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메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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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행적
2.1. 서기관에서 헤타이로이 사령관까지
2.2. 알렉산드로스 사망 이후
2.3. 1차 디아도코이 전쟁
2.4. 2차 디아도코이 전쟁
2.5. 은방패 부대의 배신과 죽음
2.6. 평가와 영향력
3. 페르가몬 시조설
4. 왕궁일지
5. 충신인가 야심가인가?
6. 대중문화 속의 에우메네스

Εὐμένης
BC 362? ~ BC 316

1. 개요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장군이자 학자. 필리포스 2세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왕궁 서기관으로 근무했다. 서기관이긴 하지만 항상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을 따랐던 것을 보면 서기관 업무 외에 군사적인 업무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1]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함께 원정을 수행한 부장 중에서는 유일하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이름을 올린 장군이다. 실제로는 학자적 식견이 대단히 뛰어났으며, 기병대 사령관은 말년의 활약이었음에도 가히 압도적이라고 볼만한 전공을 보여주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 이후에는 제국을 나누어가지려는 디아도코이 장군들로부터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을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전술적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연전연승 하는 와중에 부하들의 배신으로 사망한다.

2. 행적



2.1. 서기관에서 헤타이로이 사령관까지


카르디아 출신으로,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로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어릴 적의 이야기는 자료 부족으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원래는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3세의 개인 서기관이었다. 하지만 인도에서 처음으로 소규모 기병대의 지휘관을 맡았다. 당시 그가 맡은 임무는 두 소도시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었는데, 그가 도시들에 도착하기 전에 주민들이 도망갔기에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다.[2]
왕의 측근 헤파이스티온이 사망하자[3] 그의 친위대장직과 최선임 헤타이로이 대대장직을 페르디카스가 물려받았고, 에우메네스는 페르디카스가 가지고 있던 헤타이로이 대대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헤타이로이의 대대장 자리는 오랫동안 알렉산드로스를 따른 장군들도 가지기 힘들 정도의 명예로운 자리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유능한 서기관이 군사적 재능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2.2. 알렉산드로스 사망 이후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는 사망했다. 에우메네스는 페르디카스와 함께 대왕의 유복자 알렉산드로스 4세를 지지했고, 페르디카스가 제국 섭정으로, 알렉산드로스 4세가 공동왕에 지명되게 하는 데 공헌한다.
바빌론 협정에서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 지역의 사트라프 자리를 받았다. 하지만 그곳은 아직 점령되지 않은 지역이라 페르디카스의 지원을 받고 직접 전투를 벌여 점령한 후에[4] 기병을 6,500명이나 모으는 능력을 보여준다.[5] 에우메네스는 필리포스 2세가 개인 장구류를 국가에서 지급한 것처럼 기병 지원자들에게 말을 지급하는 등의 지원을 해 빠른 속도로 기병들을 육성할 수 있었다. 그를 따라온 헤타이로이 천인대가 교관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이후로 에우메네스의 기병대는 디아도코이들의 큰 적이 된다.
'제국 최고의 지략가'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의 주군 알렉산드로스 대왕부터 군사적 재능은 매우 뛰어났으나 지장보다는 용장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제장들로 따지면 그들은 지략이 딱히 필요없었다. 그들을 위한 책략은 알렉산드로스가 대신 짜주었기 때문으로, 그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전쟁 병기로서의 역할에 특화되어 있었다. 동방원정 중 각각 기병대와 보병대 지휘관으로서 전설적인 업적을 남긴 페르디카스크라테로스조차도 책략을 짜는 능력은 보잘것 없었을 정도이다. 이 둘은 1차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말 그대로 광탈한다.[6] 이러한 마케도니아의 장군들에 비해서 전술적 역량은 물론이고, 전략적 식견, 그밖에 학자로서의 능력까지도 뛰어난 에우메네스는 별종에 속했다.

2.3. 1차 디아도코이 전쟁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 때 네오프톨레모스와 함께 크라테로스를 막을 것을 페르디카스에게 명령받았다. 하지만, 네오프톨레모스가 배신의 기미를 보이자 기습해 병사들을 차지했다. 기원전 321년에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크라테로스, 네오프톨레모스를 전사시켰다. 크라테로스는 전향하면 후대할 것을 약속하며 항복할 것을 권했으나, 자신은 페르디카스와의 화해를 중재할 수는 있으나 왕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전력으로 저항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그는 전투 전날 한 꿈을 꾸었다 한다. 알렉산드로스 두 명이 서로 팔랑크스 방진을 가지고 싸우는데 한 명은 데메테르의 지원을 받았고. 한 명은 아테나의 지원을 받았는데 데메테르의 지원을 받은 알렉산드로스가 이기고 데메테르는 곡식 줄기로 만든 왕관을 씌워주었다. 꿈에서 깨어나 첩자들에게 받은 보고 중 크라테로스가 암구호를 '아테나와 알렉산드로스'로 정했다는 것을 듣고 자신의 암구호는 '데메테르와 알렉산드로스'로 정하고 부하들에게 팔과 머리에 곡식 줄기를 묶어두라는 명령을 했다. 일종의 주술적 효과를 노린 것 같다.
크라테로스는 안티파트로스와 함께 공동 마케도니아 섭정이었고,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와의 융합 정책에 반대해 마케도니아 병사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장군이었다. 그와 적대하고 있다는 걸 알면 자신의 병사들이 창대 끝을 돌릴 것이 뻔했기에 에우메네스는 피그레스라는 이름의 이방인 장군과 싸우러 간다는 헛소문을 내고 크라테로스의 얼굴을 모르는 현지인 기병들을 어떤 대화나 협상도 없이 크라테로스를 향해 돌격시켰다. 그리고 마케도니아 군사들은 혹시나 발생할 수 있는 돌발상황에 대비해 대기시켰다. 크라테로스는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자신을 알아보면 전의를 잃고 자신의 편이 될 것이라 확신했지만 그를 공격한 것은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아니었기에 낙마해 말발굽에 깔려 죽었다.
이 전투 중 네오프톨레모스와는 '''일기토'''를 벌였으며, 여기서 승리해 네오프톨레모스를 '''직접 베었다'''.[7] 유약한 문관으로 알려졌던 에우메네스가 제국에서 이름난 장군 둘을 하나는 무력으로, 하나는 지략으로 쓰러뜨린 것이다. 그러나 그 승리 때문에, 특히 마케도니아 군인들에게 가장 인망이 높았던 크라테로스를 이민족 기병들의 힘으로 전사시킨 것 때문에, 마케도니아인들에게는 원망을 사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톨레마이오스를 공격하기 위해 이집트로 원정을 떠났던 페르디카스가 암살당하면서, 에우메네스는 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정치적 지원자를 잃게 됐다.
에우메네스가 정치적으로 고립되자, 여러 장군들은 트리파라디소스 협약을 통해 크라테로스를 죽인 에우메네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사형 집행인으로는 안티파트로스와 안티고노스가 선정되었다. 안티파트로스는 제국 섭정이었기에, 에우메네스를 상대하는 임무는 사실상 안티고노스의 단독 임무였다. 사형 선고가 내려지자 에우메네스는 무법자가 되었고, 에우메네스는 최악의 상황을 역이용한다. 자신의 군대와 함께 도적떼가 된 것이다. 정규군의 훈련과 장비를 가진 도적떼가 탄생(...). 어쨌든 안티고노스의 공격에 위기에 몰렸으나. 알렉산드로스 3세의 여동생 클레오파트라의 지지를 받았고 대왕의 모후 올림피아스에게 후원을 받았다. 그밖에도 페르디카스 파들이 힘을 합쳤다면 안티고노스에 대적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서로 반목하다 각개격파당한다.
에우메네스는 안티고노스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 안티고노스는 크라테로스를 전사시킨 에우메네스의 기병대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건 자살행위라고 생각했고, 그의 부하 중 하나를 매수한다. 에우메네스는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전투에서 패해 기원전 320년에 노라 요새로 퇴각했다. 하지만 에우메네스는 희망을 잃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노라 산악요새는 절벽 위에 지어진 천혜의 요새였고 몇 년은 버틸 수 있는 식량과 물이 저장되어 있었다. 작은 트랙을 만들어 말을 뛰게 하거나 말의 운동기구를 만들어 언제든 요새를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에우메네스가 희망을 버리지 않은 이유는 안티파트로스-안티고노스-프톨레마이오스의 삼각동맹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4. 2차 디아도코이 전쟁


결국 노라에 틀어박힌 지 1년쯤 후에 기회가 찾아온다. 제국 섭정 안티파트로스가 고령으로 사망한 것이다. 안티파트로스는 섭정직을 자신의 부관 폴리페르콘에게 승계하나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는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 여기고 폴리페르콘과 대립한다. 에우메네스는 카산드로스와의 대립에 쓸 만한 동맹을 찾던 폴리페르콘의 도움을 받아[8] 노라를 탈출해 페니키아를 점령했다.[9]
에우메네스의 목적은 왕가의 수호였기에 그때 굳이 안티고노스와 싸울 필요는 없었다. 마케도니아 본토로 돌아가 폴리페르콘을 도와 카산드로스를 쓰러트린 다음에 안티고노스와 싸워도 늦지 않았다. 그러나 헬레스폰트 해협은 이미 안티고노스의 함대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마케도니아로 귀환은 실패하고 카파도키아로 돌아와 국고의 돈을 아낌없이 뿌리며[10] 군사와 용병들을 끌어모았다. 근위기병대(헤타이로이)와 은방패 부대라는 훌륭한 교관단이 존재했으므로 신병들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 때 바빌론 근처에서 주둔하다가 페르시스 사트라프 페우케스타스를 설득해 안티고노스와 싸우도록 했으며,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트라프들에게 하나하나 싸움을 걸기 시작한다. 바빌로니아 사트라프 셀레우코스 1세, 메디아 사트라프 페이톤 등을 상대로 싸웠다.[11] 기원전 317년에 파라이타케네, 기원전 316년에는 가비에네 등에서 안티고노스와 싸웠다.[12]

2.5. 은방패 부대의 배신과 죽음


하지만, 전투 도중에 에우메네스를 후원하던 페르시스 사트라프 페우케스타스의 태만으로 인하여, 아군이 동방원정 내내 축적해왔던 대량의 전리품들과, 휘하 부대이자 마케도니아 최정예인 '은방패 부대' 대원들의 처자식들이 적에게 넘어가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자, 은방패 부대는 적들에게 에우메네스를 팔아넘겼다. 에우메네스는 마케도니아인들에게 잘해주었지만, 마케도니아인들에게 에우메네스는 '외국인 주제에 마케도니아 동족끼리 싸움을 붙여가며 이득을 취하는 재수없는 이방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죽이고 난 뒤 자존심이 강한 은방패 부대들을 다루기 힘들다고 판단해 한직으로 좌천시키고 하나하나 숙청했다.
단, 일반 병사들의 입장에서 결국 목숨 걸고 싸우는 이유는 자신들이 한 몫 잡아 귀향하기 위한 전리품인데 이를 지키지 못한 상황에서 지켜온 충성을 저버리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 게다가 처자식들이 적들에 포로로 붙잡힌 시점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평가도 강하다. 물론 에우메네스가 마케도니아인들에게 깊은 인망을 사진 못했지만, 그들이 기회가 되자마자 좋다구나 팔아 넘겼다기 보단, 충성의 근간인 주요 사유가 사라진 탓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전근대 서방의 군대는 어디까지나 상호간 '고용 계약'으로 맺어진 주종관계였기 때문이다.
능력이 뛰어났지만 배신자 때문에 패배한 인물인데, 이는 스스로의 실수라기보다도 부하 운이 없었기 때문으로, 항상 부하들에게는 섭섭지 않게 잘 대우해줬는데도 배반당하고 말았다. 안습. 게다가 부하들이 그를 배반한 가장 큰 이유는 에우메네스의 행실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그가 마케도니아인이 아닌 외국인(그리스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스키타이인 아니면 페르시아인이라는 추측도 있다)이라서 외국인인 그에게 명령을 받고 동족과 싸우는 것이 불쾌했기 때문이었다.[13] 물론 그런 점을 뛰어넘을 만한 카리스마는 없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참고로, 은방패 부대(아르기라스피데스)는 3천명의 60~70대 고참병들로 이루어진 제국 최정예 부대였다. 전투력과 왕가에 대한 충성심을 기준으로 선발된 이들은 험지에서 하루 60km를 행군하고 절벽을 오르고 성벽을 공격하고 사막을 건너고 눈 덮인 산을 오르며 자신의 용맹을 증명했다. 전쟁을 스포츠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백전노장들이었다. 젊을 때부터 필리포스 2세의 정복 전쟁에 동참했으며, 알렉산드로스에게 무공을 인정받아 그들의 방패에 은을 도금하는 명예도 받았다.[14] 냉병기 시대에는 담력이 완력을 압도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고령이라는 것이 큰 흠이 될 수 없었고, 그들이 가진 전투 기술과 경험은 마케도니아 제국의 어떤 부대도 따라갈 수 없었다. 또한, 은방패 부대는 에우메네스를 배신하기 전 이미 여러 번 그를 배신하라는 제의를 거부했는데, 무려 4명의 제국 최고위 장군(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 셀레우코스, 페이톤)의 제의를 거절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충성심은 꽤 타산적이었는데, 은방패 부대 지휘관 안티게네스는 애꾸눈 안티고노스는 너무 강하기 때문에 부하들을 마음대로 죽이며 자신들이 큰 공을 세운다 해도 대접받기 힘들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에 비해 에우메네스는 외국인 서기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의지하고 충성에 보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에우메네스는 이들의 충성심을 붙잡아 놓기 위해 죽은 알렉산드로스 3세의 권위를 이용했는데, 자신이 알렉산드로스 3세가 자신을 찾아와 왕좌에서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꿈을 꿨다고 주장하며 왕의 자리를 마련해놓고 매일 왕의 제단에 절을 올리며 군사 회의에는 왕의 자리를 비워두고 자신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참모로서 지휘권을 대신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 책략은 기가 막히게 먹혀들어 은방패 부대는 그에 지휘에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는 묘사가 있다. 그럼에도 결국 팔아넘겨지고 말았다.

2.6. 평가와 영향력


에우메네스는 결국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의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제국 분할파에게 맞서다가 사망한 것이다. 그러한 입장의 차이 이외에도 그는 마케도니아인이 아니라 이민족 출신이었고, 무인이 아니라 문관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점 때문에, 제국 분할파 장군들이나 심지어 휘하 장군들에게도 경원시되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대단한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에우메네스의 숙적이자 그에게 여러 번 패배한 안티고노스조차 그를 잡았을 때 죽일까 말까 고민했다고 한다. 실제로 에우메네스가 보여준 능력을 본다면, 이 정도의 천재적인 인적자원을 그냥 죽이기는 아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에우메네스는 자신이 칼을 들고 있을 때에는 자신을 능가할 자가 없다고 말하며 제국의 충신으로서 죽기를 원해 결국 에우메네스를 죽이게 된다.
그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디아도코이들 중 아무도 왕을 지칭하지 못했지만, 그가 죽은 뒤 10년이 지나고 안티고노스를 필두로 디아도코이들은 스스로 왕관을 쓰고 자신의 왕국을 세우게 된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나...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하나같이 엄청난 인물들이었다. '''필리포스 2세''', '''알렉산드로스 3세''', 알렉산드로스 3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 심지어 그의 숙적 '''안티고노스'''마저도 에우메네스의 능력에 감탄했다...
거기다가 상대보다 항상 열세의 상황에서 싸웠는데도, 이민족 문관 출신이라는 약점으로 아군도 믿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마지막에 배신당하여 겪은 패배를 제외하면, 항상 불리한 상황에서도 연전연승한 걸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수준의 전술적 재능이다.
에우메네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죽은 뒤에도 늘 왕의 의자를 한가운데에 놓고 어전회의의 형식으로 군사 회의를 진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아르가이 왕조를 지지하며 왕국의 통일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로마시대에 그의 전기를 쓴 코르넬리우스(Cornelius Nepos, BC 100?~BC 25?)는 에우메네스를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4세의 '최후의 수호자'라고 평하며, 그가 살아있을 때에는 장군들이 감히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지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이라는 책은 알렉산드로스 사후 알렉산드로스 4세의 죽음까지를 서술하고 있는데. 에우메네스를 거의 주인공으로 서술하고 있다. 관심 있는 사람은 한번쯤 읽어 볼 만하다.
에우메네스에 대한 글
은방패 부대의 활약

3. 페르가몬 시조설


항간에는 에우메네스의 후손이 페르가몬 왕국을 세웠다고 알려져있지만, 이는 근거 없는 낭설이다. 아탈로스 왕조와 에우메네스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런 오해가 생긴 이유는 아탈로스 왕조의 2대 왕의 이름이 에우메네스 1세이기 때문이다.

4. 왕궁일지


에우메네스는 생전에 왕궁일지를 적었으며,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해 정확하게 기록된 문헌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른 책에서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야기를 하면 꼭 언급이 되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현대에 와서도 꾸준하게 왕궁일지를 찾으려는 역사학자가 많다. 당시에 쓰여진 책의 소재가 주로 파피루스, 혹은 양피지였기 때문에 지금도 수많은 로마 기록이 담긴 양피지가 긁혀나가고 있다.[15] 원본은 사라졌지만 사본은 최소한 서기 2세기까지는 존재했으며, 아리아노스와 플루타르코스는 서로 다른 판본을 읽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해놓았다.

5. 충신인가 야심가인가?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의 전기에서는, 에우메네스가 분열되어가는 알렉산드로스의 제국과 그 후손들을 위해 끝까지 싸우다 사망한 의로운 영웅으로 기록되어있다. 헌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에우메네스를 탐욕과 야심을 채우려든 전쟁광 정도로 묘사한다. 심지어 원정에서 돈을 챙기고 숨겼다든가,[16] 헤파이스티온과 심하게 싸워 놓고 막상 죽으니까 애도했다면서[17] 에우메네스가 겉과 속이 다르다고 까는 사례들도 들어있다. 물론 현대의 기준으로는 처세술의 일종으로 평가받는다.
플루타르코스가 단순히 음해성 기록만 모았다고 의심할 수도 있지만, 에우메네스에 대해 남겨진 유리한 역사 기록 역시 그의 동향 사람이자 친구였던 히에로뉘모스[18]에게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비록 에우메네스가 패하고 난 후에 쓰여지긴 했지만, 중립성이 의심받을 수도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에우메네스가 대의를 내세웠지만 결국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싸운 것, 알렉산드로스 사후에 권력을 잡으려 했던 다른 장군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야망을 채우는 데 더 유리한 기회는 많았다. 크라테로스와 대적했을 때와 노라 요새에서 안티고노스에게 몰렸을 때, 부하들에게 배신당해 안티고노스에게 생포되었을 때 모두 에우메네스는 항복하면 후한 대접을 받을 것을 약속받았으나 왕가에 충성을 바치는 것을 우선했다. 디아도코이 중 제국통합파로 분류되는 장군은 제국 섭정 3명(페르디카스, 안티파트로스, 폴리페르콘)을 제외하면 에우메네스밖에 없다. 섭정들은 왕가의 권위가 높아져야 이득인 걸 감안하면 불리함을 무릅쓰고 왕가에 충성을 바친 장군은 에우메네스뿐이다.
하지만 에우메네스는 자신이 알렉산드로스 가문의 충신인지 또 다른 야심가인지 증명할 단계 이전에 안티고노스에게 패배하고 죽었으니, 결국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

6. 대중문화 속의 에우메네스


이와아키 히토시만화히스토리에》는 에우메네스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학자로서도 지휘관으로서도 뛰어났다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해서 문무를 겸비한 비범한 인물로 묘사된다. 특히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사고와 창의력의 소유자라는 점이 부각된다. 작중 필리포스 2세의 평가로는 알렉산드로스와 에우메네스가 각각 1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싸우면 알렉산드로스는 3번 중 2번 승리하겠지만, 전사자 3000명 중 알렉산드로스가 포함될 것이며, 에우메네스는 9000명의 병사를 죽여도 남은 1000명 중에 있을 것이라 한다.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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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e Zero의 등장인물 라이더보구 왕의 군세의 일원으로 등장한다. 문관복을 입은 날카로운 인상, 등장 당시 라이더의 마스터 웨이버 벨벳성장한 모습과 닮아 화제가 됐었다. 후에 둘이 닮았다는 설정이 추가됐고, 로드 엘멜로이 2세의 사건부에서 등장하는 헤파이스티온(의 여동생)에 따르면 많이 닮기는 닮은 모양. '짠돌이. 좀생이. 어둡고 괴팍. 아침에 고생하고. 곰팡내 나는 책자만 읽고 있어. 비굴한 주제에 오만. 낯짝에다 자못 고생하며 산다는 티를 내놓는데 다 끝나고 보면 제일 사태를 뒤집어놨어' 라며 대차게 깐다.


[1] 사실 이 시기의 서기관이라는 게 비서에 더 가깝다.[2] 알렉산드로스가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에우메네스는 동방원정 내내 보급과 행정업무를 전담했기에 공이 작지 않았지만 무용에 기초한 마케도니아의 전통적 위계에서, 외국인 출신 문관에게 어떤 위치가 어울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에우메네스를 우대하려면 그에 걸맞은 군공을 주거나, 최소한 가질 기회라도 줘야 했다.[3] 에우메네스에게 배정된 숙소를 피리 연주자에게 양보한 일으로 크게 다툰 적이 있었다.[4] 페르디카스는 에우메네스 혼자서 그 지역을 점령하기 힘들 것 같아 소(小) 프리기아 사트라프 레온나토스와 대(大) 프리기아 사트라프 안티고노스에게 에우메네스를 지원하라 명령하나 그들이 거부하고 라미아 전쟁에 참전하는 바람에 에우메네스가 직접 점령해야 했다.[5]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때 동원한 기병이 5,000명이다. 단,출발 시점에서 5천이라는 거지. 인도나 돌아왔을때는 당연히 5천을 넘는다. 그리고 에우메네스가 동원했을 경우 마케도니아 제국의 땅은 훨씬 큰 만큼 이것만 보고 알렉산더와 비교하는 우는 범하진 말자.[6] 페르디카스가 탈락한 사유는 정략적 오판으로 적을 너무 많이 만든 탓에 의한 암살이고 크라테로스는 에우메네스의 부대가 보다 인망이 뛰어난 자신에게 회유될 거라는 다소 순진한 기대가 에우메네스의 아군을 속인 책략(쿠데타에 흔히 쓰인다.)에 무너진 이후에 전사했다.[7] 네오프톨레모스는 알렉산드로스의 개인 경호원이었다. 왕의 경호원이 무예가 낮을 리는 없으므로 에우메네스의 무력이 무시할 수 없었음을 짐작케 한다.[8] 공동 섭정 제안에 은방패 부대 지휘권과 국고 사용권을 받았다. 은방패 부대는 키인다에 있는 국고를 경비하는 제국 최정예 부대였고 국고에는 금화 2만 탈렌트 가량의 거금이 보관되어 있었다(다리우스 3세가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강화협정에 대가로 제시한 금액이 1만 탈렌트,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세폴리스에서 약탈한 아케메네스 왕조의 국고가 12만 탈렌트이니 엄청난 거금이다). 거금과 정예병을 둘 다 손에 넣는다면 안티고노스에 맞설 군대를 조직하는 것은 에우메네스의 행정가적 역량을 감안하면 어렵기는 하나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9]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의 재능을 탐내고 있었다. 둘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 왕실에서 친한 사이었다. 사형 공동집행인 안티파트로스가 죽은 이상 에우메네스를 죽일지 말지는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을 서약한다면 에우메네스의 사형 선고를 사면하고 풀어주는 것과 동시에 카파도키아의 사트라프로 복귀하게 하는 것은 물론 안티고노스 휘하의 고위 장군이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매우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상대한다는 명목으로 이미 제국에서 가장 강한 군대를 제국 섭정 안티파트로스에게 양도받았기에 여기에 에우메네스의 행정가적 역량과 군사적 역량이 더해진다면 제국의 패권을 꿈꿀 수 있었다. 그러나 에우메네스는 안티고노스에 대한 충성보다 아르기아 왕조의 대한 충성을 더 우선하는 내용으로 교묘하게 서약서를 수정해 안티고노스를 속이고 탈출한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안티고노스가 제시한 원본 서약서와 안티고노스의 대한 충성보다 아르기아 왕조의 대한 충성을 우선하는 내용의 수정본 서약서를 자신을 포위한 안티고노스의 병사들에게 둘 다 보여 주고 어느 쪽이 더 정당하냐고 물었다. 안티고노스의 속셈이 무엇이든 표면적으로 안티고노스는 아르기아 왕조를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안티고노스의 병사들은 수정한 서약서가 더 정당하다고 말했고, 에우메네스는 나름 정식으로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안티고노스의 부하들은 에우메네스를 풀어 주었다. 수정한 서약서를 본 안티고노스는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화내지만 이미 에우메네스는 도망간 후였다.[10] 에우메네스는 폴리페르콘이 부여한 국고 사용권 덕분에 국고의 돈을 제한없이 쓸 수 있었다. 셀레우코스나 안티고노스도 국고의 돈을 사용하려 했으나 국고의 경비병들은 그들을 국고에 들여보내기는 커녕 대화조차 거부했다.[11] 이들에겐 군대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에우메네스와 그의 군대를 이간질하는 것이나 수문을 열어 그의 군대를 수몰시키려는 시도 정도였다. 이조차 모두 실패하고 그들은 안티고노스가 올 때까지 바빌론 성 내에서 떨고 있어야 했다.[12] 가비에네 전투에서 전열이 망가져 패배의 위기에 몰렸을 때 최후의 비책으로 안티고노스를 향해 돌격한다. 안티고노스를 직접 죽이거나 사로잡는다면 그의 군대는 와해될 것이고 자신은 제2의 알렉산드로스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스 사트라프 페우케스타스의 배신으로 실패한다.[13] 사실 마케도니아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 다른 외국인들을 깔보는 경향이 굉장히 심해졌다. 한 예로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나서, 그의 부하 장군들이 모여서 후계자를 누구로 정할지를 놓고 벌인 토론장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여인 바르시네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인 헤라클레스를 후계자로 삼자는 의견이 나오자 "그건 안 된다! 우리가 애써 정복한 노예인 페르시아인의 후손을 왕으로 세우다니, 그러면 우리가 노예의 후손한테 지배를 받으려고 여태까지 힘들게 싸웠단 말인가?"라는 격렬한 반대 의견이 나와 결국 헤라클레스는 왕이 되지 못했다. 자신들이 모신 왕의 아들조차 외국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이유로 왕위 계승에서 밀려날 만큼 마케도니아인들은 외국인을 싫어했던 것이다(...)[14] 이 부대의 지휘권 이동이 조금 대단하다. 이들은 알렉산드로스 3세가 동방원정에 돌아와 부상자들과 고참병들을 귀국시킬 때, 제대할 14,500명 중에 끼여 있었다. 크라테로스가 이들을 인솔해 마케도니아로 귀국하고 있는 도중, 알렉산드로스 3세의 부고가 전해졌고 곧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반란을 일으켜 마케도니아 섭정 안티파트로스를 라미아 요새에 고립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들의 크라테로스는 이들을 내버려두고 혼자만 귀국해 라미아 전쟁에 참전한다(결과적으로 최악의 실책이 되고 만다. 이들이 있었다면 에우메네스에게 패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이 부대는 제국 섭정 페르디카스에게 지휘를 받게 되고 페르디카스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왕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이집트 원정을 떠날 때도 따라가나 부대장 안티게네스가 페르디카스를 암살하는 데 일조한다. 그리고 국고를 경비하는 임무를 맡다 제국 섭정 폴리페르콘이 이들의 지휘권을 에우메네스에게 넘긴다.[15] 양피지의 경우 워낙 비싸기 때문에 이전 기록 위에 덧대어서 글을 쓰는 재활용이 많이 이루어졌고 특히 그리스 시대의 양피지는 많이 재활용되었다. 그리고 로마 기록은 역사적 가치가 그다지 없어서 웬만한 양피지 기록물들은 뒤에 내용을 덧댄 게 확인되면 그냥 긁어서 복원하는 게 현실. 참고로 로마 기록에 역사적 가치가 없는 건 양이 엄청나게 많아서 그렇다.[16] 원정 때 알렉산드로스는 돈이 부족해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다. 떼어먹을 돈이 아니라 나중에 갚을 돈이었지만 에우메네스는 300탈렌트를 빌려달라 요청받은 것을 100탈렌트밖에 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대놓고 불평하지는 않았지만 에우메네스의 막사에 불을 지르라고 은밀히 명령했다. 정말 돈이 없는지 아니면 돈을 숨기고 있는지 조금 과격한 방법으로 알아보려고 한 것이다. 그의 명령대로 잿더미가 된 에우메네스의 막사에는 금과 은이 1000탈렌트가 넘게 나왔지만 오히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명령을 후회했다. 그 이유는 에우메네스의 막사에 있던 그가 관리하던 행정문서들이 모두 타버린 것이다. 거대한 제국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문서들이 잿더미가 되어 버렸으니 알렉산드로스로서는 오히려 손해를 본 것이다. 그래서 왕을 속인 에우메네스를 책망하지 않고 태수들과 장군들에게 문서를 다시 보내라고 명령한 뒤 넘어갔다.[17] 에우메네스에게 배정된 숙소를 헤파이스티온이 멋대로 피리 연주가 에우이오스에게 양보했고, 에우메네스는 이를 알렉산드로스에게 차라리 악사나 배우가 되는 게 낫겠다고 불평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헤파이스티온을 비난했으나 곧 마음이 바꿔 에우메네스가 왕에 보호를 바란다고 책망했다, 즉 에우메네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대신 불평하지 말고 헤파이스티온에게 직접 불평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헤파이스티온이 죽자 거액을 조의금으로 내고 헤파이스티온을 기념할 상징물을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18] 에우메네스의 생애를 기록한 만화 "히스토리에"에서는 그의 형으로 각색된다.[19] 이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풍신수길에서 나오는 내용을 차용한 듯 싶다. 풍신수길 상권 p.283을 보면 히데요시는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노부나가군과 가모우군이 각기 5천과 1만을 이끌고 싸우면 어느 쪽의 편을 들지 묻는다. 그리고 히데요시 자신은 노부나가의 편을 들면 오다군의 5천 중 4900명이 죽어도 노부나가님은 살아남은 100명에 속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재기하겠으나, 가모우는 투구를 쓴 장수 다섯을 베었다고 하면 그중 하나는 무조건 가모우 우지사토의 목이라고 말했다.[20] 사실 이 평가에 걸맞은 것은 그의 숙적 안티고노스 1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이다. 데메트리오스는 안티고노스가 죽은 입소스 전투에서도 상당한 전력을 보존한 채 퇴각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떠돌며 끊임없이 패배하면서도 카산드로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안티고노스 왕조를 재건했다. 에우메네스와 데메트리오스 모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