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브러햄 링컨/평가

 


1. 개요
2. 비판
2.1. 나바호족 탄압 논란
3. 미국 현대 정치에서 링컨이 미친 영향
4. 링컨에 대한 말말말


1. 개요


링컨은 노예 해방과 통합된 미국을 만들었다는 업적+대중적인 영향력이나 신뢰도 또한 엄청나다. 미국인들이 그를 부르는 애칭 중 하나가 Honest Abe(정직한 에이브)일 정도.[1] 정치, 역사학자 등 전문가들의 평가도 상당히 후한 편으로 전문가와 대중 모두에게 고르게 평가받고 있다. 역대 대통령 평가나 인기도에서도 언제나 최상위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아무리 못해도 최소 탑5 안엔 들 정도로 높은 팬덤을 자랑한다.[2] 러시모어 산에 얼굴이 새겨진 4명의 대통령 중 한명이기도 한데, 흑인을 해방하고 분열된 미국을 통합한 공로로 인해 미 연방의 '''보존'''을 상징한다고 한다.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영웅이자 위인으로 추앙되는 만큼 상당히 강력한 까방권의 소유자. 흑인 인권 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도 표절 등 그의 결함을 지적하는 사람은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각오해야 한다는걸 생각해보면 링컨과 상당히 비슷하다. 그만큼 인정받는 대통령이기도 하고, 미국인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다. 정작 살아생전엔 고릴라 닮았다는(...) 반대파들의 인신공격도 많이 당하고, 정치적 실패도 많이 겪는 등 다사다난했던걸 생각해보면 격세지감. 노예제 해방이라는 업적 덕에 프레드릭 더글러스나 마틴 루터 킹, 버락 오바마와 같은 흑인 인사들에 의해서도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특히 버락 오바마의 경우 공식 출마 선언 장소부터 링컨이 '갈라진 집' 연설을 한 장소인 스프링필드주 청사 광장으로 정하여 링컨의 신념을 언급하거나 당선되자마자 링컨의 취임식 기차여행을 오마쥬하여 본인 역시 기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입성하는 등 링컨을 상당히 의식하는 편이었다. 심지어는 '''링컨이 대통령 취임선서에 사용한 성경을 그대로 가져다가 본인 취임선서에도 사용'''했을 정도.[3] '''선임 대통령 링컨이 서명한 노예 해방법안이 146년 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는 나비효과'''를 낳은 셈이니 오바마에게 있어선 의미가 남다른 인물일듯. 케네디만큼은 아니지만 언론이나 오바마 지지자들 사이에도 두 대통령을 어떤 식으로든 연결지으려는 썰들이 제법 나오는 편이다.[4]
45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역시 링컨을 꽤나 좋아해 유세에도 여러번 써먹었으며, 아예 대통령 취임식 전 연설 자체를 링컨 기념관 앞에서 하기도 했다. 이는 링컨이 역대 공화당 대통령 중 가장 인기가 많은 대통령이기 때문. 또한 트럼프 역시 오바마와 마찬가지로 대통령 선서를 할 당시 링컨의 성경을 사용했다.
앞서 말했고, 또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말 뒤집기를 잘했다고 한다. 다만, 말 잘 뒤집는 닳고 닳은 정치가라는 이미지는 어린이용 위인전 등에서 무슨 도덕, 정의와 정직의 화신처럼 표현되는 링컨의 이미지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어른이 돼서 당시 링컨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가 한 일들을 되집어 보면 높은 이상을 가졌지만 철저하게 현실적인 정치인이였으며, 결국 자신의 이상을 현실정치로 차근차근 이뤄나간 천재 변호사였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5]
예를 들어, 카를 마르크스 같은 경우도 '다른 사람들이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면서도 이념을 위해 싸운다고 말할 때, 링컨은 이념을 위해 전쟁을 벌이면서도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고 말한다'고 평한 바 있다.
레프 톨스토이는 링컨에 대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자'''라고 극찬하였다. 아마 자신의 소작농들도 최대한 해방시키려 했던 톨스토이의 견해가 영향을 미쳤을듯.

2. 비판



현대 자유지상주의를 대표하는 론폴의 견해를 기반으로 만든 론폴 vs 링컨 영상.
다만 이 동영상은 전제부터가 틀렸다. 전 하원의원 론 폴은 링컨이 '몇몇 노예를 해방하기 위해서 불필요한 전쟁을 시작했다.'하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Lost Cause Myth(남부연맹의 미신)으로 전쟁은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이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의 요새인 섬터요새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론 폴은 기본적으로 정치인인지 역사학자가 아니며, 그 반란 전쟁(The War of the Rebellion)[6]이 노예제가 아니라 관세문제 때문에 터졌다고 지속적으로 현대 역사학자들에게 논파당한 남부연맹의 미신을 계속 주장하고 있으므로 론 폴의 남북전쟁 관련 말들은 그다지 신빙성이 있다고 하기 힘들다.
구 남부연방 지역 출신들에게는 남북전쟁으로 과거 자신들의 생활영토를 깡그리 파괴했던 인물인 까닭에 종종 악당으로 부당하게 비난받는 경우도 있으나, 이들이 먼저 전쟁을 이르킨 반란군인걸 상기하면 그다지 논리적이지 못 한 비난임을 알수가 있으며, 정작 남부군도 미국 세력권에 들어와서 같거나 비슷한 수준의 파괴 및 약탈행위를 자행했고, 구 남부연맹 혹은 아메리카 연합국이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한 지역에 살던 사람들 조차도 남부연맹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남부연맹정부를 압제자라 여겼던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면 이는 제대로 된 비판이 아니다.
또 다른 부당한 비판은 헌법으로 보장된 남부 노예주들의 자치권[7]을 무시하고, 남부 노예주들의 노예해방을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 역사 그리고 그 당시 미국의 상황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오는 비판이며 남부연맹의 미신들중 하나다. 링컨과 공화당은 1860년 대선에서 남부주의 자치권을 무시하고, 노예제를 남부에서 폐지하겠다고 공약한 적이 없다. 링컨과 공화당은 1860년 대선에서 단지 연방정부가 관할하는 서부[8]의 광활한 연방영토에서만 노예제를 금지시키겠다고 공약했을 뿐이다. 링컨과 공화당은 노예제의 확장을 막는 것은 노예제에 노예제가 서서히 없어질수 밖에 없을 치명적인 타격을 줄수 있을 것으로 보았고, 이것은 노예제를 지지하는 측도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내다봤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주의 자치권을 침해하지 않는 법안조차도 남부 노예주들은 극렬하게 반대한다.[9]
1860년 링컨과 공화당은 헌법으로 보장된 각 주의 (노예제를 포함하는) 자치권을 침해할 의사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자치권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고 밝혔다. 이는 링컨을 비롯한 공화당 중도파 인물들, 특히 미국법을 잘 이해하는 변호사들이 헌법으로 정해진 주의 자치권은 침해할수 없다는 걸 이해했기 때문이다. 또한 공화당의 기반인 북부 자유주들의 큰 불만사항 중 하나가 연방정부의 노예탈주방지법에 따라서 자유주의 시민이 노예제에 반대하거나 노예제에 관심이 없어도 연방법에 따라서 연방영장을 연방요원과 노예사냥꾼들에게 (무보수) 협력을 강요당하고, 자유주의 시민이 조금이라도 흑인 피가 섞였다는 것이 의심이 된다면 제대로 된 재판(due process)이 없이 탈주노예취급당해 노예로 끌려가는등 북부 자유주들의 자치권을 짓밟는 연방정부를 내세운 남부 노예주들의 횡포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짧게 줄여, 노예주들은 노예제 사수를 위해서면, 헌법으로 보장된 자유주의 자치권을 침해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즉, 링컨이 이에 관해 비판을 받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노예주들은 노예제 사수가 가장 우선이였으며, 연방정부, 주 자치권 침해, 연방법원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지자 미국에서 탈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뿐이다.
일부에선 결국 내분과 전쟁이라는 국가 초유의 사태로 치닫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하기도 하는데, 역시 부당한 비난이다. 정작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비롯해서 남부 노예주들이 연방을 탈퇴해서 반란에 합류하기 시작할때 링컨은 대통령이 아니였다. 이에 대한 욕은 뷰캐넌이 먹어야 하는데, 그나마 뷰캐넌은 레임덕 상황이였으며, 그 뷰캐넌조차도 참아준것에 불과하며[10], 섬터(Sumter) 요새가 공격당하자 적극적으로 전쟁을 지지했다. 게다가 링컨과 공화당은 선거 공약이였던 서부의 연방영토[11] 노예제 폐지를 제외한 여러가지 절충안을 제시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Corwin Amendment(코윈 헌법)[12]으로 수정헌법의 골자는 연방정부가 각 주의 고유 제도(=노예제)에 대해서 간섭할수 없다는 것이 였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실패로 끝났는데, 남부 노예주는 Dred Scott 판결에서 나온 것 처럼 연방영토내 노예제 완전 합법화가 최소 협상조건이였고, 이게 대선 공약이였고, 이걸로 국민(자유주)의 선택을 받은 공화당은 절대 물러설수 없었다.
또 링컨이 남북전쟁 당시 했던 일들을 부당하게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기소나 고발없이 사람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Habeas Corpus(인신 보호 영장)라는 제도를 정지시키는 것은 오직 의회만 할 수 있었음에도 링컨은 이것을 의회의 동의 없이 시행하였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두고 Ex parte Merryman이라 불리는 재판에서 대통령이 Habeas Corpus을 정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나 링컨은 그것도 무시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 상황과 미국 법을 완전히 무시한 주장이다. 첫번째, 미국 헌법에는 반란(Rebellion) 혹은 침략(Invasion)등으로 인해 공공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험에 처했을때는 예외적으로 인신 보호 영장을 정지시킬수 있다고 했으며[13], 두번째 당시 워싱턴 D.C가 있던 메릴랜드에서 친 남부연맹 폭동 및 소요사태가 얼아나 당시 휴정상태였던 의회로 국회의원들이 기차타고 다시 워싱턴 D.C 의회로 가기에 위험했기 때문에 공공을 안전을 위해서 인신 보호 영장을 중지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세번째 링컨은 대통령으로 의회의 선언 없이 이미 '전쟁(반란)이 일어난 상태'임으로 대통령의 헌법 권한으로써 전쟁에 필요에 따라 인신 보호 영장을 정지킬수 있다. 네번째 정작 미국의회는 간접적으로[14] 혹은 직접적[15]으로 링컨을 옹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작 당사자인 메리랜드 주지사는 이를 쌍수들고 환영했다. "저는 그 체포들을 환영했었고 지금도 환영하고 있습니다. 정부에게 가진 유일한 불만사항은 이 체포된 자들을 감옥에서 내보내준 것이죠."[16]
또한 링컨에게 부정적인 메릴랜드주의 언론을 탄압하고 폐간한 것 역시 언론의 자유를 크게 침해한 것 아니냔 비판도 받는데, 이 역시 위의 전시상황을 고려하면 부당하다고 볼 수가 있다. 체포된 언론인들은 주로 대놓고 남부연맹편을 든 언론이들이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링컨을 노예해방을 지지하고 그것을 이루어낸 성자라고 추앙한다. 링컨이 암살되면서 미국연합을 지키기 위한 순교자화 되며, 성역화된게 사실이다. 사실 링컨은 살아있는 시절, 죽을 때까지 엄청나게 욕 얻어먹었다. 진보, 보수 둘 다에게 욕 먹었는데, 진보측에서는 노예제 폐지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욕 얻어먹었고 보수측에서는 노예제 괜히 건든다고 욕 먹었다. 전쟁에 관해서는 한 쪽에서는 적극적으로 반대파를 탄압하지 않고, 무능함으로 전쟁을 말아먹는다고 욕 얻어 먹었고, 다른 한 쪽에서는 전쟁 때문에 대통령 권한을 너무 늘리고 무능한 주제에, 쓸데 없는 전쟁을 계속 한다고 욕 얻어 먹었다. 미국이 전투에 한 번 패배할때마다 언론들은 내일 당장 워싱턴 D.C가 함락당할 것 처럼 떠들어 댔고, 금방 끝날줄 알았던 전쟁이 지속되자 군중들은 불안에 떨고 링컨을 비난하기 시작했으며, 전쟁에 대한 결과로 노예해방이 슬슬 현실화 될 것 같으니 사회 밑바닥 계층 이민자 백인들(특히 아일랜드인들)은 노예해방으로 자유흑인들과 일자리를 가지고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몰리게 될지도 모르니 이것에 대한 반발또한 대단했다. 이렇게 사방에서 폭격을 맞으면서도 링컨은 노예제 폐지라는 개인적인 신념과 연합을 지켜야 한다는 대통령의 의무를 다 하기위해서 매우 부단히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링컨이 암살되는 시점에는 전쟁이 사실상 미국연합의 승리로 종결되고 있었고, 링컨이 노예해방 수정헌법 13조를 밀어붙여 상원과 하원에 모두 통과되어 다 판을 짜놓고 각 주가 비준할 것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였기 때문에 링컨은 실질적으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 되었다. 이 때문에 죽기 직전 링컨에 대한 지지는 매우 높았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 암살당하는 통에 연합을 구한 영웅, 노예제를 위해 순교한 성인으로 미화가 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링컨은 내전 이후 임기가 몇 년 남았기에, 지저분한 내전 뒷처리를 해야 했는데 정작 링컨은 암살당하는 통에 내전 승리에 대한 찬사만 받고, 뒷처리에 대한 욕은 부대통령이자 후임인 앤드류 존슨이 다 먹게 된다.[17]
링컨은 노예주 처리에 우물쭈물한 측면이 있다? 일단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공화당 내에서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대선 공약이였던 연방영토에서 노예제 폐지를 양보해야 하지 않냐는 이야기가 나올때도 링컨은 단호하게 유권자들과 약속이라며 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링컨은 현실주의자로 전쟁중에 헌법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고, 노예제는 각 주의 자치권에 맞겨야 하며, 연방정부가 이를 침해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것에 기본적으로 동의했다. 또한 노예제를 유지하던 경계선 주들(border states)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어디까지나 전쟁은 연합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링컨의 노예해방도 어디까지 제한적이고, 합법적이고 미국연합을 위해서 이뤄졌다. 실제로 노예 해방은 탈주 노예들의 전시 약탈품 혹은 노획품으로 취급으로 시작되었다. 노예해방선언 또한 대통령의 전시권한에 불과 했으며, 반란 상태인 남부 노예주들에 대해서만 적용되었으며 그나마도 연합에 협력적인 노예주들의 노예들은 노예해방에서 제외되었다. 이때문에 일부 노예 주인들은 미국정부에 충성해서 자신들의 자산인 노예를 지키기 위해 미국연합에 입대해 싸우던 중이였다. 실제로 테네시같은 노예주에서는 한 쪽에서는 노예 경매가 다른 한 쪽에서는 탈주 노예들의 미군 입대가 동시에 이뤄지던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링컨은 점진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노예제 폐지를 위해서 노력했으며, 원래는 계획에 없던 전쟁이 터지자 연합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교묘하게 노예제 폐지를 밀어붙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노예제 폐지만 외친 것이 아니라, 보상을 통한 주의 자발적인 노예제 폐지[18]를 시도하기도 하고, 해방노예들과 자유흑인들을 남아메리카에 보내는 것도 시도하였다. 그러면서 미국 대중들의 찬성율이 그닥 높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흑인의 입대를 허락할 뿐만 아니라 장려하고[19], 수정헌법 13조를 하원에서 통과시키기 위해서 온갖 술수를 다 썼으며[20] 말년에는 흑인 참정권을 옹호하기 시작한다. 링컨은 노예제 처리에 우물쭈물했다기 보다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맞게 노예제 폐지를 진행시켰으며, 자신의 정치적 이익이 없는 상황에서도 기회가 있으면 노예제 페지를 더 빨리 진행시킬수 있도록 노력했다.
심지어 의원 선거 시절엔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라는 말을 하다가도 1860년 대선 등에선 백인과 흑인은 평등하지 않고 흑인의 참정권이나 공직권을 주지 않겠다고 말하며 오락가락하기도 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틀린말이며 당시 대다수의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입장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주장이다. 노예제 반대와 흑인 참정권 혹은 공직권은 전혀 따른 주제다. 노예제 페지론자들은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었는데, 흑인도 백인과 동등하니 노예 해방을 하고 흑인에게도 참정권을 주자는 입장은 매우매우 소수로 매우 극단주의자가 아니면 아무도 이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 대다수 공화당 지지자들의 입장은 멕시코에게 빼앗은 서부 연방영토는 가난한 백인 자영농에게 돌아가야 하며, 값싼 흑인 노예를 대거 들여와 불공정한 경쟁을 유발하는 노예제는 서부 연방영토에서 금지되어야 한다 이 정도였고, 링컨이나 일부 정치인들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도덕적인 이유로 노예제는 결국 궁극적으로 폐지되어야 하나 헌법적으로 노예에 대한 자치권이 각 주에 보장되어 있으므로 직접 노예주에 대해서 각 주에 간섭을 하는 것은 최소한으로 하 되, 노예제의 확장을 막음으로써 노예제가 장기적인 상업적으로 가치가 없게 만들어 노예주들의 자발적으로 노예해방을 할수 밖에 없이 만든다 정도였다. 또 다른 극단에는 흑인은 쓰레기 인종이므로 같은 대륙에 살수가 없으니 빨리 노예제를 폐지하고 노예들을 죽이던가 다시 아프리카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다른 파벌로는 노예제 회의파[21]는 노예제로 인해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이 노동을 혐오하게 되고, 같은 인간인 노예들을 인간이 아니라 자산으로 취급하므로써 백인 농장주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특히, 흑인들은 노예제로 아메리카에 와서 더 나은 삶을 살면서 인구수를 늘렸기 때문에 흑인이 백인의 인구를 넘어서 백인들이 노예 반란 및 폭동에 노출되게 되었다. 즉, 백인들은 흑인 노예제로 이렇게 피해를 보고 있으니 장기적으로 노예제는 폐지되어야 하는게 옳으나 당장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 미래 세대 혹은 신에게 맞기자, 즉 노예제를 계속 존속시키자고 주장했다.[22][23] 이렇게 노예제는 노예제 폐지, 반대, 회의론자들을 비롯해서 온갖 의견들이 난무하는 상태였는데 링컨의 입장은 매우 온건한 노예제 반대파였고, 기회가 생가지가 노예제 폐지를 밀어붙인 걸 상기하면, 그의 노예제 폐지에 대한 진심은 항상 일관되었고 그 외 흑인 시민권리에 대한 의견도 차츰 진보적으로 변해갔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24]

2.1. 나바호족 탄압 논란


미국의 리버럴, PC 진영에서는 링컨을 위대한 흑인 해방자라고 치켜세우며 추앙하다보니, 흑인 노예들을 해방한 링컨에 반대한 넘들은 다 레이시스트라는 논리로 링컨이 남북전쟁 시기 반대파들에게 보인 폭압적인 면모조차 옹호하는 경우도 일부 있는데, 실제 링컨은 1864년 북부군의 반대파인 나바호족에 대한 인종청소를 자행하여(Long Walk of the Navajo) 상당수 나바호족 노약자와 아동들을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하게 하였다.# 이때문에 나바호족들은[25] 링컨을 해방자는 커녕 총맞아 죽어도 싼 인간으로 보고 미국 내 리버럴, PC 진영이 링컨을 옹호하고 추앙하는 모습을 보이면 코웃음을 치기도 한다.

3. 미국 현대 정치에서 링컨이 미친 영향


2005년 퓰리처 상을 받은 바 있는 작가 도리스 컨스 굿윈은 링컨의 대통령 재임기간에 대한 역사서인 권력의 조건(Team of Rivals)을 출판했는데, 당내 정적들을 내각에 포함시킨 점 등을 부각해 링컨의 관용적인 리더십을 재조명한 책으로 꽤나 인기를 끌었다. 특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민주당 예비후보 시절 탐독한 책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실제 오바마가 민주당 후보가 된 후 대통령까지 거머쥐자 미국 내에서 이 책을 너도 나도 사느라 동이 났을 정도였다고 한다. 오바마는 이 책에 나와있는 링컨의 용인술을 실제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힐러리 클린턴의 국무장관 기용,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의 유임 등이 그것이다.
링컨의 내각은 윌리엄 수워드 국무장관, 샐먼 체이스 재무장관, 에드윈 스탠턴 국방장관 등 능력있고 자존심 가득한 인사들로 채워졌는데, 수워드는 사실상 공화당 창당에 1등 공신이었던 사람이라 경선때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점쳐지고 있었다. 국무장관직도 자신이 촌뜨기 링컨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수락한 것인데 링컨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또 다른 경선 라이벌인 체이스 역시 입각 전후로 자신이 링컨보다 뛰어난 인물이라는 점을 공공연하게 떠들어댔고 민주당원인 스탠턴은 사사건건 링컨에 대해 "비천하고 교활한 촌뜨기", "빼빼 마른 무식한 놈" 같은 악언을 퍼부어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입각한 후 하나같이 전시국가 운영에 있어서 뛰어난 수완을 보여주게 된다.[26] 힐러리 클린턴도 오바마의 최대 경쟁자였고, 로버트 게이츠는 전임정부인 부시 행정부 때부터 국방장관을 역임해 왔다. 실제로 오바마는 자신이 가장 본받고 싶은 대통령 롤모델로 링컨을 꼽은 바 있다.

4. 링컨에 대한 말말말


"링컨, 그 숭고한 정신."

'''피델 카스트로'''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다가 알고 나면 꽤 놀라워 하는 사실이지만, 반미주의자로 유명했던 피델 카스트로가 의외로 링컨만큼은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링컨 기념관에 방문하였을 때 링컨 동상을 바라보고 있는 카스트로의 사진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미국과 카스트로의 관계를 생각하면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미국에게 공격을 받을 당시엔 카스트로가 "(지금의) 미국인들은 링컨의 숭고한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내가 볼 때 링컨의 기묘한 점은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점입니다. 즉, 또 하나의 자신이 자기 스스로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기이하고 섬뜩하며 고도의 지능적인 현상입니다. 링컨에 관한 한 모두 그가 얼마나 지능적인 인물이었던가를 잊고 있습니다. 사실 그가 행한 모든 조치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계산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을 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 남북전쟁의 저자 셸비 푸트

"링컨은 '차갑고 계산적이며 냉정한 이성'을 갖춘 마키아벨리적 근대 정치가였다. 배신한 자를 철저히 응징하고, 목표를 위해서는 핏발을 세우며 '쉴 줄 모르는 엔진'을 켜고 돌진하는 인물이었다."

- 링컨 전문가 데이비드 도널드, 저서 링컨(1995)에서



[1] 젊은 시절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할 당시 성실하고 정직한 품성 덕에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라는 설이 있다. [2] 여담으로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링컨과 비슷한 급으로 평가받는 대통령은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나 대공황, 2차세계대전이라는 빅 이벤트를 치루면서 미 역사상 유일무이한 4선 기록을 세운 FDR 정도 뿐이다. 참고로 그 외엔 보통 토마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우드로 윌슨, 해리 트루먼, 아이젠하워 등이 상위권 안에 포진하는 편. 대중적 인기로만 치면 케네디, 레이건도 못지 않으나 전문가 평에선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다.[3] 미국에서 선서를 할 때에는 보통 왼손을 성경에 얹는다. 본인 신앙에 따라 꾸란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4] 무엇보다 링컨과 오바마는 둘 다 일리노이 출신이다. 일리노이의 공식 별칭이 '''Land of Lincoln'''인데, ''''링컨의 땅'에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나온 것.'''[5] 노예해방선언을 배우게 되면 노예해방선언으로 대다수의 노예들이 해방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장 먼저 놀라며, 그마저도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전시법령으로 전쟁이 종료되면 해방된 노예들이 법적으로 노예가 될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다시 놀라고, 미연방에 충성을 맹세한 노예주인들의 노예들은 해당사항이 아니라는 걸 알게되어 경악하게 된다. 즉, 표면적으로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수표로 보이나, 실제로 더 파고 들면 주의 자치권(노예제)라는 헌법으로 보장된 권리를 일어난 내전과 헌법적으로 보장된 대통령으로써 전시권한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피해간 천재적인 전시법안이였다는 걸 알수가 있다. 그리고 이 덕분에 그 이전에는 노예들을 단순히 주 법에 따라서 인간이 아니라 단순히 자산으로, 즉 전시상황에서 적에게 빼앗은 전리품 혹은 노획품 취급하여 대우가 매우 애매했던 해방노예들을 '''합법적'''으로 해방시켜줌으로써 이들을 미군에 '''합법적'''으로 입대를 할 발판을 마련했으며, 탈퇴한 남부 노예주들의 흑인노예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연방에 협력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링컨은 헌법적 노예제 폐지를 골자로하는 수정헌법 13조를 준비하는데, 이는 전시법령으로 해방된 노예들이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 해방될수 있도록, 그리고 앞으로 미국에서 누구도 노예가 되지 않고 더 나아가 다시는 미국이 노예제로 인해서 분열되지 않도록 조치를 마련한 것이였다. 이처럼 미국에 충성하는 노예주들을 안심시켜 미국이 남북전쟁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도우면서도, 합법적으로 주 자치권이라는 헌법을 피해 자신이 원했던 노예제 폐지를 이룩한 '변호사' 링컨은 천재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6] 이게 미연방정부가 남북전쟁을 원래 불렀던 공식명칭이다. 실제로 미군 총사령관이였던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도 자기 회고록에 이 명칭을 쓴다. 정확히는 'The War of the Great Rebellion' - 남부연맹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미국정부의 입장을 가장 확고히 보여준다.[7] 미헌법 10조[8] 미주리주 서쪽으로 텍사스, 캘리포니아 그리고 오레건만 빼면 대부분 아직 주로 승격이 안 되고, 연방영토이던 시절이다.[9] 이 당시에 남부 노예주들 사이에서 논쟁거리는 노예제를 점진적으로 폐지할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노예제 사수를 위해서라면 연방을 탈퇴해야 마느냐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남부 노예주들조차 의견통일이 안 됬는데, 당시 득표상황을 보면 노예제와 연방을 포함한 헌법을 그대로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헌법수호당(Constitution Party)이 노예제 수호에 더 극단적이였던 남부 민주당과 꽤나 많은 표를 갈라먹었다는 걸 알수가 있다.[10]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남부 노예주들은 연방금고를 약탈하고, 연방 무기고를 약탈하여 무기를 탈취하는등 그야말로 강도행위를 자행하고 있었다.[11] 이때 미국 서부는 대부분 주로 승격된 상황이 아니였다. 이걸 이해해야 왜 이게 중요한[12] 링컨은 적극적인 지지보다 그런 헌법이 통과하면 반대하지는 않겠다고 했다.[13] "the privilege of the writ of habeas corpus shall not be suspended unless when, in cases of rebellion or invasion, the public safety may require it"[14] 어자피 전시상황이고, 다 합법인데 왜 새로운 법안이 필요하냐는게 그 논리[15] Habeas Corpus Suspension Act 1863은 링컨에게 국회차원에서 대통령이 인신 보호 영장을 정지시킬 권리를 재확인 한 법안이지만, 핵심은 공화당과 민주당의 협약에 따라 1861년부터 1863년까지 '정치적 수용수'들을 풀어주기 위함이기도 했다.[16] "I approved them (the arrests) then, and I approve them now; and the only thing for which I condemn the Administration in regard to that matter is that they let some of these men out."[17] 정작 앤드류 존슨의 적극적인 노예주들에 대한 유화정책, 점진적이거나 보수적인 흑인권리 보장은 링컨이 다 판을 짜놓은 것이라 앤드류 존슨 입장에서 매우 억울할만하다.[18] 노예인구 비율이 5% 이하였던 델라웨어[19]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북부 백인들조차도 흑인 입대는 자연스럽게 흑인의 참정권 요구로 이어질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에 반대여론이 높았고, 실제로 전후가 되면 링컨이 이걸 빌미로 흑인 참정권을 옹호하기 시작한다[20] 당시 미국은 매관매직이 성행하였는데, 링컨은 재선이후에 적절한 당근책으로 다음 선거에 낙선이 거의 확실시 되던 일부 민주당 의원들을 관직으로 매수하는데 성공, 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킨다.[21] 이들은 노예제 반대파나 폐지파가 아닌 노예제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파다.[22] 대표적으로 토마스 제퍼슨, 로버트 E 리등 버지니아 농장주들의 입장이였다. 이들은 영국을 상대로 자유라는 미명 아래에 독립을 쟁취했으나 정작 자신들이 노예들을 억압하던 폭군이라는 도덕적 딜레마가 있었고, 필요에 따라 노예제를 존속시키되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옳지 못 하다는 것 또한 인정하는 기묘한 입장을 견지할수 밖에 없었다.[23] 이들은 노예제로 이익은 보고,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인정했지만 이에 대해서 뭘 할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나 부정적이였고, 오히려 노예제 반대/폐지론자들을 국가를 위협하는 불순분자 취급하여 북부의 반 노예제 연대를 더욱 더 자극하게 된다.[24] 진보적으로 변화한 것도 유색인종부대가 내전에서 잘 싸웠기 때문이다.[25] 미국 내에서 체로키족에 이어 2번째로 인구수가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이 바로 나바호족이다.[26] 그리고 재밌게도 상당수가 링컨의 편으로 돌아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