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주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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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주 공국 국장
오늘날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 위치했던 조그마한 공국. 수도는 오랑주였다. 바로 남쪽에 교황령이었던 아비뇽이 있다.
지중해에 가까운 남프랑스에 위치한 조그마한 공국이지만 저 멀리 북쪽에 있는 '''네덜란드'''와 연관이 깊은 곳인데 바로 현 네덜란드의 왕가인 오라녜나사우 가문이 이곳을 가문명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로 '오랑주(Orange)', 네덜란드어로 '오라녜(Oranje)'라고 하는 이곳[1]116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백작령 신분이던 오랑주와 그 일대를 공국으로 승격시키면서 오라녜 공국이 되었다. 처음에는 보(Baux) 가문이 다스리던 이곳은 14세기 후반 부르고뉴 가문의 방계 가문인 샬롱아를레(Châlon-Arlay) 가문에게 작위가 넘어갔으며 그 후 16세기 초까지 샬롱아를레 가문이 오랑주 공국을 다스렸다.
오랑주 공국이 네덜란드의 왕가 오라녜나사우 가문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515년인데 독일의 귀족 가문 나사우 가문의 일원인 헨드리크 3세(Hendrik III van Nassau)[2]가 오랑주 공작 필리베르 드 살롱(Philibert de Chalon)의 여동생인 클로드 드 샬롱(Claude de Châlon)[3]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 그 시초이다. 헨드리크와 클로드는 아들 르네(René de Châlon)[4]를 낳았는데 1530년 샬롱오랑주 가문으로서는 마지막 오랑주 공작이던 그의 외사촌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오랑주 공국을 상속받으면서 나사우 가문이 오랑주까지 다스리게 되었다.
브레다 백작이자 오랑주 공작 르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영지였던 저지대의 17개주 중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헬러의 4개주 총독을 동시에 맡을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1544년 카를 5세와 프랑스와의 전쟁 중 카를 5세 편에 종군하던 르네는 불행하게도 생디지에 공략 와중에 전사하고 말았다. 불과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르네는 결혼은 했으나 자식이 없었고 르네가 유언으로 자신의 영지를 자신의 사촌에게 물려줄 것을 남겼다. 결국 르네의 작위와 영지는 르네의 사촌인 빌헬름 폰 나사우딜렌부르크(Wilhelm von Nassau-Dillenburg)가 상속받게 되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네덜란드의 국부 빌럼 1세이다.
빌헬름 폰 나사우딜렌부르크, 즉 빌럼 1세가 오랑주 공국을 물려받으면서 그의 성씨는 원래 가문인 나사우에 물려받은 영지인 오랑주(오라녜)가 합쳐지면서 오라녜나사우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후 빌럼 1세는 네덜란드 독립전쟁 때 네덜란드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이후 그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네덜란드 공화국의 국가원수, 그 후 네덜란드 왕국의 국왕직을 맡으면서 오라녜나사우는 네덜란드 왕국의 왕가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상징색이 오렌지색인 것도 그의 가문 이름과 오렌지색을 가리키는 네덜란드어 '오라녜'와 똑같았기 때문에 오라녜나사우 가문이 가문의 상징색으로 오렌지색을 쓰면서 이렇게 된 것이다.
한편 오랑주 공국은 빌럼 1세의 후손인 네덜란드 공화국의 국가원수들이 오랑주 공작의 자격으로 계속해서 통치했으나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의 결과 프랑스로 넘어가게 되었다.
[1] 다만 알아둬야 할 것은 '오랑주'는 '''과일 오렌지와는 이름의 연관이 전혀 없는 곳이다.''' 오랑주는 고대 로마인들이 켈트 신화의 물의 신의 이름을 따 '아라우시오(Arausio)'라는 이름의 도시를 건설한 것이 시초로 라틴어 '아라우시오'가 프랑스어 '오랑주'로 자리잡은 것이다. 당연하지만 도시를 건설할 당시 과일 오렌지는 고대 로마에 알려지지도 않은 상황이었다.[2] 네덜란드어. 프랑스어로는 Henri III de Nassau. 브레다 백작이었기 때문에 헨드리크 3세의 가문은 나사우브레다(Nassau-Breda) 가문이라고도 한다.[3]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로는 Claudia van Châlon.[4]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로는 René van Châlon. 원래라면 아버지의 성인 나사우브레다를 물려받는 것이 원칙이나 르네 본인은 어머니의 성인 샬롱오랑주를 더 자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