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고사

 


1. 개요
2. 상세
3. 역사
4. 역대 수석
5. 연도별 시험 일자
6. 같이 보기


1. 개요


大學入學 豫備考査
1969학년도(시험 실시는 1968년)부터 1981학년도(시험 실시는 1980년)까지 실시한 국가 주관의 대학 입학 시험.
대학입학 학력고사의 원류이기도 하다.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예비고사의 명칭만 바꾼 것이 학력고사이다.
첫 예비고사 세대는 1950년생, 마지막 예비고사 세대는 1962년[1]이었고 현재 57~70세이다. 마지막 예비고사 세대가 65세가 되는 2027년쯤을 기점으로 예비고사 세대는 모두 노인이 된다(만약 그때까지 노인의 기준이 65세 이상으로 유지된다면 말이다).

2. 상세


한국의 대학 입학 시험 제도는 광복 후부터 1969년 이전까지는 각 대학에서 자체적으로 출제하고 선발하는 대학별고사 위주였다. 그러나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1954학년도에는 대학별고사 전에 자격 시험으로 대입연합고사가 치러졌으나 1회 시행 후 폐지되었다. 1962학년도에는 대학별고사가 금지되고 대신 국가 주관의 대학입학 자격고사가 시행되었고 1963학년도에는 대학별고사와 병행하여 치러졌으나 결국 2회 시행 후 폐지되었다.
1969학년도 입시부터 국가에서 실시하는 '''대학 입학 예비고사'''가 시행되면서, 대학별고사는 '본고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시험 출제 방식은 체력장 20점 포함 340점 만점 체제로 고교에서 이수되는 대부분의 과목을 포함한 사지선다형이었다.
거의 전과목을 다 보니 지나치게 많아 암기 위주의 입시 공부가 시작되는 안 좋은 전통을 남겼다. 현재의 수능 체제에서 과목 수가 줄어서 非수능 과목을 등한시하는 고등학생들이 많아진 것을 보면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윤리나 국사는 물론이고, 사회나 과학 등의 과목은 대학에서 공부를 따라갈 실력이 되는지 측정하는 "대입 전형"의 본래 취지와는 거리가 있다.
첫 시험은 1968년 12월 19일에 실시됐다. 1969년 1월 4일자 동아일보의 사설에 따르면, 총 응시자 11만 2천여명 가운데 대학 총 정원의 1.5배수인 6만 1천여명을 합격시켜 합격율은 50%를 약간 상회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컷오프는 340점 만점에 210~220점 정도였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예시는 통과만 하면 그만이고 본고사만으로 전형을 했으나, 이후 예시의 반영 비율이 대폭 늘어났다.
1979학년도에 처음 생긴 전문대학교육대학(당시 2년제)[2]과 함께 본고사 없이 예시와 내신으로 전형을 했다.
예비고사-본고사 체제는 1980학년도까지 유지되다가, 1981학년도에는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예비고사만 치러졌다. 1982학년도부터는 예비고사의 명칭이 대학입학 학력고사로 변경되었다.[3]
여담이지만 당시 예비고사 수험번호는 응시원서 접수 순서대로 발부되었다. 다시 말해 접수번호가 곧 수험번호인 셈.
당시 대학 접수 방식은 지망하는 시도를 3지망까지 적었다고 한다.[4]

3. 역사


1960~70년대 입시는 전기대학과 후기대학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전기대학의 입시가 모두 마무리 된 뒤 후기대학의 입시가 시작되는 구조였다. 당시의 대학 입시는 오늘날처럼 여러 대학에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기대학 중 하나의 대학에 지원을 했다. 이에 전기대학에서 불합격했다면 후기대학에 진학하거나 다음 해를 기약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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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월 10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 알 수 있듯, 당시 1973학년도 입시에서 전기대학은 서울대학교, 부산대학교, 경북대학교, 한국항공대학교, 전남대학교, 전북대학교, 충남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중앙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수도여자사범대학교(현 세종대) 등이 있었다. 기사에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서강대학교와 건국대학교도 전기대학에 속했다. 1973학년도 입시까지는 응시 자격만을 갖춘 예비고사를 통과한 자만이 대학별 입학 시험(본고사)을 치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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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서울대의 예시점수 680점은 68점을 잘못 쓴 것이다)
1974학년도 입시부터 예비고사는 종래의 "지원 자격"에서 실제 대학 입시에 성적이 반영되는 구조로 바뀌게 된다. 그리하여 예비고사 시험 성적과 대학별 본고사 시험 성적이 함께 반영되어 대학 입시가 치러지게 된다. 하지만 1975학년도까지는 예비고사 반영 비율이 저조하여, 당시까지에는 절대적으로 본고사에서 고득점해야 합격할 수 있었다.
1975년도 기사를 보면, 76학년도 대학입시에서 대부분의 대학이 반영율을 대폭 높이게 되어 예비고사가 사실상 입학을 좌우한다고 보도하고 있다.출처 본고사 성적은 학생들이 다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예비고사 명목상 비율은 저래도, 실질적인 비율은 이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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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1.31 동아일보에서는 당시 재수생의 실태를 보도하는 기사를 냈다.#
"우선 재수생의 형태를 크게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꼭 일류대학에 들어가야겠다는 학생들이고 둘째는 아무 대학이든 들어가고 봐야겠다는 학생들이다. 후자의 유형 속에는 예비고사에 조차 불합격되고 취직도 안돼 오갈데가 없는 학생들이 많이 끼여있다. 일류대학을 목표로 재수하는 학생들은 대개의 경우 학구의욕이 왕성하고 생활도 성실한 편이다. 이들 가운데는 입학시험에서 1,2점 차이로 억울하게 떨어졌거나 충분한 실력이 있으면서도 시험운이 나빠서 실패한 학생이 많다. 서울의 J학원이 작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조사대상 3백명 중 51%가 전기대에 낙방한뒤 후기대엔 아예 응시조차 않았고 10%는 후기대학에 합격했는데도 등록을 포기하고 재수하는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바로 이 사회에 팽배해있는 일류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후기대학에서 최상위에 위치한 경우는 점수대가 높았다. 성균관대 법학, 상경, 한국외국어대 영문, 한양대 공대 등에는 서울대에 아깝게 떨어진 응시자가 상당수 입학하여 매우 높은 점수대를 기록했다. 당시 학번의 사법시험, 행정고시 등의 결과를 보면 성균관대가 2위를 여러번 차지하기도 했다.
1976학년도 입시에서 전기대학은 서울대학교, 부산대학교, 경북대학교, 한국항공대학교[5], 전남대학교, 전북대학교, 충남대학교 등 국립대학교들과,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서강대학교, 중앙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경희대학교, 건국대학교 등이었고, 후기대학은 성균관대학교, 한양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동국대학교 등 50여개 대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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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중앙일보 "76년도 대학신입생 대학별 학과별 예시성적" 기사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사회 283.21점, 서울대학교 인문 273.17점, 성균관대학교 법률학 272.27점, 성균관대학교 경영 270.31점, 연세대학교 경제 261.78점, 성균관대학교 행정 261.62점, 부산대학교 상경 260.18점, 연세대학교 경영 259.60점, 고려대학교 법학 259.12점, 고려대학교 행정학 258.97점이었다.
동아일보의 1977년 5월 9일자 "77년도 대학합격자의 예비고사 성적 평균치" 기사에 따르면, 전기대학으로는 서울대학교 사회 285.84점, 서울대학교 인문 278.17점, 연세대학교 경제 266.77점, 고려대학교 법과대 264.86점, 한국항공대학교 항공관리학 260.17점, 부산대학교 상경 258.53점, 부산대학교 법정계 253.66점이었다. 후기대학으로는 성균관대학교 법률학과 279.08점,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270.60점, 서울산업대학교 도시행정 262.67점, 한양대학교 법학 261.60점,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 256.55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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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도 입시에서는 전국 모든 대학에서 예비고사 성적을 50% 이상 반영토록 조치를 취했다. 웬만한 서울의 주요대학들은 예비고사 성적의 반영비중이 60% 이상이었고, 심지어는 예비고사 성적 반영비중 100%의 특차 무시험(본고사를 치르지 않는) 전형을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1979년도 예시부터 삼수 감점제를 적용, 삼수생 이상의 경우 최종점수에서 3점을 감점하도록 했다.
1979학년도 입시 이후 예비고사 성적의 반영비중은 거의 절대적이었고, 전국의 주요대학에서 예비고사 성적 반영비중이 100%인 특차 무시험(본고사를 치르지 않는) 전형을 운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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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1979년 12월 29일자 "1980학년도 예비고사 성적으로 본 대학별 합격 가능점수" 기사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법과대 312점, 고려대학교 법과대 295점, 연세대학교 경제 291점, 중앙대학교 법과대 286점, 부산대학교 상경계 284점, 서강대학교 경상계열 277점, 경희대학교 경상계 275점, 이화여자대학교 인문사회계 271점, 건국대학교 정법대 261점이었다. 이들 모두는 전기대학이었다.
5공화국이 시작되면서 전두환의 사회 개혁 작업의 하나로 실시된 과외 금지와 맞물려서 당시 망국병이라 일컬어지던 고액 그룹 과외의 이유였던 대학별 본고사(수학과 영어)를 금지하고 '''예비고사와 내신 성적만을 반영'''하는 이른바 '''7.30조치'''를 1980년 7월 30일에 발표했다.
학력고사는 예비고사의 과목별 배점 체계를 그대로 가져왔으며, 내신 성적 반영 비율이 확대되었다.[6]
1981학년도까지는 예비고사란 이름을 유지했고 총정원 1.x배수 컷오프도 있었다. 82학년도부터 학력고사란 이름을 사용하고 1.x배수 컷오프제 폐지.
본고사(대학별고사)를 거치지 않은 세대는 62학번[7]에 이어 81학번이 두 번째라고 할 수 있다.[8]

4. 역대 수석


'''학년도'''
'''성명'''
'''출신 고교'''
'''진학 대학'''
'''약력'''
1969[9]
이윤섭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화학과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포스텍 석학교수
최왕욱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
Hantronix, Inc. 대표
1970
임지순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서울대학교 교수
1971
오세정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서울대학교 교수, 총장
1972
한태숙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1973
허익렬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학과
김앤장 변호사
1974
오내원
광주제일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본부장
1975
송기호
대전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서울대학교 교수
1976
임희근
경기여자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출판기획번역 네트워크 '사이에' 대표이사
1977
신상훈
보성고등학교
불명[10]

1978
박석원
서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LG전자 부사장, (주)테크로스 대표이사
1979
김용재
대전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신문학과
법무법인 정세 변호사
1980
김기영
해동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학과
김앤장 변호사
1981
오관석
부산진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학과
엘프스 법률사무소 변호사
흔히 예비고사 수석 근황이라고 검색되는 자료에는 예비고사 수석과 서울대 수석 입학이 혼재되어 있다. 81학년도를 제외하고는 본고사가 치러졌기 때문에 예비고사 수석과 서울대 수석입학은 엄연히 다르다. 이를 구분하지 않고 '수석' 타이틀로만 분류했기 때문에 생긴 혼동이다. 본고사가 존재했던 시기의 예비고사 수석들 중 서울대 수석입학 타이틀도 거머쥔 수험생은 70학년도 임지순, 71학년도 오세정, 72학년도 한태숙 등 3명 뿐이었다.
81학년도에는 본고사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오관석은 서울대에 수석입학했다.

5. 연도별 시험 일자


1969학년도
1968년 12월 19일
1970학년도
1969년 11월 18일
1971학년도
1970년 11월 20일
1972학년도
1971년 11월 19일
1973학년도
1972년 11월 27일
1974학년도
1973년 11월 16일
1975학년도
1974년 11월 13일
1976학년도
1975년 11월 12일
1977학년도
1976년 11월 12일
1978학년도
1977년 11월 10일
1979학년도
1978년 11월 7일
1980학년도
1979년 11월 6일
1981학년도
1980년 11월 20일

6. 같이 보기




[1] 본고사를 치른 것은 1961년생.[2] 교육대학은 1980년대 들어서 점차 4년제로 개편되었다.[3] '본'고사가 없어졌으므로 '예비'라는 의미도 없어짐[4] 이를테면 1지망에 서울, 2지망에 경기도, 3지망에 자신의 고향이 있는 시도를 적는 식.[5] 당시는 국립대였다[6] 당시 경기고등학교 등 입시 명문 고교 학생들은, 고등학교 교실에서 수업 받는 날보다 시내 학원에서 본고사 공부를 하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동급생끼리 얼굴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심지어 담임 선생님 얼굴도 몰라, 졸업식 날에만 학교에 가서 담임 선생님과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을 하는 일도 흔했다. 7.30조치로 내신 반영 비율이 20% 이상이 되었고, 학력고사가 시행되면서 내신 반영 비율은 30% 이상으로 확대된다.[7] 5.16 군사정변 직후 대학 입학에 관한 임시조치법으로 대학별고사를 금지시켰으나 1년만에 다시 허용하였다.[8] 1958 ~ 1961학년도에도 정원의 10%는 내신 성적만으로 무시험으로 선발했으나 전체 수험생에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9] 공동수석[10] 당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서울대 의대를 지망한다고 밝혔으나 1992년 이전 서울대 의대 졸업자 명단에 없다. 1992년 졸업한 국립암센터 신상훈 교수는 이름의 한자도 다르고 입학 시기도 맞지 않는다. 서울대의 다른 학과로 확대해도 1990년대 졸업생 중에 동명이인이 있으나 역시 입학시기와 거리가 멀다. 따라서 입학은 했으나 어떤 사정으로 중퇴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다른 대학으로 진학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