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입학 학력고사

 


1. 소개
2. 전형 과정
3. 역사
3.1. 1982 ~ 1987학년도
3.2. 1988 ~ 1993학년도
3.3. 폐지
4. 과목
5. 시간표
5.1. 1982 ~ 1986학년도
5.2. 1987 ~ 1992학년도
5.3. 1993학년도
5.4. 전문대학
6. 연도별 시험 일자
7. 기타
8. 사건사고
9. 역대 수석
10. 같이 보기


1. 소개


[image]
1982학년도 첫 회 학력고사 배치표(조선일보 1981년 12월 30일자 기사)

大學入學 學力考査
1981년부터 1992년까지, 즉 1982학년도[1]부터 1993학년도까지 시행되었던[2] 전국 규모의 대학입학/교육 적격자 선발 시험이다. 인문/자연계(문/이과)구분이 폐지된 제7차 고등학교 교육과정[3]이 시행된 2002년 '''이전'''에 시행되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계열별 분리가 이루어졌다.
필기 시험 320점에 체력장 20점[4]을 합하여 340점 만점으로 구성되었다. 1982학년도부터 1987학년도까지(1981~1986년)는 선 시험 후 지원 방식이었다. 즉 먼저 학력고사를 본 후 그 점수 가지고 대학을 지원했으며(현 수능 정시 모집과 유사), 1988학년도부터 1993학년도까지는 선 지원 후 시험 방식이었다. 즉 먼저 지망 대학을 지원한 다음 시험 결과를 봐서 당락을 결정했다.

2. 전형 과정


당시에는 대입 모집군이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어 각 1군데 씩만 지원이 가능했다.[5] 전기에 모집하는 학교가 더 많았으며 전기와 후기에 걸쳐 분할 모집하는 학교도 있었다. 선 시험 후 지원 시기에는 1년에 한번, 11월에 시험을 본 후 그 점수로 전기에 지원, 전기에 탈락하면 후기에 지원했으며, 선 지원 후 시험 시기에는 대입 지원이 먼저이고 시험과 채점이 대학에서 진행되다 보니 그에 따라 시험도 전기(12월)와 후기(다음해 1월)로 2번 시행되었다. 보통은 후기 시험이 전기 시험보다 난도가 더 쉬운 편이었다.[6][7] 후기까지 끝나면 전문대학 입학 전형을 위한 별도의 학력 고사가 치뤄졌다.
선 지원 후 시험 시절에는 원서 접수 마감 일이면 오후 6시부터 각 방송사들이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각 대학 학과 별 지원 현황 및 경쟁률을 보도하는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때문에 이 시간대에 주로 방송되는 애니메이션이나 어린이 프로그램도 결방되어 아동 시청자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선 시험 후 지원 시절에는 시험 지구가 설치된 거점 도시[8][9]에서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시골이나 소도시에서는 그 도의 거점도시로 가서 치러야 했다. 이를테면 경기도 포천의정부[10], 용인 신갈영덕동, 흥덕동의 경우 수원[11], 강원도 철원에 사는 수험생은 춘천[12], 전라남도 화순광주[13]까지 가서 치러야 했다. 게다가 각 도 별로 시험 지구가 무조건 정해져 있어서 다른 도에 더 가까운 거점 도시가 있는 지역[14]이나 해당 도와 다른 도의 거점 도시들 사이에 끼어 있는 지역[15]이라 하더라도 얄짤없이 그 도에 있는 거점 도시에서 봐야 했다. 때문에 시골이나 소도시 출신 수험생들은 학력고사를 보는 전 날 도시나 그 인근 도시로 가서 하룻밤 자고 시험을 봐야 했다.[16]
선 지원 후 시험 시절인 1988학년도 이후에는 일본의 센터시험 비슷하게 자기가 지망한 대학교의 지망 학과 강의실에서 시험을 보는 것이었으므로 무조건 지망 대학교까지 가야 했기에, 서울 출신 수험생들도 본인이 지망한 학교가 인 서울이 아니면, 무조건 해당 도시에서 2박(1박은 시험, 1박은 면접)을 해야 했다. 대학조차 없는 시골[17]이 고향이면 100% 2박3일 원정을 가야 했다.
여기서 특히 '본인의 지망 대학의 '''지망 학과'''에서 시험을 본다'는 말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같은 강의실에서 시험을 치르는 모든 사람이 바로 경쟁자였다는 것. 이 사람들의 운명은 합격하여 서로 동기가 되거나 혹은 낙방하여 재수생이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런 관계로 멘탈 관리가 중요했는데, 예컨대 극악의 난이도였던 1991학년도 수학의 경우, 해당 수학 시험이 있던 2교시가 끝난 후 멘붕한 나머지 울며 짐을 싸고 시험을 포기하고 집으로 가버리는 수험생이 속출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어떤 선생님들은 '시험 보러 가서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나왔어도 쉬는 시간에 절대로 어려웠던 척 하지 말라'며 코치를 하기도 했다. 나름 심리전까지 폈던 것.
학력고사 시험 당일이면 시험이 치루어지는 대학 앞에서는 수험생 말고도 수험생의 학부모들, 모교 출신 수험생들을 응원하러 나온 해당 대학 재학생들, 학부모들과 함께 수험생들을 위해 격려해 주러 온 신부들이나 승려들, 합격 기원 엿이나 찹쌀떡을 팔러 나온 잡상인 등이 몰려들어 한바탕 북새통이 벌어지곤 했다.[18]
시험이 끝난 다음날 면접과 신체검사가 있었다. 면접 점수가 있기는 했지만 동점자 처리에만 반영되는 정도여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단, 교대와 사범대는 교직적성이라는 이름으로 면접 점수가 2~5% 반영되었다. 간혹 사범대 이외에도 면접점수를 전형에 반영하는 학교도 있었으나 실질적 반영률은 미미했다.

3. 역사


5공화국이 시작되면서 전두환의 사회개혁작업의 하나로 실시된 과외 금지[19]와 맞물려서 당시 망국병이라 일컬어지던 고액 그룹 과외의 이유였던 대학별 본고사(수학과 영어)를 금지하고 '''예비고사 성적만을 반영'''하는 이른바 '''7.30조치'''를 1980년 7월 30일에 발표했다. 입시가 반년도 안 남았는데 대학별 본고사가 사라지니 전 국민이 큰 충격에 휩싸였었다.
학력고사는 예비고사의 과목별 배첨 체계를 그대로 가져왔으며, 이때 처음으로 고교내신성적이 대학입시에 반영되게 되었다.[20]

3.1. 1982 ~ 1987학년도


1981학년도는 본고사가 폐지되었지만 예비고사란 이름을 그대로 유지했고 총정원 1.3배수 컷오프도 있었다. 본(本)고사가 없어진 마당에 '예비'(豫備)라는 명칭이 부적절해 1982학년도부터 학력고사란 이름으로 바뀌고 1.3배수 컷오프제도 폐지되었다. 실질적으로는 1981학년도 예비고사도 학력고사와 다르지 않지만, 명목상으로는 1982학년도가 첫 세대. 1984년 학력고사 배치표 1986년 학력고사 배치표
예비고사/학력고사의 단점으로 지적되는 암기위주의 입시를 보완한다는 취지로 1986학년도 및 1987학년도에 대학별 논술시험이 실시됐다. 당시 출제 문항은 2010년대식의 논술을 빙자한 문제풀이식 본고사가 아니었고 순수하게 작문을 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서울대 기출 논술고사 문제를 보면 1986학년도는 '현대인과 일의 보람', 1987학년도는 '독서가 우리에게 주는 혜택'이었다.[21] 논술고사는 문제가 너무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라는 비판과 채점의 객관성이 의문시되어 2년만에 폐지되었다. 1987학년도부터 9과목으로 줄었다.
학력고사를 도입하면서 대학교에서 시험을 치르지 아니하고 미리 시험을 치르고 나서 지원을 하게 되어, 80년대 이후 한국 대학입시의 키워드가 되는 '''눈치작전'''[22]이 처음 시작되기도 했다.

3.2. 1988 ~ 1993학년도


1988학년도에 대학별 논술은 2년만에 폐지하면서 '''선지원 후시험'''제로 개편했고 주관식이 추가되었다. 선지원 후시험제로 바꾼 이유는 지나친 눈치작전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자 정부가 해결책이랍시고 내놓았던 것인데, 오히려 막판 눈치작전은 더욱 심화되었고 결국 애꿎은 학생들만 피해를 봤다. 학과 지원자가 입학정원에 미달하여 '''경쟁률이 1 이하인 경우 나중에 받을 학력고사 점수와 관계없이 사실상 자동 합격'''되지만, 경쟁률이 높을 경우 기본적으로 불리한데다 '''선지원 후시험'''의 특성으로 인해 실제 점수에 따른 하향지원은 애초에 불가능했고, 모의고사 성적 등만을 지원의 기준으로 삼을 수 밖에 없어, 수험생의 시험 전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잘 모르겠다면 '''자기 점수를 모르고 지원부터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지금 수능 끝나고 원서 영역이니 뭐니 하면서 눈치를 보는 일이 많은데 지금은 적어도 자기 점수를 알고 지원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대입 수험생 입장에서 이 시기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입시제도'''로 불리운다. 자신의 객관적인 실력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모의고사 점수나 내신성적 등의 '감'에 의해 대학 지원 후 학력고사를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모의고사 전국 1등, 수학, 과학 올림피아드 한국 대표 등의, 지금같으면 수능 0.0x%대의 극상위권 수험생도 시험 당일 컨디션 난조가 있으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수시도 없었고 복수지원도 없었던 시기라서 전기에 단 '''1회'''의 지원이 실패하는 경우 피해가 꽤 컸다.[23][24] 실제로 선지원 후시험이 처음 시행된 1988년 최상위 수험생이 대거 탈락하는 바람에 이들이 재수를 한 1989년에는 전국 수석과 서울대학교 자연계 수석, 고려대학교, 포항공과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등의 수석을 재수생이 석권하였다. 학력고사 역사상 재수생이 전국 수석을 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게다가 이 시기 수험생들은 2차 베이비붐 세대(1968~1974년생)로 100만 명의 입시경쟁을 뚫어야 하는 그야말로 입시지옥이었다. 수험생은 늘었는데 하필이면 동시기 졸업정원제까지 폐지되어 입학정원이 크게 감소한 탓까지 더해졌다.
또한 선지원 후시험으로 인해 시험관리를 지금처럼 평가원 등의 공공기관이 아닌 지원한 대학교에서 모두 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OMR카드에 기재하는 선다형 문제 외에 직접 시험지에 답안을 문장으로 작성하는 단답형, 서술형 문제도 있었고 당연 이들의 채점 또한 해당 대학에서 했다. 따라서 채점자가 서술형 답안 조작을 통한 '''입시부정'''까지 일어날 수 있었다. 입시부정까지는 아니여도 라이벌 대학에 비해 자기 대학의 위상(?)을 올리기 위해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학과간 커트라인을 조작해 발표한다던가[25], 아예 커트라인 발표 자체를 하지 않던가 하는 문제가 있었으며, 수험생 자신도 합격/불합격 관계 없이 몇점 맞았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지금같으면 커트라인 발표를 하지 않더라도 합격/불합격한 지원자들의 수능점수를 통해 대략의 커트라인을 추정할수 있는데 당시에는 그게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 당시 학원가에서 돌던 말은 국립대는 감사도 있고 다들 자기 지역에서 최고라서 굳이 속이지는 않지만 사립대학들은 비슷한 라인의 경쟁대학보다 점수가 높게 나오도록 하려고 커트라인 뻥튀기를 해서 다 믿을수 없다는것.[26]
그때는 배치표에 좋게 나오게 하기 위해 대형입시학원에 로비까지 하던 시절이라서 이러한 입시시스템은 지원할 대학의 과년도 커트라인 등을 알기 어려워서 선지원을 하려 해도 어디를 지원해야 할지조차 알기 어려웠으며, 이는 비슷한 점수대의 대학이 여럿 모여있는 인서울 중위권에서 더욱 문제가 되었다. 적당한 모의고사 점수대 가지고 배치표상 적절하게 지원하고 당일 시험도 비슷하게 봤으나 누구는 떨어지고 누구는 장학생으로 붙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27] 그래서 눈치작전은 더더욱 심해졌다. 교내 학과선택은 물론이거니와 '''학교간''' 선택 눈치작전까지. 온 가족이 지원예정인 몇개 대학에 직접 가서 경쟁률을 확인하고 공중전화 찾아 전화하는 쇼를 했던 시기가 그때였다.
이때 유행한 신조어가 "고득점 재수생". 즉 체력장 포함 300점 이상을 받고도 서울대 등에 합격하지 못하고 재수하게 된 인원이 3자릿수(혹은 4자리수)로 폭증하는 현상이 시작됐다.[28]

3.3. 폐지


사교육을 없애고 고등학교 교육을 정상화한다는 일련의 조치로 도입되었으나, 과도한 암기형 문항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수험생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의 학업성취도 검사에 지날 뿐 대학 교육 적격자를 선발할 수 있는 기능이 없다는 비판에 부딪혔다. 그러자 1987년부터 미국의 SAT를 본 따 학력고사를 대체하기 위한 대학입학 적성검사의 연구·개발이 진행되었으며, 1990년부터 1992년 7차례에 걸친 실험평가를 통해 1993년에 '''199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시행되자 폐지되었다.

4. 과목


* 1981학년도[29] ~ 1983학년도: 총 14과목. 국어 I, 수학 I, 외국어[A] 비롯 한문, 국사, 국민윤리, 정치, 경제, 기술/가정[30], 남학생의 경우 실업과목 4과목(농업, 공업, 상업, 수산업) 중 택1과목, 여학생은 가사로 고정, 사회과목 4과목 전부, 과학과목 4과목 중 택1과목[31] 등 사실상 고교 전 과목이 시험범위다.
* 1984학년도: 문과와 이과에 각각 국어 II와 수학 II 추가[32]. 총 15과목.
* 1985학년도: 문과의 경우 과학 한 과목을 추가하여 과학 2과목 응시. 이때 물리화학 중 적어도 한 과목을 반드시 선택하도록 함.[33] 이는 문과생의 99%가 생물을 선택하는 사태 방지. 문과 16과목. 이과는 이전과 동일하게 15과목.
* 1986학년도: 영어를 필수로 하고 나머지 외국어가 제2외국어로 빠져 이 중 하나를 추가로 시험 치게 함. 따라서 문과는 17과목, 이과는 16과목이 됨.
* 1987학년도 이후: 9과목으로 시험과목이 축소되게 된다. 아래 서술은 9과목으로 축소된, 1987학년도 ~ 1993학년도 시험의 과목 구분이다.
인문계열은 국어Ⅰ·Ⅱ 75점 만점, 영어 60점 만점, 수학 Ⅰ·Ⅱ-1 55점 만점, 국사/윤리 각 25점 만점이 필수로 지정되었고 사회Ⅰ·Ⅱ, 세계사, 지리Ⅰ·Ⅱ중 택2 각 과목당 20점 만점, 물리Ⅰ, 화학Ⅰ, 생물Ⅰ, 지구과학Ⅰ중 택1 20점 만점, 제2외국어 및 실업 중 택1 20점 만점 등 총 320점+20점(체력장[35])=340점 체제로 구성되었다.
자연계열은 국어Ⅰ 55점 만점, 영어 60점 만점, 수학 Ⅰ·Ⅱ-2 75점 만점, 국사/윤리 각 25점 만점이 필수로 지정되었고 물리Ⅰ·Ⅱ, 화학Ⅰ·Ⅱ, 생물Ⅰ·Ⅱ, 지구과학Ⅰ·Ⅱ중 2개 과목 선택[B] 각 과목당 20점 만점, 사회Ⅰ, 지리Ⅰ, 세계사중 택1 20점 만점, 제2외국어 및 실업 중 택1 20점 만점 등 총 320+20점(체력장)=340점 체제로 구성되었다. 국사/윤리가 합 50점이다 보니 문과 과목인 국어, 사회계열의 과목 총점이 125점으로 이과 과목인 수학, 과학계열의 과목 총점인 115점보다 더 많다.[36]
이외에도 예체능 계열의 경우 사회, 과학을 하나씩만 선택하고 국어Ⅱ와 수학Ⅱ-2가 빠지면서 남는 40점은 자기 전공의 이론시험(음악, 미술, 체육)으로 채워지게 됐다. 이것도 지망 학과에 따라 해당하는 과목의 시험지가 제공되었는데 진학하고자 하는 학과에 따라 미대면 미술과목 시험지가, 체대면 체육과목 시험지가 제공되었다. 당시엔 이런 예체능 학생들을 위해서, 지금은 과학만 있는 하이탑에 음악, 미술, 체육도 있었다.
그래서 인문계와 자연계는 국, 영, 수가 190점, 기타과목이 130점, 예체능계는 국, 영, 수가 170점, 기타과목이 150점인 체제다. 제2외국어와 실업 중 하나 선택이 가능한데 일부 대학은 제2외국어를 치를 학생만 지원 가능했다. 당시에는 원점수를 그대로 적용했으니 자기가 배운 과목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낫겠지만 지금처럼 표준점수제를 도입했다면 당시 고등학생 중 소수만 배웠던 중국어나 에스파냐어에 응시자가 몰렸을지도.
객관식의 경우 전 문제 4지선다형 시험이고, 수학과 음미체 선택 과목은 각 2점, 나머지는 모두 각 1점이었다. 주관식의 경우 과목과 문제의 난이도에 따라 점수 배점은 2~4점이었는데, 폐지 직전 몇 년 동안은 주관식 문항이 만점의 30%를 차지하였다.[37] 학력고사의 출제는 중앙교육연수원 평가관리본부에서 담당하다 중앙교육평가원을 거쳐, 1992년 마지막 해에는 국립교육평가원에서 담당하였다.

5. 시간표



5.1. 1982 ~ 1986학년도


'''교시'''
'''성별/계열'''
'''시험 과목'''
'''배점'''
1교시
공통
국어Ⅰ
한문Ⅰ
50
남자
기술
20
공업, 상업, 농업, 수산업 중 1개 선택
20
여자
가정
20
가사
20
2교시
공통
국사
25
국민윤리
15
정치경제
15
수학Ⅰ
50
3교시
공통
영어, 독일어, 불어(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 서반아어(에스파냐어)[A] 중 1개 선택
50
4교시
인문계
사회문화
15
세계사
15
국토지리
15
인문지리
15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중 1개 선택
15
자연계
물리
15
화학
15
생물
15
지구과학
15
사회문화, 세계사[38], 국토지리, 인문지리[39] 중 1개 선택
15



320

공통
체력장
20
총계


340

5.2. 1987 ~ 1992학년도


'''교시''' [E]
'''계열'''
'''시험 과목'''[40]
'''배점'''
1교시
(08:40-10:10, 90분간)
공통
국어Ⅰ(한문Ⅰ 포함)
55
국사
25
2교시
인문·자연
(10:40-12:30, 110분)
예체능
(10:40-12:10, 90분)
인문계
수학Ⅰ·Ⅱ-1[41]
55
사회Ⅰ·Ⅱ, 지리Ⅰ·Ⅱ, 세계사 중 2개 선택
20+20
자연계
수학Ⅰ·Ⅱ-2
75
사회Ⅰ, 지리Ⅰ, 세계사 중 1개 선택
20
예체능
수학Ⅰ·Ⅱ-1
55
사회Ⅰ, 지리Ⅰ, 세계사 중 1개 선택
20
3교시
(13:30-15:00, 90분)
공통
영어
60
독일어, 프랑스어, 중국어[42], 일본어, 에스파냐어, 농업, 공업, 상업, 수산업[43], 가사[44] 중 1개 선택
20
4교시
(15:30-17:10, 100분)
공통
국민윤리
25
인문계
국어Ⅱ
20
물리Ⅰ, 화학Ⅰ, 생물Ⅰ, 지구과학Ⅰ 중 1개 선택
20
자연계
물리Ⅰ·Ⅱ, 화학Ⅰ·Ⅱ, 생물Ⅰ·Ⅱ, 지구과학Ⅰ·Ⅱ 중 2개 선택[B]
20+20
예체능
음악, 미술, 체육[D] 중 1개 선택
40
물리Ⅰ, 화학Ⅰ, 생물Ⅰ, 지구과학Ⅰ중 1개 선택
20

전체 시험시간 410분 (예체능계는 370분)
320

공통
체력장[46]
20
총계


340

5.3. 1993학년도


'''교시'''
'''계열'''
'''시험 과목'''[47]
'''배점'''
1교시
공통
국어(한문上 포함)
55
국사
25
2교시
인문계
일반수학·수학Ⅰ
55
정치경제·사회문화[48], 한국지리·세계지리[49], 세계사 중 2개 선택
20+20
자연계
일반수학·수학Ⅱ
75
정치경제, 한국지리, 세계사 중 1개 선택
20
예체능
일반수학·수학Ⅰ
55
정치경제, 한국지리, 세계사 중 1개 선택
20
3교시
공통
영어
60
독일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 에스파냐어, 농업, 공업, 상업, 수산업, 가사, 정보산업 중 1개 선택
20
4교시
공통
국민윤리
25
인문계
문학·작문·문법
20
과학Ⅰ上[50], 과학Ⅰ下 [51], 과학Ⅱ上[52], 과학Ⅱ下[53] 중 1개 선택
20
자연계
물리, 화학, 생물(과학Ⅰ上 포함), 지구과학(과학Ⅰ下 포함) 중 2개 선택[B]
20+20
예체능
음악, 미술, 체육[D] 중 1개 선택
40
과학Ⅰ上, 과학Ⅰ下, 과학Ⅱ上, 과학Ⅱ下 중 1개 선택
20



320

공통
체력장[54][55]
20
총계


340

5.4. 전문대학


시험 과목은 계열 구분 없이 국어, 수학, 영어, 국사, 국민윤리 5과목이었으며, 전체 점수는 250점 만점이었다.[56]
'''교시'''
'''시험 과목'''
1교시
국어Ⅰ(한문Ⅰ 포함), 국사
2교시
수학Ⅰ·Ⅱ-1, 국민윤리
3교시
영어

6. 연도별 시험 일자


1982학년도
1981년 11월 24일
1983학년도
1982년 12월 2일
1984학년도
1983년 11월 22일
1985학년도
1984년 11월 23일
1986학년도
1985년 11월 20일
1987학년도
1986년 11월 20일
1988학년도
전기: 1987년 12월 22일
후기: 1988년 1월 28일
1989학년도
전기: 1988년 12월 16일
후기: 1989년 1월 23일
1990학년도
전기: 1989년 12월 15일
후기: 1990년 1월 22일
1991학년도
전기: 1990년 12월 18일
후기: 1991년 1월 22일
1992학년도
전기: 1991년 12월 17일
후기: 1992년 2월 10일
1993학년도
전기: 1992년 12월 22일
후기: 1993년 1월 29일

7. 기타


  • 동점자가 나올 경우 재학생이 졸업생(재수생)에 우선하며, 연소자가 연장자에 우선한다. 만일 동점자가 같은 나이일 경우 국민 윤리 점수가 높은 자가 우선하며, 국민 윤리 점수도 같을 경우 국어, 국사 순으로 나간다. 국사까지 같을 경우 동 순위로 처리한다.
  • 1991학년도 학력고사 수학이 역대 최고로 어렵게 출제[57]되어 당시 55점 만점이었던 문과 수학에서 반만 맞으면 서울대 법대를 간다는 소문도 있었다.[58] 1989학년도부터 본격적으로 난이도가 상승하는 경향을 보이던 와중에 일어난 사태였다. 서울대 의예과 커트라인이 공대 웬만한 과보다 낮은 280점대로 내려갔던 유일한 해. 당시 최고는 무기재료공학과로 298점. 단, 어렵지 않았던 다른 학년도라도, 학력고사 수학 자체의 기본 난이도가 결코 낮지 않았기 때문에 (1992, 1993학년도 제외), 이과는 75점 만점에 65점 이상, 문과는 55점 만점에 45점 이상이면 고득점 권으로 보았다.[59]
  • 학력고사 시절의 '고득점'이라고 하면 보통 340만점에서 '300점 이상'이었다. 요즘 말로 빗대면 대학 프리패스 수준. 아무리 서울대 상위학과라도 커트라인이 300점을 넘는 경우는 물리학과나 전자공학과 정도가 아닌 이상 거의 없었기 때문. 단, 92 93 제외.[60]
  • 아무리 어렵게 나온 문제라도 70년대 본고사 수준의 문제보다는 쉬웠다고 한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한 학생들은 수학 과목에서 검산을 5번이나 하고도 시간이 남아돌았다고 한다. 즉 학생들이 (요즘도 그렇지만) 학교나 학원 등에서 출제 경향을 익히는 것이 결국 입시 공부이기 때문에, 비슷한 패턴과 난이도의 문제에는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데, 듣도 보도 못한 스타일의 문제가 출제되면 학생들이 당황을 하던 것이다. 문제 자체만 놓고 보면 대학 별 본 고사 수준에는 못 미쳤다.[61]
  • 88학년도~92학년도 선지원 후시험제 시행 당시 서울대,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전북대 등의 주요 국립대와 연세대와 고려대 등 일부 상위권 대학은 제2외국어 선택이 필수였기 때문에 실업계통 과목을 선택한 수험생의 경우 지원 불가였다. 해당대학의 경우 단과대학별, 또는 인문/사회/사범 계열별, 학과별로 제2외국어 선택사항이 달랐는데, 제2외국어 선택여부가 1지망 학과외에 2,3지망 학과의 경우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거의 전 지원생들이 제2외국어를 선택했다. 여기에 더해 서강대나 성균관대, 한양대 등의 학교 역시 제2외국어 필수가 아님에도 선택하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선지원 후시험제의 특성 상 입시준비 과정에서 (자신의 성적향상을 전제로 한) 더 높은 커트라인의 상위권 학교를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 1990학년도부터 학력고사 시험지를 미래엔의 전신인 대한교과서 주식회사에서 1989년 10월부터 인쇄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대학입학 학력고사가 폐지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신설된 이후에도 현재까지 미래엔에서 인쇄를 담당하고 있다. 1990학년 이전에는 교학사에서 담당했다.
  • 첫 학력고사 세대는 1963년생들이고,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는 1974년생들이며,[62] 이들은 현재 49~61세이다.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인 1974년생이 65세를 넘기는 2039년쯤을 기점으로 학력고사 세대들이 모두 노인이 된다(만약 그때까지 노인의 기준이 65세 이상으로 유지된다면 말이다).

8. 사건사고


  • 학력고사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해인 1981년 서울대 법대에 300점 이상을 획득한 많은 학생들이 겁을 내어 지원하지 않은 덕에 학과가 미달이 나서 이른바 '배짱지원'을 한 학력고사 200점 이하인 학생 5명이 서울대 법대에 합격한 사건도 있었다.[63] 이 사람들은 면접에서 교수가 영작을 해 보라고 요구하자 '관악산에 노루가 뛰논다' 를 '관악마운틴 노루점핑(...)', '법대교수'를 '티쳐오브법대(!!!)' '너는 참아다오'를 '유 니드 노 에너지(???)' 등 충공깽급 대답을 보여 당시 교수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 중 한 명만 빼고 모두 졸업에 성공했다니 놀랄 노자. 게다가 법대 외에도 서울대 상당수 학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가히 원서 영역의 시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82학년도 학력고사 이후의 서울대 입시 요강에는 '본교 수학이 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경우 합격을 취소할 수 있다'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당시 기사
  • 1982년 1월 27일에 대학입학 학력고사에 합격했는데도 불합격한 것으로 착각한 수험생 박모 군이[64] 박 군의 이모에게 불합격했다는 전화를 걸고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가던 도중 수험생의 이모가 뒤늦게 학교 측에 박 군이 불합격인지 전화를 걸어 뒤늦게 합격 확인을 알고 이모가 순찰차에 수배를 요청, 경찰이 박 군이 타고 있는 고속버스를 추적, 고속버스에 타고 있던 박 군을 찾아 가까스로 신체검사를 마쳐 합격의 영광을 차지한 사건이 있었다. 해당 수험생은 학력 고사에서 278점을 얻고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응시, 27일 아침에 발표자 명단에 자기 이름이 빠져 있던 걸로 착각해서 부산 행 고속버스를 탔다고 한다.낙방 오인 귀향하다 경찰 도움으로 합격(1982.01.28. 중앙일보 11면 기사)[65] 졸업 후 제일은행에 입사, 부장까지 역임했다고 하니 천만다행.
  • 1992학년도 후기 대학입학 학력고사를 하루 앞둔 1992년 1월 21일 서울신학대학교에서 보관중인 학력고사 문제지 포장 박스 겉면이 뜯겨져 있는 것을 경비원이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 조사 결과 문제지가 각 교시별로 1부씩 없어진 것이 확인되었고, 이에 교육부에서는 부랴부랴 전국 각 대학에서 보관 중인 문제지를 긴급 회수하여 파기하는 한편, 1월 22일로 예정되어 있던 후기 대입 학력고사를 2월 10일로 연기했다.

이 사건으로 21일로 예정된 예비 소집을 위해 올라와 있던 수험생들은 헛걸음을 치고 되돌아가야 했고, 22일 학력고사 실시와 함께 연금 상태에서 풀려날 예정이었던 학력고사 출제 위원들은 20일을 더 붙잡혀서 문제를 재출제해야 했다. 결국 많은 수험생들 및 출제 위원들은 2월 2일~5일로 이어지는 설 연휴에도 쉬지 못하고 수험 공부 및 문제 출제에 매달려야 했고, 후기대 입시 관계자들 역시 합격자 발표 예정일인 2월 15일까지 불과 5일 안에 입학 사정을 끝마치고 합격자를 발표해야 했기에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또한 전문대학 입시도 예정된 2월 19일에서 1주일 연기되는 바람에 전문대 입시 관계자들도 불과 3일이라는 촉박한 시간 안에 입학 사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 탓에 입학관리팀들은 입학 사정이 끝날 때까지 매일 야근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많은 대학들이 편입학 시험을 취소, 연기해야 했다.
한편 이 사건의 여파로 당시 교육부 장관 윤형섭이 경질되고, 후임으로 조완규[66] 서울대학교 총장이 임명되었다.
경찰 수사 결과 범인은 당시 야간 당직을 맡고 있던 경비원으로 밝혀졌다. 해당 경비원은 평소 알고 지내던 교회 집사의 딸이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으로 이런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며, 정작 시험지는 해당 수험생에게 전달하지 않고 바로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경위는 파악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기사
이 사건을 계기로 93학년도 대입 학력고사부터는 시험지를 시험 당일 새벽에 고사장으로 이송하게 되었고, 이는 94학년도부터 시행된 수학능력시험에서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 1993학년도 학력고사에서 사전에 정답이 유출되는 입시부정이 일어났다. 1993학년도 후기 입시에서 순천향대 의대를 지원한 함 모양은 339점을 받아 최고득점을 올렸다. 그러나 고교 내신 등수가 꼴등으로 최하등급 10등급이었던 함 모양의 점수를 이상하게 여긴 입시처의 조사로 꼬리가 밟혔다. 뿐만 아니라 함 모양의 두 언니들도 같은 방법으로 문제를 유출하여 부정입학했다는 사실이 들통났다.

    함 양의 아버지는 유명 성형외과 원장으로 큰 돈을 벌어 대학교를 설립하고 재단이사장으로 있으면서 국립교육평가원장학사 김 모씨에게 거액을 주고 정답을 사전에 빼내어 세 딸을 모두 의과대학에 진학시켰다. 이 세 딸의 성적이 가관인데 첫째 딸은 이과 106명 중 104등(10등급)의 내신으로 91학년도 314점을 받고 충남대 의예과에 들어갔고, 둘째 딸은 이과 175명중 135등(7등급)의 내신으로 91학년도 309점을 받아 단국대 전체수석을 차지해 의예과에 입학했다. 셋째 딸은 이과 94명중 1학기 94등, 2학기 93등(10등급)으로 전기 입시에서 충북대 의예과를 지원하여 308점을 받았다.[67] 다른 때라면 충분한 점수였겠으나 93학년도 입시는 역대급으로 쉬웠던 터라 점수 인플레로 내신을 합산한 점수가 모자라 불합격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후기 입시에서는 무려 339점을 받는 바람에 오히려 의심을 사고 말았다.[68]

    김 모 장학사는 2심에서 징역 8년, 추징금 3억원을 선고받았고, 함씨는 부인이 저지른 짓으로 본인은 몰랐다고 주장하여 결국 함씨의 부인 한 모씨만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세 딸은 모두 입학이 취소됐다.

9. 역대 수석


'''학년도'''
'''성명'''
'''점수'''
'''출신 고교'''
'''진학 대학'''
'''졸업 이후 경력'''
1982
원희룡
332
제주제일고등학교
서울대 법학과
국회의원, 제주지사
1983
홍승면
339
고려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서울대 법학과
사법연수원 수석졸업.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1984
황덕순
332
경성고등학교
서울대 경제학과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대통령비서실 일자리수석비서관
장순욱
영신고등학교
서울대 법학과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 법무법인 LKB 변호사
송병호
김천고등학교
서울대 의예과
이비인후과 전문의[69]
1985
이미령
336
미림여자고등학교
서울대 물리학과
휴스턴 대학교 교수
1986
이준걸
332
경성고등학교
서울대 물리학과
홍익대학교 교수
오석태
숭실고등학교
서울대 경제학과
한국SC증권 이코노미스트(상무)
1987
김영용
332
동래고등학교
서울대 전자공학과
연세대학교 교수
김동균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서울대 물리학과

1988
정성태
331
충렬고등학교
서울대 물리학과
인텔 재직
이일완
서초고등학교
서울대 전자공학과
GCT Semiconductor 재직
1989
이종진
325
대신고등학교
서울대 화학공학과
S-OIL 재직
1990
양신호
333
대구고등학교
서울대 경제학과
ING(기업) 수석운용역
1991
한확
325
목포덕인고등학교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Ayla Networks 재직
1992
이학호
336
양정고등학교
서울대 물리학과
하버드 대학교 메사추세츠병원 교수
1993
민세훈
339
가락고등학교
서울대 법학과
딜로이트컨설팅 파트너컨설턴드
  • 이들은 모두 서울대에 수석입학했다. 본고사를 치르던 예비고사 시절에는 예비고사 수석과 서울대 수석입학이 다른 경우가 많았으나, 학력고사 시절에는 내신 1등급의 범위가 넓어 최상위권은 다 1등급을 받았고 체력장 역시 대부분 만점이었으며, 86~87학년도 치러진 논술[70] 역시 변별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 자연계 수석이 의대에 진학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당시에는 의대의 인기가 요즘같지 않았다. 수석들이 진학한 과를 보면 알겠지만 서울대 자연계 최상위과는 물리학과와 전자공학과였고, 의대는 중상위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서울대 한정. 연고대부터는 의대가 최상위였다.
  • 어렵다 보니 만점이 없다. 이는 예비고사도 마찬가지. 대입시험 최초의 만점자는 199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등장했다.
  • 여성수석합격자는 1985학년도 이미령씨가 유일하다. 참고 기사

10. 같이 보기



[1] 1969학년도부터 전해인 1981학년도까지 실시됐던 예비고사가 사실상 이름만 바꾼 것이다. 하단의 유래와 역사항목 참조해서 보기 바람.[2] 대대수의 1963년 3월 출생자~1975년 2월 출생자들이 봤다.[3] 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4] 건강에 별 문제가 없다면 대부분 19~20점을 받았다. 즉, 실질적인 점수 차이가 없어 사실상 비중이 매우 낮았다. 특히 고3 체육시간에는 체력장 종목을 집중 훈련시켰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몸이 약하거나 장애인 학생들인 경우 체력장 때문에 불공평한 것 아니냐라는 논란이 한 때 있었지만, 기본점수 15점을 주고, 응시 의사만 있다면 16점을 주는 식으로 무마되었다.[5] 그러니까 전문대를 제외하면 전기대학, 후기대학 2개 대학밖에는 지원을 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수능 정시와는 다른것이 수능은 가군, 나군, 다군 등 대학 세곳과 산업대/전문대 제한없이 넣을 수 있었지만, 학력고사는 무조건 많아야 두군데였다는거.[6] 최상위권 대학들과 지방거점국립대는 전기로만 모집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후기대 입시에서 합격선이 가장 높았던 곳은 문과는 성균관대 법학과, 이과는 한양대 의예과로 둘다 소수인원만 분할모집했던 곳이며, 서울대 인기학과 탈락자들도 여기 후기분할에 합격하기 어려웠다.[7] 문과는 성균관대와 한국외대가 계속 분할모집을 했던 반면에 이과는 80년대의 한양대가 분할모집을 안한 시기도, 하더라도 의예과 제외로 한 해가 많았다. 이런 경우 이과 최고 합격선은 점수는 그대로인채로 대학은 더 많이 내려간다. [8] 당시 기준으로 서울특별시, 인천직할시, 수원시, 안양시, 부천시, 의정부시, 성남시, 양주시, 이천시, 춘천시, 원주시, 강릉시, 청주시, 충주시, 대전직할시, 천안시, 서산시, 전주시, 이리시, 군산시, 광주직할시, 목포시, 여수시, 순천시, 대구직할시, 안동시, 구미시, 포항시, 부산직할시, 울산시, 마산시, 창원시, 진주시, 제주시. 총 34개 도시가 학력고사 거점도시였다. 직할시를 제외하고 도별로 나누면 경기도 7개시, 강원도 3개시, 충청북도 2개시, 충청남도 2개시, 전라북도 3개시, 전라남도 3개시, 경상북도 3개시, 경상남도 4개시, 제주도 1개시 등이있다.[9] 거점도시는 주로 비슷한 생활권끼리 권역을 나눈것으로, 예를 들어 진주시 권역이면 진주시 생할권인 사천시, 산청군, 삼천포시 등이 진주시 권역이었다.[10] 포천은 아예 의정부와 붙어 있는 동네이다. 6군단, 8사단 등 포천에 주둔하는 부대 장병들이 의정부로 외박을 오고 포천 시민들이 버스 타고 의정부역까지 가서 지하철을 탈 정도면 완벽한 의정부 생활권이다.[11] 신갈동, 흥덕동 주민들은 간혹 주말에 수원시 가서 장 보고 올 정도면 말 다 한 거다. 심지어 용인에 있는 부대에 주둔하는 장병들이 수원으로 외박을 오고, 수원에 사는 사람들이 놀이공원에 갈 때는 대부분 가까운 용인의 에버랜드로 많이 간다.[12] 철원은 의정부시 등 경기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지역이나 (버스도 춘천 가는 것보다 서울 가는 것이 더 많이 다닐 정도), 도가 강원도라는 이유로 도청 업무 등은 춘천에 가서 봐야 한다. 남북 분단만 아니었으면 철원군이 시로 승격돼 평강군, 회양군, 김화군, 이천군에서 오는 수험생들을 위해 여기도 시험 지구가 생겼을 수도 있다.[13] 화순과 광주는 차로 1시간 거리이다. 화순 사람들이 광주로 가서 장을 보고 올 정도이며, 광주광역시의 시계외 시내버스들 중에서도 배차간격이 가장 짧은게 화순가는 버스일 정도다.[14] 충청북도 옥천군, 전라북도 고창군, 경상남도 합천군, 경상북도 문경군, 울진군등. 충청북도 옥천군은 충청남도 대전시가, 전라북도 고창군은 광주직할시가, 경상남도 합천군은 대구직할시가, 경상북도 문경군은 충청북도 충주시가, 경상북도 울진군은 강원도 강릉시가 가까운 도시였다.[15] 충청남도 논산군, 경기도 평택시, 경상남도 창녕군 등. 충청남도 논산군은 충청남도 대전시와 전라북도 이리시, 경기도 평택시는 경기도 수원시와 충청남도 천안시, 경상남도 창녕군은 대구직할시와 경상남도 마산시 사이에 끼어 있었다.[16] 지금이야 교통이 매우 발전해서 매우 먼거리로 가는 게 아닌 이상 아침에 버스나 기차타고 시험장으로 갈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도로고 철도고 빈약했기 때문에...[17] 영양군, 울릉군, 완도군, 해남군, 보은군, 양구군 등.[18] 지금의 적성검사 전형을 실시하는 학교들을 생각하면 된다. 학력고사 때와는 많이 다르지만, 적성검사 시험을 보는 대학의 분위기와 흡사하다고 봐도 무방하다.[19] 금지 시켜도 있는 집 자제들이나 머리 좋은 학생들은 지하로 숨어 들어서래도 몰래 받았다. 학교에서도 받을 수 있으면 어떻게 든 받으라고 오히려 법을 어기라고(...) 부추기기도 했으니...[20] 당시 경기고등학교 등 입시명문고교 학생들은, 고등학교 교실에서 수업 받는 날보다 시내 학원에서 본고사 공부를 하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동급생끼리 얼굴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심지어 담임선생님 얼굴도 몰라, 졸업식 날에만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과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을 하는 일도 흔했다. 2010년대의 공교육 파행은 말 그대로 애교 수준. 그 당시 형식적이던 고교내신성적 반영비율이 7.30조치 이후 10%이상으로 상향됐다.[21] 이 논술시험이 종국에는 본고사제를 복원하려는 대학 측의 로비의 결과인지 교육당국의 진보적인 정책이었는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22] 토토와 매우 흡사하다. 한번 본 시험점수를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베팅을 해야했다. 누구나 최대의 배당금을 노린다. 전공적성따위 개무시는 기본. 수능으로 개편된 이후 지금까지도 눈치작전은 계속되고 있다. 원서 영역 참조.[23] 특히 이런식으로 떨어지면 멘탈이 약한 학생은 이게 트라우마가 되어 재수, 삼수해서도 시험 당일 컨디션이 흐트러진다. 전교 1등, 지금 같으면 SKY급 대학에 수시로 충분히 붙고도 남을 학생이 계속 떨어져 3수 후 후기분할모집에 광명상가급 대학을 가는 예도 흔했다. 자기보다 실력 떨어지고 나이도 어린 선배에게 존대말 해야 되는것은 덤. 거기다 광명상가급 인서울 중하위권 대학들의 경우 1980년대에는 과장좀 보태서 지방대 취급을 받을 정도로 인지도가 그다지 좋은편은 아니었다.[24] 부차적인 것으로 최대한 정확한 자신의 실력을 파악하기 위해서 모의고사를 여러 번 치게 되는데, 심한 경우 10월 한 달 동안 '배치고사'라는 이름으로 최대 10회의 시험을 치게 되어 스트레스가 심했다.[25] 대놓고 뻥점수를 기재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므로 서술형 답안 채점을 후하게 해서 지원자 모두의 점수를 올리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26] 1989학년도 포항공과대학교고려대학교의 '''발표된''' 공대 커트라인은 고려대학교쪽이 10점가까이 높게 나왔다.[27] 여러가지 이유로 비슷한 라인의 대학들에서 점수편차가 크게 날수가 있었으며, 뻥튀기 채점으로도 극복 못할정도로 점수가 크게 떨어진 대학은 '''아예 커트라인 발표를 하지 않았다.'''[28] 도미노식으로 선배 학년이 한 학년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셈이다. 이 즈음을 배경으로 하는 만화 영심이에서, 영심이의 큰오빠가 높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재수생으로 살고 있는 이유다.[29] 예비고사 마지막해[A] A B 영어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외국어까지 제1외국어로서 출제됐다. 이때는 한국의 영어교육이 미약할 때라 중학교에나 가야 ABC를 배웠던 시기였다. 그렇다보니 십중팔구의 학생들은 점수 따기 어려운 영어 대신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서반아어 등을 선택해서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큰 문제로 대두화되었다. 왜냐하면 이 당시 시대상으론(물론 지금도 별 차이는 없다만) 미국이 엄청나게 발전되었던 나라에다가(아메리칸 드림이란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캐나다, 영국)등이 엄청 잘살고 세계를 주름잡던 시기였던지라 영어를 못하면 국가망신이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학교에서도 외국어로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 네개가 쌈싸먹었고.[30] 남학생은 기술, 여학생은 가정이였다. 남학생이 가정을 선택하거나 여학생이 기술을 선택하는 건 불가능[31] 문과 기준. 이과는 그 반대.[32] 이건 81학년도~83학년도에서는 문과도 국어 II 시험을 안 치뤘고, 이과도 수학 II 시험을 안 치렀다는 흠많무한 얘기. 이는 80학년도까지는 수학 II가 본고사에서 다뤄졌기 때문이다.[33] 이는 1987년 이후 이과도 동일하다.[34] 남자는 1000m(2.5리), 여자는 800m(2리)[35] 윗몸일으키기, 100m 달리기, 멀리던지기, 오래달리기[34], 턱걸이(남)/매달리기(여) 등이 있었다.[B] A B C 물리 또는 화학이 반드시 하나 이상 포함될 것. 즉 생물-지구과학 조합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물리-화학 조합은 당연히 가능. 대다수 학생들은 물리-지학 또는 화학-생물 조합을 선택했다.[36] 당시에는 국어가 공통이 아니었다.[37] 이를테면 국어II는 20점 만점에서 객관식 14문제와 주관식 3문제(각 2점)으로 출제. 총점으로 보면 1987년 이후부터 객관식 227점, 주관식 93점.[38] 문과와 이과와 세계사 문제가 달랐다. 이때 역시도 세계사를 알아야 한국이 세계에 위대한 족적을 남길수 있다며 이과 학생들에게도 사회탐구중 세계사를 선택하길 권장했다. 그러나 이과 학생들은 역사의 발자국이고 나발이고 일단 문제가 어려워서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당연히 문과 세계사는 현 수능보다 어려웠고, 이과 세계사는 지금 수능제도의 세계사 문제랑 비슷한 수준으로 출제되었다.[39] 지금은 없어진 경제지리+세계지리의 혼합된 과목이다. 현재 교육과정의 세계지리와는 다소 이질적이다.[E] 이 시험시간은 1993학년도 학력고사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40] 4차 교육과정[41] 문과 시험지에 타원과 쌍곡선이 나온 마지막 교육과정이다.[42] 당시는 한중수교 이전(대만과 수교시절)이라서 문자는 정체자, 발음부호는 주음부호와 한어병음방안 병기[43] 농업, 공업, 상업, 수산업은 남학생 전용과목으로 여학생은 농업, 공업, 상업, 수산업 선택이 불가능. 반대로 남학생은 가사 선택이 불가능했다.[44] 가사는 여학생 전용과목으로 남학생은 가사 선택이 불가능. 반대로 여학생은 농업, 공업, 수산업, 상업 선택이 불가능했다.[D] A B 각 계열별로 시험 과목이 정해져있다. 진학하고자 하는 학과에 따라 미대면 미술과목 시험지가, 체대면 체육과목 시험지가 제공되었다. 또한 이 이론 시험때문에, 필기보다는 실기를 잘하는 예체능계열 학생들의 불만이 많았는데, 아무리 실기를 잘해도 필기시험을 못보게 되면 실기를 쬐끔 못하더라도 필기시험, 즉 이론에 대해 잘 아는 학생에게 조금 밀리는감이 있었다.[45] 학교마다 천차만별이다. 어떤 학교의 경우 5월 학교 체육대회 때 체육대회와 고3의 체력장을 동시에 했다.[46] 학력고사 당일에 하지 않고 그 이전 자신의 학교 운동장 같은 곳(주로 9~10월)[45]에서 했다. 여담으로 투포환 멀리 던지기가 있었던 마지막 체력장.[47] 5차 교육과정이지만...사실상 4차 교육과정이라 봐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이 학력고사를 마지막으로, 다음 해 본격적으로 새 교육과정, 새 대입시험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과목 일부 명칭만 바뀌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48] 과거 사회Ⅰ,Ⅱ 체제에서는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문화인류학을 심도에 따라 분류해서 Ⅰ,Ⅱ 체제로 편집한 것을 분야별로 헤쳐모여 두 과목 체제로 개편[49] 한국지리는 지리 일반에 대해서 다루던 과거의 지리Ⅰ 중에서 지리 이론 대부분과 지리Ⅱ을 구성하는 지지학 중에서 한국지리에 해당하는 부분, 세계지리는 과거의 지리Ⅰ 중 지리이론 일부분과 지리Ⅱ의 지지학 중 세계지리에 해당하는 부분의 조합이다.[50] 이전 체제에서는 생물Ⅰ에 해당[51] 이전 체제에서는 지구과학Ⅰ에 해당[52] 이전 체제에서는 물리Ⅰ에 해당[53] 이전 체제에서는 화학Ⅰ에 해당[54] 공통 체력장 종목은 50m 단거리 달리기, 윗몸일으키기, 제자리멀리뛰기, 앉아윗몸 앞으로굽히기등이 있었다. 그리고 팔굽혀펴기는 남학생과 여학생의 심사 기준 차이가 있었다. 또한, 남학생의 경우는 철봉 턱걸이, 오래 달리기 1000m, 여학생은 오래 매달리기, 오래 달리기 800m 등의 차이가 있었다.[55] 전에는 8종목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바뀌었다.[56] 전기대학, 후기대학도 떨어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의 학생들이 있어서 전문대학이라도 시험을 냈다. 그러나 사회, 과학, 실업 과목은 보지 않았다.[57] 당시 93학년도를 마지막으로 학력고사를 폐지하고 본 고사가 부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본고사 스타일로 수학 난도가 계속 상승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학교나 수험가에서 예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뜬금없이 일본 역대 본고사 문제집이 출간되기도 하고 한국일보에서는 고난도 수학 문제를 특집으로 엮어서 제공한 것이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본 시험에서는 발상 자체가 어려운 문제도 있었지만 단순한 문제조차도 어이없을 정도로 숫자 계산이 복잡하게 출제되어 시간 부족으로 더 곤란을 겪었다. 그탓에 순수 수학 전공이 아닌 공학 전공 교수가 출제(공대에서는 시험 시간에 계산기를 지참한다.)한 탓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출제 난이도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게 제기되었고, 이후 92~93학년도 수학 시험은 역대 급으로 쉽게 출제되고 만다. 물론 이미 89학년부터 수학이 이전에 비해 계속 어렵게 출제되어 어느 정도 면역된 수험생이 많기도 했다.[58] 그냥 뜬소문은 아닌 것이, 당시 서울대 법대 커트라인은 295점 수준이었으므로 45점 정도 감점이니까 수학에서 20~30점 감점 받아도 나머지 과목을 잘 보면 충분히 가능 했다.[59] 이 서술은 9과목으로 축소된 이후의 서술이다.[60] 역대 학력고사의 난이도가 가장 낮았던 시험이자 마지막 학력고사였던 1993년도는 서울대 상위학과의 커트라인이 320점 대에, 중위학과에서도 310점대로 불합격한 사례도 많았다.[61] 물론 70년대 식 본 고사도 그 출제 경향에 익숙해지면 해 볼만한 것 이었다고 한다. 결국 한국의 입시 공부란 출제 경향에의 적응기에 따라 맞춰가면(...)된단 말.[62] 빠른 생일, N수 등등 제외.[63] 학력고사 시기에는 원서를 넣을 때 학과 정원이 미달이 나면 무조건 합격이었다. 즉 운만 좋으면 자기 실력보다도 더 좋은 대학을 들어갈 수 있었단 흠좀무한 얘기.[64] 기사에 의하면 이 수험생은 부산가야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타임머신에서는 고삼생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했다.[65] 해당 기사는 MBC의 타임머신에서 재연해 방영하기도 했다.(2003.11.09 95회 방영, '이상한 수배자' 에피소드)[66]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교수(동물학)를 역임했으며 한국일보 타임-라이프에서 1980년(개정판은 1991년)에 출판했던 "세계의 야생동물(오리지널 타임라이프판 제목은 Wild,Wild World of Animals)" 한국어판의 자문을 맡기도 했었다. 현재는 서울대학교의 명예교수.[67] 어차피 정답을 모두 알고 있으므로 만점을 받을 수도 있지만, 지나친 고득점은 의심을 살 수 있으므로 예년 기준으로 안정권인 점수만 받으면 되었다.[68] 후기는 대부분 전기에 떨어진 학생들이 응시하고 보통 명문대는 분할 모집을 하지 않고 전기 모집만 하기 때문에 후기 입시에서 이런 고득점자가 나오는 것 자체도 드문 일인 데다가 내신까지 최하등급이었으니 의심을 살 만했다.[69] 탤런트 송윤아의 큰 오빠[70] 서울대 논술 제목은 86학년도 '현대인과 일의 보람', 87학년도 '독서가 우리에게 주는 혜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