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밴드)

 

[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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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예스
YES

멤버
존 앤더슨, 크리스 스콰이어, 빌 브루포드, 토니 케이,
스티브 하우, 릭 웨이크먼, 앨런 화이트, 트레버 라빈

입성 연도
2017년
후보자격 연도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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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멤버들.[2] 왼쪽부터
  • 빌 브루포드(Bill Bruford / 드럼 1949~)
  • 존 앤더슨 (Jon Anderson / 보컬 1944~)
  • 피터 뱅크스 (Peter Banks / 기타 1947~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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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앨범 디자이너인 로저 딘[3]이 제작한 예스의 로고.
1. 소개
2. 개요
3. 음악적 자취
3.1. 초기
3.3. 휴지기: 끝없는 멤버 교체
3.4. 음악적 변화와 상업적 대 성공: /뉴웨이브의 결합
3.5. 리드 보컬의 대체
4. 평가
5. 디스코그래피


1. 소개


영국프로그레시브 록밴드.
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의 주류를 이끌어 전세계에 수많은 팬들과 그들의 음악을 따라하는 추종자 밴드들을 낳았으며, 80년대 이후 음악의 성향을 기존의 프로그레시브 록에 뉴웨이브 성향을 섞은 새로운 취향으로 바꾸면서, 기존의 골수팬들에게 실망을 줬지만[4], 새로운 젊은 팬들을 얻었고, 70년대에 이루지 못했던 상업적인 성공을 일구어냈다. 90년대 이후엔 70년대와 80년대의 음악을 절충해 여러 시도를 했지만 이전과 같은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비디오게이머들에게도 의외로 잘 알려진 밴드인데, 홈월드라는 유명 게임의 엔딩곡을 이들이 작곡/연주했기 때문이다.

2. 개요


밴드의 리더는 보컬리스트인 존 앤더슨 (Jon Anderson)이며, 음악적 역량을 가장 많이 보여준 이는 릭 웨이크먼이다.[5] 존 앤더슨의 경우 중간에 다른 멤버들과의 분란으로 한번 축출된적이 있고, 릭 웨이크먼은 몇번의 재가입과 탈퇴를 반복한다. 현재의 밴드 명의의 법적인 소유자는 밴드를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베이시스트 크리스 스콰이어다. 현재는 존 앤더슨이 탈퇴 (2002년)하고 다른 보컬리스트가 영입되었다.
음악적 성향이 시대에 따라 많이 변하긴 했지만 그래도 밴드의 특징을 들자면, 첫째는 리더 존 앤더슨의 천사와 같은 청아한 보컬이고, 두번째는 상당한 연주 실력을 지닌 멤버들의 꽉 짜여진 연주 하모니, 셋째는 록 이외의 여러가지 음악 요소가 잔뜩 들어가 조화를 이룬 복잡하고 드라마틱한 곡의 전개이다. 쉽게 말해 전형적인 록밴드가 키보드 멜로디를 중심으로 각각의 연주력으로 오케스트라를 구현해냈다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이러한 성향은 예스를 제외하고도 제네시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등의 많은 심포닉 프로그레시브 밴드 대부분이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연주력으로 따지고 보면, 70년대 당시 프로그레시브 록의 범주를 벗어나서, 록의 무대 전체를 살펴봐도 최고라 할만한 뮤지션들이 모인 밴드였기에, 그 연주력은 지금 들어도 굉장히 잘 짜여져있고 지금의 후배 연주자들도 감히 따라하기가 어려운 연주 파트가 많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스케일이 크고 기승전결의 순서를 가진 복잡한 구조의 곡을 만들었는데, 한 앨범에 세네개의 곡밖에 안들어가는 대곡위주의 수록곡들이 많다. 특히 전성기 시절 음악들은 이쪽 바닥의 대표적 모범사례이다.
그들의 음악은 기존의 록 음악 이외 여러가지 다른 장르의 자양분이 많이 스며들었는데, 먼저 클래식적 악곡 요소가 다분히 많이 차용되었고, 빌 브루포드와 같은 연주자들의 취향으로 전위적인 재즈적 시도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6,70년대 당시 록음악에 많은 영향을 준 동양명상 사상, 즉 힌두교의 신비주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은 리더 존 앤더슨의 시도로 예스의 음악에는 이후 뉴에이지라 불리울 형태의 새로운 음악 사조의 시조라 할만한 실험도 많이 나타난다. 예스의 음악이 장중하고 때론 암울하기까지 한 핑크 플로이드킹 크림슨과 차별을 두는 밝고 낙관적이고 환희에 찬 모습을 많이 보이는건 이때문이기도 하다. 예스의 음악은 장중할지언정 어둡지는 않다.
70년대 당시 존 앤더슨은 멤버들을 데리고 인도힌두교 요기들을 방문하곤 했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릭 웨이크만을 제외한 멤버들 대부분이 채식주의자라고 하기도 하고, 밴드 멤버들 대부분이 존 앤더슨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물론 예스의 음악 = 뉴에이지라고 생각하는건 큰 오산이다. 영향만 주었을 뿐, 예스의 음악과 뉴에이지는 완전이 딴판이라고 보면 된다.
워낙 뛰어난 연주력을 가진 자부심 강한 멤버들이 모인 밴드였기에 밴드의 멤버들은 자주 교체되었으며, 그런만큼 음악의 성향이 많이 바뀌었다. 이런 점에선 음악 성향은 다르지만 예스 못지않게 멤버 교체가 잦았던 딥 퍼플과 비견되기도 한다. 사실 거론했던 5대 밴드 중 예스와 킹 크림슨은 멤버들끼리의 교류가 잦았고, 이후 밴드 멤버들끼리 이합집산하여 U.K., 아시아 등등의 여러 밴드를 결성하기도 하고 서로의 솔로 앨범에 세션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그래서 예스와 킹 크림슨,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이 세 밴드 멤버들의 활동 연혁을 살펴보면 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 세계의 절반 이상은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밴드에서 활약한 연주자들이 곧 당시 프로그레시브 록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자 들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201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때 초기 멤버들이 모두 모여 Rounabout을 불렀는데, 사망한 크리스 스콰이어를 대신하여 러시의 게디 리가 참여하였다. 반응 역시 스콰이어를 대신할 사람은 리 밖에 없다는 분위기이다.

3. 음악적 자취



3.1. 초기


예스는 1968년 보컬 존 앤더슨과 베이시스트크리스 스콰이어를 주축으로 드러머인 빌 브루포드, 기타리스트인 피터 뱅크스, 건반악기인 토니 케이가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데뷔를 알렸다.
활동 이전 존 앤더슨은 벽돌공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젊은 예술인들의 요람이었던 2년제 예술 대학 (아트 스쿨)에 들어가 예술적인 영감을 얻고 밴드를 결성할 생각을 했다고도 한다. 당시 영국의 음악씬은 사이키델릭 록이 뒤로 후퇴하면서 크림(Cream)으로 대표되었던 하드 록사운드가 슬슬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동시에 19세기 클래식 음악을 전격적으로 도입한 프로그레시브 록 역시 키스 에머슨(Keith Emerson)이 몸담았던 나이스(The Nice)와 딥 퍼플(Deep Purple)을 중심으로 세력 확장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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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는 같은 해 11월, 로얄 알버트 홀 (Royal Albert Hall)에서 펼쳐진 크림의 고별 무대 오프닝을 장식하면서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그 유명한 존 필(John Peel)의 라디오 쇼에 출연하면서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아틀란틱 레코드(Atlantic Records)[6]와 계약한 뒤 1968년 셀프 타이틀 데뷔앨범인 "Yes"를 내놓으며 단번에 프로그레시브 록의 총아로 떠올랐다.
음악 평론가 전정기씨의 표현에 따르면, 이 앨범만 내놓고 바로 해체되었어도 전설적인 희귀반으로 남았을 거라고 하는데, 확실히 처음 밴드를 시작하는 신출내기 록밴드의 음악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연주 앙상블이 뛰어나고, 특히 빌 브루포드의 드럼이 훌륭하다. 하지만 당시의 음악은 완전한 프로그레시브 록이라 보기는 조금 어렵고, 오히려 사이키델릭 록과 팝의 요소가 많이 섞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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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이들은 2집인 "Time And A Word"를 발표하며 향후 전개될 "예스표 심포닉 록"의 서막을 알렸다. 하지만 오히려 전작보다 못하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많다. 1950년대 영화 "The Big Country"의 메인 테마를 리메이크한 곡에서 클래식한 오케스트레이션과 멤버들의 연주의 조화가 많은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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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를 피터 뱅크스에서 사이키델릭 록밴드인 투모로우(Tomorrow) 출신의 스티브 하우(Steve Howe)로 교체하고, 낸 1971년 3집 앨범 "The Yes Album"은 복잡하고 심오한 록의 예술을 펼치며,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냈고 싱글 "Your Move"는 밴드 역사상 최초 빌보드 40위권에 진입하며 전세계적으로 예스를 알리는데 선봉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 때의 여담으로, 존 앤더슨은 처음엔 기타리스트로 킹 크림슨의 로버트 프립을 영입하려고 했다고 한다. 프립이 지금처럼 성격이 유들유들해져서 당시의 예스에 들어갔다면 예스는(...)
앨범은 영국에서 7위, 미국에서 40위를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사실 이때부터 수퍼 밴드로서의 예스 음악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즈음 토니 케이가 탈퇴한다. 토니 케이가 멜로트론 연주를 거부해서 그만뒀다는 소문이 있다.

3.2. 전성기: FragileClose to the 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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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4집 앨범 "Fragile"을 발표함으로서 예스의 개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71년 키보디스트를 토니 케이에서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릭 웨이크먼(Rick Wakeman)이 교체되어, 앨범은 음악적, 상업적으로 전작을 뛰어넘는 결과를 이뤄내며 최고의 프로그레시브 밴드 중 하나로 우뚝 섰다. 각자 최상의 기술적 완성도를 지닌 멤버들이 밴드라는 우산 아래 합일점을 찾아내어 완벽한 연주 하모니를 일궈낸 것이다. 특히 릭 웨이크먼의 키보드는 테크닉 면에서 ELP의 키보디스트 키스 에머슨에 전혀 뒤쳐지지 않았고, 풍부한 멜로디 메이커이자 오케스트레이션이었다. 예스의 로고를 제작했던 디자이너 로저 딘(Roger Dean)이 제작한 초현실적인 앨범커버도 웅장한 밴드의 사운드를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는 평을 얻어냈다.
수록곡들은 각자의 연주력을 뽐내는 솔로 연주 위주의 대곡들로 채워져있다.[8] 다른 프로그레시브 명반들과 달리 산만해 보일 수도 있는 구성이지만, 곡 하나하나 라이브에서 주 레퍼토리가 될 정도로 개성과 임팩트가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첫 트랙 "Roundabout"[9]일본 애니메이션 "죠죠의 기묘한 모험"[10]엔딩곡으로 쓰였다.[11]
이때의 멤버가 존 앤더슨 (보컬), 릭 웨이크먼 (건반악기), 스티브 하우 (기타), 빌 브루포드 (드럼), 크리스 스콰이어 (베이스)로, 대부분의 예스팬들은 이 때가 밴드의 최전성기이자 최고의 연주실력을 가진 멤버 조합으로 인정한다. 역시 최전성기였던 동시대의 딥 퍼플 2기의 멤버 (이언 길런 - 보컬, 존 로드 - 키보드, 리치 블랙모어 - 기타, 이언 페이스 - 드럼, 로저 글로버 - 베이스)와 비견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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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발표된 "Close to the Edge" 역시 영국 차트 4위, 미국 차트 3위에 랭크되며 밴드의 성공을 이어나갔다. 팬들에 따라 본 앨범을 최고작으로 꼽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3곡만이 이 앨범에 들어있으며, 타이틀 곡이며 4개의 파트로 나눠져있는 대곡 "Close to the Edge"는 심포닉 록 최고 수준의 조곡이다.[12]
하지만 이 시기에 존 앤더슨과의 음악적 견해차이로 빌 브루포드가 킹 크림슨으로 떠났고, 대신 존 레논의 밴드 등에서 활약한 유명 세션 드러머 앨런 화이트가 드럼 스틱을 쥐게 되었다. 빌 브루포드에 의하면 지금까지 예스의 음악 방법론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결과물이 "Close to the Edge"에서 최고의 단계를 달성했고 더이상 추구할 것이 없는 벽에 부딪쳤기에 이제 밴드의 음악 추구 방향을 바꿔야하며, 자신이 리더가 되어 재즈적인 성향으로 이끌어 가겠다고 했지만 존 앤더슨이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후 방향으로 볼 때 전작 "Fragile"이나 본작 "Close to the Edge"보다 훨씬 감성적이고 개인기 위주가 아닌 밴드 지향적인 음악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밴드의 음악이 하향세로 돌아섰다는 평가가 많다. 그들의 얘기로는 여러 뛰어난 연주자들의 초절기교가 넘치는 복잡한 연주를 빌 브루포드가 재즈적인 센스의 리듬으로 중심을 잡아주어 지금까지 밴드의 음악이 균형을 잃지 않았는데, 일반 ,락앤롤 음악의 세션을 주로 하던 앨런 화이트는 오히려 그런 연주자들의 연주 선율에 동조하여 고조시켜 따라가는 연주를 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이후 밴드의 음악이 균형을 잃고 난잡해졌다는 것이다. 드러머의 중요함은 비단 재즈적 드럼이 아니더라도 비정상적인 박자가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록 음악이 프로그레시브 록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특히 예스처럼 안그래도 머리 터질듯 복잡한 리듬에 한술 더 떠 변화가 심했던 밴드는 빈자리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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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는 1973년 공연 실황 앨범인 "Yessongs"을 발매하기도 했다. 드러머는 앨런 화이트가 담당했으며 빌 브루포드의 세션은 두 곡(Perpetual Change, Long Distance Runaround, The Fish (Shindleria Praematurus))이 수록되어 있다.

3.3. 휴지기: 끝없는 멤버 교체




때문에 빌 브루포드의 탈퇴 이후 발매된 1974년 작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를 기점으로 하향세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앨범은 영국 차트 정상을 차지하기는 하였으나, 그들이 자랑하는 대곡 지향은 2장의 LP, 4개의 대곡이 되는 과한 구성이었고 또한 사운드 메이킹의 주축을 이뤘던 릭 웨이크먼 역시 음악적 견해차를 보이면서 탈퇴를 선언했다.[13] 공석은 곧바로 패트릭 모라츠 (Patrick Moraz)로 대체되었거 멤버들의 솔로 활동과 함께 병행한 1974년 "Relayer"는 어지러웠던 팀 사정을 그대로 반영하는 범작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Relayer"를 명작으로 보는 예스의 팬들도 많으며, 그들은 "Fragile"과 "Close to the Edge", "Relayer"를 예스의 3대 앨범으로 꼽곤 한다. 사실 패트릭 모라츠도 대단한 기량을 보였던 키보디스트였고 앨런 화이트가 리듬을 주도하는 예스의 음악엔 보다 차갑고 무미건조한 패트릭 모라츠의 건반음이 더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특히 "The Gates Of Delirium" 마지막에 들려주는 Soon의 아름다운 부분은 따로 커트해 다른 앨범에 수록될 정도. 또한 스티브 하우는 최고 역량의 기타 연주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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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 웨이크먼이 복귀한 뒤, 1977년에 등장한 "Going For The One"은 전작의 실패를 만회할 만한 역작이었다. 그간의 성과를 고스란히 안으면서 좀 더 현대적이다. 커버도 로저 딘의 커버가 아니라 힙노시스의 커버이다. 하지만 뒤이은 야심작인 1978년 "Tormato" 는 당시 영국 음악계의 대세였던 펑크 밴드들에게 집중 포화를 맞아가며 역사 속에 파묻히고 만다. 본 앨범은 이전의 "Fragile" 시절의 음악으로 충실히 돌아간 시도였다. 하지만 "Tormato" 때에는 거기서 정도를 지나쳐 너무 가벼워졌던 것 같다.
"Tormato" 앨범의 좌절은 예스에게 크나큰 상처로 남았다. 그 결과 멤버들의 분란으로 존 앤더슨과 릭 웨이크먼이 밴드를 등졌고, 버글스[14]의 트레버 혼 (Trevor Horn, 보컬)[15]과 제프 다운스 (Geoff Downes, 건반악기)가 공석을 대신했다. 이때 존 앤더슨은 키보디스트로 반젤리스를 데려오려고 했지만 오히려 다른 멤버들에게 축출되었고 이후 존 앤더슨은 반젤리스와 듀오 그룹을 만들어 몇몇 앨범을 발표한다. 그리고 이 때 밴드의 소유권 명의는 존 앤더슨에서 크리스 스콰이어에게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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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는 새로운 라인업으로 1980년 "Drama"를 발매하여 항해를 지속하였고 앨범은 영국에서 2위, 미국에서 18위를 기록하며, 자신들이 여전히 건재함을 알렸다. 하지만 다음 해 예스는 해산의 진통을 겪게 된다. 제프 다운스와 스티브 하우는 아시아 (Asia)를 결성하며 1980년대 초반에 짧지만 화려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Drama"는 존 앤더슨 대신 트레버 혼이 보컬을 맡았으며 목소리는 음색 외엔 비슷비슷한 편으로 뉴웨이브 느낌이 물씬 풍기긴 하지만 전작 "Tormato"처럼 유치한 주제를 가진 앨범은 아니었다.

3.4. 음악적 변화와 상업적 대 성공: /뉴웨이브의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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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보드 차트 역대 1위곡
Say Say Say (6주)

Owner of a Lonely Heart (2주)

Karma Chameleon (3주)
1983년 기타리스트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인 트레버 래빈으로 교체되어 재결성 뒤 내놓은 "90125"는 당시 주류였던 /뉴웨이브 사운드를 예스의 필터로 걸러낸 수작이었다. 멤버들의 공동작곡으로 되어있지만 대부분의 곡들은 기존에 트레버 래빈이 만들어 놓았던 곡들을 다듬은 것이었다. 이렇게 새 멤버 트레버 래빈의 존재감이 두드러진 이 앨범에서 밴드는 명곡 "Owner Of A Lonely Heart"라는 뉴웨이브 사운드의 곡으로 미국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고,[16] 최초로 미국 차트에서 플래티넘을 기록하는 대 히트를 기록한다. 다만 이전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로서의 예스를 좋아한 옛 팬들이 떨어져 나간것은 당연지사. 대신 /뉴웨이브 스타일의 새 곡을 좋아하는 새로운 팬들이 생겨난다.
트레버 래빈은 기존 예스 멤버들보다 10살 가까이 어린데다가 미남이기 까지 했다. 당시 크리스 스콰이어는 공연에서 소녀팬들의 함성이 들려 신기했었다고 한다.물론 그들은 트레버 래빈의 팬들이었다. 덕분에 예전 예스 팬들은 새 기타리스트인 트레버 래빈이 예스를 망친 주범이라며 이를 갈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이 앨범은 지금 들어도 70년대의 예스 사운드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잘 짜여진 새로운 예스 사운드의 시작이었으며, 2018년 기준으로 클래식중의 클래식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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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계속해서 1987년 "Big Generator"를 발표하였고, 크리스 스콰이어를 뺀 전성기 예스 멤버들이 예스라는 밴드명 대신 "Affirmative"라는 명칭으로 1989년 "Anderson, Bruford, Wakeman And Howe"를 선보였다. 크리스 스콰이어, 알란 화이트 그리고 트레버 레빈 등은 계속해서 YES 의 이름하에 1991년 "Union" 같은 앨범도 발매하기도 하고, 밴드는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3.5. 리드 보컬의 대체


2014년 7월 25일 21번째 앨범 "Heaven&Earth"의 라이센스반이 발매되었다. 새로운 보컬리스트 존 데이비슨(Jon Davison)이 참여했다.
2015년 6월 27일 베이스 주자인 크리스 스콰이어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17] 이로써 초기 멤버들은 모두 그룹를 떠난 셈이다.

4. 평가


예스는 대중 음악의 수많은 장르 중, 프로그레시브 (Progressive)라는 수식어가 붙는 모든 것의 원조이자 그 자체로서 평가받는 수퍼밴드이다. 이들은 동시대의 음악 동료였던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e And Palmer)", "제네시스 (Genesis)" 등과 함께 1970년대 초 프로그레시브 록의 중흥기를 선포하면서 예술적이고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30년 이상 펼쳐왔다. 이런 탐미적 음악관은 비론 동시대의 펑크 록 진영에게 적잖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들이 일궈놓은 예술 지상주의 록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위대한 업적임에는 분명하다. 국내에서도 예스의 정교한 록 사운드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낳아,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한국 록 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5. 디스코그래피


  • Yes(1969)
  • Time and a Word(1970)
  • The Yes Album(1971)
  • Fragile(1972)
  • Close to the Edge(1972)
  • Tales From Topographic Ocean(1973)
  • Relayer(1974)
  • Going for the One(1977)
  • Tormato(1978)
  • Drama(1980)
  • 90125(1983)
  • Big Generator(1987)
  • (1989)[18]
  • Union(1991)
  • Talk(1994)
  • Keys to Ascension(1996)
  • Keys to Ascension 2(1997)
  • Open Your Eyes(1997)
  • The Ladder(1999)[19]
  • Magnification(2001)
  • Fly from Here(2011)
  • Heaven & Earth (2014)

[1]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함.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주길.[2] 현재는 2015년 사망한 크리스 스콰이어를 끝으로 모두 밴드를 떠났다.[3] 게임계에서는 테트리스 로고를 디자인 한 것으로 유명하다.[4] 당시 해외에서는 예스의 뉴웨이브 사운드를 대표하는 Owner Of A Lonely Heart를 비롯한 80년대 곡들을 '예스가 아니다'라며 엄청나게 깠었다.[5] 릭 웨이크먼의 평가는 연주자적 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것이다. 작곡이란 측면에선 아무래도 다른 멤버들이 우세했다...라고 적혀있었지만, 이런 평가는 릭 웨이크먼에게 대단히 실례이다. 본문에도 언급되다시피 웨이크먼은 런던 왕립음악원에서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한 피아니스트 출신으로 음악적 성향이 다른 멤버들보다 좀 더 클래식, 특히 오케스트레이션 성향이 강했다. 결국 이 양반이 작곡한 음악들은 밴드 내 작품들이 아니라 별도의 개인 작업들이 훨씬 더 유명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 그가 예스와 처음 결별하던 1974년에 발표한 곡으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1400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당시 작품들의 성향으로 볼 때, 아마도 밴드보다는 록과 클래식의 결합을 통해, 20세기 판 바그너 같은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여하튼 예스의 전성기 때 음악적인 방향에 가장 많이 기여한건 역시 존 앤더슨이고, 작곡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의 고집적인 산물이었던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1973)"에서의 한계도 염두에 두자.[6] 여담으로, 하드 록계의 전설 레드제플린도 아틀란틱 레코드 소속이었다.[7] 미국에선 선정성 문제로 커버가 바뀌었다.[8] 멤버 각자가 작곡한 곡들이 하나씩 포함되어 있다. Cans and Brahms는 릭 웨이크먼이 요하네스 브람스의 교향곡 제 4번 3악장을 어레인지한 곡이고, We Have Heaven은 보컬 존 앤더슨이 혼자 오버덥을 이용해 합창으로 만든 곡이고, Five Per Cent For Nothing은 드러머 빌 브루포드의 특기인 엇박과 정박을 넘나드는 드럼실력이, The Fish (Schindleria Praematurus) 는 스티브 하우의 기타 하모닉스와 크리스 스콰이어의 베이스 속주로 이루어진 곡이고, Mood For a Day는 스티브 하우의 클래식 기타 연주로 플라멘코 장르와 바로크의 하모니를 들을 수 있다.[9] 이 곡은 원래부터 Fragile 앨범과 예스 밴드를 대표하는 걸작이었다. 이 곡의 조화로운 연주는 예스의 상징 중 하나인 하모니를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승전결이 희미한 구성이라 일반 대중들에게는 다소 산만하게 들릴 수 있지만, 난해하면서도 매력적인 프로그레시브 록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때문에 예스 팬들에게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곡이다.[10] 원작자 아라키 히로히코가 처음 스토리를 썼을때 들었던 노래중 하나라고 한다.[11]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서 엔딩곡으로 쓴 뒤 유튜브에서 'Jojo'라는 댓글이 수없이 달렸는데, 예스 골수팬들이 '도대체 이 Jojo가 뭐냐?'하는 얘기를 끊임없이 했다.(...)[12] 프로그레시브 마니아층들은 보통 이 곡을 예스 최대의 명곡으로 꼽는다. 이 곡은 예스에게 있어서 핑크 플로이드Echoes 같은 곡이라고 볼 수 있다.[13] 이때 대체자로 그리스 출신의 키보디스트 반젤리스가 추천되었다. 존 앤더슨이 예스 활동 중 중간중간 반젤리스의 앨범인 "Heaven And Hell"의 보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이 후 몇달간 함께 연주를 하며 합숙을 했지만 반젤리스 스스로 밴드와 맞지 않다 생각했는지 탈퇴를 선언한다. 이후 반젤리스와 음악을 함께 하고 싶었던 앤더슨은 1978년 "Jon And Vangelis"라는 세션을 구성하여 총 4장의 앨범을 발표하기에 이른다.[14] Video Killed the Radio Star로 유명한 신스팝 듀오이다.[15] 이후 90125에도 프로듀서로 참여한다.[16] 빌보드 Hot 100에서 1위를 기록한 곡은 "Owner of a Lonely Heart"가 유일하고, "Love Will Find a Way"와 "Lift Me Up"은 각각 메인스트림 록 차트와 앨범록 차트에서만 1위에 올랐다.[17] 그 자리에 빌리 셔우드가 들어갔다.#[18] 위에 쓰여있듯이 이 때 예스의 권리는 정식으로 크리스 스콰이어에게 있었다. [19] 게임 홈월드의 엔딩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