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고려 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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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려의 제10대 임금. 묘호는 정종(靖宗), 시호는 용혜대왕(容惠大王). 휘는 형(亨), 자는 신조(申照). 현종의 둘째 아들이자 덕종의 친동생이다.
17살에 즉위해 29살에 죽은 청년 군주이다. 그의 재위 기간은 고려의 최고 황금기기라 볼 수 있는 동생 문종 시기를 완성하는 주요 정책들이 만들어지고 준비된 시기다. 다만 아버지와 동생에 묻혀서 그런지 재위 기간이 형처럼 짧지도 않은데 이미지는 희미한 편이다. 물론 따지고 보면 이 시기 자체가 안정된 시기여서 그런지 잘 부각되지 않는 측면이 많다.[4]
2. 칭호
묘호는 정종(靖宗)으로 고려 제3대 임금인 정종(定宗)과 발음이 같다.
시호는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전해지는데 다른 고려 군주들도 비슷비슷하지만 조금 심한 편이다.
고려사 정종 세가 총서:
- 홍효안의강헌용혜대왕(弘孝安毅康獻容惠大王)
- 문경영렬홍효용혜대왕(文敬英烈弘孝容惠大王)
- 정종(靖宗) 영렬홍효안의헌경명양환원용혜대왕(英烈弘孝安義獻敬明襄桓元容惠大王)
이렇듯 여러 가지의 시호가 전해지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후계자가 올린 첫 시호다. 그래서 시호를 줄여 부르면 다음 왕 문종이 올린 정종 용혜대왕(靖宗 容惠大王), 더 줄이면 정종 용혜왕(靖宗 容惠王)이 된다.
정종 재위기인 1044년에 세워진 '보현사 석탑'의 비문에 '황제폐하(皇帝陛下)'의 축복을 기원하는 내용이 있는데 이 황제는 당시 고려가 상국으로 대우하던 요나라나 북송의 황제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외왕내제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던 만큼 정종을 가리킨 것일 가능성도 높다.
3. 생애
3.1. 즉위 전
1018년 8월생으로 연경궁의 주인인 원성왕태후의 둘째 아들이다.[6] 정종의 탄생으로 연경원(院)은 연경궁(宮)으로 격이 올라갔다. 형 덕종이 있어 어머니의 관저를 분봉받지 못했지만 제2수도인 평양을 분봉받았다. 고려사 총서에는 어렸을 때부터 똑똑했다고 하며 만 4세가 된 1022년에 내사령 평양군에 책봉되었고 만 9세가 된 1027년에는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겸 내사령이 되었다.
3.2. 즉위 후
덕종이 붕어하자 그의 유언을 받들어 본궐 편전 중광전[9] 에서 즉위하였다. 형에게 경강대왕이라는 시호와 덕종 묘호를 바쳤다. 덕종은 고려사에서 '강단(剛斷)이 있었다.'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강경한 군주였고 정종은 그런 형의 정책을 이어나갔다.
3.2.1. 외치
왕위에 오른 정종은 임기 초에는 선대 왕인 덕종의 대거란 강경 외교 방침을 계승해나간다. 단적으로 1035년 5월에 거란이 3가지 요구를 해왔는데
1. 너희 형이 우리랑 단교한거 다시 시작해라.
2. 장성 쌓지 마라.[10]
3. 이상 조건 안지키면 전쟁이다.
이에 대해 다음 달 6월에 정종이 답변했고 내용은:
1. 사신 보낼거 다 보내고 있는데 뭘 더 보내냐.
2. 성은 우리 일이니 참견하지 말고 우리가 보낸 사신 6명 억류한거나 돌려 보내라.
3. 협박하냐?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11]
거란의 전쟁 협박에 정종은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거란의 침입을 대비해 그해 서북로에 장성을 쌓고 군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는 등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다. 실제 1037년 10월 거란이 해군을 동원해 압록강을 침범하여 공격했지만 오히려 고려 정부는 자신감을 내비쳤고 결국 거란의 해군을 동원한 침입은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나게 되었다.
이후 거란 측에서 장성에 대한 언급을 포기하자 12월 정종도 외교력을 발휘해 거란과의 국교를 다시 정상화하고 관계 회복을 시도한다. 다만 국방 정책은 유지해 1044년에 천리장성을 완성시켰으며 예성강의 병선 180척으로 군수 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는 등 힘을 기울였다.
하여튼 당대 강대국으로 자리잡은 거란의 요나라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강국으로 고려가 인식되자 이후 고려는 신봉루(神鳳樓)[12] 에서 사면령을 내리고 동번 여진, 서번 여진, 탐라, 왜 등에게 사실상 조공을 받는 등 위상을 뽐내기 시작하는데 이런 고려의 관례가 정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3.2.2. 내치
외교 문제를 정리한 뒤 내정에 힘을 쏟은 그는 노비종모법을 제정했다. 요는 "노비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야 한다."라는 내용. 다만 이건 정종의 실책 또는 악습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남성 양민이 힘없는 여성 노비와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하지만 조선의 세종, 영조도 노비종모법을 실시하였고 유지하였다.[13]
1036년에는 한 집안에 아들이 넷 있을 경우 그 중 한명은 출가하여 중이 될 수 있도록 했다. 1045년, 악공과 각 관아의 말단 이속에 속하는 잡류, 그리고 오역과 오천, 불충, 불효한 자와 향과 부곡인의 자손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여기서 오역은 부모를 죽인 자, 파계하였거나 수행하는 사람을 죽인 자, 출가하여 몸에 피를 묻히는 자 등을 말한다. 1046년에는 장자 상속과 적서의 구별을 법으로 정하기도 했다. 또한 도량형의 규격을 새로 마련하여 세금 수취의 폐단을 막도록 했으며 불교를 숭상하여 시중 최제안에게 명해 구정에 배향하고 개경 길가에 승려들이 불경을 암송하여 백성들의 복을 비는 행사를 열도록 하기도 했다. 이를 경행이라 하는데 그 뒤로 해마다 연례 행사처럼 열렸다.
3.3. 붕어
재위 기간 동안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는데 지진에 관한 기록을 보면 1035년 6월에 서울에 지진이 있었고 8~9월에는 서울과 경주 지방 19개 주에 지진이 일어났다. 이듬해 6월에는 서울, 동경, 상주, 광주, 안변부 관내 주현에서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가옥이 훼손되었고 동경에서는 3일이 지나서야 멎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농업이 국가의 근간이었던 고려인데 비가 잘 내리지 않아 가뭄이 들어 하늘에 비를 내려달라 기도했고 반찬 수를 줄이고 이같은 천재지변이 자신의 부덕 탓이라고 자책하여 죄수들을 석방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나라를 이끄는 것이 부담이 되었는지 재위 12년만에 29살의 나이로 붕어했다.
이전에 정종은 자신이 붕어할 것을 예상하고 형인 선군(先君)이 그랬듯이 동생인 낙랑군 휘를 부른 뒤 유조를 통해 왕위를 넘겼고 다음 날인 5월 18일에 붕어했다.
정종이 형인 덕종과 다르게 후사가 있었음에도 동생을 후계자로 삼은 이유는 태조의 유훈을 따르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도 문종이 그냥 왕족으로 두기 아까울 정도로 성군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형제가 형제애가 각별하고 진정으로 고려를 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종은 문종에게 선위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동문선 28권에 '정왕 애책(靖王 哀冊)'과 '정왕 시책문(靖王 諡冊文)'이 남아있다. 정종의 묘호가 시호로 강등된 이유는 원 간섭기에 들어서며 원이 고려 천자의 묘호가 참람하다는 이유로 시호로 낮추어버렸기 때문이다.짐(朕)은 선군(先君)의 마지막 명령(末命)을 받들어 누성(累聖)의 비도(丕圖)를 이었으니 12재(載)가 지났다.
하늘의 돌봄 덕분에 국내(國內)가 편안했으나, 이번 계절에 들어 몸과 마음이 아프고 약석(藥石)이 무효(無效)하니 결국 대참(漸)에 이르렀다.
바라는 것은 신기(神器)를 유덕(有德)한 자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내사령(內史令) 낙랑군(樂浪君) 휘(徽)는 짐(朕)이 사랑하는 아우이니라. 지극한 효성과 어진 성품에 검소하고 공손해 인국(隣國)에까지 알려졌으니 마땅히 대보(大寶)를 맡아 성덕의 빛을 나타내라.
고려사 정종 세가 중 정종의 유조.
정종 애책은 후왕 문종이 정종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이다. 고려사와 비슷하게 5월 18일 정유시에 정종 용혜대왕(靖宗 容惠大王)이 대내(大內)에서 훙했다고 한다. 정종 시책문은 애사왕(哀嗣王)이 대행대왕(大行大王)의 묘호와 시호를 정종 용혜대왕으로 정했다고 고하는 글이다.
4. 평가
여말 유학자 이제현이 정종을 평하길:
라 하며 거란과의 전후외교를 성공적으로 마친 공로를 칭찬하였다. 여요전쟁 이후 거란은 노골적으로 고려를 경계했고, 고려 또한 흥료국 사건이 터지자 참지정사 곽원의 북벌이 시도되는 등 양국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평장사 왕가도는 유소와 함께 거란의 성을 부수자고 주장하는 등 덕종 대에도 긴장감이 계속 이어졌고 이는 정종 대에도 천리장성 문제로 마찰이 이어진다. 이 불편한 기류를 그나마 진정시킨 것은 정종으로 이제현의 말마따나 진심으로 거란을 따르지 않되 화친을 이루었다."현종은 어려운 시기에 반정(反正)을 일으킨지라 외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덕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한지라 전쟁을 경계해야만 했다.
가 거란과 관계를 단절하자고 한 주장은, 화친을 유지함으로써 평화를 지키자는 황보유의(皇甫兪義)[15] 의 주장보다 한 수 낮은 것이었다.정종이 보위를 계승한지 3년만에 우리의 대부(大夫) 최연하(崔延嘏)가 거란에 갔고, 이듬해 거란의 사신 마보업(馬保業)이 우리나라에 옴으로써 다시 외교가 회복되었다.
(거란의) 마음이 움직인 것은, 우리가 그들을 진정으로 따른 것이 아니라 기묘한 책략으로 움직인 것이다. 군자가 말한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함으로써 나라를 보전했다.'인 것이다."
- 고려사 정종 세가 논평 중.
정종은 고려의 외왕내제 체제가 확고해지게 한 군주로 신봉루 하례 행사를 계획 및 제도화한 인물이다. 고려의 세번째 대문[16] 이자 가장 화려한 누각인 신봉루에서 송나라 상인, 여진, 탐라, 고려 각지에 조공 받고 천하에 사면령을 선포[17] 하는 행사가 아예 왕실 공식 행사로 박히면서[18] 고려는 승전국으로서의 국격을 크게 선전하며 자국 내에서 천자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5. 왕릉
정종의 무덤인 주릉은 2016년에 형인 덕종의 숙릉 근처에서 발굴되었다. 정비된 후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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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태묘 악장
고려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구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예종 대 정종 왕형의 찬가 제목은 "원화(元和)"이다. 네글자 운구이다.
덕종이 시작하고 유소가 진행하고 정종이 끝낸 천리장성 건축을 칭찬하고, 천자로서 강토를 봉하고 계몽시킨 업적을 찬양했다.이성을 잇고 성공을 받으시니 나라가 그로인해 창성했습니다.
성스런 효성과 신령한 계획이 바다와 같이 넘침니다.
저 오성(五城)[19]
을 건축하시니 변경이 그로 인해 안정됐습니다.아! 덕이 더해지시니 들려오는 좋은 소문이 영원합니다.
공손하시고 양보하시니, 준수한 인물을 많이 얻었습니다.[20]
강토를 계몽하시고 봉하시고 넓히시니, 공덕이 만세토록 영원합니다.
그리하여 악장을 짜서 종묘에 고하니, 이것으로 흠향하시고 제 효도를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7. 기타
- 덕종과 정종의 할아버지이자 현종의 친아버지 왕욱(王郁)은 안종으로 추숭되었으나, 주요한 신주에 오르지 못했다. 그보다는 성종의 아버지 왕욱(王旭)이 대종으로 추숭되어 신주에 올랐다.
- 사실 정종의 재위 기간은 유독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많던 시기였다. 비가 제때 내리지 않아 죄수를 사면하거나 본인의 반찬수를 줄이는 등 정종이 심적 부담을 받은 기록도 나온다. 지진 크리도 잦아 1035년 6월에 개경에서 지진이 일어났고, 8월과 9월에는 개경과 동경(현 경주시) 지방의 19개 주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다음 해인 1036년 6월에는 서울, 동경, 상주, 광주에서 지진이 일어나 가옥들이 무너졌으며 이중 동경에서 일어난 지진은 3일 동안 지속되었다고.
- 황성 동쪽에 있던 큰 호수 동지(東池)는 고려국왕이 즐겨 찾는 장소였다. 정종은 이 곳에서 기르던 진귀한 동물을 모두 풀어줘 비용을 줄이고, 사치를 멀리 하고자 했다.
- 유난히 추운 겨울이 오자 몰번회토(沒蕃懷土), 즉 고려의 제후국 땅에서 잡혀온 사람 80여명에게 의복을 제공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