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마가트
1. 개요
독일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산둥 루넝 감독을 맡았다.
선수 시절 함부르크 SV의 전성기의 주역. 미국계 독일인으로, A매치는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출신으로 43경기에 출전해 3골을 넣었다. 선수 시절 주요경력으로 함부르크 SV에서 10년을 뛰며 3번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경험하는 등 함부르크 SV의 전성기와 함께 했으며 특히 1982-83년 유러피언컵(현재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어 함부르크의 우승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2] .
선수 은퇴 후, 여러 클럽에서 단장직을 겸하기도 했으며 슈투트가르트 시절에는 유망주들을 이끌고 분데스리가 준우승, 바이에른 뮌헨 시절에는 2시즌 연속 더블, 볼프스부르크 시절에는 깜짝 리그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별명은 '분데스리가의 소방수', '사담'[3] , '독일판 라니에리.'[4]
2. 특징
- 아버지가 푸에르토리코계 미군이었다. 마가트가 어렸을 적에 독일을 떠나 자신과 어머니를 버렸기 때문에 굉장히 싫어했으나 성장 후 만나서 감정을 어느 정도 푼 모양. 그 이후로 아버지의 이름인 펠릭스를 자기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 전엔 볼프강 마가트였다. 현재는 볼프강-펠릭스 마가트지만 일반적으로는 펠릭스 마가트라고 부른다.
- 누가 독일인 아니랄까봐, 맥주를 엄청나게 좋아한다. 공교롭게도 산둥 루넝의 본거지인 칭다오는 명맥주산지이기도 하다. 경기장 외에서의 모습을 보면, 맥주 한 잔을 들고 찍은 사진이 많기도 하고, 선수들이 자신한테 장난치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는 감독이지만, 유일하게 넘어가는게 우승 후의 맥주세례.
- 영국 언론들과 사이가 엄청나게 나빴는데, 엄숙한 것과는 반대로 가쉽 좋아하는 타블로이드판 언론들은 마가트가 쫓겨난 후에도 풀럼 시절의 마가트의 "기행"을 캐내 자주 보도한다. 영국 메일지는 스티브 시드웰이 "마가트가 경기에 패하면 벌로 바깥에서 40분씩 서있으라고 명령했다"고 폭로한 것을 보도했다. 또한 원정경기에서는 팀전원이 저녁 9시에 바에 모여 파인트잔으로 맥주를 마시라고 했다고... #
- 풀럼 시절에는 특유의 카리스마적 지휘 때문인지 영국 언론에 의해 맹폭을 받았다. 민간요법신봉자인듯, 브레데 한겔란트에 부상에 좋다며 치즈에 알콜을 섞어 부상당한 허벅지에 바르라고 했다는 기행이 보도되어 영국 언론의 비웃음을 받았다. 그런데 이를 옆에서 지켜본 사샤 리터는 "스토리가 좀 과장되었는데, 그건 전통요법이었을 뿐이다"며 마가트를 옹호.
- 운동선수 출신 답지 않게 체스의 고수다. 세계 체스 챔피언과도 대국한 적이 있을 정도로 프로급 실력을 자랑한다.
- 2016년 산둥 루넝을 이끌고 아챔 FC 서울과의 대결을 위해 서울 원정을 왔다. 당시 슈틸리케가 상암에서 직관했으나, (적어도 운동장에서는) 마가트와 만나지 않았다. 1982년 월드컵 동문임에도 사이가 별로 안 좋은 듯. 2017년에는 아쉽게도 산둥과 톈진의 일정이 끝난 후 슈틸리케가 중국리그에 왔고, 시즌이 끝난 후 마가트가 중국을 떠난지라 슈틸리케와의 지략대결은 이뤄지지 않았다.
- 외모와 성격은 다혈질 같지만, 말은 굉장히 조용하고 차분하게 한다. 독일어 인터뷰 풀럼시절에도 통역없이 인터뷰를 하는 등 (다만 풀럼 초기 인터뷰에서 영어가 잘 생각나지 않을 때는 가끔씩 스태프에게 독일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물어보기도 했다), 영미권에서 살아보지 않았지만 영어실력도 꽤 괜찮은 듯. 영어 인터뷰 (풀럼시절)
- 다둥이를 두었다. 두번의 결혼에서 6남매의 자식을 두고 있다.
3.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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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풋했던 청년시절
선수 초창기에는 아샤펜부르크와 자르브뤼켄 같은 하위 리그의 팀에서 활동했지만 1976/77시즌, 함부르크로 이적하여 10년 동안 팀의 주전 선수로 활동하여 명선수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10년 동안 306경기에 출장했으며 46득점을 하여 미드필더로서 쏠쏠히 공격에도 가담한 편. 특히 1982/83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유벤투스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팀을 유럽 정상으로 올려놓기도 했다. 10년 동안 함부르크에서 '''3차례의 분데스리가 타이틀과 유러피언 컵과 UEFA 컵 위너스 컵 각각 1회 우승, UEFA컵 준우승''' 등의 기록을 세우며 함부르크 SV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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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스페인 월드컵 준결승 프랑스전의 서독 선발.
윗줄 왼쪽부터, 브라이트너, 슈틸리케, 슈마허, 브레겔, 피셔, 베른트 푀어스터
아랫쪽 왼쪽부터 칼츠, 리티바르스키, 칼하인츠 푀어스터, 드렘너, '''마가트'''
국가대표에도 43경기에 출전하며 82년, 86년 월드컵에 2회 연속으로 출장하였고 유로 1980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6년 월드컵 참가 후 무릎 부상으로 인해 33살의 나이로 은퇴를 하게 된다.
4. 감독 경력
4.1. 단장 시절
사실 펠릭스 마가트는 은퇴 후 곧바로 지도자 수업을 받은 게 아니라 프런트에서 단장으로 활동했다. 자신의 친정팀인 함부르크 SV를 시작으로 자르브뤼켄, 위어딩엔에서 6년 동안 단장직을 겸임하던 펠릭스 마가트는 1992년 브레머하펜의 코치로 영입되며 지도자 코스를 밟기 시작하고 1993년 함부르크의 수석코치로 임명되고 2년 뒤 1995년, 함부르크 감독으로 승격된다. 1995/96 시즌, 팀을 UEFA컵으로 이끈 마가트는 그러나 1996/97 시즌 리그 13위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경질된다.
4.2. 독일
그 뒤로 1997/98시즌 2부 리그에 있던 1.FC 뉘른베르크 감독을 맡아 2부 리그 3위를 기록하며 뉘른베르크를 분데스리가로 승격하는 업적을 이루었으나 구단주와의 의견 차이로 인해 1년 만에 바로 그만 두고 베르더 브레멘 감독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한 시즌만에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되었다.[5]
여기까지 보면 뉘른베르크를 승격시킨 것 외에는 별 볼일 없는 감독이라는 이미지겠지만, 브레멘에서 경질된 이후 1999/00 시즌 분데스리가에서의 강등 위기에 놓인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감독을 맡아 소방수 역할로서 팀을 강등권에서 구출해낸다. 그러나 칭송도 거기까지... 다음 시즌 또 다시 막장 성적에 팀이 6연패를 하자 경질당한다. [6]
그러나 소방수 감독으로서 강등권 위기의 팀을 구해내며 명성을 얻은 마가트는 2001/02 시즌 강등권에서 악전고투하던 VfB 슈투트가르트 감독이 된다. 이 때부터가 마가트의 전성기. 슈투트가르트 프런트로부터 단장직 겸임이라는 권한까지 얻어낸 마가트는 그 후 '마가트 유치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흘렙''', '''티모 힐데브란트''', '''케빈 쿠라니''' 등의 선수들과 바이에른 뮌헨의 필립 람을 임대로 영입해 오며 팀을 구축시켰고 2002/03 시즌 리그 준우승을 차지해버렸다!
부진한 팀의 감독을 맡아 리그 준우승에 챔피언스 리그 진출까지 해 버렸으니 네임벨류가 슬슬 쌓여가고, 03-04시즌에도 팀을 4위까지 끌어 올려 놓고서 2004/05 시즌, 당시 오트마어 히츠펠트의 부진한 성적에 실망한 분데스리가의 바이에른 뮌헨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7]
빠방한 지원에 전권을 위임을 받은 마가트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우승컵을 모으기 시작했다. 부임한 뒤 2004/05, 2005/06시즌 리그와 DFB-포칼을 휩쓸며 2년 연속 더블의 성적을 기록한 명감독의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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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05/06시즌 이후 팀의 에이스인 미하엘 발락이 첼시로 이적하고 제 호베르투마저도 팀을 떠나게 된다. 마가트는 급하게 반봄멜까지 데려와 공백을 메꾸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중원의 실종으로 인해 마카이, 피사로 등이 예전과 같이 제대로 공을 공급받지 못하여 공격에서 해맸으며, 다른 분데스리가 팀들은 아예 라인을 깊숙히 내린 후 역습 한 방을 노리는 방식으로 전술을 바꾸었으나 여기에 대한 해답을 제대로 내놓지 못하며 지지부지한 성적을 보여주게 된다.
여기에 선수들의 줄부상과 호흡이 맞지 않는 수비진, 발락과 제 호베르투가 팀을 떠났으나 마치 있는 선수마냥 취급하는 식의 전술로 인해 2006/07시즌 중반, 팀은 리그 4위로 밀려났고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바이에른 뮌헨 프런트에 의해 해임된다.[8]
2007/08시즌, 전권을 위임받는다는 조건으로 VfL 볼프스부르크 감독 겸 단장이 된다. 07-08시즌 5위로 팀 순위를 끌어올린 마가트는 08-09시즌에 포텐이 폭발했다! 에딘 제코, 그라피테, 미시모비치의 삼각 편대를 앞세워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이 우승은 팀 역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볼프스부르크의 유일한 리그 우승이다. 우승 세레머니 장면.
모기업 빵빵하지, 권한 막강하지, 어린 선수도 잘 키웠지, 뭐 하나 후달릴 게 없는 볼프스부르크 생활이었지만 1년 만에 FC 샬케 04로 떠나버린다. 사실 샬케가 좀 더 크고 역사도 유구한 구단이긴 하다. 샬케에선 라울 곤살레스와 클라스 얀 훈텔라르를 영입해 전 시즌 볼프스부르크에서의 제코 - 그라피테와 같은 영혼의 투톱을 꿈꾸었으나 절반의 성공만 거두었다. 그리고 4년짜리 계약 기간의 반도 못 채우고 2011년 3월 16일 해고되었다. [9] 그리고 베르더 브레멘 때와 똑같이 마가트가 경질된 뒤 샬케는 포칼을 우승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10]
샬케에서 해고된 마가트는 감독과 단장직을 겸임하는 조건으로, 리즈시절을 보냈던 볼프스부르크에 돌아와 강등권에 허덕이던 팀을 구해냈다. 그러나 볼프스부르크에서도 부진을 겪자 2012년 10월 해임되어 1년 넘도록 쉬었다.
4.3. 잉글랜드
2014년 2월 14일, 풀럼 FC 감독을 새롭게 맡았다. 소문에 의하면 풀럼에 있던 독일인 선수들이 마가트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자 구단측에 이적을 요청할 정도였다고... 어쨌든 풀럼을 맡으면서 처음으로 해외 구단 감독이 되었다.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첫 독일인 감독이 되는 기록까지...[11] 계약기간은 1년 6개월. 하지만 풀럼이 20위, 꼴등으로 부진한 상황에서 3달 동안 3승 3무 6패를 초라한 전적을 세우며 결국 19위로 강등이 확정되었다. 챔피언십에서도 1무 6패의 환상적인 성적을 거두며 꼴찌로 내려앉은 끝에 2014년 9월 18일,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풀럼에서 여러가지 기행을 저지르며 영국 언론으로부터 조롱을 받았고, 제대로 독일 망신을 시켰다. 후술된 한겔란트 치즈 사건 이외에도 원정경기 이후 새벽 2시까지 훈련장 뺑뺑이를 시킨 썰, 자기 맘에 안 드는 선수들을 투명인간[12] 취급해서 1군 열외시키기, 2m 장신의 센터백 댄 번을 강등이 걸린 경기에서 풀백으로 내보내기[13] , 지각생 벌금[14] 등등 여러 좋지 않은 괴담들이 있었다. 가르디안.
4.4.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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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의 마가트 감독. 넥타이의 주황색은 산둥 루넝의 팀컬러이다.
풀럼에서 잘린 후 한동안 놀다가, J리그의 사간 도스행이 유력하다는 보도가 2016년 초에 났으나, 최종단계에서 일본에 안간다고 밝히고는[15] 대신 몇 달 후 중국에 갔다. 2016년 6월에 산둥 루넝이 부진에 빠지자, 브라질 출신 마누 메네지스가[16] 6개월만에 해임되고 마가트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산둥에 와서 첫번째로 한 일은 마가트가 다른 곳에서 행한 것처럼 팀내 30대 고참 주전 세명 (양쉬, 왕융포[17] , 자오밍젠)을 자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20대 초반의 신참을 대거 기용하여 기동력을 늘렸다.
갑작스럽게 고참을 자르면서 팀전력이 떨어진 부작용으로, 2016년에는 14위로 아슬아슬하게 강등권인 15위를 피했지만, 2017년에는 기용한 신참들의 기량이 활짝 피면서 5위 근처에서 놀고 있다.
2016년에는 아챔에 참가, 8강전에서 FC 서울의 대결을 위해 상암에 원정을 오기도 했으나 3-1로 참패.
2017년은 6위로 마감. 슈퍼리그는 2(슈퍼리그1위, FA컵 우승-조별리그행)+2 (슈퍼리그 2,3위-플레이오프행) 장의 아챔 티켓이 걸려 있기 때문에 아챔에는 못나오게 되었다.
2017년의 정규리그 성적은 6위로 전년도 14위에 비해 상당히 좋아졌으나 구단측은 성적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재계약하지 않기로 했다. 항상 클럽과 안좋게 헤어지는게 마가트의 연례행사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에는 계약 기간을 꽉 채우고 구단과 사이가 좋게 헤어졌다. 구단은 공식발표문에서 "마가트 감독이 구단에 커다란 공헌을 했고,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구단측은 미래를 위해 리더쉽을 교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마가트 감독께 구단은 감사드립니다"며 립서비스성이지만 마가트를 치켜주며 헤어졌다.
마가트는 아쉽게 물러났지만, 마가트의 리빌딩은 효과를 보았는지 경험치 먹이며 키운 신인들의 포텐이 터져 2018년 산둥 루넝은 초반 3연승 을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월드컵 브레이크 전의 전반기를 1위로 마쳤다.
2018년 최종순위는 리그 3위로 (FA컵 준우승) , 후임 감독 리샤오펑의 공이 가장 크겠지만 전임감독 마가트가 1년 반동안 행한 팀 리빌딩도 큰 도움이 된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5. 평가
성적만 보면 꽤 괜찮은 감독이다. 전체적으로 종합해 오면 95년부터 11년까지 함부르크 SV, 1.FC 뉘른베르크, VfB 슈투트가르트,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FC 바이에른 뮌헨, FC 샬케 04, VfL 볼프스부르크 등의 8개 팀에서 1부 리그 승격 한번, 분데스리가 우승 3번, 준우승 1번, UEFA 인터토토컵 우승 1번, DFB-포칼 2번, 리가포칼 1번의 우승을 기록했다. 비록 잉글랜드 시절(풀럼)은 흑역사이지만, 중국 슈퍼 리그에서도 시즌 중반에 와서 강등권의 팀을 구원했으며, 이듬해에는 중상위권에 고정시켰다. EPL 팬들이 많은 한국 해축빠들은 영국 시절만을 들어 그를 기행이나 일삼는 3류 감독으로 욕하는 사람도 있지만, 능력만큼은 확실히 있는 감독이다.
마가트는 감독이 가장 위에 있어야 한다는 주의로 언제나 팀내 전권 위임을 요구하는 감독이다. 훈련 방식은 정신력과 강도 높은 체력훈련, 그리고 쌍팔년도식의 희한한 규율들[18] 이 많다.
자기한테 대든 선수는 절대 쓰지 않으며, 자기 말을 잘 듣는 충실한 선수 위주로만 기용하는 성향이 있어 개성 강한 선수들과 갈등이 잦고, 자기가 하란대로 충실히 하는 선수들을 좋아해 아시아권 선수들을 좋아한다. 대표적인 예로 구자철[19] 과 하세베 마코토, 오쿠보, 알리 카리미, 하오준민, 우치다 아츠토 등등 감독 부임시절 다양한 아시아선수들을 많이 영입했다.
별명인 ''''크밸릭스''''(Quälix, 이름 "Felix"와 괴롭히다 라는 뜻을 지닌 "quälen"의 합성어), '''사담'''[20] 그런 별명이 선수들한테 불리는 거 보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더블 스쿼드를 선호하는 정책 역시 많이 까이는 편인데, 선수 오타쿠라고 불릴 정도로 한 포지션에 다량의 선수를 사는 짓을 많이 한다. 이래서 구자철이 피봤다. 그리고 구자철이 FC 아우크스부르크로 임대되고 대활약을 펼치는 바람에 한국에서 욕을 더 얻어먹었다. 하지만 이는 마가트가 구자철을 싫어해서는 아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이적 당시의 독일 기사에 따르면 마가트는 구자철을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한국 분데스 팬들도 대부분 마가트가 구자철과 하세베 마코토 이 2명은 확실히 총애한다고 봤다.[21] 이 때문에 앞의 임대 이적 제시를 거절했었고 기회도 점차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었으나 워낙 그 포지션에 선수가 많아 제 자리에서 풀타임을 뛸 수가 없으니 폼이 올라오지를 않았다. 결국 바이에른 뮌헨과의 중요한 경기에서 골대 앞 결정적인 찬스를 트레핑 실수로 무산시키는 모습을 보고는 결단을 내리고 임대를 보냈다고 한다. 근데 11-12시즌 겨울이적시장에서 3000만 유로라는 거금을 들여 '''또''' 선수들을 잔뜩 사왔고, 그 전에도 중앙 미드필더만 8명을 두는 정신 나간 짓을 벌이기도 했다. 당연히 볼프스 팬들에게는 수집병이냐고 가루가 되도록 까였는데, 빈터파우제(윈터브레이크) 기간이 타 리그에 비해 길고 팀 숫자와 한 시즌 경기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분데스리가는 선수들 체력 부담이나 부상 발생이 적기 때문에 지나치게 두터운 더블 스쿼드를 구축하는 건 바이에른 같이 돈이 썩어 남아도는 구단이 아니면 오히려 돈지랄+주전 선수들의 경기 감각 유지에 독이 되는 행위이다. 비록 볼프스부르크 모기업인 폭스바겐 덕택에 자금줄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구단이긴 했지만 중미'''만''' 8명이나 두는 짓은 바이에른도 안 하는 짓이다.
FC 샬케 04팬들은 특히 더 이를 가는데 구단의 재정난이 심각했음에도 1500만 유로를 들여 훈텔라르를 사오고(데려올 당시의 훈텔라르는 훈신이 아니라 [훈] 수준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방만한 재정낭비로 챔피언스리그에서 반짝 성적은 일으켰지만, 리그에서 14위라는 실망스런 성적으로 경질되고는 한다는 소리가 '''날 경질하려면 내가 벌어준 UEFA 챔스리그 상금 전부 내놔라!''' 하면서 소송을 걸어버린 사건으로 샬케팬의 금지어다. 물론 흐지부지 되고 끝났지만. 사실 방만한 스쿼드와 훈의 영입 등은 당시 훈이 부진했기에 문제였지만 자신에게 반대하는 선수는 가차없이 처내는 그 성향 덕택에 주급 좀되는 노장들이 팍팍 갈려 나갔기 때문에 저 놈이 안 그래도 재정 안 좋은데 돈 더 썼다는 비난은 좀 그렇다. 본인 말마따나 상금도 팍팍 따 냈고 훈텔라르는 처음엔 부진하더니 나중에는 폼이 확 올라와 돈 값은 해주었으므로 결국 성공적인 영입이 되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강등권에서 허덕이는, 당장의 성적이 중요한 팀이나, 유소년들 자원이 뛰어나거나, 전권 위임을 해 줄 신뢰있는 구단주가 있으면 좋은 성적을 내나, 그 성적이 단기간에 머물고, 이리저리 팀을 옮기면서 반짝 성적을 일으켜 주는 소방수 감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측면은 중국 슈퍼 리그에서의 이장수 감독과 매우 비슷한 측면이 있다.
사실 어느 시점까지만 해도 저 정도까진 아니었으나, 슈투트가르트 시절 이후, 그리고 특히 볼프스부르크에서 기적 같은 우승을 거둔 이후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게 되어 본인의 방식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
5.1. 축구 버전의 김성근?
종목은 다르지만 한국에선 '''김성근'''과 자주 비교되었다. 정신주의 강조, 엄격한 규율과 강압적 훈련, 독선적 성격, 무분별하게 일단 선수 수집하고 보기, 잘못될 경우 프런트와 선수 탓 하기, 그리고 해임이든 재계약 포기든 구단과 매우 안 좋게 헤어진다는 것까지... 게다가 단장을 무력화키면서 사실상 단장 노릇까지 한 김성근보다도 한술 더 떠서, 마가트는 단장 - 감독을 공식적으로 겸임했다. 양 감독 문서를 번갈아가면서 보면 비슷한 점이 꽤 많다.
하지만 마가트는 김성근처럼 팀에 두고두고 악영향을 미치진 않으며, 순수한 스포츠인으로 정치질과도 거리가 멀다. 결정적으로 마가트는 김성근과는 달리 언론플레이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기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쓰며, 언론이 자신을 호의적으로 보도하도록 노력하는 김성근과는 달리, 마가트는 언론에 전혀 신경을 안 썼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과 매우 사이가 나쁘며[22] , 김성근의 소위 "노리타"라고 불리는 팬덤도 존재하지 않는다. 김성근은 선수를 망치면서도 선수에게 "이건 너를 잘 되게 하기 위한 쓴약이다"라는 주지(세뇌)시켜 혹사시켜 망가뜨린 선수도 "존경" 운운하는데[23] , 마가트는 호불호가 확실하여 공개적으로 그를 디스하거나 욕하는 선수도 많다.[24] 한화 시절 경질 직전까지 언론의 비호를 받았던 김성근과는 정반대다.[25]
선수단 운용에서도 마가트와 김성근은 매우 다르다. 일단 선수를 모으는 성향은 비슷한데, 대조적으로 더블 스쿼드 선호로 선수 혹사가 없고 말 잘 듣는 어린 선수들을 잘 기용하다보니 팜을 메마르게 하지도 않는다. 김성근은 즉시 전력감을 구해서 타팀의 고연봉 노장 선수를 자기팀 유망주로 교환하면서 팜을 폐허로 만들고, 구단 페이롤이 폭등하지만, 마가트는 대조적으로 부임한 후 가장 먼저 팀 내에서 방귀 좀 뀌는 말년병장들을 우선적으로 쳐내고 유망주에게 기회를 주니 팜에는 풍년이 들고 오히려 팀 페이롤이 떨어진다. 마가트가 주물렀던 팀은 성적을 못 내더라도, 마가트의 강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후임 감독이 팀을 장악하기 비교적 용이한데다, 마가트가 경험치 먹이며 키워준 유망주들 포텐이 터져서 1~2시즌 내에 금방 성적을 회복하는 경우가 많다. 마가트는 일단 선수의 부상을 자비로 치료하라는 등 나 몰라라 해서 몸을 망쳐놓거나 스쿼드를 작살낸 일은 없기 때문.
김성근은 위와 같은 마가트의 장점과는 정반대로, 팜 작살, 선수 혹사, 페이롤 폭등이 전부 따라온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김성근과 정말 비슷한 감독은 마틴 오닐이다.[26] 첼시와의 결말이 끝내줬던(...) 주제 무리뉴도 있고...[27]
그리고 선수 시절 무명이었던[28] 김성근과는 달리 마가트는 스타 플레이어였다.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분데스리가 우승을 경험한 6명[29] 중 한 명이다. 보기 드문 스타 플레이어 출신 명장이다.
6. 수상
6.1. 선수
- 함부르크 SV (1976/77 - 1985/86)
- 독일 분데스리가 (3) : 1978/79, 1981/82, 1982/83
- 유러피언 컵 (1) : 1982/83
- UEFA 컵 위너스 컵 (1) : 1976/77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 UEFA 유로 1980 : 우승
6.2. 감독
- 바이에른 뮌헨 (2004/05 - 2006/07)
- 독일 분데스리가 (2) : 2004/05, 2005/06
- DFB-포칼 (2) : 2004/05, 2005/06
- DFB 리가포칼 (1) : 2004
- 볼프스부르크 (2007/08 - 2008/09, 2011/12)
- 독일 분데스리가 (1) : 2008/09
[1] 2012년에 해체된 클럽이다[겸직] A B C D E F G H 해당 기간 중 감독직과 단장직 겸직[2] 당시 HSV에게 패해 준우승을 한 팀은 '''미셸 플라티니'''가 이끌었던 유벤투스로, 1:0으로 패했다.[3] 그 사담 후세인의 사담 맞다. 워낙 지도하는 스타일이 독불장군 스타일이라 사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4] 각각 이탈리아와 독일의 소방수와 리빌딩 전문가로 유명한 감독이다. 다만 성격은 정반대.[5] 이후 브레멘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토마스 샤프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샤프 감독은 강등권 탈출과 포칼 우승이라는 업적을 1주 만에 달성한다.[6] 첼시 FC, AS 모나코, 레스터 시티 FC를 거쳐간 감독 클라우디오 라니에리와 참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 명성있는 팀이 시즌 중 성적 부진으로 위기에 빠지면 단기감독으로 들어가 어느정도 성적을 내지만, 장기적으로 감독을 맡으면 알 수없는 부진으로 경질. 그러나 마가트 쪽은 우승을 많이 해서 라니에리보단 평가가 좋으... 려나? 참고로 2015-2016 시즌 라니에리 감독의 레스터 시티는 EPL 우승을 해냈다.[7] 지금은 사라진 인터토토컵 우승도 한 번 했지만 이 대회는 UEFA과 무관한 토토복권 주관 대회로 우승팀이 여러 팀인 말뿐인 우승대회라서 의미가 그다지 없다. 여담으로 이 대회 최다 우승 기록을 가진 팀은 3번의 우승을 기록한 VfB 슈투트가르트이다.[8] 이 때 바이에른은 리그 4위로 지금과 달리 분데스리가에 챔피언스 리그 티켓이 3장만 배정되었기 때문에 유로파행... [9] 그런데 훈텔라르는 이후 2011-2012 시즌 분데스리가 32경기 29골, 포칼 3경기 5골, 유로파리그 12경기 14골 총합 48경기 48골을 기록하며 완벽하게 부활했다. 이 후에도 꾸준히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샬케에서 오랜 기간 활약했다.[10] 덧붙여서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디펜딩 챔프 인터밀란을 격침시키고 4강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11] 두 번째 독일인 감독은 위르겐 클롭이다.[12] 마르턴 스테켈렌뷔르흐, 페르난도 아모레비에타, 코스타스 미트로글루, 브라이언 루이즈. 대부분 주전급 선수였는데, 마가트가 오자마자 입지가 크게 흔들렸다.[13] 37라운드 스토크 원정이었는데, 오사마 아사이디에게 탈탈 털리고 강등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나서 마가트가 번에게 화내자 번은 한 번도 풀백으로 나온 적 없다고 항변했고, 이에 마가트는 번을 투명인간 취급했다고 한다.[14] 규율상 지각생 벌금이 존재할 수 있는데, 문제는 연차가 적은 10대 선수가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벌금을 물리자 주장인 스콧 파커가 총대를 매고 지각한 이유를 정중하게 설명하고 선처를 호소했다는 것. 그러나 마가트는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고, 파커가 대신 그 벌금을 물어줬다는 일화가 있다.[15] 당시 갑급리그에서 승격된 옌볜 푸더의 감독 물망에도 올랐으나, 옌볜은 갑급리그에서 승급시켜준 박태하와의 의리를 지켜 박태하와 재계약했다.[16] 남아공 월드컵 직후 2년가량 브라질 대표팀 감독까지 지냈다.[17] 2018년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중국이 한국 국대를 이긴 창사 참사에서 골을 넣은 선수이다.[18] 훈련장에서 헤드폰 꼈다고 벌금을 먹이거나, 경기장에서 본인 전술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벌금을 먹이기도 했다.[19] 다만, 구자철은 마가트가 오기 전에 스티브 맥클라렌 감독이 자신이 경질 되기 직전에 영입한 선수였다.[20] 당연히 사담 후세인에게서 따온 것(...).[21] 당시 마가트에게 진짜 찍힌 선수는 구자철과는 상대도 안 될만큼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구자철이 못 뛴 이유는 순전히 자기 포지션'만' 따져도 비슷한 기량의 선수가 몇명이나 우글대서였다.[22] 아래도 나오지만 풀럼 시절에는 (성적도 안 좋았지만) 영국 언론의 맹폭을 받았고, 그 때문에 몇 달 만에 잘렸다. 아래 브레데항겔란트의 치즈 민간요법은 대부분의 영국 언론이 "crazy (미친)"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마가트를 깠다.[23] 전병두는 김성근이 망쳤지만, 은퇴에서도 김성근을 원망하기는 커녕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신윤호, 김현욱, 이동현도 마찬가지. 김성근의 인격이 훌륭하다기보다는 선수를 망치면서도 이를 "팀을 위한 희생"으로 믿게 하는 신통한 재주가 있다.[24] 다만 중국에서는 그다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중국도 한국보다는 약하지만 상명하복 문화가 있는지라 마가트가 좋아할만한 팀 분위기이다.[25] 사실 한국의 정서상 선수가 감독을 직접 디스하는 경우는 찾아보기가 어렵다.[26] 팀 재정 전혀 생각 안 하는 씀씀이, 더러운 성질, 심한 뒤끝, 선수 보내버릴 때 교묘한 언플, 쓸놈쓸, 유스 키우는데 무관심, 베스트 멤버만 주야장천 돌리다 시즌 후반에 DTD까지 비슷한 점이 정말 많다.[27] 워낙 첼시가 감독을 자주 바꾸다 보니 무리뉴는 문제가 전혀 없고 첼시가 늘 문제였다는 의견이 많아 김성근과의 비교는 무리뉴가 굴욕이라는 반응이 압도적이었지만 맨유에서도 똑같이 쫓겨나며 오히려 이쪽이 김성근과 비슷하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 사실 첼시 2기와 맨유 이전에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선수들과의 불화가 상당히 컸다. 무리타문서 참조.[28] 무명까지는 아니다. 적어도 짧은 전성기지만 그 전성기가 실업야구 최정상급 투수였으니까...[29] 헬무트 벤타우스, 유프 하인케스, 프란츠 베켄바워, 마티아스 자머, 토마스 샤프, 그리고 펠릭스 마가트.
분류
- 1953년 출생
- 독일의 축구선수
- 독일의 축구감독
- SV 빅토리아 아샤펜부르크/은퇴, 이적
- 1. FC 자르브뤼켄/은퇴, 이적
- 함부르크 SV/은퇴, 이적
- 함부르크 SV/역대 감독
- 1. FC 뉘른베르크/역대 감독
- SV 베르더 브레멘/역대 감독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역대 감독
- VfB 슈투트가르트/역대 감독
- FC 바이에른 뮌헨/역대 감독
- VfL 볼프스부르크/역대 감독
- FC 샬케 04/역대 감독
- 풀럼 FC/역대 감독
- 1972년 데뷔
- 독일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참가 선수
-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80 참가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