 데뷔, 이후 1959년까지 RC 파리 등을 거치며 화려한 선수생활을 했다. 그리고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오스트리아를 3위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했다.

2.2. 감독


[image]
1965년 ADO 감독시절의 모습.
[image]
1970년 유러피언컵 우승 당시의 모습.
1962년에 네덜란드 ADO 덴 하흐의 감독으로 데뷔한 뒤 1968년에 팀을 네덜란드 컵에서 우승시킨 것을 시작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1968년에 페예노르트로 팀을 옮겨 1970년 유러피안컵 우승/인터컨티넨탈 컵 우승과 1971년 에레디비시 우승을 했다.
[image]
1977년 벨기에리그 우승 당시의 모습.
[image]
1978년 네덜란드 국대 감독 시절의 모습.
이후 1973년에 클뤼프 브리허로 감독직을 옮겨 벨기에리그 3연패(1976~78) 달성과 1977년 벨기에 컵 우승을 이룬 뒤 1978년에 유러피안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당대 천하무적팀 리버풀 FC의 유러피안컵 2연패 달성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으나, 벨기에 축구 역사상 유일한 유러피안컵 결승 진출이라는 대업을 이룬 뒤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에서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을 맡아 네덜란드를 결승전을 다시 결승에 진출시켰으나,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다.[3] 그래도 그는 역대 월드컵을 통틀어 월드컵에서 타국의 국가대표팀을 지휘하여 월드컵 결승까지 올라본 단 둘 뿐인 외국인 감독이기도 하다.[4]
[image]
HSV 감독 시절의 모습.

1990년 방송 인터뷰 영상.
[image]
생애 말년인 1992년 대표팀 감독시절 모습. 폐암을 앓았던 탓인지 너무 수척해져 있다.
이후 벨기에로 돌아가 팀을 2개나 거치다가 1981년에 독일 함부르크 SV의 감독을 맡아 펠릭스 마가트, 만프레드 칼츠 등을 축으로 1982년과 1983년에 분데스리가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하여 1983년 유러피안 컵 우승, 1987년 DFB-포칼을 우승한 뒤에 고국인 오스트리아의 클럽팀 FC 슈와로프스키 티롤(현 FC 바커 인스브루크)를 맡아 1988년과 1989년에 오스트리아 리그 우승과 1989년 오스트리아 컵 우승을 이끌어냈고, 1992년에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수장으로 부임해서 불철주야 활동하다 그해 11월 14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평소에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는 골초였던 탓에 그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이다.
사후에 그의 업적을 기려 오스트리아의 최대 경기장인 빈 프라터슈타디온 (Praterstadion)을 에른스트 하펠 슈타디온으로 개칭하였다.[5]

3. 여담


리누스 미헬스와는 묘한 라이벌 관계이기도 하다. 둘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준우승을 하였고, 각각 페예노르트 로테르담AFC 아약스를 이끌며 팀에게 첫 빅 이어를 안겨주면서 명성을 높이기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둘 다 같은해에 축구인생을 마무리했다는 점이 흥미롭다.[6]
후고 마이슬오스트리아 축구감독 순위를 메길 때 1, 2위를 다투는 감독이다.
[1]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 오스트리아[2] 지금까지 이 기록을 가진 감독은 하펠 감독 포함해 5명뿐인데 오트마어 히츠펠트, 주제 무리뉴, 유프 하인케스, 카를로 안첼로티다.[3] 그러나 해당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와 함깨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월드컵'''으로 평가되었다. 당시 주최국을 우승시키기 위해 당국이 유럽강호들을 한조에 묶여 죽음의 조를 만드는 등 만행을 저질렀으며, 승부조작 의혹이 있다.[4] 다른 한 사람은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에서 스웨덴 대표팀을 이끌어 준우승을 기록한 잉글랜드 출신의 조지 레이너 감독.[5] 최대 53,808 수용가능하며 오스트리아 국가대표 홈구장이다. 유로 2008 결승전이 여기서 진행됐다.[6] 정확히 말하자면 미헬스는 은퇴, 하펠은 재임중 지병으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