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Emerson, Lake & Pal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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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그렉 레이크(1947~2016)'''<기타/베이스/보컬>
'''칼 파머(1950~)'''<드럼/퍼쿠션>
'''키스 에머슨(1944~2016)'''<피아노/키보드>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e & Palmer)는 1970년에 결성돼서 1978년에 해체된 3인조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이다. 주로 ELP라는 약자로 불리운다.
키스 에머슨이 공연 중간에 오르간에 칼을 꽂는 등 퍼포먼스로도 유명하다.영상
핑크 플로이드, 예스, 킹 크림슨, 제네시스 등 과 함께 프로그레시브 락의 대표 밴드로 꼽힌다.
1969년 킹 크림슨에서 베이스, 보컬을 맡던 그렉 레이크는 미국 투어 도중에 나이스라는 그룹을 이끌고 있던 키보디스트 키스 에머슨을 만난다. 당시 나이스에서 한계에 부딪쳤던 키스 에머슨은 그렉 레이크와 새 그룹을 결성하려는 논의를 한다. 그런데 그렉 레이크는 당시 잡지에서 본 무그 신디사이저를 사서 수련하지 않으면 가입하지 않겠다고 하여 결국 키스 에머슨은 로버트 무그에게서 무그 신디사이저의 사용법을 완전히 배워온다. 그러면서 당시 어토믹 루스터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던 칼 파머 에게도 가입 제안을 하지만 그는 처음엔 거절했다가 나중에 승낙한다. 원래는 지미 헨드릭스에게도 제안을 했지만 지미 헨드릭스가 사망하여 성사되지는 못했다. 만약 지미 헨드릭스가 들어왔다면 밴드 이름은 Help가 되고 음악 스타일도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가 아니고 지미 헨드릭스와 밴드의 인연은 무대 뒤 백스테이지에서 잠깐 만나 대화를 나눈 게 전부다. ELP 헨드릭스 가입 썰은 ELP가 당대 테크니션이 뭉친 슈퍼밴드라는 점과 헨드릭스의 이름을 합치면 HELP가 된다는 점 등으로 인해 널리 퍼졌지만 완전한 루머로 생전의 그렉 레이크가 이미 수 차례 부인한 바 있다. 다만 그와 별개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드러머 미치 미첼에게 합류 요청이 간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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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3인 그룹이 된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는 1970년 영국 와이트 섬에서 데뷔공연을 한다. 이 공연에서는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의 록 버전이 최초로 연주됐고 공연 반응도 좋았다. 그렇게 몇 번의 공연을 진행한 뒤 그들은 셀프타이틀 앨범 '''Emerson, Lake & Palmer'''를 발매하여 영국차트 5위, 미국 차트 12위까지 올라간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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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앨범 투어 이후 그들은 "아르마딜로 탱크"라는 가상의 전투 기계에 관한 콘셉트 앨범 '''Tarkus'''를 1971년에 발표하는데 이 앨범은 영국차트 1위, 미국차트 9위로 상업적으로 성공하였고 평가도 매우 좋았다. 앞면에 수록된 20분 가량의 타이틀곡은 많은 키보디스트에게 영감을 줬으며 [2] 특히 중간에 4분의 5박자 부분은 이후 여러 프로그레시브 락그룹에게 영향을 줬다. 이후 그들은 라이브 투어를 하는데 당시 세트리스트에 들어있던 전람회의 그림이 해적판으로 나와 돌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해적판을 회수하고 정식으로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의 실황을 발매하여 미국 11위, 영국 3위를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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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72년에는 '''Trilogy'''라는 앨범을 발표해서 영국차트 2위, 미국차트 5위를 기록하는데 원래 앨범 커버는 살바도르 달리에게 부탁했지만 그가 대가로 5만 파운드의 거금을 요구하여 무산되고 결국 핑크 플로이드와 레드 제플린으로 유명한 "힙노시스"에서 만들어 진다. 밴드 앨범 중 가장 서정미가 돋보이는 작품인데 그렉 레이크의 인터뷰에 따르면 보컬리스트로서 이 앨범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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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logy투어 이후 그들은 당시 킹 크림슨에서 나온 피터 신필드와 함께 만티코어(서양에서 유명한 환상종이면서, 타쿠스 앨범에서 타쿠스와 싸워서 이긴 동물. 곡 내용은 타쿠스와 만티코어가 싸워서 타쿠스가 패배하고 바다로 도망치면서 아쿠아타쿠스로 개조?된다는 내용)라는 음반사를 만든다. 그 이후 '''Brain Salad Surgery''' 작업을 시작하는데 남아있던 세계순회공연과 당시 개발된 "무그 폴라포닉 앙상블 신디사이저","퍼쿠션 신디사이저"등을 도입하는 등 여러 바쁜 일 때문에 결국 9개월이 걸려서야 앨범 작업이 끝났다. 예전엔 그렉 레이크가 맡았던 가사를 피터 신필드가 맡으면서 가사는 더욱 초현실주의적이 되었으며 H.R 기거가 만든 앨범커버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3]
위 앨범은 영국의 국가인 예루살렘[4] 과 알베르토 히나스테라의 피아노 협주곡 1번 4악장을 편곡한 Toccata[5] , 그렉 레이크의 발라드 곡 Still.. You turn me on과 30분짜리 대곡 Karn Evil 9이[6] 수록되었고 영국차트 2위, 미국차트 11위까지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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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in Salad Surgery 발매 후 그들은 다시 세계순회 공연을 하는데 이 투어는 역대 ELP투어 중 가장 대규모였다. 원형스크린에다가 키스 에머슨은 키보드 8대와 피아노 3대, 칼 파머는 360도 회전하는 무대에다가 양쪽에 두드리는 악기들을 다 놓고 공연을 하였다. 또한 공연 중간에 피아노를 좌우로 돌리는 등 여러 퍼포먼스를 하였다. 여담으로 당시 멤버들 사이가 안 좋았는지 악기 등을 트럭에 실을 때 각자 다른 트럭에 실은 것도 모자라 트럭에 멤버 이름을 크게 적어놓기도 하였다. 하지만 투어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딥 퍼플, 블랙 사바스등과 함께 캘리포니아 잼 74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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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멤버들은 계속되는 순회공연을 매우 힘들어했고 결국 74투어를 담은 3LP '''Welcome Back, My Friends, to the Show That Never Ends... Ladies and Gentlemen'''발매를 끝으로 ELP는 휴식기에 들어가기로 한다.
휴식기 동안 멤버들은 솔로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렉 레이크는 75년에 "I Believe in Father Christmas", 키스 에머슨은 76년에"Honky Tonk Train Blues"라는 싱글을 발매하고 앨범을 준비하는 중이었는데, 그렉 레이크가 재결합을 제안하자 키스 에머슨은 솔로앨범을 포기하고 다음앨범인 Works Volume 1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멤버들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 2LP에서 각각 1면에 멤버들의 솔로음악을 놓고 나머지 면에 ELP곡을 놓는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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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77년에 발매된 '''Works Volume 1'''은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받았고 당시 펑크나 뉴웨이브의 영향때문에 영국 9위, 미국 12위라는 예전보단 낮은 성적을 얻었지만 그렉 레이크의 "C'est La Vie"와 신디사이저 Yamaha GX-1을 사용한 "Fanfare For The Common Man"[7] 등이 유명하다. 아무튼 밴드는 앨범 발표 이후 무려 130명이나 되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투어를 하지만, 하루 만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동할 수 없어 일주일에 1~2일만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어 투어경로를 짜지 못하는데다, 공연할 때마다 엄청난 비용이 들어서 결국 밴드는 캐나다 공연이후 오케스트라를 포기한다.
그렇게 투어를 진행한 후 그들은 '''Works Volume 2'''를 내놓지만 수록곡의 대부분은 Brain Salad Surgery시절의 싱글이나 멤버들의 솔로(싱글)곡이었고 차트 성적도 매우 좋지 않았다. 하지만 계약 때문에 결국 다음 앨범작업을 하여 1978년에 '''Love Beach'''라는 음반을 내지만 상업적,음악적으로 실패하고[8] 팬들에게 외면을 받는다. 결국 1977년 캐나다 공연을 담은 '''In Concert'''[9] 발매후 그룹은 해체되었다.
해체 이후 칼 파머는 예스의 스티브 하우, 제프 다운스와 킹 크림슨, UK에서 활동하던 존 웨튼과 함께 슈퍼그룹 아시아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그렉 레이크, 키스 에머슨은 솔로활동을 시작하는데, 키스 에머슨은 다리오 아르젠토가 감독을 한 인페르노#s-3OST(1980), 실베스타 스텔론이 주연을 맡은 "Nighthawks"(1981),루치오 풀치(1927~1996)가 감독한 "Murderock"(국내 비디오 제목은 악몽/1984)등 OST를 맡으며 영화음악 작곡가로도 활동한다. [10]
하지만 ELP시절이 그리웠던 키스 에머슨은 옛 동료들에게 재결합을 제의하는데 그렉 레이크는 승낙했지만 칼 파머는 당시 Asia 활동 때문에 거절했다. 결국 키스 에머슨은 당시 최고의 드러머라는 평가를 받았던 코지 파웰을 영입해 1986년에 '''Emerson, Lake & Powell'''라는 셀프 타이틀 앨범을 발표하고 타이틀 곡인 Touch and Go를 싱글로 발표하여 히트를 친다.[11] 그러나 그렉 레이크와 키스 에머슨의 불화 때문에 밴드는 투어 이후 해체된다. 그이후 키스 에머슨은 당시 Asia에서 나온 칼 파머와 GTR에서 세션 기타를 맡았던 로버트 베리라는 기타리스트와 함께 "3"라는 그룹을 만들어 1988년에 '''To The Power of Three'''를 발표 하는데 과거에 비해 매우 팝적인 음악을 담고 있어 팬들에게 실망을 안겼지만 이러한 팝적인 감각 덕에 토토같은 팝밴드 팬들에게 재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 그룹도 앨범 판매량 저조 등의 이유로 투어 이후 해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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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후 키스 에머슨은 La Chiesa의 OST를 담당하고 그렉 레이크, 칼 파머는 솔로활동을 시작하는데 1991년 영화 사운드트랙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3명은 앨범작업에 착수한다. 결국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지만 앨범작업은 거의 완성되어 1992년에 '''Black Moon'''을 발표한다. 과거에 비해 매우 퇴폐적인 사운드를 담아 팬들에게 실망을 주지만[12] 홍보를 많이 한 덕분인지 투어는 성공적으로 마친다.
하지만 투어를 마치고 In The Hot Seat 녹음을 시작할 때 키스 에머슨의 손목에 문제가 발생한다. 손목 신경을 전달하는 부분에 큰 압박을 받아 4,5번째 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게 되고 과거 퍼포먼스 때문인지 손목에도 이상이 생겨 수술을 받는 바람에 연주를 따로 녹음해야 되었다. 결국 '''In The Hot Seat'''은 완성도나 연주력이 매우 떨어지는 음반이 되었으며 당연히 상업적, 음악적으로 실패한다.[13] 결국 투어를 할 수 없게 되자 ELP는 해체된다.
이후 멤버들은 솔로활동을 하다가 다시 모여 1996-97년투어를 한다. 물론 키스 에머슨의 손목과 후덕해진 그렉 레이크[18] 의 목소리 때문에 음악이 완전히 달라졌지만... 이후 칼 파머는 아시아에 다시 들어가고 그렉 레이크와 키스 에머슨은 각각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2010년 멤버들이 다시모여 공연을 하긴한다.
또한 2014년 그렉 레이크, 키스 에머슨 둘이 함께 투어를 한다.
2016년 3월 10일 새벽 1시 30분에 캘리포니아주 해안에 있는 아파트에서 키스 에머슨이 숨져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은 에머슨의 머리에서 총상이 발견됐다며 자살이 확실해 보인다고 밝혔다. 사인은 손가락 질환으로 고통받던 키스가 팬들의 기대의 보답하지 못할것이라 생각해서 자살한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12월 7일 (현지시간) 그렉 레이크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며 ELP의 멤버 중 칼 파머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이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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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그렉 레이크(1947~2016)'''<기타/베이스/보컬>
'''칼 파머(1950~)'''<드럼/퍼쿠션>
'''키스 에머슨(1944~2016)'''<피아노/키보드>
1. 개요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e & Palmer)는 1970년에 결성돼서 1978년에 해체된 3인조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이다. 주로 ELP라는 약자로 불리운다.
키스 에머슨이 공연 중간에 오르간에 칼을 꽂는 등 퍼포먼스로도 유명하다.영상
핑크 플로이드, 예스, 킹 크림슨, 제네시스 등 과 함께 프로그레시브 락의 대표 밴드로 꼽힌다.
2. 역사
2.1. 데뷔
1969년 킹 크림슨에서 베이스, 보컬을 맡던 그렉 레이크는 미국 투어 도중에 나이스라는 그룹을 이끌고 있던 키보디스트 키스 에머슨을 만난다. 당시 나이스에서 한계에 부딪쳤던 키스 에머슨은 그렉 레이크와 새 그룹을 결성하려는 논의를 한다. 그런데 그렉 레이크는 당시 잡지에서 본 무그 신디사이저를 사서 수련하지 않으면 가입하지 않겠다고 하여 결국 키스 에머슨은 로버트 무그에게서 무그 신디사이저의 사용법을 완전히 배워온다. 그러면서 당시 어토믹 루스터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던 칼 파머 에게도 가입 제안을 하지만 그는 처음엔 거절했다가 나중에 승낙한다. 원래는 지미 헨드릭스에게도 제안을 했지만 지미 헨드릭스가 사망하여 성사되지는 못했다. 만약 지미 헨드릭스가 들어왔다면 밴드 이름은 Help가 되고 음악 스타일도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가 아니고 지미 헨드릭스와 밴드의 인연은 무대 뒤 백스테이지에서 잠깐 만나 대화를 나눈 게 전부다. ELP 헨드릭스 가입 썰은 ELP가 당대 테크니션이 뭉친 슈퍼밴드라는 점과 헨드릭스의 이름을 합치면 HELP가 된다는 점 등으로 인해 널리 퍼졌지만 완전한 루머로 생전의 그렉 레이크가 이미 수 차례 부인한 바 있다. 다만 그와 별개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드러머 미치 미첼에게 합류 요청이 간 것은 사실이다.
[image]
결국 3인 그룹이 된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는 1970년 영국 와이트 섬에서 데뷔공연을 한다. 이 공연에서는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의 록 버전이 최초로 연주됐고 공연 반응도 좋았다. 그렇게 몇 번의 공연을 진행한 뒤 그들은 셀프타이틀 앨범 '''Emerson, Lake & Palmer'''를 발매하여 영국차트 5위, 미국 차트 12위까지 올라간다.[1]
2.2. 데뷔이후부터 1차 공백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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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앨범 투어 이후 그들은 "아르마딜로 탱크"라는 가상의 전투 기계에 관한 콘셉트 앨범 '''Tarkus'''를 1971년에 발표하는데 이 앨범은 영국차트 1위, 미국차트 9위로 상업적으로 성공하였고 평가도 매우 좋았다. 앞면에 수록된 20분 가량의 타이틀곡은 많은 키보디스트에게 영감을 줬으며 [2] 특히 중간에 4분의 5박자 부분은 이후 여러 프로그레시브 락그룹에게 영향을 줬다. 이후 그들은 라이브 투어를 하는데 당시 세트리스트에 들어있던 전람회의 그림이 해적판으로 나와 돌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해적판을 회수하고 정식으로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의 실황을 발매하여 미국 11위, 영국 3위를 기록한다.
[image]
이후 1972년에는 '''Trilogy'''라는 앨범을 발표해서 영국차트 2위, 미국차트 5위를 기록하는데 원래 앨범 커버는 살바도르 달리에게 부탁했지만 그가 대가로 5만 파운드의 거금을 요구하여 무산되고 결국 핑크 플로이드와 레드 제플린으로 유명한 "힙노시스"에서 만들어 진다. 밴드 앨범 중 가장 서정미가 돋보이는 작품인데 그렉 레이크의 인터뷰에 따르면 보컬리스트로서 이 앨범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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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logy투어 이후 그들은 당시 킹 크림슨에서 나온 피터 신필드와 함께 만티코어(서양에서 유명한 환상종이면서, 타쿠스 앨범에서 타쿠스와 싸워서 이긴 동물. 곡 내용은 타쿠스와 만티코어가 싸워서 타쿠스가 패배하고 바다로 도망치면서 아쿠아타쿠스로 개조?된다는 내용)라는 음반사를 만든다. 그 이후 '''Brain Salad Surgery''' 작업을 시작하는데 남아있던 세계순회공연과 당시 개발된 "무그 폴라포닉 앙상블 신디사이저","퍼쿠션 신디사이저"등을 도입하는 등 여러 바쁜 일 때문에 결국 9개월이 걸려서야 앨범 작업이 끝났다. 예전엔 그렉 레이크가 맡았던 가사를 피터 신필드가 맡으면서 가사는 더욱 초현실주의적이 되었으며 H.R 기거가 만든 앨범커버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3]
위 앨범은 영국의 국가인 예루살렘[4] 과 알베르토 히나스테라의 피아노 협주곡 1번 4악장을 편곡한 Toccata[5] , 그렉 레이크의 발라드 곡 Still.. You turn me on과 30분짜리 대곡 Karn Evil 9이[6] 수록되었고 영국차트 2위, 미국차트 11위까지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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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in Salad Surgery 발매 후 그들은 다시 세계순회 공연을 하는데 이 투어는 역대 ELP투어 중 가장 대규모였다. 원형스크린에다가 키스 에머슨은 키보드 8대와 피아노 3대, 칼 파머는 360도 회전하는 무대에다가 양쪽에 두드리는 악기들을 다 놓고 공연을 하였다. 또한 공연 중간에 피아노를 좌우로 돌리는 등 여러 퍼포먼스를 하였다. 여담으로 당시 멤버들 사이가 안 좋았는지 악기 등을 트럭에 실을 때 각자 다른 트럭에 실은 것도 모자라 트럭에 멤버 이름을 크게 적어놓기도 하였다. 하지만 투어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딥 퍼플, 블랙 사바스등과 함께 캘리포니아 잼 74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image]
그러나 멤버들은 계속되는 순회공연을 매우 힘들어했고 결국 74투어를 담은 3LP '''Welcome Back, My Friends, to the Show That Never Ends... Ladies and Gentlemen'''발매를 끝으로 ELP는 휴식기에 들어가기로 한다.
2.3. Works부터 해체까지
휴식기 동안 멤버들은 솔로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렉 레이크는 75년에 "I Believe in Father Christmas", 키스 에머슨은 76년에"Honky Tonk Train Blues"라는 싱글을 발매하고 앨범을 준비하는 중이었는데, 그렉 레이크가 재결합을 제안하자 키스 에머슨은 솔로앨범을 포기하고 다음앨범인 Works Volume 1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멤버들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 2LP에서 각각 1면에 멤버들의 솔로음악을 놓고 나머지 면에 ELP곡을 놓는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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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77년에 발매된 '''Works Volume 1'''은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받았고 당시 펑크나 뉴웨이브의 영향때문에 영국 9위, 미국 12위라는 예전보단 낮은 성적을 얻었지만 그렉 레이크의 "C'est La Vie"와 신디사이저 Yamaha GX-1을 사용한 "Fanfare For The Common Man"[7] 등이 유명하다. 아무튼 밴드는 앨범 발표 이후 무려 130명이나 되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투어를 하지만, 하루 만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동할 수 없어 일주일에 1~2일만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어 투어경로를 짜지 못하는데다, 공연할 때마다 엄청난 비용이 들어서 결국 밴드는 캐나다 공연이후 오케스트라를 포기한다.
그렇게 투어를 진행한 후 그들은 '''Works Volume 2'''를 내놓지만 수록곡의 대부분은 Brain Salad Surgery시절의 싱글이나 멤버들의 솔로(싱글)곡이었고 차트 성적도 매우 좋지 않았다. 하지만 계약 때문에 결국 다음 앨범작업을 하여 1978년에 '''Love Beach'''라는 음반을 내지만 상업적,음악적으로 실패하고[8] 팬들에게 외면을 받는다. 결국 1977년 캐나다 공연을 담은 '''In Concert'''[9] 발매후 그룹은 해체되었다.
2.4. 해체 이후
해체 이후 칼 파머는 예스의 스티브 하우, 제프 다운스와 킹 크림슨, UK에서 활동하던 존 웨튼과 함께 슈퍼그룹 아시아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그렉 레이크, 키스 에머슨은 솔로활동을 시작하는데, 키스 에머슨은 다리오 아르젠토가 감독을 한 인페르노#s-3OST(1980), 실베스타 스텔론이 주연을 맡은 "Nighthawks"(1981),루치오 풀치(1927~1996)가 감독한 "Murderock"(국내 비디오 제목은 악몽/1984)등 OST를 맡으며 영화음악 작곡가로도 활동한다. [10]
하지만 ELP시절이 그리웠던 키스 에머슨은 옛 동료들에게 재결합을 제의하는데 그렉 레이크는 승낙했지만 칼 파머는 당시 Asia 활동 때문에 거절했다. 결국 키스 에머슨은 당시 최고의 드러머라는 평가를 받았던 코지 파웰을 영입해 1986년에 '''Emerson, Lake & Powell'''라는 셀프 타이틀 앨범을 발표하고 타이틀 곡인 Touch and Go를 싱글로 발표하여 히트를 친다.[11] 그러나 그렉 레이크와 키스 에머슨의 불화 때문에 밴드는 투어 이후 해체된다. 그이후 키스 에머슨은 당시 Asia에서 나온 칼 파머와 GTR에서 세션 기타를 맡았던 로버트 베리라는 기타리스트와 함께 "3"라는 그룹을 만들어 1988년에 '''To The Power of Three'''를 발표 하는데 과거에 비해 매우 팝적인 음악을 담고 있어 팬들에게 실망을 안겼지만 이러한 팝적인 감각 덕에 토토같은 팝밴드 팬들에게 재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 그룹도 앨범 판매량 저조 등의 이유로 투어 이후 해체된다.
2.5. 재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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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후 키스 에머슨은 La Chiesa의 OST를 담당하고 그렉 레이크, 칼 파머는 솔로활동을 시작하는데 1991년 영화 사운드트랙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3명은 앨범작업에 착수한다. 결국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지만 앨범작업은 거의 완성되어 1992년에 '''Black Moon'''을 발표한다. 과거에 비해 매우 퇴폐적인 사운드를 담아 팬들에게 실망을 주지만[12] 홍보를 많이 한 덕분인지 투어는 성공적으로 마친다.
하지만 투어를 마치고 In The Hot Seat 녹음을 시작할 때 키스 에머슨의 손목에 문제가 발생한다. 손목 신경을 전달하는 부분에 큰 압박을 받아 4,5번째 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게 되고 과거 퍼포먼스 때문인지 손목에도 이상이 생겨 수술을 받는 바람에 연주를 따로 녹음해야 되었다. 결국 '''In The Hot Seat'''은 완성도나 연주력이 매우 떨어지는 음반이 되었으며 당연히 상업적, 음악적으로 실패한다.[13] 결국 투어를 할 수 없게 되자 ELP는 해체된다.
2.6. 재결성 이후
이후 멤버들은 솔로활동을 하다가 다시 모여 1996-97년투어를 한다. 물론 키스 에머슨의 손목과 후덕해진 그렉 레이크[18] 의 목소리 때문에 음악이 완전히 달라졌지만... 이후 칼 파머는 아시아에 다시 들어가고 그렉 레이크와 키스 에머슨은 각각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2010년 멤버들이 다시모여 공연을 하긴한다.
또한 2014년 그렉 레이크, 키스 에머슨 둘이 함께 투어를 한다.
2016년 3월 10일 새벽 1시 30분에 캘리포니아주 해안에 있는 아파트에서 키스 에머슨이 숨져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은 에머슨의 머리에서 총상이 발견됐다며 자살이 확실해 보인다고 밝혔다. 사인은 손가락 질환으로 고통받던 키스가 팬들의 기대의 보답하지 못할것이라 생각해서 자살한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12월 7일 (현지시간) 그렉 레이크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며 ELP의 멤버 중 칼 파머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이로 남게 되었다.
3. 디스코그래피
3.1. 스튜디오 앨범
- Emerson, Lake & Palmer (1970)
- Tarkus (1971)
- Trilogy (1972)
- Brain Salad Surgery (1973)
- Works Volume 1 (1977)
- Works Volume 2 (1977)
- Love Beach (1978)
- Black Moon (1992)
- In the Hot Seat (1994)
3.2. 라이브 앨범
- Pictures at an Exhibition (1971)
- Welcome Back, My Friends, to the Show That Never Ends... Ladies and Gentlemen, (1974)
- In Concert (1979)
- Live at the Royal Albert Hall (1993)
- Live at the Isle of Wight Festival 1970 (1997)
[1] 앨범에 수록된 그렉 레이크의 곡 "Lucky Man"을 싱글로 내어 빌보드 핫100차트 46위까지 올라간다.[2] 드림 시어터의 키보디스트 조던 루디스도 이 음악을 듣고 프로그레시브 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3] 원래 그림에는 여성의 입 아래 남성성기 그림이 그려져있었으나 음반사의 반대의 부딪혀 결국 빛으로 대체된다.[4] 영국에서는 민요를 그냥 모방했다는 이유 등으로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있다.[5] 처음에 출판사가 승인을 해주지 않아 결국 하나스테라의 집까지 직접 가서 승인을 얻어온 곡이다.[6] Karn Evil은 Carnival을 살짝 비튼 것이다. [7] 싱글을 발매하여 메인 록스트림 차트 2위까지 올라가 원곡까지 유명하게 해준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 KBS 뉴스 9의 주요뉴스 테마로 유명하다.[8] 그래도 영국 46위, 미국 55위를 기록하여 실버 레코드를 기록한다.[9] 나중에 몇곡 더 추가되어 "Works Live"라는 이름으로 나온다.[10] 하지만 "Asia"에 들어간 칼 파머를 제외하곤 나머지 멤버들은 그다지 주목 받지 않았다. 키스 에머슨의 Nighthawks가 빌보드 162위까지, 그렉 레이크의 첫 셀프타이틀 앨범이 영국 차트 64위까지 올라간 게 전부다.[11] Mainstream Rock차트 2위까지 올라간다.[12] 특히 달라진 점은 그렉 레이크의 목소리다. 변성기가 늦게 왔는지 예전에 비해 매우 무거운 목소리로 바뀌어 있다.[13]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마존에다가 이런 댓글을 썼다. ''Welcome Back My Friends To The Shame That Never Ends''(번역: 끝나지 않는 부끄러움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18] 원래 그렉 레이크가 어느 정도 얼굴이 통통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