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프 하인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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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축구선수 출신 前 감독.
현역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로, 분데스리가 통산 369경기에 출장해 220골[3] 을 기록하고 분데스리가, 유러피언컵, UEFA 컵 위너스컵, UEFA컵에서 모두 득점왕을 경험해본 선수였다. 출신지의 연고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레전드로 글라트바흐의 전성기인 6~70년대에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분데스리가 4회 우승, DFB-포칼 1회 우승, UEFA컵 1회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서독 대표팀으로도 39경기에 출장해 14골을 기록했으며, 유로 1972와 1974 서독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1년 뒤, 친정팀 묀헨글라트바흐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8시즌간 지휘하였다. 이후, 독일 출신의 감독으로는 이례적으로 라리가에 진출하여 레알 마드리드 CF의 감독을 맡아 팀에 32년 만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안기는 등의 성공을 거뒀지만,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 최정상급 레벨의 감독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4]
그러나 이후, 66세의 고령으로 복귀해 바이어 04 레버쿠젠과 FC 바이에른 뮌헨을 이끌며 결국 뮌헨에서 감독 인생의 마지막을 트레블로 장식하고[5] 화려하게 은퇴했고, 2017년에는 위기에 빠진 바이에른 뮌헨의 소방수로 다시 돌아와 안첼로티가 망쳐놓다시피한 팀을 빠르게 재건해 명성을 재확인했다.
2. 선수 시절
하인케스는 1964년 당시 2부 리그 소속이었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데뷔했다. 다음 시즌 팀은 바이스바일러 감독의 휘하에서 팀의 분데스리가 승격을 이끌었다. 1967년엔 하노버 96으로 이적해 3시즌간 활약했다.
그리고 1970년, 친정팀 글라트바흐로 복귀해 은퇴할 때까지 뛰었으며, 이적 직후시즌인 70-71시즌에 팀은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72-73시즌에는 팀의 UEFA 컵 준우승을 이끌었으며, 하인케스는 12골로 득점왕을 차지한다. 73-74, 74-75 시즌에는 각각 30골, 27골로 리가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74-75 시즌에는 당대 최강 바이에른을 제치고 다시 한번 팀에 마이스터 샬레[6] 를 선사한 데 이어 UEFA컵에서도 결승 2차전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며 팀의 더블을 이끈다. 이후 하인케스는 74-75 UEFA컵에서도 10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76-77 시즌에는 팀의 유러피언컵 결승행을 이끌었으나 결승에서 리버풀 FC에게 3:1로 패하면서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래도 하인케스는 이 시즌 6골로 유러피언컵 득점왕에 오른다. 리가 내에서는 3년 연속으로 마이스터 샬레를 가져 오는데에 성공한다.
분데스리가에서만 통산 220골을 기록했고 이 기록은 현재까지 통산 득점 4위으로 남아 있다.
이후 1978년 33세의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한다.
3. 감독 시절
은퇴 후 이듬해에 하인케스는 묀헨글라트바흐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곧바로 우도 라테크의 뒤를 이어 8년 동안 친정팀 글라트바흐의 지휘봉을 잡았다.
1987-88 시즌을 앞두고 하인케스는 독일 최강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에 부임하고, 이후 4시즌 동안 두 번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나 90-91 시즌, 세대 교체에 실패하며 부진에 빠지자 결국 경질되었다.
이후 1991-92 시즌, 하인케스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아틀레틱 빌바오의 지휘봉을 잡는다. 이듬해인 92-93 시즌에는 라리가 5위를 기록하며 빌바오의 UEFA컵 진출을 이끈다. 94-95 시즌에는 잠깐 분데스리가로 돌아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지휘봉을 잡았으나 선수단과의 마찰로 인해 9개월만에 잔여 시즌을 포기하고 팀과의 계약을 해지하였다.
1995-96 시즌,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온 하인케스는 하위권 CD 테네리페의 감독이 되어 한 시즌만에 팀의 UEFA컵 진출을 이끌었고 이듬해에는 UEFA컵 준결승까지 진출시키는 쾌거를 이룬다.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1997년 스페인 최고 명문 레알 마드리드 CF의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7]
그렇게 레알의 감독으로 부임한 1997-98 시즌, 하인케스는 레알의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며 감독 커리어 사상 첫 유럽대항전 타이틀을 얻는다. 이는 레알 마드리드가 32년만에 들어올린 7번째 빅 이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리그 내에서는 죽을 쑤며 4위에 그친데다 엘 클라시코에서 승리하지 못하자 한 시즌만에 경질되고 말았다는 게 그동안 국내 많은 축구 팬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2019년에 당시 레알 마드리드 회장이었던 로렌소 산스가 하인케스와 결별하게 된 이유를 밝힌 바에 따르면, 하인케스와 작별한 이유는 하인케스가 먼저 떠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벤투스와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일주일 앞두고 산스는 하인케스에게 안부 전화를 했는데, 그로부터 앞으로 레알 마드리드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한 직후 하인케스는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게 된다. 그래도 레알 마드리드의 황금기를 다시 개막한 공은 크다고 볼 수 있다.[8]
다음 시즌 하인케스는 SL 벤피카 감독직을 맡고, 그 이듬해에는 다시 아틀레틱 클루브의 사령탑으로 부임해 2시즌간 팀을 이끌지만 지난번처럼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지는 못했다.
3.1. 분데스리가로의 복귀와 부진, 은퇴
2003-04 시즌을 앞두고 하인케스 감독은 독일로 돌아왔다. 복귀 무대의 첫 도전은 FC 샬케 04의 사령탑. 하지만 큰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고, 팀은 중위권에 머무르다 시즌을 7위로 마감했다. 하인케스는 그 해 9월까지 감독직을 맡다가 물러났다.
약 2년간의 공백기 끝에 2006-07 시즌, 하인케스는 고향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 복귀한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글라트바흐는 14경기 연속 무승을 달리며 강등권인 17위로 추락했고, 하인케스는 2007년 1월 31일 감독직에서 사임하며 은퇴를 선언했다.
3.2. 은퇴 번복과 복귀
은퇴 후 고향 글라트바흐에서 지내던 하인케스는 08-09 시즌 막바지에 깜짝 복귀했다. 위르겐 클린스만 체제 하의 FC 바이에른 뮌헨이 시즌 내내 졸전을 펼친 끝에 4위로 처지며 UEFA 유로파 리그로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긴급 소방수로 선임된 감독이 하인케스였던 것. 그렇게 2009년 4월 27일 클린스만이 경질되자 바이에른의 감독직을 맡게 되었고, 다행히 팀의 연승 행진을 이끌며 바이에른은 2위로 올려놓으며 UEFA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따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2009년 6월 5일, 바이어 04 레버쿠젠은 전임 감독 라바디아가 함부르크 SV로 떠나고 몇 시간 후 하인케스를 영입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하인케스의 레버쿠젠은 많은 공격루트를 양산해내며 09-10 시즌 4위에 오르더니, 10-11 시즌에는 분데스리가 준우승을 차지하며 부흥한다. 특히 아르투로 비달의 가파른 성장, 슈테판 키슬링의 재발견, 바이에른에서 임대해온 토니 크로스의 잠재력을 알아본 이도 모두 하인케스였다.[9] 그리고 2010-11 시즌 종료를 앞두고, 루이 판할의 후임으로 다시 바이에른 뮌헨 감독직에 복귀하는 것이 결정된다.
3.3. 트레블, 그리고 여정의 끝
2011-12 시즌, 하인케스는 이사진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공-수 양면의 선수 보강을 통해 2010-11 시즌 무관으로 죽을 쑤던 것과는 달리 팀을 한 시즌 만에 유럽 정상급 팀으로 탈바꿈시킨다. 특히 지난 시즌 '3골을 먹히면 5골을 넣어서 이긴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안 좋은 수비력을 보이던 뮌헨의 수비진은 무려 1011분 무실점을 기록할 정도의 통곡의 벽의 수비진으로 탈바꿈한다. 제롬 보아텡과 하피냐, 마누엘 노이어 등 수비진-골키퍼의 알짜배기 영입에 하인케스의 수비전술의 변화 덕택인 것.
뮌헨은 전반기 2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승점 4점을 앞선 선두로 마감한다. 후반기에는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부상 공백에 토니 크로스와 아르연 로번, 토마스 뮐러 등이 동반 부진에 빠지며 무재배-뜬금패-무재배의 부진을 겪는다.
부상자가 속출했던 것은 팀의 얇은 스쿼드로[11] 분데스리가, DFB-포칼, UEFA 챔피언스 리그를 모두 병행하며 컨디션이 극도로 저하된 것이 원인이었다.[12] 결국 30R 도르트문트와의 단두대 매치에서 1:0으로 패했고, 31라운드에서는 1.FSV 마인츠05와 0:0 무승부를 거두며 도르트문트와는 승점 8점차가 나버려 리그 우승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DFB-포칼 결승에서 다시 한 번 데어 클라시커를 치렀으나 졸전 끝에 5:2로 패하며 자국 리그, 컵대회 모두 라이벌 도르트문트에게 내준 데 이어 레알 마드리드와의 혈투 끝에 결승에 진출한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홈에서 첼시 FC의 영혼의 10백과 디디에 드록바에게 당해 승부차기에서 이비차 올리치와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실축하며 빅이어를 내줘야만 했고, 결국 2011-12 시즌 결과는 그 유명한 '''트리플 러너업'''이 되고 말았다.[13]
그렇게 절치부심한 2012-13 시즌에는 서브 부실로 피눈물을 흘렸던 바이에른은 다시 한 번 '''분노의 영입'''을 시전하며 하비 마르티네스와 단테 본핌, 마리오 만주키치, 제르단 샤키리, 클라우디오 피사로를 사왔다.
독일 슈퍼컵에서의 시즌 첫 데어 클라시커에서는 신입생들의 활약으로 도르트문트를 꺾으며 우승하더니 2012-13 시즌 바이에른 뮌헨을 이끌고 역대 최다 승(29승), 역대 최소 패(1패), 역대 최다 승점(91점), 역대 최단기간 우승(28라운드)[14] , 2위와의 최다 승점차(25점), 역대 최소 실점(18실점), 개막전 기점 최다 연승(8연승), 최다 원정승(15승), 최단기간 전반기 우승(14라운드) 등의 기록을 쓰며분데스리가의 역대 기록이란 기록은 모두 갈아치우며 우승하였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조 1위를 차지하며 선두로 올라와 아스날 FC를 원정에서 꺾고 유벤투스 FC를 1, 2차전 모두 2:0으로 침몰시키더니 4강에서는 당시 세계 최강으로 불리던 FC 바르셀로나를 홈에서 4:0, 원정에서 3:0으로 승리를 거두며 합산 점수 7:0으로 대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은 공교롭게도 영국 축구의 심장 웸블리 스타디움에서의 데어 클라시커. 지난 시즌 도르트문트 전에서 연이어 피눈물을 흘렸던 아르연 로번의 결승골로 2:1로 승리하며 팀 역사상 다섯 번째 빅이어를 들어올리면서, 하인케스 본인 커리어의 두 번째 유럽 정복에 성공했다.
포칼에서도 결승전에서 VfB 슈투트가르트를 꺾으며 역대 최다 득점으로(20골) 우승에 성공하며 바이에른 뮌헨의 독일 클럽 사상 최초로 트레블 우승을 이끌었다. 2012-13 시즌 바이에른이 기록한 골은 무려 '''153골.''' 시즌 중이었던 2월에 2012-13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던 하인케스는 결국 '''팀의 트레블 우승 후 아름답게 은퇴하게 된다.'''[15] 은퇴 선언 이후 뮌헨의 칼 하인츠 루메니게 사장과 마티아스 잠머 단장은 하인케스를 구단의 기술고문으로 임명하여 자문을 구하려고 했으나, 하인케스는 트레블을 이룬 자신이 구단에 잔류할 경우 후임인 펩 과르디올라 감독에게 부담이 될 것이라는 판단으로 정중히 거절했다. 그렇게 하인케스는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소일거리를 하며 실버라이프를 즐기고 있었다.
3.4. 또 한 번의 복귀
그런데 과르디올라의 후임으로 온 카를로 안첼로티가 2017년 9월 28일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자, 대체자를 구하던 뮌헨은 하인케스에게 SOS를 청했고, 하인케스는 10월 9일자로 '사랑하는 팀의 부름에 오게 되었다'며 은퇴한지 4년 만에 감독으로 복귀하게 되었다.[16] 계약기간은 2017-18 시즌이 끝날 때까지이다. 바이에른 뮌헨 감독 부임만 무려 네 번째이다.
하인케스는 공식 기자회견에서 어려운 상황이지만 팀이 정상 궤도를 찾을 거라 확신한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 또한 독일어를 못하는 하메스 로드리게스를 도울 것이고[17] # 국가대표에 차출된 아르투로 비달의 조기 복귀를 요청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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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 후 첫 훈련 모습 사진이 공개되었다.
리그 8라운드에서 프라이부르크를 상대로 무려 5:0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뮌헨의 훈련에 1500여 명의 관중이 찾아왔고 프라이부르크 전 대승에 환호했다. #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B조 3라운드 셀틱과의 경기에서도 3:0으로 완승, 조 2위로 올라섰으며 성공적인 챔스 복귀전을 치렀다. 바이에른이 완벽히 정상화 된 것, 그리고 폼이 하락했던 토마스 뮐러를 극찬하며 자신이 알던 뮐러가 돌아왔다며 극찬했다. #
11월 1일 시점에서는 현재 그야말로 '''하인케스 매직'''이 뭔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공식 경기 5연승에 리그 1위 자리를 되찾았고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와 토마스 뮐러가 전부 결장하게 되어 '''전문 공격수가 단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셀틱 원정을 떠나 그야말로 뚝심으로 이겨내''' 조기 16강 확정을 이뤄냈다.
스피드만 빠르지 크로스나 컷백 정확도는 0에 가까워 팬들로 하여금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게 만들던 킹슬리 코망을 전성기 프랑크 리베리가 생각나게 할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윙어로 만들더니, 활용도가 애매하던 하메스 로드리게스를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고, 프리시즌에 오랜만에 중앙으로 뛰어보았으나 크게 떨어진 기량으로 팬들을 실망시켰던 하비 마르티네즈는 다시 미드필더로 대활약 중이며, 가장 결정적으로 토마스 뮐러가 부활했다. 하인케스 복귀 후 승점 5점차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선두를 허용했던 뮌헨은 리그 1위 자리를 탈환했고[18] , 챔스는 16강행을 확정지었으며, 전승 행진을 달리고 있다.
리그 선두를 결정짓는 11월 5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경기에서 3:1 승리를 거두며 1위 자리를 탈환하였다.
11월 18일 아우크스부르크전에서 3:0 승리를 거두며 선수 시절 포함 분데스리가 500승을 달성하였다.[19] 또한 분데스리가 30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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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첼로티 시절의 뮌헨과 비교하면 하인케스 뮌헨의 상황이 모든 면에서 좋아졌음을 알수 있다.
계약 연장을 언급한 울리 회네스 회장의 발언에, 하인케스 감독은 "계약은 그대로 진행될 것”이라며 연장 없이 내년 6월 30일까지만 바이에른을 이끌 것이라며 올 시즌까지만 팀을 이끌고 은퇴할 것임을 못박았다. #
많은 팬들의 시선이 모아졌던 조별리그 6차전 파리 생제르맹과의 일전에서는 '''주전이 다수 빠졌음에도 말 그대로 풀 주전의 파리를 참교육시키며''' 연륜과 클라스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안티 네이마르 플랜과 파리의 약점들을 정확히 공략한 하인케스의 전술은 이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쿼드 면면을 보면 어느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데, 중원의 핵이자 플레이메이커 티아고 알칸타라와 최고의 수문장 마누엘 노이어가 장기 부상으로 쓰러졌고, 베테랑 돌격대장 아르연 로번 역시 부상으로 이탈했으며, 토마스 뮐러, 아르투로 비달과 제롬 보아텡은 부상 여파로 후반 막판에 잠깐 뛰거나 아예 벤치에서만 지켜봐야 했다. 이들의 공백을 거의 완벽에 가까이 메워낸 건 로타어 마테우스에게 비아냥을 듣던 백업 골리 스벤 울라이히와 갓 이적해온 제바스티안 루디, 그리고 마찬가지로 갓 이적해 왔으며 22세, 23세에 불과한 코랑탱 톨리소와 니클라스 쥘레였다. 프랑크 리베리 역시 장기 부상에서 돌아와 주말에 교체 투입 한 번 뛴 다음 두 번째 경기였는데 전술적으로 매우 훌륭하게 유프의 플랜을 이행했다. 이토록 스쿼드가 거의 반토막났는데도 팀을 최강으로 유지시키는 것을 보면 유프 하인케스 감독의 능력이 경이로울 따름.
분데스리가 후반기 첫 경기인 레버쿠젠 원정 경기에서도 그의 진가가 발휘되었다. 최전방 원톱 레반도프스키가 가벼운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하게 되어 뮐러를 또 한 번 원톱에 배치했는데, 그러고서도 3:1 완승을 거두었다. 이 경기가 의미있는 것은 하인케스 감독이 트레블을 달성할 당시의 승리가 레버쿠젠 원정에서 바이언의 마지막 승리였기 때문이다. 그가 은퇴하고 무려 4시즌 동안이나 승리가 없던 레버쿠젠 원정 경기에서 완승을 거둠으로써 자신의 진가를 어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22라운드 샬케전에서는 독감으로 벤치에 앉지 못하고 수석코치 페터 헤어만이 대신 지휘봉을 잡았다. 헤어만의 말에 의하면 경기가 끝나자마자 승리 축하한다고 문자를 보내셨다고.
헤르타 베를린과의 리그 24라운드가 종료된 현재, 공식전 22승 2무 1패를 기록 중이다. 저 2무는 RB 라이프치히한테 승부차기로 이긴 것, 헤르타의 극단적 텐백에 무를 캔 것이다. 부상자가 속출했던 와중에 포칼에서 라이프치히와 도르트문트를 연이어 만나는 등, 순탄치만은 않은 일정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대단한 성적이라 할 수 있다.
하인케스는 다시 한 번 본인의 계약이 이번 시즌까지임을 재확인했다. 뮌헨 보드진이 후임 감독 선임에 난항을 겪고 있는 가운데 하인케스 감독에게 재계약을 제안했었으나 하인케스 본인이 이번 시즌까지라고 확실하게 못을 박아버렸다. # 유프 하인케스 감독의 나이가 만 72세를 넘은 고령임을 감안한다면 더 이상 감독 생활을 하기엔 확실히 무리가 있다.[20]
그리고 2018년 4월 13일, 현 프랑크푸르트 감독인 니코 코바치가 바이에른의 후임 감독으로 확정되었다.
4월 7일 아우크스부르크와의 리그 경기에서 4:1 대승을 거두며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고, 나흘 뒤 치른 세비야와의 챔피언스 리그 8강 2차전에서는 0:0 무승부를 거두며 합계 점수 2:1로 4강 진출에 성공했다.[21] 시즌 초반에 리그 우승은 커녕 챔피언스리그 진출조차 힘겨울 거라고 여겨졌던 바이에른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으니 정말 특급 소방수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심지어 4월 17일 치른 포칼 4강전 레버쿠젠 원정에서는 무려 6:2 대승을 거두며 손쉽게 결승에 진출했다. 뮐러가 4년 만에 해트트릭을 기록한 건 덤.
챔스 4강에서는 레알 마드리드를 만났고, 5년 전 바르셀로나를 만났을 때처럼 자신은 레알을 잘 알고 있다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감을 내비치며 팬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 말을 증명하듯이 전반적으로 뮌헨은 레알을 상대로 약우위의 경기력을 보이며 트레블 명장의 클래스를 보여주었지만, 1차전 초반에 나온 로번과 보아텡의 부상은 그가 교체 투입을 통한 전술 변화를 꾀하는 것을 방해하고 전반적인 게임 플랜을 꼬아버렸으며, 여기에 하피냐의 치명적인 패스미스가 쐐기를 박으며 패배하고 말았다. 2차전 역시 비슷한 양상으로 이번에는 부상을 없었지만 하필이면 시즌 내내 훌륭하게 노이어의 공백을 대체해준 스벤 울라이히가 치명적인 판단 미스로 골을 내주면서 합산 점수 3:4로 탈락하고 말았다.
비록 4강에서 탈락하면서 트레블의 영광을 재현하는데는 실패했으나, 4년 전에 비해 상당히 노쇠하고 망가진 스쿼드를 가지고도 레알을 끝까지 몰아붙인 그의 역량은 축구팬들에게 감탄을 이끌어내기 충분했다. 특히나 이번 탈락의 경우는 선수들의 실수와 부상 변수가 워낙 치명적이었다는것을 축구팬들도 인지했기 때문인지 하인케스 감독이 비판받는 일은 없었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마지막 챔피언스 리그였지만 끝까지 강력한 포스를 보여주며 뮌헨 팬들 이외의 해외축구 팬들에게도 강력한 인상을 심어줬던 복귀였다.
하인케스 감독은 이후 인터뷰에서 더 이상 벤치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이제 완전한 은퇴를 하겠다는 인터뷰를 했다. #
마지막 경기였던 포칼 결승에서는 프랑크푸르트에게 충격적인 1:3 패배를 당하면서 더블을 이루는 데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팬들은 패배 직후 감사를 표하는 플래카드를 꺼내며 하인케스 감독에 대한 예의를 지켰다. 그리고 다음 날 뮌헨 마리엔 광장에서 열린 리그 우승 축하 행사에도 많은 팬들이 찾아오며 감독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이에 하인케스 감독은 전날 밤 패배에도 많은 사람들이 와줘서 고맙다며 팬들에게 맞인사를 해주었다.
2018년 7월 20일 본인의 업적을 기리는 특별 전시회가 알리안츠 아레나 내 뮌헨 구단 박물관에 열렸고, 개장 행사에 참석했다.
8월말 슈바인슈타이거의 고별 경기에 참석해 오랜만에 만나는 자신의 제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한편 하인케스의 은퇴 후 뮌헨은 챔스에서 리버풀 FC한테 무기력하게 홈에서 1:3으로 패하면서 '''8년 만에 16강에서 탈락한다.''' [22] 그러나 이후 2019-20 시즌은 하인케스의 제자 한스디터 플리크 감독이 하인케스 시절의 압박과 조직력 높은 공격축구를 되살리며 팀을 정상 궤도로 올려놓았고, 사상 첫 챔피언스 리그 전승 우승이라는 업적과 함께 팀의 두번째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하인케스로서는 사랑하는 제자가 사랑하는 팀을 부활시켰으니 감동적일 수 밖에 없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0:6 이라는 치욕스러운 점수 차로 패하자 독일 국민들은 요하임 뢰브를 경질 시키고 하인케스를 감독으로 선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하인케스의 확실한 은퇴 의사 때문에 가능성 자체는 상당히 낮다.
4. 전술 철학
그야말로 다재다능하다. 실리적인 전술, 주도적인 전술, 강력한 압박과 피지컬을 동원한 역동적인 압박 전술, 적절한 교체 카드와 포메이션 활용까지 못하는 게 없는 팔방미인 감독. 선발을 정할 땐 단호하면서도 플랜을 수정해야 할 경우에는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매우 유연하게 대처한다.[23]
강팀뿐만 아니라 아무리 약한 팀을 상대할 때도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는데, 대표적인 예시로 2017-18 시즌 DFB-포칼 8강에서 SC 파더보른과의 경기를 앞두고 휴일에 파더보른 경기를 두 경기나 챙겨보고 분석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파더보른은 현 독일 3부 리그 소속으로, 당시 포칼컵 8강 진출 팀 중 가장 약한 팀이었다. 분데스리가 선두를 질주하는 바이에른 입장에서는 대수롭지 않을 만한 상대였으나, 하인케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석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6-0 대승을 거두며 4강 진출에 성공했다.
11-12 시즌과 12-13 시즌은 중원에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를 빌드업의 코어로 삼으면서 그의 파트너로 수비적인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인 루이스 구스타보, 하비 마르티네즈를 배치한 4-2-3-1 포메이션을 필두로 한 압박 전술과 빠른 템포의 빌드업을 주 무기로 한 팀을 운용했는데, 감독처럼 팔방미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 슈바인슈타이거를 공-수 및 전환에서 매우 유연하게 활용하면서도 빠른 빌드업 플레이를 지향하는 전술을 펼쳤다. 당시 바이에른 뮌헨의 에이스로는 리베리나 로번을 떠올리기 쉽상이지만, 슈바인슈타이거야 말로 당시 하인케스의 진정한 전술적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기에서는 바이에른 뮌헨이 강한 압박과 역동적인 빌드업을 베이스로 상대의 혼을 빼놓는 선굵은 축구를 추구했기 때문에 슈바인슈타이거는 자연스레 박스 투 박스처럼 양 박스를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공-수에 모두 고르게 기여했지만, 끈질기게 점유하며 지공을 펼쳐야 할 상황에는 후방에서 경기의 전체적인 템포와 조율을 담당하면서 롱패스 기회도 틈틈이 노리는 후방 플레이메이커의 역할까지도 담당했다. 또한 공격 숫자 및 전방 압박 숫자가 더 필요할 때는 롱패스 능력을 장착한 수비수들인 제롬 보아텡, 홀거 바트슈투버, 단테 본핌 등에게 후방 플레이메이킹을 맡기고 2선에 가담해 공격에 가담하기도 했다. 어떻게보면 전술적으로 프리롤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이 모든 건 하인케스의 슈바인슈타이거의 결단력과 유연함을 향한 신뢰, 그리고 그의 파트너인 하비 마르티네즈의 슈바인슈타이거가 특정 역할을 담당할 때 여백의 역할을 담당하는 커버 및 수비 능력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과감한 운영이다. 주 공격루트는 후방 및 중원에서 바이에른 뮌헨이 자랑하는 양 측면을 향한 빠른 전진패스 후 측면에서의 공격 전개를 하는 동안 두 젝서[24] 가 번갈아가며 순간적으로 공격에 가담해 볼경합 상황에서 수적 우위를 확보하며, 이 공백을 두 명의 센터백 사이에 다른 미드필더 한명이 위치하고 그 앞의 2선 자원이 압박으로 시간을 벌어주며 마치 3백 앞에 미드필더 한 명 있는 라볼피아나 형태로 배치해 재정비할 시간을 번다. 그렇다고 모든 중앙 전개에 대한 부담을 슈바인슈타이거에게 맡긴 건 아니고 공격형 미드필더에 선 토니 크로스나 토마스 뮐러가 전방에서 패스워크를 주로 담당하며 볼 전개에 대한 임무를 나눠가졌다. 하인케스 감독이 이렇게 기술적으로도, 활동량 면에서도 완벽한 중원 밸런스를 구축하며 바이에른 뮌헨의 중원은 공-수 및 전환 상황에서 매우 역동적인 템포를 보여줄 수 있는 엔진이 되었다.
바이에른 뮌헨이 전통적으로 자랑하는 강력한 측면 공격도 11-12 시즌 및 12-13 시즌 하인케스 부임 당시 절정에 이르렀다. 우측면에서 아르연 로번과 토마스 뮐러[25] , 그리고 그 뒤를 돌아들어가는 필립 람의 정교하고 깔끔한 부분 전술[26] 과 좌측면에서 프랑크 리베리의 개인능력과 플레이메이킹, 리베리에게 향하는 압박을 폭발적인 오버래핑/언더래핑으로 분산시키는데다 기동성까지 뛰어난 데이빗 알라바의 조합은 2020년 현재 축구계에서 측면 공격력이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위르겐 클롭의 리버풀, 한스디터 플릭의 바이에른 뮌헨 이상의 위력이었다. 이 양 측면 사이의 완급을 조절하고 2-3선에서 치명적인 파이널 볼을 비롯한 패스를 공급해주는 토니 크로스[27] 의 맹활약, 그리고 원톱에 마리오 고메즈, 마리오 만주키치 등 최정상급 타겟맨들을 조합해 최강의 공격력을 보여줬다. 좌로 보고 우로 봐도 세계 정상급 스피드를 갖춘 풀백, 윙어들이 머리까지 잘 돌아가고 전술적으로도 다기능성이라 온갖 패턴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매 경기 측면을 갈아마시니 상대 감독의 입장에서는 거의 미쳐버릴 지경. 빠르고 강력하면서도 상대 키 플레이어 봉쇄, 중원 쪽 숫자 가담 등 독특한 임무를 상황에 따라 수행할 수 있는 유연성까지 갖춘 바이언의 측면 라인은 하인케스 감독의 팔색조 같은 유연한 전술과 디테일을 중요시하는 특성, 선수 개개인의 캐릭터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임무와 부분 전술을 부여하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날개를 달았고, 바이에른 뮌헨의 속전속결 공격전개의 핵심이었다. 하인케스 은퇴 이후에도 스피드와 파괴력을 두루 갖춘 측면 공격력은 바이에른 뮌헨의 강력한 아이덴티티로 남을 정도.
UEFA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 같은 큰 경기에서는 마치 위르겐 클롭과 흡사한 게겐 프레싱을 기본으로 온갖 카운터 전술을 구사한다. 덕분에 12-13 시즌에 M-V-P 라인의 유벤투스와 드림팀 3기 시절의 바르셀로나를 관광보냈다.[28] 11-12 시즌 레알 마드리드에게 힘겨운 승리를 거뒀을 때도 메수트 외질, 사비 알론소 등 레알 마드리드 중원의 핵심 자원들은 바이언의 구스타보 등에게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 역대 압도적인 최고 승률[29] 이 대변하듯 강팀 담구는 전문가다. 특히 그 강팀의 키 플레이어를 어떻게 해야 꽁꽁 묶어버릴지 잘 안다. 예를 들면 유로 2012에서 독일을 관광보낸 바 있는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의 한 명인 안드레아 피를로를 중원에서 맞대응하는 대신 포워드로서는 최고의 활동량과 수비력을 자랑하는 마리오 만주키치를 마크맨으로 붙여서 힘도 못쓰게 만들어버리고, 오히려 뮐러와 로번이 만주키치를 대신한 전방 공격수 역할을 하며 유벤투스의 빌드업 체계를 무너뜨리고 8강에서 0실점을 기록했다. FC 바르셀로나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경우 상대 우측 풀백들의 공격력을 의식해 프랑크 리베리를 낮게 배치시켜 다니 알베스, 우카시 피슈첵 등을 막아버리고 리베리가 내려가 있는 위치는 로번을 프리롤처럼 활용해 공격 숫자를 충당, 리베리가 공격으로 전진 시 둘이 같은 위치에서 공격을 하는 장면까지 여럿 나왔다. 여기에 끊임없이 3각 대형을 형성하는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와 하비 마르티네즈, 그리고 전방에서 압박하러 수비로 가담하는 마리오 만주키치와 토마스 뮐러까지 더해 경기장 전역에서 볼 소유는 커녕 어디로 패스할 지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을 거친 압박을 지속했다.
바르셀로나 전 유명한 4-0 승리 당시 분석 영상. 말 그대로 물 흐르듯 팀이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한 명의 선수도 놓치지 않고 바르셀로나가 자랑하는 크루이프이즘을 철저히 붕괴시켰다. 패스 길을 담당해야할 세르히오 부스케츠,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차비 에르난데스에 대해 뮐러, 만주키치, 슈바인슈타이거, 마르티네즈가 한 명이라도 놓쳤다 싶으면 바로 뛰쳐가서 커버를 쳐주는 조직력은 경이로운 수준. 예시로 다니 알베스가 전진할 때 리베리가 커버를 빠르게 들어온다거나, 리베리가 알베스를 놓치면 센터백 한명이 불쑥 튀어나가 시간을 벌어주는 형태의 수비로 동료가 다시 커버를 들어오는 시간을 벌어주는 등, 수비 부분 전술과 조직력 결성의 결정체였다. 수비 위치까지 내려간 리베리는 공격 전환 시에는 아예 측면이 아닌 중원 프리롤로 이동해 특별한 마크맨 없이 프리하게 볼배급이 가능했으며, 공격 시 뮐러가 오프더 볼로 공간을 벌어주면 로번 등이 순식간에 그 공간을 이용한다거나, 풀백이 빠르게 전진해 수적 우위를 확보해 득점을 만들어 냈다.
4-5년 동안 공백기를 보낸 뒤 펩 과르디올라와 카를로 안첼로티 체제에서 망가지고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잃으며 위기를 맞은 바이에른 뮌헨으로 소방수로서 17-18 시즌에 복귀했는데, 공백기가 무색하게 자신의 아이덴티티인 선 굵고 빠르면서도 유연한 전술을 재빠르게 주입시켜 바이에른 뮌헨의 정상화에 크게 기여했다. 마법이라도 쓴건지 폼이 바닥을 달리던 토마스 뮐러, 하비 마르티네즈, 데이빗 알라바를 다시 과거 전성기 시절 역할을 주며 정상급 선수들로 변모시켰고, 임대 이적 후 고전하던 하메스 로드리게스와 전 시즌 성장이 멈췄다고 비판받던 킹슬레 코만, 요주아 키미히를 팀의 중심 플레이어들로 만들었다. 은근히 활동량에 강점이 있던 하메스의 경우 하인케스 하에서 위치가 메짤라로 완전히 조정되어[30] 12-13 시즌의 토니 크로스처럼 2선과 3선을 오가며 전방에서의 창의적인 패스 워크와 전방 압박은 물론, 후방까지 내려와 롱패스나 전환 패스로 공격을 풀어주는 볼배급 및 빌드업까지도 유연하게 가담했다. 킹슬레 코만은 폭발력 대비 생산성 및 후속 플레이의 정확성이 너우 부족해 비판받았으나 하인케스의 박스 주변에서 속도를 줄이고 시야를 확보하라는 조언을 받고 폭발적으로 성장해 상당한 공격포인트 창출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2선 자원들의 장점을 파악해 최선의 부분전술 및 각자의 역할을 배정하는 데에 매우 능한 하인케스의 노련미가 보이는 대목. 키미히의 경우 람의 은퇴 이후 자연스레 주전 라이트백이 되었고 원래도 유망했던 선수였으나 하인케스 부임 이후 공격적인 재능을 더더욱 만개해 람을 완벽히 대체했다. 이렇게 하인케스가 순식간에 선수들을 다시 본 궤도로 올려놓으면서 바이에른 뮌헨의 장기인 유기적인 측면 패턴 플레이와 2선에서의 지속적인 스위칭 및 뮐러/하메스를 축으로 한 상호 오프더볼 무브먼트 및 부분전술을 활용한 페너트레이션, 빠르고 선 굵은 빌드업과 유연성을 갖춘 팀 컬러까지 구축하게 되었다.
여러 중원 자원들을 적절히 섞어 4-1-4-1과 4-2-3-1을 번갈아 사용하며 유연성을 늘렸고 측면에서도 노장이 된 로번과 리베리는 물론 본인의 지휘 하에 크게 성장한 코만과 재차 부활한 뮐러를 로테이션으로 적절히 출전시간을 분배해 활용하며 자신의 유연성을 증명했다. 아르투로 비달과 하비 마르티네즈를 두고 하메스를 2선으로 전진배치해서 안정성을 강화한 4-2-3-1부터 하메스 - 티아고 알칸타라를 전진배치하고 그 뒤에 하비의 피보테가 받치는 공격적인 4-1-4-1, 하메스의 짝으로 박스 투 박스 역할의 비달이나 톨리소를 놓고 밸런스를 맞춘 4-1-4-1 등 여러 조합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며 전술적인 선택 가짓수를 늘렸다. 거기에 16-17 시즌 공격형 미드필더로 포텐셜이 터진 티아고를 시즌 막판 피보테 자리에도 완벽히 적응시키며 선수를 한 단계 성장시켜주었다. 여담으로, 개인의 능력보단 팀 플레이가 더 돋보이는 하인케스의 전술이지만 17-18 시즌 바이언 중원의 주요 키 플레이어는 누가 뭐라 해도 하메스였다. 하메스의 은사로는 레알 마드리드, 바이에른 뮌헨, 에버튼에서 함께한 안첼로티가 단연 1순위로 꼽히지만, 어찌보면 전술에 따라 기복을 타는 하메스를 가장 현대축구의 틀에 맞는 형태로 잘 써먹은 감독이 안첼로티보다도 하인케스이다. 하인케스 은퇴 이후 하메스의 뮌헨과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행보를 보면 그저 아쉬울 따름.
챔피언스리그 우승에는 아쉽게 실패했으나, 17-18 시즌에도 하인케스의 강팀 킬러 본능은 여전했다. 조별리그 6차전 파리 생제르망을 1.5군으로 격파할때도 과거 바르셀로나 전과 비슷하게 리베리를 이용해 상대의 핵심 풀백인 다니 알베스를 묶어버리는 와중에 알베스가 공격이 안 풀리자 무리하게 올라간 공간을 자유도가 부여된 하메스와 알라바가 털어먹었고, 결과적으로 레반도프스키의 첫 번째 골과 톨리소의 두 번째 골이 모두 알베스가 지키던 파리의 오른쪽에서 나왔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알베스가 공격에도 가담하면서 이 모든걸 제어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리베리 역시 34세의 노장이었는데, 90분동안 뛸 활동량을 모조리 60분 동안 쏟아붓게 주문해서 알베스의 체력을 쏙 빼놓고 교체시켰고, 리베리가 빠지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포지션을 바꾼 코만은 지친 알베스의 뒷공간을 돌파해 코랑탱 톨리소의 3번째 골을 만들어냈다. 또한 중원에서는 젊고 압박이 강력한 코랑탱 톨리소-제바스티안 루디 + 하메스까지 압박에 참여시켜 네이마르를 향하는 패스길을 모조리 차단하고 네이마르가 공을 잡을 시 강력한 바디 체킹과 택티컬 파울을 동반해 그의 흐름을 끊어내는 등 일명 '''안티 네이마르 플랜'''으로 파리의 키 플레이어들을 모두 무력화 시키고 3-1 쾌승을 거뒀다. 여러 주전 선수들의 부상으로 인한 조기 교체 및 톨리소, 하피냐, 울라이히 등 후보 선수들의 어이없는 치명적인 실수,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의 유례없는 결정력 부족으로 아쉽게 챔피언스리그 여정의 끝을 봤던 4강 레알 마드리드 전에서도 전술 싸움에서는 하인케스가 상대인 지네딘 지단보다 한 수 위였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1-2차전 내내 대단한 득점력을 보여주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꽁꽁 묶으며 침묵시키고 당시 챔피언스리그 3연패에 도전하던 막강한 레알 마드리드를 정공법으로 맞서며 180분 동안 가두고 패는 엄청난 밀봉 압박과 빠른 전환을 그대로 선보였다. 마르셀루의 극단적인 오버래핑과 그에 의존하는 레알 마드리드의 전술을 읽고 요주아 키미히를 엄청나게 전진배치 시키고 주로 왼쪽 메짤라였던 하메스의 동선을 우측으로 조정해 역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측면 뒷공간을 털어먹는, 한 쪽 측면에 포커스를 둔 전술로 재미를 봤다.[31] 이에 지단도 한 수 접고 4강 내내 실리적인 전술을 쓰며 막판에는 자신들의 홈그라운드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똥줄타는 지키기에 들어갔을 정도.
5. 기록
5.1. 대회 기록
5.1.1. 선수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63~19667, 1970~1978)
-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74
-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1972
5.1.2. 감독
- FC 바이에른 뮌헨 (1987~1991, 2008~2009, 2011~2013, 2017~2018)
- 분데스리가: 1988-89, 1989-90, 2012-13, 2017-18
- UEFA 챔피언스 리그: 2012-13
- DFB-포칼: 2012-13
- DFL-슈퍼컵: 1987, 1990, 2012
- 레알 마드리드 CF (1997~1998)
- UEFA 챔피언스 리그: 1997-98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97
- FC 샬케 04 (2003~2004)
- UEFA 인터토토컵: 2003, 2004
5.2. 개인 수상
5.2.1. 선수
- 분데스리가 득점왕: 1973-74, 1974-75
-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1971-72, 1973-74, 1974-75
- 유러피언컵 득점왕: 1975-76
- UEFA 컵 위너스컵 득점왕: 1973-74
- UEFA컵 득점왕: 1972-73, 1974-75
-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토너먼트의 팀: 1972
5.2.2. 감독
- FIFA 올해의 감독: 2013
-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2013
- IFFHS 세계 최우수 감독: 2013
- 유럽 올해의 감독-Alf Ramsey Award: 2013
- 유럽 시즌의 감독: 2012-13
- 독일 올해의 감독: 2013
6. 여담
- 평소에는 말끔한 얼굴이지만 경기도중 기쁘거나 화나거나 흥분했을때 얼굴이 붉어지는 것 때문에 오스람[32] 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 은퇴 이후에도 파리 생제르맹 FC, 맨체스터 시티 FC, 레알 마드리드 CF에서 러브콜이 있었으나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다만 바이에른 뮌헨이 복귀 요청을 했을 때는 고심 끝에 결국 복귀를 결정했다.
- 2012-13시즌의 미칠 듯한 우승 행진으로 역사상 7번째로 트레블을 달성한 감독이 되었다. 또한 역사상 4번째로 다른 두 팀에서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한 감독이 되었다. 그런데 4명의 감독 중 빅이어를 들어올린 때의 시간 간격이 가장 긴데, 무려 15년이다.
- 은퇴 후 2013 FIFA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여담으로 2013 감독상 최종 3인[35] 은 2012 최종 3인[36] 과 단 한 명도 겹치지 않는다.[37]
- 많은 뮌헨 팬들에게는 펩 과르디올라가 안 오고 하인케스가 뮌헨 감독을 연임했다면 어땠을까는 만년 이야기거리이자 한탄소재이기도 하다.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 스페인 클럽에 강했던 하인케스의 뮌헨에 비해 펩의 뮌헨은 스페인 클럽[38] 에게 연달아 탈락하며 약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 그 외에도 구단의 스쿼드 자체가 하인케스식 축구에 맞게 완성되어 있었는데 펩이 부임하면서 이를 극대화하지 못하고 구단의 황금기를 보내버렸다는 지적도 있다.[39] 그 예시로 마리오 만주키치와 하비 마르티네스[40] 는 하인케스 아래서 엄청난 폼을 보여줬지만 펩과는 맞지 않는 관계로 이적을 하거나 맞지 않는 옷을 입어야 했다.
- Elo 레이팅 기준으로 역사상 FC 바르셀로나를 가장 잘 잡았던 감독 중 하나로,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Elo 레이팅을 68.2점이나 빼앗아 왔다. 역사상 바르셀로나 상대로 Elo 레이팅을 가장 많이 빼앗아 온 하비에르 이루레타가 32경기를 붙고 85.6점을 빼앗아왔는데, 하인케스는 고작 16경기를 치르고 저 레이팅을 빼앗아온 것.[41]
- 감독으로서 참여한 4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중 2017-18시즌을 제외한 3시즌을 결승전에 도달했다. 결과는 2번의 우승과[42] 1번의 준우승.[43]
- 바이에른 뮌헨 시절에는 프랑크 리베리 때문에 열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부인에게 리베리와 아르연 로번은 다루기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했는데, 부인이 한 말이 "당신 선수 때는 더했어요!" 였다고...#
- 털이 아주 북실북실한 저먼 셰퍼드를 키우고 있었다. 이름은 칸도. # 뮌헨 팬들 사이에서는 하인케스가 2017-18 시즌에 감독으로 복귀했을 때 한 당시 인터뷰 때문에 하인케스를 뮌헨으로 복귀시킨 레전드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지난 11월에 죽었다고 한다.[44]
- 2019-20 시즌 니코 코바치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뮌헨 감독직에서 사임하자 후임으로 수석 코치 한지 플릭을 추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추천은 적중해 플릭 휘하의 뮌헨은 2020년에 한 경기를 제외하고는[45] 모든 경기에서 전승을 거두며 분데스리가 우승을 확정지었고, 내친 김에 포칼까지 우승하며 마지막에는 UEFA 챔피언스 리그를 전승 우승하면서 트레블을 거머쥐었다. 재미있는 건 플릭과 하인케스의 전술 스타일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
- 한지 플릭의 감독대행 첫 경기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전이었는데, 이때 플릭은 많이 긴장했고 하인케스가 전화통화를 걸어 안심을 시켰다고 한다. 하인케스는 "걱정하지 마라. 너는 3:0 또는 4:0으로 이길거다. 나는 내 바이언을 안다." 라는 말을 했는데, 실제로 뮌헨은 다음 날 도르트문트전에서 4-0 대승을 거두었다.출처
- 영어를 잘하고 라리가에서 감독을 했던 경험으로 스페인어에도 능통하다. 트레블 시즌때 영입한 하비 마르티네스는 독일어를 하나도 몰랐고 하인케스가 하비의 적응을 도와주었고 하비는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트레블의 1등공신이 되었다. 17/18시즌 안첼로티의 경질 후 소방수로 투입되었을때 당시 임대로 온 하메스 로드리게스는 독일어에 미숙했고 하인케스가 스페인어에 능통했기에 하메스에게 지시할때 스페인어로 말하는 등 하메스는 빠르게 적응하기 시작했고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당시 하메스의 활약으로 하인케스가 안첼로티보다 하메스를 더 잘 사용한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1] 그의 생일은 나치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한 바로 그 날이다. 정확히는 5월 8일에 독일 측이 연합군에 항복을 했는데, 이오시프 스탈린이 '베를린을 점령한 건 우리인데 왜 우리는 빼고 항복하냐'면서 다시 항복을 받아야겠다고 주장해서 5월 9일에 한 번 더 항복한다. 자세한 내용은 승리의 날 항목 참조.[2] 나치 독일의 명목상 국체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행정구역에 따른 것으로 나치는 기존의 행정구역을 명목상 그대로 둔 채 실질적인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가우(Gau)'를 설치하였다. 여기에 따르면 출생지는 뒤셀도르프 가우 글라트바흐라이트(Gladbach-Rheydt)구 묀헨글라트바흐이다.[3] 그의 리그 득점 기록은 게르트 뮐러의 365골과 클라우스 피셔의 268골,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의 241골에 이어 역대 4위에 해당한다. 공교롭게도 레반도프스키를 제외한 셋은 모두 같은 시대에 활약했다. 득점왕은 각각 뮐러가 7회, 하인케스가 2회, 피셔가 1회를 차지하였다.[4] 2007년 은퇴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면 잊혀질 뻔했다.[5] 12-13시즌 뮌헨은 70년대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가 이끌던 무적시대와 더불어 뮌헨 역사상 최강팀중 하나로 손꼽히는 팀이다. 21세기 클럽팀으로 범위를 넓혀도 펩 과르디올라의 FC 바르셀로나와 더불어 최강의 팀으로 평가된다.[6] '''Meister Schale'''; 분데스리가 우승 트로피. 접시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마이스터 샬레라고 불린다. 방패모양 위에 역대 우승팀들이 새겨져 있다.[7] 원래 레알은 당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유럽 제패를 이끈 명장 오트마르 히츠펠트를 영입하려 했으나, FC 바이에른 뮌헨이 먼저 히츠펠트를 선임하자 차선책으로 라리가 내에서 좋은 지도력을 보이던 하인케스로 선회했다.[8] 그리고 하인케스 다음으로 레알의 감독을 맡은 인물은 비센테 델보스케이고 이후 델보스케는 4년간 2번의 챔스 우승과 2번의 리그 우승을 했다.[9] 시즌 종료 직전 레버쿠젠의 이사진은 크로스의 완전 영입 의사를 표했으나 바이에른에서는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10] 지금에 와서는 이때의 바이에른 뮌헨이 21세기 들어 최고의 전성기였다는 평가를 받는데, 하인케스 이후에 바이에른 뮌헨을 맡은 명장들이 하인케스 시절만큼 압도적인 공격력과 부분 전술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FC 바르셀로나를 이끌고 역사적인 왕조를 건설한 바 있던 펩 과르디올라 역시 리그는 제패했지만 유럽 무대인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압도적인 위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의 후임으로 온 카를로 안첼로티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며 경질되었다. 이 때문에 하인케스가 2년 정도만 더 감독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팬들이 많다. 2012-13 시즌에 역대 최강이라 불리던 리오넬 메시와 그를 뒷받침하는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차비 에르난데스의 바르셀로나를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합계 7:0으로 박살낼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또한 하인케스가 그 날 입은 정장은 바이에른 뮌헨의 구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11] 2011-12 시즌 뮌헨은 베스트 11은 유럽 정상급이었으나, 그에 비해 서브진은 매우 부실한 것으로 유명했다. 당장 아르연 로번이나 프랑크 리베리 등 2선 공격자원들이 부상당하면 '''벤치에서 기다리는 건 기복왕 프라니치, 2009-10 시즌 한 번 불태우고 폼 떨어진 올리치, 일본산 유니폼 판매원 우사미''' 등이었다. 센터백도 다니엘 반부이텐이 거의 유일한 서브였고, 콘텐토는 서브로도 잘 못나올 정도로 유리몸이었다. 그나마 아나톨리 티모슈크가 수비형 미드와 센터백을 오가며 땜빵을 할 수 있었으나 말 그대로 땜빵이 가능한, 급한 불 끄기용 자원일 뿐 주전급으로 쓰기엔 영 좋지 않았다. 특히 중원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는 마땅한 대체자도 없어서 부상으로 쓰러지자 공-수 벨런스를 잡아줄 중원사령관이 없어졌고, 이 때 가을 챔피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르트문트에게 역전 우승을 허용했다.[12] 게다가 챔스 4강 레알 마드리드전과 포칼 4강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전에서 무려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를 치렀고, 이런 상황에서도 전술했던 대로 서브가 워낙 부실한지라 교체카드를 1장밖에 안 썼다.[13] 축구 역사상 뮌헨을 제외하고 단 한 팀만이 이 업적을 이뤘는데, 그 팀은 바로 2001-02 시즌의 바이어 04 레버쿠젠이다. 특히 양 팀에 모두 소속됐었던 한스외르크 부트 골키퍼는 '''준우승 트레블만 두 번 기록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게다가 부트는 2011-12 시즌이 끝나고 은퇴해서 2012-13 시즌 바이에른의 트레블 우승에 함께하지 못했다.[14] 이 기록은 다음 시즌에 뮌헨이 27라운드(25승 2무)에 우승을 확정하며 1시즌 만에 다시 깨졌다.[15] 원래 바이에른 이사진은 하인케스의 잔류를 원했으나, 하인케스는 나이와 건강상의 문제로 가족들과 상의 끝에 은퇴 의사를 밝혔다. 후임인 펩 과르디올라의 영입 확정은 그 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과르디올라의 선임 이후 너무나 놀라운 경기력에 은퇴를 번복하고 싶어하기도 했지만...[16]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가족과 상의한 끝에 복귀를 결정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감독을 맡아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심지어 하인케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개까지 복귀를 동의했다고 하는데, 개가 두 번 짖는 걸 동의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17] 하인케스 본인이 스페인어에 능통하기에 가능한 것.[18] 물론 페터르 보츠의 도르트문트가 크게 흔들려줘서 하인케스 부임 후 승점을 단 1점밖에 챙기지 못하는 극심한 부진을 겪었던 점도 한몫했다.[19] 선수로서 174승, 감독으로서 326승.[20] 알렉스 퍼거슨과 불과 4살 차이밖에 안 난다.[21] 참고로 4강 상대는 유럽 대항전 바이언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하인케스의 친정팀 중 하나인 레알 마드리드 CF.[22] 물론 2018-19 시즌 더블을 하는 등 리그 내에서의 경쟁력은 좋지만 분데스리가 자체가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어서..[23] 11-12 시즌의 경우에는 서브가 부실해 로테이션을 '''못'''한거지 '''안'''한게 아니다.[24] Sechser. '6'이라는 뜻의, 분데스리가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를 가리키는 용어[25] 원래는 11-12 시즌 막판 대역죄인 수준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로번이 로테이션 자원이었고 뮐러가 주전 윙어였으나 후반기 초반 크로스의 장기부상 이후 뮐러가 공격형 미드필더로 자리를 옮기고 윙 자리를 로번이 차지하게 된다.[26] 중원 패스길의 1명을 포함한 3대1 패스, 뮐러가 중앙쪽으로 들어가면서 한명을 끌고가서 공간 열어놓으면 람이 오버래핑, 로번이 2명 시선 뺏으면 뮐러나 람이 불쑥 침투 → 한명이 박스 아크에서 약속된대로 기다리다가 컷백 받아먹기 등등 엄청나게 다채로운 플레이가 나왔다. 람과 뮐러는 축구계에서 지능캐로 손꼽히는 선수들이라 전술적으로 문제가 없었으나 로번 같은 경우 지능적인 면모보다는 스피드와 폭발력이 더 돋보였던 선수였으며 11-12 시즌 부진 이후 자신감도 많이 떨어지던 시기였는데 그런 로번에게 완벽히 전술과 팀 플레이를 이해시키고 팀에 녹아들게 유도하며 다시 에이스 급 면모를 보이게끔 각성시킨 하인케스의 역량이 실로 대단하다고는 표현할 수 밖에 없다.[27] 토니가 시즌아웃 당한 후엔 언급했듯 토마스 뮐러가 이 자리를 담당했는데 플레이메이커인 크로스와는 달리 포워드 성질의 선수라 우측면에서 로번과 람 사이의 연계를 도우면서 박스로 침투하거나 오프더볼로 수비를 교란 시키는 역할에 집중했다.[28] 바르셀로나 킬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바르셀로나에게 강한데, 역대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세 번째로 많은 elo 레이팅을 가져온 감독이며, 하인케스 개인으로는 가장 많은 elo 레이팅을 빼앗아 온 상대 클럽이 바로 바르셀로나다.[29] 70.6%[30] 레알 마드리드 시절 주전이었던 안첼로티 시절에도 앙헬 디 마리아의 역할을 그대로 계승해 메짤라로 뛰었다고 볼 수 있지만, 활동반경을 보면 사실상 프리롤 2선 자원으로 분류될 만큼 공격적으로 활용되었다.[31] 실제로 키미히는 당시 4강에서 1, 2차전 합계 무려 2골을 기록했고 하메스도 1골 1도움을 기록했다. 하지만 다니 알베스를 공격적으로도 무력화시켰던 파리 전과는 달리 물이 오른 마르셀루의 공격력을 제어하지 못했던 점은 유일하게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 마르셀루는 1, 2차전 합계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공격적으로는 흠잡을 곳 없는 활약을 펼쳤다.[32] 독일의 전구회사이다. 백열등, 형광등, 할로겐등 같은 전구는 가리지 않고 만들며 치아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임플란트로도 유명하다. [33] Opa는 독일어로 할아버지를 뜻하는 애칭. [34] Don Jupp, Don은 스페인어로 옹(翁)정도 된다.[35] 유프 하인케스, 위르겐 클롭, 알렉스 퍼거슨.[36] 비센테 델보스케, 주제 무리뉴, 펩 과르디올라[37]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과르디올라는 감독직을 사퇴하여 쉬고 있었고, 무리뉴의 레알은 무관이었으며, 델보스케의 스페인 국대는 컨페드컵 결승에서 너무나도 허무하게 털렸다.[38] 하인케스 시절에는 스페인 클럽에게 강했던 뮌헨이 펩 시절에는 3연속으로, 그것도 각기 다른 세 클럽에게 돌아가며 털렸다는 자체가 단순 성적 이상으로 팬들에게 자존심의 상처를 줬기 때문이다.[39] 레바뮌으로 불리는 2010년대 유럽 축구 3대장의 전성기를 살펴보면 유독 뮌헨만 전성기가 시작될 시점에 감독 교체를 겪은 것을 알 수 있다. 펩의 바르셀로나가 4년, 지단의 레알이 3년인데 비해 하인케스의 뮌헨만 2년으로 그 기간이 짧다. 특히나 각 구단의 황금기 멤버의 전성기를 위의 감독들과 함께한 두 팀과는 달리 뮌헨은 하인케스 감독 하에서 제대로 성적을 낸게 1년밖에 되지 않다. 이를 반영하듯 슬슬 레바뮌 시대가 저물어가는 지금에는 세 팀의 챔피언스 리그 성적을 보면 바르셀로나가 우승 3회, 레알이 4회인데 반해 뮌헨은 1회밖에 되지 않는다.[40] 트레블 시즌에는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와 함께 볼란치 롤에서 엄청난 폼을 보여줬으나, 펩이 추구하는 수비형 미드필더 롤에는 부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센터백으로 포지션 변화를 하였고 하인케스가 복귀하기 전까지 수비형 미드필더로서의 재능을 썩히게 된다. 물론 센터백으로서도 실력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트레블 시즌과 하인케스 복귀 이후에 보여준 폼을 생각해보면 정말 아쉬울 따름이다.[41] 물론 두 경기를 치르고 무려 50점이나 빼앗아 온 발레리 로바노브스키도 있기는 하다.[42] 레알 마드리드에서 지낸 97-98, 바이에른 뮌헨에서 지낸 12-13 시즌.[43] 바이에른 뮌헨에서 지낸 11-12 시즌.[44] 무려 14살까지 살았는데, 하인케스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았다고 했다.(...)[45] 그마저도 진 게 아니라 RB 라이프치히와 0:0으로 비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