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비교: 오늘날의 경희궁 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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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궁궐로,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상세
1617년(광해군 9년)에 착공하여 1623년에 완공된 이궁으로, 조선 후기 동안 정궁인 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궐(이궁)로 '''양대 궁궐 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많은 왕들이 경희궁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거처하면서 창덕궁이 지닌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일정 부분 나눠서 수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에 대비되는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西闕''''로 불렸다. '''규모로 보자면 경복궁 크기의 2/3를 넘는 영역이 경희궁에 속하였고, 한양도성 서쪽 성벽 일부와 한양 서북부를 대부분 차지하던 거대한 궁궐이었다.'''
경희궁은 100% 일제의 만행에 의해 흔적도 없이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어느정도 경희궁에 관심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공분하며 일제를 규탄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제시대 이전 흥선대원군 시절에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90%)'''이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헐렸다. 일제가 경희궁에 손댄 거라곤 경희궁터에 방치되어 있던 잔여 전각 5개를 통째로 외부에 매각한 것뿐이다. 그러나 문화재청 등에서 발간한 여러 자료에는 이러한 사실이 일절 언급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일제에 의해서 훼손되었다고만 적혀 있기 때문에 일반에게는 이러한 내막이 거의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다. 심지어 위키피디아에도 관련 내용이 전혀 없다. 최근에 발표된 학술논문에서만 언급되고 있는 상황이다.
일단 2016년 서울역사박물관의 경희궁은 살아있다 특별전에서는 경복궁의 중건을 위해 경희궁의 전각을 대부분 해체했다는 내용이 분명히 명시되었다.# 이 사실이 대중들에게 처음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례일 것이다. 앞으로 오해가 바로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듯.
게다가 광복 후에도 경희궁 터 위에 지어진 서울고등학교의 존재 때문에 한동안 복원은 꿈도 꾸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1980년 서울고가 이전한 후에야 경희궁 터의 본격적인 유적 발굴과 복원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경희궁 복원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전에 경희궁 터를 소유하고 있던 서울시가 잽싸게 그 자리에 '''서울특별시교육청''',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 '''서울역사박물관''' 등을 짓는 만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도리어 경희궁 유구가 더욱 훼손되고 말았다. 게다가 서울시는 잔여 경희궁 터를 민간에 매각하려 했으나 땅값이 너무 비쌌던 데다가 당시에도 경희궁 부지를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매각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서울시는 그 땅이 경희궁으로 온전히 복원되는 것을 저지하고 끝끝내 서울역사박물관을 건립하여 경희궁의 잔여 유구를 훼손하고 말았다. 또 일부 부지는 서울시가 끝내 민간으로 매각해버렸고 이것이 현재 경희궁 완전 복원의 걸림돌 중 하나가 되고 있다.
남은 전각이 적고 협소한 탓에 조선 5대 궁궐 중 인지도가 가장 낮다. 1박 2일의 서울특별시 문화유산 특집에서도 5대 궁궐을 문제로 내자, 다른 4개의 궁은 어렵지 않게 맞혔으나 경희궁에서 다들 헤맸는데,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이나 역덕후가 아닌 이상 다른 일반인에게도 사정은 비슷할 듯. 훼손이 너무 심하다 보니 책에 따라선 4대 궁을 먼저 묶은 뒤 '''서울역사박물관과 경희궁터'''라고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3D 복원된 경희궁의 가상체험을 할 수 있다.
3. 역사
3.1. 조선 후기
연원은 1616년 광해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당 부지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의 저택이었지만 왕기가 흐른다 하여[1] 광해군이 그 부지를 몰수하여 별궁인 경덕궁(慶德宮)[2] 을 짓게 햇다. 1617년 착공해 1620년 완공되었다. 건립 이래 140여년간 경덕궁이라 불리어 왔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고 이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동궐로 불리던 것처럼 경희궁은 서궐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 후기 동안 정궁 창덕궁+창경궁과 더불어 양궐체제하의 이궁으로써의 역할을 했다. 건립된지 3년만인 1623년과 1624년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인해 창덕궁과 창경궁이 연이어 전소되자 왕의 거처로 바뀌어 창경궁이 중건될 때까지 임시 정궁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전각은 헐려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 공사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조선 후기에 많은 왕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애용했다. 특히 이곳에서 태어난 숙종은 경희궁에 대대적인 개보수를 실시했다. 이후 영조는 치세의 거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다고 한다. 또한 정조 즉위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다만 19세기에 이르러 경희궁은 그 사용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헌종과 철종은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창덕궁에서만 머물렀다. 그러다가 아래에 상술되어 있듯이 고종 즉위 직후 경복궁 중건 공사를 위해 5개의 전각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3.2.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대량 철거
그동안 경희궁이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1865년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이 철거되었다.[3] 원래 경희궁에는 100여동의 전각이 있었지만, 주요 전각 5개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어 경복궁의 궐내각사와 나인전 건설에 사용되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일제시대가 아닌 조선 말기에 경희궁이 대거 훼손되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려운 도시전설에 가까운 얘기로 치부되었지만, 최근에 이를 뒷받침하는 학술 논문들이 발표되면서 사실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학계를 제외하면 어떠한 대외적인 자료에도 이러한 사실이 언급되고 있지 않아 대다수의 국민들은 아직도 경희궁이 일제에 만행에 의해서 파괴된 것으로 알고 있다.
경복궁 중건 공사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경복궁연건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 경성부에서 간행한 '경성부사'에 따르면 1910년 당시 경희궁에 남아 있는 전각이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화문, 황학정 뿐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경복궁연건일기'의 기록과 일치한다.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興政堂)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하였다.
'경복궁연건일기'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경복궁 중건이 시작된 직후인 1865년 4월에서 8월까지 동안 경희궁 훼철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철거된 경희궁 부지에 대한 사후 처리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1868년 6월에 경복궁 중건이 마친 후 경희궁의 용동궁, 수진궁, 어의궁 4궁을 비롯한 몇몇 관청의 밭을 개간될 수 있도록 분배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70년 호조와 선혜청에서 곡식 보관 창고가 부족하다면 경희궁터에 창고를 지을 것을 건의해 2년뒤 풍년이 들면서 200칸의 창고를 지은 것과 화약 보관 창고가 들어섰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개화기에 서양인들이 남긴 여러 기록들에도 경희궁이 거의 완전히 훼손된 상황이 나타나 있다. 개화기 당시 한양에 체류한 것으로 보이는 길모어라는 서양인이 쓴 서울풍물지에서 1883년 경희궁터에 뽕나무를 심고 양잠소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콜로네 브라운이 작성한 지도에 경희궁 위치에 '옛 왕궁' 내지는 '뽕나무 궁궐'이란 표기가 있다. 또한 실제로 조선 말의 경희궁 지역 사진을 보면, 건물이 몇 동 안 남아 있고 전각 주변은 허허벌판임을 확인할 수 있다.[4]
이처럼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의 대부분이 철거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숭정전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5개의 전각들은 이후 사신 접대 등 행사 용도로 간간히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숭정전의 경우에는 창살로 장식된 문들을 모두 떼어내 수원화성의 연무대(동장대)처럼 군사사열이나 행사를 위한 목적으로 개조되기도 하였다.
3.3. 대한제국
아관파천 후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덕수궁(경운궁)이 북서쪽으로 대대적으로 확장되면서 경희궁 궁역과 인접하게 되었다.[6] 경운궁 확장 공사가 1차로 마무리되어가던 시점인 1901년에 덕수궁과 경희궁을 잇는 홍교[7] 라는 다리가 세워졌다. 당시 경희궁역에는 전각 5개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지만, 홍교로 덕수궁과 연결된 덕분에 대한제국 시기에 경희궁에서 국가행사가 개최되기도 했다.
그러나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덕수궁은 황궁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경희궁 역시 그 사용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신문로의 교통 흐름을 막고 있던 홍교는 1908년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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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교
3.4. 일제에 의한 잔여 전각 이건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면서 경복궁 등 다른 궁궐과 더불어 경희궁도 총독부 소유로 넘어갔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 시점에 경희궁 권역 내에 남아 있는 전각은 5개에 불과했다. 이는 일제가 간행한 '경성부사' 뿐만 아니라 이전에 조선 측에서 간행된 자료인 '경복궁연건일기'에 모두 일치되게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1910년 11월에는 조선 내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경희궁 터 동남쪽 부지로 이전해 왔다. 기존의 나무위키 문서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문서에는 일제가 경희궁을 헐고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세우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쓰여져 있는데, 사실 일본은 경희궁 터에 있는 비어있는 공터에 경성중학교를 신축했을 뿐, 경성중학교 건설 때문에 전각을 철거하지는 않았다.
1915년에는 신문로를 새로 건설하면서 정문인 흥화문을 남쪽으로 이건했다.
이후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일제는 경희궁에 남아 있는 다섯 개의 전각들을 순차적으로 매각했다. 일제는 경희궁에 남아 있는 전각을 부순 것이 아니라 그냥 통째로 매각했다. 때문에 숭정전, 흥화문 등이 다른 장소에서라도 현재까지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고, 훗날 경희궁 복원에 큰 도움이 되었다. 흥화문은 다시 경희궁으로 되돌아 왔다. 동국대가 절로 전용하여 사용하고 있는 숭정전은 경희궁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것을 완전히 카피하여 복원시켰다.
정전인 숭정전은 1926년 일본사찰이었던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가 매입한 후 현재의 위치(동국대학교)로 이건되어 법당으로 마개조하여 사용했다. 참고로 이 조계사는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의 조계사와는 관련이 없는 절이다.[8] 해방 이후 이 절은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흡수되었고, 그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세워지면서 동국대학교의 법당 '정각원'으로 쓰이게 되었다. 1976년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이건되었다.
정문인 흥화문은 일본사찰인 박문사[9] 에 매각되어 박문사의 산문으로 쓰게 되었다. 해방 이후 박문사 자리에 서울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이 되었다. 1974년 서울시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1988년 경희궁 복원 작업이 시작되면서 경희궁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원래 흥화문 자리에 구세군회관이 들어선 관계로 개양문이 있던 자리로 이건되었다.
경희궁 외조 남쪽문인 개양문은 남산에 있는 일본사찰 서본원사에 매각되어 정문으로 사용되었가 이후 경성방송국을 거쳐 1964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정문인 대성문으로 사용되어 60~70년대 성균관대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차량통행에 방해가 되어 1976년 석조교문으로 교체되었고, 이후 신라호텔로 매각되었다고 구전되나 지금은 그 행방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이는 서울역사박물관측의 조사 내용인데, 일부에서는 1904~05년에 촬영되어 꼬레에 에 꼬레아니에 수록된 사진을 보면 개양문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애초에 경복궁 중건 때 소실된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1930년대초에 이르러 경희궁 전각은 100% 완전히 소실되었다.
1943년~44년에는 폭격을 대비해 왕과 왕비의 처소가 있던 위치에 방공호를 설치했는데, 인근의 경성중학교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하면서 대규모로 축조했다. 다만 경성중학교 재학생들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자국의 청소년들까지 강제 동원하면서 만든 것이다.
3.5. 서울고등학교 터
경희궁 부지에 일제가 지은 경성중학교는 광복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되었고, 현재는 서울역사박물관이 건립되어 현재 경희궁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1980년 강남개발계획에 따라 도심부의 명문고교들이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서울고등학교도 서초구로 이전하게 되었다. 서울고가 강남으로 이사가자마자 서울시는 그 부지의 서쪽 구석에 서울시교육청 신청사를 신축했으나, 나머지 부지는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기까지 약 20년간 서울시 한복판에 공터로 방치되었다. 서울시는 서울시 한복판에 있는 알짜배기 땅인 서울고 부지의 매각을 시도했으나 선뜻 그 땅을 사겠다고 나서는 민간기업이 없었다. 땅값이 100억원이 넘어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거액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중앙정부와 서울시는 현대건설에 이 땅을 사라고 권유했다. 현대건설은 "별 생각 없지만 정부가 권유하니 인수하겠다"는 태도로 이 땅을 구매한다.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에 새 교사를 짓고 이전해간 것은 1980년 신학기부터였고 구 교사자리는 '인력개발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현대그룹의 사원연수원으로 활용되었다. 이 때 이미 현대그룹은 이곳에 28층짜리 대형건물을 지어 그룹본사의 사옥 겸 외국 바이어 전용호텔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대규모 현대사옥이 들어선다는 것을 일반시민이 알게 되자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매스컴에서도 반대의견이 중론이었고, 서너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으레 화제가 되었고 한결같이 '시민을 위한 공원화'를 주장했다. 이렇게 반대여론이 압도적이었던 것에 대해 손정목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감이 기저에 깔려있었다고 분석한다. 엄혹한 시절이라 정치이야기는 할 수 없었지만, "현대로부터 땅을 빼앗아 공원으로 만들어라"는 소리는 아무리 크게 외쳐도 잡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들의 답답하고 울적한 심정을 해소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론이 들끓자 현대그룹은 사옥건설계획을 보류하고 관망세로 전환한다. 서울시는 궁지에 몰렸다. 이 때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이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 예술의전당을 이곳에 지어야 한다는 의견, 대한민국 경찰청 신청사를 이곳에 지어야 한다는 의견 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성난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어느 기관도 강력하게 추진을 하지는 못하였다.
3.6. 발굴 조사 및 복원 시작
1985년 1월 서울시장을 비롯한 서울시 간부들이 주요업무계획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다가오는 12대 총선에 대비한 민심수습책이 논의되었고, 그 방안의 하나로 경희궁터 공원화계획이 거론되었다. 이후 서울시는 서울고등학교 부지를 공원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현대건설로부터 다시 부지를 취득한다. 이 때 서울고등학교부지 가격으로는 당시 매립한지 얼마안된 구의지구(강변역 일대)의 택지 5만평과 등가교환하였다. 현재 강변역 일대의 빽빽히 들어선 현대아파트는 경희궁의 흔적인 셈.
서울시는 '경희궁지 복원과 시민사적공원 조성계획'를 세우고 1985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했다. 우선 1985년과 1987년 1,2차 발굴 조사가 단국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1988년부터 1994년까지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가 3차~7차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이후에도 발굴 조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1,2차 발굴 조사를 실시한 단국대학교 박물관은 월대석을 노출하였고, 당시까지 계단으로 사용하고 있던 어계는 숭정전 건물과는 축을 달리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또한 애초의 추정과 달리 숭정전은 옛 서울고의 신관 건물이 아니라 식당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으며, 지금도 경희궁은 복원 진행중에 있다.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발굴 결과 및 문헌 고증을 거친 경희궁 전각 복원 사업도 시작되었다. 1987년에 우선 정문인 흥화문을 복원했다. 다만 원위치에 구세군회관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서쪽으로 100여m 이동하여 복원했다. 1991년에는 숭전전을, 자정전과 회랑은 1998년에, 태령전과 그 일곽은 2000년에 각각 경희궁내에 복원하였다. 2002년에 숭정전 주변부 복원을 완료하여 경희궁을 시민에게 공개했다. 그러나 이후로 2017년 현재까지 경희궁 복원 사업은 상당히 지지 부진하여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그런데 하필 경희궁 부지에 서울역사박물관(구 서울시립박물관)이 1997년에 들어섰고 또한 '경희궁의 아침'(...)이란 아파트 단지 때문에 당분간 더 이상의 복원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장기적으로 보고 주변 건물을 먼저 철거하려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2004년 이후로 복원은 중단된 상태. 기사 서울시랑 문화재청이 서로 배째라면서 예산을 안 주고 있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내전에 해당되는 곳에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 복원이 재개된다 해도 많은 어려움이 발생할 확률까지 생겼다.
복원된 현재의 경희궁 부지는 서울 궁궐 치고는 상당히 협소한 편인지라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면 쉽게 둘러볼 수 있다. 비탈이 많아 이동이 쾌적한 편은 아니지만.
숭정전에서는 대장금, 화성에서 꿈꾸다, 명성황후, 왕세자 실종사건 등의 사극 뮤지컬도 '고궁 버전'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올라온다. 야외이기도 하고 애초에 공연장이 목적인 장소가 아닌지라 시설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밤하늘 아래에서 보는 뮤지컬은 최소한 분위기가 제법 난다. 또한 문화재 보호를 위해 주요 고궁에서의 사극 또는 드라마 촬영을 엄격하게 제한하자 사실상 신축이라 상대적으로 연혁이 짧은 경희궁이 촬영 장소로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궁>에 나오는 황궁도 사실 이곳에서 외부 장면을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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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의 용 그림이 문제가 되면서 경희궁 숭정전 용도 덩달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 적이 있다. 위쪽 사진의 용은 동국대 정각원건물로 쓰이게 된 본래의 숭정전 천장에 달려있는 것이고, 아래쪽 사진의 용은 옛 숭정전 자리에 새로 복원한 건물의 천장에 달아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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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되는 용 조형물은 장난감 같이 조잡하게 제작되었으며, 천정의 그림과 다른 조형물 역시 원형과 전혀 다르게 제작되었다.
그리고 2013년 1월 27일 문화재청에서 2014년에 다시 복원사업을 진행한다고 발표했으며 복원작업에는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공동으로 참여하며, 예산도 국비 70%, 시비 30%를 투입하며 2023년까지 진행한다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서울시에서 제작한 종합정비계획안에 따르면 2035년 이후를 목표로 경희궁 전체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출처
우선 2016년 말에 경희궁 옆에 있었던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이 철거가 되고, 그 자리에 서울역사박물관의 주차장이 들어서고, 지금의 주차장 자리는 발굴을 통해 복원을 시도한다. 또한 방공호도 철거하고, 2025년까지 흥화문 등도 고쳐 짓는다. 그리고 서울역사박물관 등은 2026년부터 장기계획으로 옮겨갈 예정이다. 기사
3.7. 계속되는 훼손
모순적이게도 '''광복 이후'''에 일제도 아닌 대한민국 정부, 특히 '''서울시'''에 의한 경희궁의 유적과 유구의 파괴, 훼손이 자행되고 있으며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정부에서 유적이 발굴된 때에 한해서라도 해당 사유지를 매입해 경희궁 유적을 보존했어야 하나, 어떠한 보존조치도 이뤄지지도 않았고 조선 전기 유적까지 사라져버렸다. 이것은 과거 저개발 국가 시절의 얘기가 아니라, 2010년 이후 현재에도 발생하고 있는 일이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유적 위에다가 원래 전각을 복구하면서 유구 파괴가 생긴 것도 아니고, 다른 용도의 건물을 건축하며 기존의 유구를 모두 제거해 폐기한 것이다.
현재 경희궁 터에는 서울시 교육청, 기상청(일부),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 서울복지재단 등의 공공기관과 대한축구협회, 성곡미술관, 일조각 출판사, 내수동교회, 구세군회관 등의 민간 건물이 들어서 있다.
특히 서울시는 경희궁 터가 사적으로 지적된 1980년 이후에도 경희궁 터에 '''서울시교육청'''(1981년), '''서울시립미술관'''(1988년), '''서울역사박물관'''(2002년[10] ), 서울복지재단 등을 짓는 만행을 자행하였고 이 과정에서 기존 경희궁 유적과 유구에 대한 발굴과 보존 조치를 거의 취하지 않아 유적지가 파괴되는 믿기 어려운 짓을 저질렀다.
1980년 드디어 서울고가 강남으로 이전했으나, 서울시는 곧바로 경희궁 터 서쪽부지를 '''서울시교육청'''에게 떼내주었다. 서울시교육청은 경희궁 터 서쪽에 청사 및 부속 건물들을 신축한 후 1981년 이전해 왔고 현재까지 사용 중에 있다.
서울시는 경희궁 터 한복판에 지어진 서울고등학교의 본관을 경기고처럼 동문들의 압력 때문인지 철거하지 않고 있다가 1988년 개축하여 '''서울시립미술관'''을 개관했다.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이 서소문 본관으로 이전하면서, 경희궁 내 미술관은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16년 말에야 미술관 분관이 철거되었고 현재는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희궁 유적 발굴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서울시는 경희궁 터 내에 '''서울역사박물관''' 건축을 추진했다. 아직 유적이 발굴되지 않은 부지에 건물을 올려 2002년 완공되었다.
1998년 9월~11월 신문로2가 1-107, 108번지에 "서울 교원복지회관 신축공사"가 진행되었다. 공사에 앞서 명지대학교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가 진행한 조사에서 남서쪽 지역에서 적심석 총 14기, 북쪽 끝부분 중앙에서부터 서쪽으로 지정석으로 보이는 잡석군과 적심석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석재 1기, 그리고 장대석 6기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유적의 보존도 이뤄지지 않았고 공사를 허용해 경희궁 유적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예정대로 서울교총빌딩이 건축되었다.
2003년 10월 신문로2가 1-335에 "서울 신문로2가 근린생활시설 신축공사"가 진행되었고, 한양대학교 박물관이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조선시대 와편 및 전 등이 출토된 건물지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역시 유적은 파괴되었고 출판사 일조각 사옥이 건축되었다.
2005년에는 사직동 9-1 일대에 사직1구역 도심재개발사업이 추진되었다. 경희궁 관련 궁장, 우물 등이 확인되었으나 산지형까지 깎아 원지형을 훼손하면서까지 아파트 건축이 진행되었고 현재 광화문풍림스페이스본 단지가 위치하고 있다. 복토보존 후 사업시행을 했다고는 하나 지형 자체가 파괴되었고, 고층 아파트가 건립되어 원형은 완전히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에 위치한 다른 공동주택 시설인 파크팰리스, 경희궁의 아침 아파트 단지는 경희궁의 궁역이 아니지만 풍림스페이스본의 경우 경희궁의 직접적인 궁역이며 유적까지 확인됐으나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그대로 공사가 진행됐다. 현재 풍림스페이스본 106동 일부, 104동 일부가 경희궁 궁역이다.
2008년 8월~12월 재단법인 한울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서울 종로 신문로2가 1-176번지 일원 발굴조사 진행되었다. 조사결과,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문화층과 조선 전기 문화층이 중첩되어 확인되었다. 조선 전기의 유구는 건물지 1동이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문화층의 유구는 건물지 1개소와 주거지 또는 여막 등으로 추정되는 수혈 6기, 그 밖의 수혈 40여 기가 확인되었다. 역시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아산정책연구원이 건축되었다.
2009년 10월~12월 재단법인 고려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서울 종로 신문로2가 1-158번지 내 유적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조사결과, 유구는 건물지 1동, 구상유구 1기, 방형전 유구 1기, 축대 및 배수로 등이 조사되었다. 또한 와전류와 자기류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그러나 안내판 하나만 만들고 유적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통일교 재단 사옥이 건축되었다.
2013년 신문로2가 1-124번지 어린이집 건축 부지에서 조선전기 건물지가 출토되었으나, 완전히 파괴한 채 건물이 신축되었고 현재 현대해상어린이집이 운영중이다. 특히 현대해상은 외부에 유적이 출토되었다는 안내판을 설치하겠다고 했으나 말만 그랬을 뿐 전혀 시행되지 않았다.
반면 일제시기 한국에서 문화재를 무수히 파괴한 일본조차도 패전 후 나라시대 헤이조쿄 유적 발굴 및 복원을 각계 의견 수렴으로 수십년 넘게 차근차근 진행한 걸 보면, 경희궁 등에 대한 부적절한 문화재 복원정책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하다.
4. 기타
- 경희대학교의 어원이며, 인근에는 '경희궁의 아침'이라는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이 아파트와 같은 이름의 너비아니 비슷한 냉동식품도 있다.
- 서울시내에 있는 다른 4개 궁궐과 달리 경희궁은 입장료가 없다.
- 앞에 서술했던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인지도가 적은 궁인데다 외국인 관광객들 중에도 고궁 체험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 경복궁을 찾기 때문에 경희궁은 잘 오지 않는다. 때문에 조용한 분위기에서 전통 궁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기도 하다.
- 경희궁과 인경궁의 유래와 배치(블로그)
5. 주요 전각
[1] 그리고 그 예언이 맞아들어가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광해군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결국 광해군에게 뺏긴 아버지의 저택을 도로 가져온 모양새.[2] 경희궁의 원래 이름[3] 1860년에 철종이 경희궁에 6개월간 머물렀다는 기록이 경희궁의 마지막 사용 기록인데 적어도 이때까지는 경희궁이 온전했던 것으로 보인다.[4] 1900년대 초까지의 사진상으로 보이는 남아있던 전각들을 나열해보자면, 정문인 흥화문과 금천교. 정전인 숭정전. 편전으로 많이 활용된 흥정당. 중궁전(왕비의 침전)으로 사용된 회상전이 전부이다.[5] [image] 사진엽서 전체의 모습.[6] 경희궁은 현재 서울역사박물관과 구세군 회관 아래쪽 신문로까지 포함하고 있었고, 대한제국 시절 덕수궁의 부지도 지금보다 북서쪽으로 더 넓었기 때문에 경희궁과 상당히 가까웠다.[7] 무지개다리라는 뜻이다. 운교라고도 불렀는데 이 쪽은 구름다리.[8]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9]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10] 개관 기준. 준공은 1997년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