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게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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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Michael Gates
(1943년 9월 25일 ~ )
1. 개요
미국의 CIA의 국장이자 미국 22대 국방장관. 조지 워커 부시가 임명했으며 버락 오바마 행정부 1기에서도 유임되었다.
2. 생애
1943년에 캔자스주 위치타에서 태어났다. 1961년 위치타 이스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윌리엄앤드매리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1965년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에서 역사로 학사, 1966년에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역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미 공군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했으며 최종계급은 소위.[1] 1974년엔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러시아와 소련 역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논문 주제는 소련과 중국의 관계였다.
3. 공직 생활
인디애나 대학교에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1966년에 CIA의 모집에 지원했으며 CIA의 지원을 받아 공군장교로 임관했다. 공군에선 정보장교로 전략공군사령부에서 근무하며 핵미사일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1970년 CIA로 복귀하여 정보분석가로 근무하게 된다. 1974년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의 직원으로 일하기 위해 CIA를 나왔다가 1979년에 복직했다. CIA로 복귀하여 전략평가센터의 센터장으로 근무했다. 1986년 CIA 부국장이 되었고 1987년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CIA 국장으로 지명되었으나 미국 상원에서 이란-콘트라 사건 당시에 그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제동을 걸면서 스스로 반려했다. 1989년까지 CIA 부국장으로 근무하다 백악관 국가안보부보좌관이 되어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을 보좌하였다. 그러다가 1991년에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에 의해 CIA 국장으로 임명되었고 1993년에 은퇴했다.
4. 국방장관이 되기 전까지
CIA를 나와서는 학자로 활동했는데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워싱턴 대학교에 적을 뒀고 하버드와 예일, 존스 홉킨스, 밴더빌트, 조지타운, 인디애나,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 등 여러 곳에서 강의를 했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는 텍사스 A&M 대학교에서 학과장을 맡다가 2002년에 총장이 되었다. 총장으로서 2020년까지 텍사스 A&M 대학교 공립대학 TOP 10으로 만든다는 VISION 2020을 수립하고 이를 위해 4대 개혁을 실시하였다.
5. 국방장관
2006년 11월 6일 조지 부시의 공화당이 중간선거에서 패하면서 도널드 럼즈펠드는 사임했다. 뒤를 이어 조지 부시는 로버트 게이츠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다. 부임하자 몇 달 안 돼 월터리드육군병원 스캔들[2] 이 터지고 합동참모의장 인선에서 잡음[3] 이 생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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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일본의 방위대신 이시바 시게루를 만난 게이츠.
2008년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도 게이츠는 유임되었다.[4] 2011년 7월 1일에 리언 패네타가 그의 뒤를 이어 국방장관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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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상황실. 사진에 나온 인물을 설명하자면 일단 앉은 인물들은 왼쪽부터 조 바이든 부통령,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작전 책임자였던 공군준장 마셜 웹 장군, 데니스 맥도너 안보부보좌관[5] ,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그리고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이다. 뒤에 선 인물들은 왼쪽부터 합참의장인 해군대장 마이크 멀린 제독, 안보보좌관 톰 도닐런 안보보좌관, 윌리엄 댈러이 백악관 비서실장, 토니 바이링컨 부통령 소속 안보보좌관, 오드리 토머슨 국가안정보장회의 대테러국장(토머슨의 뒤에 셔츠의 일부만 비치는 사람은 누군지 모른다), 존 브레넌 대통령직속 국가안전보장및대테러 보좌관,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이다. 정장 왼쪽 부분만 나온 사람은 CIA의 정보분석가로 추정된다.
국방장관 퇴임 후에는 다시 학자로 돌아갔다. 공화당 지지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공화당에 당적을 둔 적은 없다.
이후 회고록을 펴냈는데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을 반미적(anti-American)이고 정신나간(crazy) 인물이라 평가했으며 이명박 대통령은 "정신력이 강하고, 현실적이고, 아주 친미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관련기사 “노무현, 정신 나간 반미적 인물”… 게이츠 전 미 국방 회고록 발간 회고록은 미국 내에서도 상당히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게이츠의 경우엔 당파성을 뛰어넘는 실용적인 인물이란 평가를 받았는데 오바마 행정부가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주요 현안을 세세히 공개한 등의 행동에 버락 오바마나 조 바이든 등 현 미국 지도부에 대한 혹평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실용/현실주의적이라는 것은 핵무기에 대한 접근방식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북한에 대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할 수는 없으니 핵 탄두 개발과 운반체 사거리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하도록 주기적으로 핵무기의 동향을 사찰을 시행하는 ‘핵동결’을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미국이 원하는 것은 북한의 완전한 핵무기 폐쇄인 만큼 당연히 듣는 사람도 별로 없다.
[1] 위관급 출신이 국방장관이 된 것을 의아해 할 수 있지만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인데 문민통제가 이뤄지지 않는 한국이 이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참고로 2014년 취임한 척 헤이글 국방장관은 장교도 아닌 병장 출신.[2] 환자와 시설 등의 부실관리 문제가 터졌다.[3] 부시 행정부가 자기네가 벌인 삽질을 9.11 테러 이후로 합참차장/합참의장으로 계속 근무했던 피터 페이스 장군에게 떠넘기려 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결국 페이스 장군은 스스로 물러나라는 권고까지 들은 끝에 보통 2년×2회의 임기가 보장되는 관례를 깨고 2년만에 경질 형식으로 옷을 벗어야 했다.[4] 이는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사례라고 한다. 같은 당 소속의 후보가 당선되어도 장관을 교체하는 게 보통인데 당선인이 다른 당 소속인데도 유임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그만큼 여론이나 민심도 그에게는 우호적이었음을 증명한다. 사실 당시 오바마 당선인 측인 정권인수위원회에서 미리 유임설을 흘려 여론을 떠보았고 여론이 그것에 우호적인 걸 확인한 다음 게이츠 장관에게 유임을 제안했고 그가 수락하자 여러 협의를 거친 후 힐러리의 국무장관 지명을 발표할 때 최종적으로 그의 유임을 같이 발표했다고 한다.[5] 2013년 1월 25일 오바마 행정부의 백악관 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