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종(고려)

 


'''고려 제9대 대왕
德宗 敬康大王
덕종 경강대왕
'''
'''묘호'''
'''덕종(德宗)'''
'''시호'''
광장강명선효경강대왕
(光莊剛明宣孝敬康大王)[1]
'''군호'''
연경군(延慶君)
'''절일'''
인수절(仁壽節) → 응천절(應天節)
'''성씨'''
왕(王)
''''''
흠(欽)
''''''
원량(元良)
'''왕후'''
경성왕후(敬成王后), 경목현비(敬穆賢妃), 효사왕후(孝思王后)
'''부왕'''
현종(顯宗) 원문대왕(元文大王)
'''모후'''
원성왕태후(元成王太后)
'''능호'''
숙릉(肅陵)
'''출생지'''
고려국(高麗國) 개경(開京) 개성부(開城府) 연경원(延慶院)
'''사망지'''
고려국(高麗國) 개경(開京)[2] 정궁(正宮) 연영전(延英殿)
'''생몰연도'''
음력
1016년 5월 2일 ~ 1034년 9월 17일
양력
1016년 6월 9일 ~ 1034년 10월 31일 (18세)
'''재위기간'''
음력
1031년 5월 23일 ~ 1034년 9월 17일
양력
1031년 6월 16일 ~ 1034년 10월 31일 (3년)
1. 소개
2. 생애
2.1. 즉위 전
2.2. 즉위 후
2.2.1. 대 거란 강경 외교
2.2.2. 외치
2.2.3. 내치
2.3. 붕어
3. 태묘 악장
4. 왕릉
5.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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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효성스러웠고 명신들을 등용하여 조정을 잘 이끌었으며 백성들도 편안히 생활했으니 '덕(德)'이라는 이름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 이제현의 평.

'''"나면서부터 숙성하고 성품이 강직하며 과단성이 있었다. 장성해서는 벽돌을 밟기만 하면 깨어지니 사람들은 그의 덕이 무겁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고려사》 덕종 세가, 3년 9월 계묘일.

고려의 제9대 임금. 묘호는 덕종(德宗), 시호는 광장강명선효경강대왕(光莊剛明宣孝敬康大王). 휘는 흠(欽). 자는 원량(元良). 현종 원문대왕의 맏아들이자 공인된 태자였다.

2. 생애


'''등극한 현종 원문왕(顯宗 元文王)의 아들'''
'''9대'''
'''10대'''
'''11대'''
덕종 경강왕
정종 용혜왕
문종 인효왕

2.1. 즉위 전


'''고려의 역대 왕태자'''
왕송(왕위 후계자)

'''왕흠'''

왕훈
'''군호'''
연경군(延慶君)
연경궁(延慶宮)의 가신.
'''훈위'''
상주국
가장 높은 훈위.
'''공신호'''
숭인광효보운공신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
종 1품 품계로 가장 높은 품계.
'''수직'''
수사도
수직은 자신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을 때 붙힌다.
'''겸교직'''
검교태사
검교는 직위에 이름만 올렸다는 뜻으로 명예직이다.
'''직위'''
내사령
내사령은 내사성[3]의 명목상 장관[4]이다. 명예직이며 실권은 없다.
1016년 5월 2일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현종원성태후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군이었던 부왕을 빼닮았는지 어린 시절부터 결단력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1020년에 연경군(延慶君)에 봉해졌고 1022년에 태자에 책봉된 후 1031년에 부왕 현종이 승하하자 중광전[5]에서 즉위했다. 그는 아버지가 승하하자 방에서 하루종일 울며 슬퍼했다.[6] 아버지가 붕어하자 16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선정을 펼쳤다.
덕종은 현종의 공인된 후계자로서 왕태자(王太子)에 봉해졌다. 덕종 이전에는 공인 후계자의 작위를 정윤(正胤)[7], 태자(太子)[8], 개령군(開寧君)[9]으로 불렀는데 덕종부터 태자로 고정되어 봉해졌고 충렬왕이 마지막 태자가 되었다.[10]
또한 고려의 임금 중 마지막으로 궁원(宮院)에 봉해진 군(君)이다. 덕종은 아버지 현종이 대량원(大良院)에 봉해진 것처럼 연경원[11]에 봉해졌고 덕종이 마지막 사례가 되었다. 이후의 군주들은 태자로서 국왕이 되거나 옛 국가나 영지를 하사받은 제후 상태에서 즉위했다.[12]

2.2. 즉위 후



2.2.1. 대 거란 강경 외교


덕종 즉위 초인 1031년 거란에서는 성종이 사망하고 흥종이 즉위했다. 성종의 장례식 준비 기간 동안 거란은 압록강 유역에 부교와 여러 보루를 쌓아두고 있었다. 같은 해 10월 조정에서는 이를 무너뜨리는 것과 거란과의 전쟁 때 포로가 된 고려인들의 송환을 요구했는데 거란이 이를 거부하자 당대의 중신이었던 서눌[13]왕가도[14]는 "이놈들이 우리 말을 쌩까니 어이없네요. 그냥 사신을 끊죠"라고 진언해 왕이 이를 받아들여 11월에 거란으로의 사신 파견을 중단하는 한편 흥종에게 사대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전황제 요성종연호인 '태평(太平)'을 계속 사용하는 등 강경 일변도를 유지했다. 거란 흥종이 사용한 연호는 경복(景福)과 중희(重熙)였는데 이 해의 연호는 경복이었다. 1032년 1월 또 다시 거란이 사신을 보냈지만 그냥 무시했다.
한편 거란에서 후궁이던 흥종의 생모가 요성종의 황후에게서 태후 자리를 빼앗고 그들을 살해하는 정변이 일어나 이 여파로 1031년부터 옛 발해인 고진상, 왕광록이 투항했고 1032년 3월 고선성, 고진성, 최운부, 이운형 등 20명에 달하는 거란의 중앙 관료 출신 귀족들이 대거 고려로 망명했고 4월에는 고위 관료 해가, 내을고 등 30명이 귀순했으며 6월에는 우응, 약기 등 50명이 망명하였다. 덕종은 이들을 모두 받아들였고 같은 해 거란의 군인 7명을 체포하였다.
이런 긴장 관계 속에 끝내 1033년 10월 거란군이 정주에 침입해오자 맞서서 격퇴하기도 했다.[15] 거란이 갑자기 침입한 것은 덕종이 수축하기 시작한 고려 북계의 천리장성의 공사를 저지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命平章事柳韶, 創置北境關城.

평장사 유소를 시켜 북쪽 국경에 관성을 축조하도록 했다.

- 고려사 덕종 세가 1033년 8월 중.

당시 거란은 성종의 승하 전후로 나라가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 지도층은 분열하고 국력이 심하게 기울어 가던 상태였다. 이런 거란의 재침입에 대비하여 영인진(寧仁鎭), 삭주(朔州), 파천현(派川縣) 등 북방의 요새를 축성하여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다.
고려사 왕가도 열전에는 왕가도, 유소, 이단 등 조정의 중신들이 덕종에게 거란을 침공하자고 강하게 건의했지만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고 덕종은 태묘에 들어가 점을 쳐보고는 결국 포기했다고 기록했다. 이미 아버지 대에 흥료국을 지원하기 위해 거란을 공격했지만 큰 성과를 못본 것 역시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16]

2.2.2. 외치


아버지 현종 대부터 점차 타국에 품계를 내리거나 책력의 반포, 조공 무역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이어서 즉위한 덕종 대부터 고려는 가히 동북아의 강국으로 명성이 퍼졌을 정도로 강성한 국력을 자랑하게 된다. 짧은 고려사 덕종 세가 내용의 절반은 타국이 조공하러 오는 것일 정도.
현종에게 책력을 받은 철리국(鐵利國)의 왕인 무나사(武那沙)는 약오자(若吾者) 등을 보내 준마와 담비 가죽을 조공해 무역을 지속적으로 행하였다. 또한 무나사는 다시 사신을 보내 고려와 외교관계를 이어가고자 했다. 덕종은 이에 하사품을 크게 주어 화답했다.
또한 요나라의 남부에 거주하던 해가(奚家) 민족, 발해 유민들은 계속하여 고려로 이주하였다. 울릉도의 성주(城主)는 자신의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 덕종에게 특산물을 조공했다. 송은 무역 상인 편에 여러 외교문서를 보내 간접적으로나마 고려와 무역, 외교관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동, 서여진의 영새대장군(寧塞大將軍), 장군(將軍) 등이 170여명과 같이 와 병기, 준마, 특산물을 조공했다. 또한 장군 모이라(毛伊羅)는 현종의 선릉을 제후로서 참배하였다. 위의 관작들은 전부 고려가 봉한 것이다. 덕종은 투항한 동여진 350호의 거주지를 동번으로 정하는 등 여진의 거처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덕종의 치세 동안 동여진의 정보(正甫), 보윤(甫尹), 정조(正朝), 원보(元甫), 원윤(元尹), 봉국대장군(奉國大將軍), 회화장군(懷化將軍) 등과 서여진의 대상(大相),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 귀덕장군(歸德將軍) 등이 총 620여명을 이끌고 수차례 입조(入朝)하였고 덕종은 품계를 올려주고 직접 조공을 받았다. 대상[17], 원보[18], 정보[19] 원윤[20], 정조[21], 보윤[22]은 고려의 향직 품계, 봉국대장군, 회화장군, 귀덕장군은 고려의 관작명이다.
서여진 200여명이 북계 천리장성을 쌓는데 도움을 주자 그들의 관작을 높여주기도 했다.

2.2.3. 내치


한편 덕종은 고려 역사상 처음으로 '''국자감시를 시행'''하여 폭넓은 인재 등용의 체계의 기반을 마련했다. 국자감시는 국자감에서 실시한 예부시의 예비 시험인데, 이게 왜 중요하냐면 이 시험을 시행하면서 처음으로 중앙의 국자감생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선발된 인재들에게도 응시 자격을 부여했기 때문. 그만큼 인재 등용의 폭이 넓어진 셈이다. 또한 전시과를 개정하고 현종 때부터 복원하기 시작한 '7대 실록'의 완성을 보는 등의 크고 작은 치적들을 남겼다.

2.3. 붕어


짐(朕)의 병이 낫질 않으니 이미 대참(大漸)[23]

에 이르렀다. 마땅히 사랑하는 동생 평양군(平壤君) 형(亨)으로 하여금 보위(寶位)를 잇게 하라.

- 고려사 덕종 세가에 기록된 덕종의 고명(顧命).[24]

이렇듯 어린 나이에 아버지 현종의 뒤를 이어 고려의 태평성대를 잘 이끌어 나갔지만 불행하게도 몸이 병약했다. 그 때문인지 재위 3년만인 1034년 9월에 병석에 누웠고 왕위를 동생 평양군 왕형에게 물려준 뒤 만 19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이 탓인지 치적은 준수한데 비해 지명도는 상당히 낮은 편에 속한다.
덕종에 대해 여말의 유학자 이제현은 아들로서 아버지의 제사를 잘 모셨고, 왕으로서 여러 인재를 등용시켰으니 덕(德) 자에 어울리는 임금이라고 호평을 내렸다. 16살인 어린 나이에 등극하여 거란 차단, 여진 복속, 국가시험 시작 등 무거운 임무를 3년 동안 잘 해냈으니 고려 입장에서 덕종이 등극한 것이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현은 평론에 민간 설화를 소개했는데 덕종 대에 위봉문(威鳳門)[25]에서 봉황이 날아다녔다고 한다. 헌데 까마귀 떼가 따라와 울어대자 봉황은 귀찮아서 날아갔고, 이후부터 고려 사람들은 상서로운 봉황을 쫓아냈다고 까마귀를 싫어해 보일 때마다 활로 쏘아대니 덕종의 치세동안 개성엔 까마귀가 없었다고 한다.

3. 태묘 악장


고려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구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예종 대 덕종 왕흠의 찬가 제목은 "엄안(嚴安)"이다. 네글자 운구이다.

당신의 덕은 천생(天生)이니, 용감함이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당신의 위엄은 뇌정(雷霆)과 같으니, 인방(隣邦)[26]

을 떨게하고 놀라게 합니다.

국강(國疆)[27]

을 넓히시니, 길고 길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변방의 오랑캐는 빈 땅을 뺏길까 늘 지키고 있습니다.

진덕(震德)[28]

이 잠저를 떠나니, 용이 하늘을 날라다닙니다.

당신의 위엄은 요방(遼邦)까지 흔드니 용감함을 드러내면 아무도 앞에 서지 못합니다.

문화가 다른 자들이 소문을 듣고 내정(來庭)하여 조공합니다.

이에 변강(邊疆)[29]

을 넓히시니 세세토록 복을 받으시오서.

예종 대에 덕종은 상당히 용맹한 군주로 받아들여진 듯 하다. 찬가의 내용을 보면 이웃 국가는 두려워 하고 조공 한다고 하며 심지어 당시 상국으로 대우하던 요나라까지 겁쟁이 오랑캐로 취급해 덕종의 위엄을 드러내려고 한다.

4. 왕릉


덕종의 숙릉은 오랜 세월의 풍파를 거쳐 유실된 상태였으나 2016년 해선리 1릉을 발굴해 숙릉으로 발표했다.
[image]
발굴 초기의 모습. 도굴갱이 뻥 뚫려있다.
[image]
정비된 최근의 사진.

5. 가족관계


부인이 다섯인데 이 중 둘이 이복여동생이다. 고려 왕조 특유 근친혼의 대표적인 사례.
1034년(덕종 3년) 음력 2월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왕비에 책봉된 해에 남편 덕종이 사망하였으며, 경성왕후는 52년을 더 살다가 1086년(선종 3년) 음력 7월 23일에 사망하였다.
  • 경목현비(敬穆賢妃) 왕씨(王氏):
3비 효사왕후보다 서열이 높으나 품계가 그보다 낮은데 여기엔 조금 복잡한 이유가 있다. 사실 경목현비는 덕종의 1비였지만 서열이 밀렸다. 왕족인 경성왕후, 효사왕후와 달리 아버지 왕가도는 문벌귀족[30]이었고 후에 왕가도가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입지가 흔들렸기 때문에 품계가 더 올라가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 상회공주:
덕종과 경목현비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요절해, 덕종에겐 후손이 없다.
  • 효사왕후(孝思王后) 김씨(金氏):
효사왕후 역시 덕종의 누이로 현종과 현종의 제4비인 원혜태후의 딸이며 후에 왕위에 오르게 되는 문종과는 동복 남매이다. 덕종의 모후인 원성태후와 효사왕후의 모후인 원혜태후는 모두 김은부의 딸로 친자매 사이이며, 이에 따라 덕종과 효사왕후는 이종 사촌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두 왕후의 원래 성은 왕씨이나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김씨로 바꾸었다고 보인다.
  • 이씨
현 대한민국 충청남도 부여군 출신. 존호 실전.
  • 유씨
충주 유씨 가문 출신. 존호 실전.
[1] 고려사 덕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2] 덕종이 태어난지 2년 뒤, 현종이 개성부를 없애고 중경에 통합시켰다.[3] 고려 최상위 정부기관으로 조직명은 내의성 → 내사성 → 중서문하성 순으로 바뀌었다.[4] 실권을 가진 실제 장관은 문하시중이다.[5] 重光殿, 고려 본궐에서 가장 크게 활용된 편전.[6] 고려사 원문 기록: '태자가 즉위하여 익실(翼室)에 거처하면서 조석으로 애림(哀臨)하였다.'[7] 혜종, 경종, 성종.[8] 혜종, 경종.[9] 목종. 선왕인 성종의 군호를 물려받는 방식으로 후계자에 공인됐다.[10] 원 간섭기부터는 왕세자(王世子)에 봉해졌다.[11] 당시에는 원이었다. 동생 정종이 태어나고 나서 궁으로 승격된 것.[12] 원 간섭기 이전까지.[13] 서희의 아들.[14] 개경 나성의 건축자.[15] 고려사 유소 열전.[16] 현종 원문대왕의 신하 곽원의 출정이다. 곽원은 압록강 이북을 차지하자며 군대를 끌고 갔지만 역사에 기록될만한 성과는 얻지 못했다.[17] 4품 1등위.[18] 4품 2등위.[19] 5품.[20] 6품 1등위.[21] 7품 1등위.[22] 8품.[23] 죽음의 때.[24] 고려사 원문엔 유조(遺詔)가 아닌 고명이라고 기록했다.[25] 본궐의 제 2정전 천덕전으로 가는 길에 세워져있던 문이다. 3번째 대문이며 이중루로 위에 위봉루(威鳳樓)가 있어 매우 화려했다고 한다. 태조 왕건이 직접 세운 문이다.[26] 인접한 나라.[27] 나라의 영토, 경계.[28] 모두를 떨게 만드는 덕성.[29] 나라의 주변 영토, 경계.[30] 왕씨라 혼동하기 쉬운데 왕가도는 원래 청주 이씨였으나 공을 세워 현종에게 국성을 사성받았다. 몇십년 뒤, 덕종의 이복동생 문종 때 일어난 쿠데타 모의 사건 때 처벌 받은 사람 중 한 명인 왕무숭은 그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