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궁
1. 개요
고려 왕조 초기부터 있던 궁궐.
정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별궁이다. 고려가 세워지며 수도로 격상된 개경에 세워졌다.
2. 설명
명복궁은 본디 처음부터 임금의 또 다른 궁전으로 세워진 것은 아니다. 태조 왕건은 수 많은 호족을 연합해 국가를 이루었다. 고구려계 호족의 강력한 재력, 무력으로 굴복시킨 호족도 있는가 하면 정략결혼을 통해 결속을 다진 호족도 있다.
고려 초 호족인 충의공 황보제공(皇甫悌恭)은 황주 황보씨(黃州 皇甫氏)의 수장이었다. 황주는 현 황해북도 황주군으로 왕건과 같은 고구려계 호족의 영역이었다. 태조는 제공의 딸과 결혼함으로서 황주 일대를 복속시키고 제공은 개경에 권력 기반을 둔다.
제공의 딸 역시 개경에 살게 되었는데 왕건은 그에게 황주원(黃州院)이란 건물을 선물한다. 이 황주원은 제공의 딸이 왕자와 왕녀를 낳으며 권력이 강해지자 경종 대에 명복궁, 즉 궁전으로 승격된다. 그리하여 명복궁의 주인인 제공의 딸이 명복궁대부인 작위를 받게 된다.
고려사 열전에 기록된 태조의 24번째 아내의 작위가 소"황주원"부인(小"黃州院"夫人)이다. 원보 품계를 받은 순행이란 사람의 딸로 성씨가 미상이라는 설명 밖에 없지만 신정왕후와 어떤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이후 명복궁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호족의 상징보단 임금의 별궁으로 이용된다. 현종이 자꾸 별궁 수창궁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자 짜증나 명복궁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현종 원문왕은 이 곳에 자주 승차했고 명복전(明福殿)이란 전각도 자주 갔다. 명복전은 어느 궁에 속한 전각인지 모르지만 명복궁과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명복전이 명복궁 내의 전각일 수도 있는게 서경 황성 내에 있던 장락궁도 장락전, 장락문 등 궁명이 그대로 쓰였다.
3. 역대 주인
4. 대중매체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황주 명복궁으로 자막에 나오는데 위에 언급된 것처럼 개경 내 황주세력의 거처였던 것이지 황주에 있었던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