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보현

 




[image]
廉普鉉
1932년 3월 22일 ~
제20대 서울특별시장 (재임기간 1983.10.15 ~ 1987.12.29)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나 서울 경기고등학교,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60년 제12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고 경찰에 투신하여, 1968년 경기지방경찰청에서 국장(경무관)이 되었고, 1976년에 경찰대학 학장이 되었으며, 1980년에 치안본부 본부장을 역임하였다.
1980년에서 1983년까지 경기도지사를 역임하였고, 1983년부터 1987년까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였다. 서울시장 재임 기간 지하철 2 3 4호선을 완공했고, 한강종합개발을 추진했으며,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개장, 목동신시가지 건설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경희궁 복원, 보라매공원, 종묘공원, 석촌호수 공원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기도 하였다.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새벽 7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했다고 한다. 서울시장으로 임명되었을 당시 서울특별시는 지하철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파산할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염보현이 수완을 발휘하여 재정위기가 극복되었다. 그 후 올림픽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당시 돈으로 9,6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였는데, 그 중 1,700억 원을 한강의 모래를 팔아 충당함으로써 예산을 절약하였다.
[image]
(1984년 LA올림픽 폐회식에서, 차기 개최도시의 시장 자격으로 올림픽기를 전달받는 염보현(오른쪽)의 모습)
1988 서울 올림픽은 실질적으로 염보현이 준비하였다. 1986 서울 아시안 게임뿐 아니라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 역시 그 1등공신은 염보현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던 기간,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에게서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고, 당시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장관, 올림픽조직위원장,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있던 노태우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1987년 이후 노태우가 권력을 장악하자 노태우의 측근들에게 정치적 타겟으로 지목되었으며, 본인도 그 눈치를 채고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열심히 활약하였다. 1987년 12월 노태우가 당선된 직후 서울시장에서 물러났으나, 그 몇 달 뒤인 1988년 4월에 서울시장 재직시절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염보현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자, 염보현의 부하들이 민정당 선거운동에 뛰어들지 않아, 결국 민정당은 1988년 4월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1996년 이후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강원도 철원군-화천군-양구군에서 지구당 위원장으로 있었지만, 국회의원이 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