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독립전쟁
네덜란드어 Tachtigjarige Oorlog
스페인어 Guerra de los Ochenta Años
영어 Dutch Revolt / 80 Years'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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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부르고뉴 공국의 지배에 이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스페인 왕국에 귀속되었던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반란/독립전쟁. 1568 ~ 1648년간 일어나서 80년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전쟁의 후반부는 옆 동네의 30년 전쟁과 긴밀하게 엮여 종종 30년 전쟁의 일부로 취급받기도 한다.
북부의 홀란트 - 제일란트 - 프리지아 일대는 칼빈파 개신교도들의 주도로 독립하였으나 남네덜란드 일대는 여전히 스페인의 지배 하에 남았다가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이후 오스트리아의 지배와 통합 네덜란드 왕국 시기를 거쳐 1830년 벨기에 혁명으로 떨어져 나간다.
교과서 등에는 슈말칼덴 전쟁, 위그노 전쟁과 함께 구교와 신교 간의 갈등 중 하나로만 제시되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었다. 전쟁은 1기와 2기로 나뉘는데, 1기인 1581년에 네덜란드 공화국이 세워진다. 두 단계 사이에는 안트베르펜 조약으로 인한 10년의 휴전기가 성립되었다. (1609 ~ 1619년)
네덜란드는 그 휴전기에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며 제국주의적 식민제국을 세웠고,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1619년에 30년 전쟁의 일환으로 재개된 2차 전쟁도 이겨낸 네덜란드는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완전히 독립을 인정받았고 17세기 유럽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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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지명으로서의 네덜란드(혹은 저지대)는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즉 베네룩스 지역을 통칭하는 지리적 용어로 현재 프랑스의 국경지대에 있는 릴까지 포함하여 총 17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네덜란드 지역은 프랑크 왕국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의 하로트링겐 공국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내 하로트링겐 공국은 브라반트 등 여러 제후국으로 분열되며 사라지고 말았다. 한때 브라반트 공국이 네덜란드의 패권을 잡기도 했으나 네덜란드 각 제후국은 대체로 특정 가문에게 오랜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네덜란드 17개 주로 이어졌다.
15세기 이후 부르고뉴 공국이 네덜란드 남부 지방을 통치하게 된다. 그런데 부르고뉴 공국의 남자 자손이 끊겼고 유일한 후계자는 여성인 마리 드 부르고뉴였다. 부르고뉴와 네덜란드를 둘러싸고 프랑스가 눈독을 들였으나 마리는 프랑스를 뿌리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태자인 "마지막 기사(the last knight)" 막시밀리안 1세에게 도움을 청하여 그와 결혼하면서 저지대의 땅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에 이어 부르고뉴 공작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1519년)가 된 카를 5세는 네덜란드 남부에 있는 헨트 출생이었다. 최초의 네덜란드 출신 황제라는 점 때문에 처음에 카를 5세는 지역 주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나 이러한 기대는 곧 무참하게 꺾이고 말았다. 프랑스, 이탈리아, 교황청, 오스만 제국, 독일 개신교 세력 등 각지에서 수많은 적들과 동시다발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카를 5세는 막대한 전비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자신의 직할 영지에 대폭적인 증세를 실시했다. 카를 5세의 명목상의 영토는 엄청났지만 그가 실제로 과세를 할 권한이 있는 직할 영지는 의외로 그리 넓지 않았는데, 카스티야와 네덜란드가 거의 다였다. 가문의 본령인 오스트리아와 그 주변의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크라인, 티롤, 슈바벤, 알자스는 1521년부터 동생 페르디난트 1세의 영지였다. 1526년 보헤미아, 실레시아, 크로아티아, 서헝가리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떨어졌지만 이 역시 페르디난트 1세의 영지였다. 옛 부르고뉴 공국 중 유일하게 카를 5세 수중에 있었던 프랑슈콩테는 프랑스 영토 한가운데 있어서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했고 아라곤과 이탈리아에서도 카를 5세는 과세권이 없었다. 결국 카를 5세에게 집중적인 수탈을 당했던 곳은 카스티야와 네덜란드였다.
유례없이 가혹한 징세에 시달리게 된 네덜란드인들은 1539년 마침내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카를 5세는 원수지간이었던 프랑수아 1세에게 양해까지 구해가며 프랑스 영토를 가로질러 고향의 폭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한편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발표되며 시작된 종교개혁의 물결은 네덜란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자유와 관용을 중시했던 네덜란드에서 개신교는 빠르게 확산되었는데 특히 북부 지역에 칼뱅파 개신교가 널리 스며들었다. 그러자 카를 5세는 1550년 4월 29일 '피의 칙령(Bloedplakkaat)'을 내려 개신교 신자를 모조리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이 칙령이 현재 네덜란드어로 남아있는 것은 그의 직할 영지 중 네덜란드에서 집중적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이었다.[3]
1556년 카를 5세가 퇴위한 후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는 카를의 장남이자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상속되었다. 카를 5세는 가혹한 통치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네덜란드를 자신의 고향으로 여겼다. 카를 5세의 모국어는 플람스어와 벨기에식 프랑스어였고 거의 평생 벨기에식 프랑스어로 의사소통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태어나서 골수 가톨릭으로 자라난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를 식민지 취급했고 즉위하자마자 아버지보다 더욱 가혹한 과세와 종교 탄압 정책을 실시했다.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우선 자신의 이복 누이인 마르게리타(Margherita di Parma, 1522~1586)를 네덜란드 섭정에 임명하였고 성직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주교의 숫자를 늘리는 등, 네덜란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일련의 개혁을 시도한다. 문제는 도시 시민들 입장에선 이는 고유한 자치권에 대한 침해이고, 귀족들의 입장에서도 사제에게 높은 자질이 요구되는 등 '왕의 폭정'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알바 공과 같은 스페인 파견 총독들의 실정과 전쟁으로 인한 수탈, 거기에 네덜란드에 주둔한 스페인 군대의 약탈 등으로 반발이 거세진다. 빌럼 판 오라녜를 위시로 한 귀족들은 일련의 자유를 요구했으나 펠리페 2세는 요지부동이었다.
펠리페 2세의 억압적인 통치가 이어지자 처음에 네덜란드의 지도층인 에흐몬트, 흄, 오라녀 공 빌럼 등은 펠리페 2세에게 억압적인 통치를 완화해줄 것을 지속적으로 탄원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네덜란드인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펠리페 2세에 대항한 반란의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반란을 경고하는 네덜란드 귀족들의 청원을 무시했다.
1566년 마침내 개신교도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칼뱅주의자들은 성당에 있는 성인들의 성상을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성당과 성상 등을 파괴하는 성상파괴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최남부 혼트스호터[4] 에서 최북부 흐로닝언까지 저지대의 성당들이 모두 파괴되었다.[5]
성상 파괴 운동을 반역으로 간주한 펠리페 2세는 악명높은 알바 공(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톨레도)이 지휘하는 대군을 파견하여 네덜란드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알바 공은 네덜란드의 법과 의회를 완전히 무시하고 철권통치를 실시했다. 알바 공은 "피의 법정"이라 불린 특별 종교재판을 열어 수천명을 처형했다. 네덜란드의 지도자였던 에흐몬트, 호르너 같은 귀족들까지 모두 사형당했다. 이들은 네덜란드의 지도자였지만 펠리페 2세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스페인의 강압 통치를 완화해보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알바 공은 이들이 개신교도들에게 관용을 배풀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또다른 귀족 출신 지도자인 오라녀 공 빌럼은 알바 공의 탄압을 피해 아내의 친정인 작센으로 피신했다가 1568년 군대를 이끌고 네덜란드로 귀환했다. 이로서 본격적인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시작된다. 오라녀 공 빌럼이 이끄는 네덜란드군은 1568년 5월23일 헤일리헤를레 전투에서 처음으로 스페인군에게 대승을 거두었고 빌럼은 네덜란드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때를 기점으로 홀란트와 제일란트 일대는 사실상 스페인의 지배가 무력화되었다. 그러나 이내 빌럼 공의 재산이 바닥나게 되었고 알바 군에게 패배한 뒤 빌럼의 군대는 해산되었다. 스페인 역시 재정이 고갈되고 있었기에 네덜란드 전쟁은 소강기에 접어들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등으로 국고가 바닥난 스페인 궁정은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70년 네덜란드에 더욱 가혹한 과세를 부과했다. 네덜란드 의회가 이를 거부했으나 알바 공은 이를 무시하고 증세를 강행했다. 이에 네덜란드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가혹한 세금을 피해 외국으로 도망가는 이들이 늘어났다.
빌럼 공은 1572년 다시 스페인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켰고 이에 네덜란드는 다시 반란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빌럼은 델프트와 홀란트를 탈환하였다. 빌럼 공의 주도로 네덜란드의 지도자들이 회동하였고, 홀란트와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프리슬란트 4개 주는 연합하여 스페인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였고, 다른 북부주들도 여기에 동참했다. 네덜란드의 상황이 악화 일로로 치닫자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을 해임하고 레퀴상스를 총독으로 임명했다(1573년). 레퀴상스는 전임자에 비해 유화적인 정책을 폈다.
그러나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해외에서 여러 전쟁을 벌이다가 1575년 또다시 파산하고 말았다. 이에 스페인 궁정은 군대에 급료를 지불하지 못했고 이에 네덜란드에 주둔하고 있던 스페인군은 1576년 네덜란드 각지를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특히 악명 높은 "안트베르펀 약탈"이 발생하자 많은 네덜란드인들이 독립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남부 벨기에 지방의 가톨릭 교도들도 스페인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느니 반군에 가담하기로 했다. 1576년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을 축출하기 위해 네덜란드 북부와 남부가 서로간의 종교의 차이를 불문하고 협력하기로 하는 '''겐트(헨트) 협약'''이 체결되었다. (1576년 11월 8일)
신대륙에서 들어온 금은으로 곧바로 재정을 확충한 스페인은 독실한 가톨릭교도이자 강경진압파였던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를 사령관으로 한 진압군을 파견하였고 1578년 1월 31일에 벌어진 젬블루 전투에서 2천여명의 스페인 기병대가 2만에 달하는 네덜란드 군대를 습격하여 1만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에노, 아르투아 등 남부의 가톨릭 주들은 겐트 평화조약을 파기한 후 아라스 동맹을 결성하여 스페인에 충성할 것을 결의하였다(1579년). 이에 반해 북부의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흐로닝언 4개 주는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여 스페인 및 아라스 동맹에 대항할 것을 결의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반트, 플란데런 등 6개 주가 추가로 위트레흐트 동맹에 참가하여 총 10개 주가 스페인에 대항하게 되었다.
위트레흐트 동맹의 네덜란드는 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1세를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엘리자베스는 이에 회의적이었고 엘리자베스의 대안으로 네덜란드는 앙주 공작 프랑수아를 국왕으로 추대했다. 프랑수아는 국왕 추대를 수락하는 조건으로 네덜란드가 스페인에게서 완전 독립을 선언할 것을 요구했고 어차피 스페인에 충성할 생각이 없던 네덜란드는 이를 받아들여 1581년 7월 26일 헤이그에서 국가원수(Stadtholder) 빌럼 판 오라녀가 주축이 되어 네덜란드 지역의 종교적 자유의 선언과 동시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인 프랑수아를 국왕으로 추대한다는 것에 반대의 움직임이 거셌으며 설상가상으로 스페인군 사령관 파르네세의 맹공으로 인해 네덜란드 측이 크게 밀리게 되었다. 플란데런과 브라반트 절반을 빼앗기고 수도였던 안트베르펀까지 함락당하자 국왕 프랑수아는 네덜란드를 떠났으며 지도자였던 빌럼은 1584년 스페인의 자객 가톨릭 신자 발타자르 제라르(Balthazar Gerard)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위기에 몰린 네덜란드는 다시 한번 엘리자베스를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엘리자베스는 네덜란드 측을 지원만 해줬을 뿐 이를 거절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네덜란드는 국왕이 존재하는 왕국이 아니라 국가원수가 다스리는 공화국 체제로 가게되었다. 1587년 빌럼의 셋째아들 마우리츠 판 나사우가 20살의 나이로 군사령관 직책에 올라 네덜란드의 지도자가 되면서 네덜란드 7개주 연방공화국(Republiek der Zeven Verenigde Nederlanden), 즉 네덜란드 공화국이 출범하게 된다.
마우리츠가 지도자가 될 당시의 네덜란드는 스페인 군의 공세로 고작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프리슬란트의 4개 주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마우리츠는 스페인이 영국 및 프랑스와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 네덜란드에 제대로 신경쓰지 못하는 사이 차근차근 영토를 되찾기 시작했다. 마우리츠의 노력으로 네덜란드는 스페인에게 빼앗긴 헬러, 흐로닝언, 오버레이설의 3개 주와 브라반트의 절반을 되찾았다. 또한 오랜 전쟁으로 인해 안트베르펀을 위시로 한 플란데런 일대가 몰락하고 암스테르담을 위시로 한 홀란트 지역이 경제적으로 번성하면서 네덜란드는 전성기로 접어들게 된다.
전성기로 접어든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 하에 남아있는 남부 지역을 되찾아야 하는가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고 1600년 플란데런을 마지막으로 찔러본 후 남부 지역에 대한 공세를 사실상 포기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네덜란드는 림뷔르흐 일대를 제외하면 현재의 국경과 대략 일치하는 국경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브뤼셀 등 스페인령 벨기에에서 개신교가, 네덜란드에선 가톨릭 신자가 많았으나 이 과정에서 개신교 신자는 네덜란드로[6] , 가톨릭 신자는 스페인령 벨기에로 대거 이동하였다.
계속되는 전쟁에 스페인은 경제적 부담이 막중했고 네덜란드 역시 전쟁에 지쳤기는 마찬가지라 1609년 안트베르펀에서 양국은 12년간의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12년의 평화 기간 동안 네덜란드는 전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등 빠르게 발전하면서 경제적 문화적 전성기를 향해 달려갔다. 12년의 휴전이 끝나기도 전인 1619년, 이미 1618년부터 재개된 30년 전쟁의 여파로 스페인과의 전쟁이 재개되었으나 이미 스페인은 전성기에서 내려오던 상황이었고 네덜란드는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던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스페인은 30년 전쟁으로 인해 위그노 전쟁의 혼란을 끝내고 부활을 선언한 프랑스와도 전쟁을 치뤄야 할 판이었다. 다만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스페인이 그냥 물러선 것은 아니었다. 1659년의 피레네 조약 이전까지는 아직 시글로 데 오로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황금세기, 스페인 패권)가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스페인은 강했다.
1620년경부터 총공세에 돌입한 스페인 군대는 벨기에 일대의 네덜란드 군을 격파하고 1624년 8월부터 브레다를 포위, 이듬해인 1625년 6월에 도시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화가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작품인 브레다의 항복이 이 사건을 묘사한 그림이다.
하지만 상승세던 스페인 군대는 현재 네덜란드 동부의 도시인 그론로 포위전 (1627년)에서 패하였다. 게다가 네덜란드의 서인도 함대는 쿠바 인근에서 벌어진 마탄자스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고 막대한 보물을 싣고 있던 선박을 나포하는 쾌거를 올렸다. (1628년)
1631년에는 9.12-9.13에 걸쳐 벌어진 슬라크 해전(?)에서는 스페인군 5,500명이 안트베르펀에서 나룻배 100척에 탑승해 로테르담 남쪽의 구레-오버플라케 섬에 상륙하려 했으나 네덜란드 나룻배 40척이 이를 차단했고, 해전에서 밀린 스페인군은 간신히 해안에 상륙했지만 그곳엔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용병 연대(2천)명과 네덜란드 농민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스페인군 4천이 포획되었다.
1635년부터 30년 전쟁의 신교 측에 프랑스가 직접 참전하자 대세는 결정되었다. 1639년의 둔스 해전에서 네덜란드 함대는 됭케르크에 상륙하려던 스페인 아르마다를 격파하였고,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네덜란드 내륙의 스페인 군대는 남쪽으로 퇴각하였다.
다만 1618년~1648년 포르투갈령 브라질(이베리아 연합)의 바이아와 페르남부쿠를 점거하였으나 실패하고, 1646년에 스페인령 필리핀을 빼앗으려던 네덜란드 함대는 2번에 걸친 해전에서의 패배로 필리핀에서 철수하였다.
스페인은 대세를 거스르지 못했고 결국 1646년에 네덜란드와의 협상 테이블에 끌려나왔다. 1648년에 체결된 뮌스터 조약으로 북부 7개 주와 브라반트의 절반은 '''네덜란드 공화국'''으로서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의 베스트팔렌 조약은 네덜란드를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켜 주었다.
장장 80년 동안 원조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인 서구 세계 최강국과의 전쟁 끝에 얻어낸 독립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공화국은 남부 네덜란드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해야 했으며 결국 이를 계기로 독립국을 세운 북부(네덜란드)(네덜란드 공화국)와 스페인의 지배가 유지된 남부(벨기에 + 룩셈부르크)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나뉘게 되었다.
한편 종교적으로 불관용적이지만 "잘나가던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살던 유대인과 이슬람 계열의 주민들이 종교재판소 등에 의해 이교도로 몰려 재산을 빼앗기고 학살당하는 등 핍박을 당하자 그나마 자유로운 분위기의 네덜란드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에겐 네덜란드인들이 종파주의를 한 발 물러나게 할 정도의 기술과 노하우가 있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오랜기간 대부업을 하여 귀금속 가공 기술과 금융업에 대한 노하우가 많았고, 이는 네덜란드의 해운업 발전과 맞물려 무역업을 크게 발전시키고 초기 자본주의 형성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이 네덜란드도 독립 이후엔 종교적으로 굉장히 불관용적이었다.(...) 종교의 자유란 개신교 신자의 자유일 뿐이었고, 가톨릭 신자에게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가톨릭은 1581년에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1848년에서야 네덜란드 헌법에는 근대적 의미의 종교적 자유가 명시되었다. 그리고 가톨릭이 해금된 건 1853년부터다. 물론 가톨릭 신자들이 다수이던 시절에도 네덜란드는 개신교에 비교적 관용적인 지역이었고, 따라서 장기간에 걸쳐 개신교화가 진행된 이후에도 가톨릭에 비교적 관용적인 지역으로 있을 수 있었다. 비록 완벽하게 개개인 단위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지는 않았을지언정, 네덜란드 사회에는 '가톨릭 공동체'와 '유대교 공동체' 등이 존재한다는 게 사회적으로는 묵인되어 있었고 당대 유럽의 종파주의 국가들보다는 '그나마' 관용적인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대륙의 귀금속 광산에 빨대를 꽂은 스페인과 수십년을 싸우면서도 네덜란드의 경제는 지속적으로 발전했는데, 어업과 상업은 물론 금융업도 큰 지분을 차지했다. 스페인이 몇 번이고 파산을 선언하는 동안(=빚 안 갚겠다. 불만 있으면 우리 스페인군에게 항의하시오),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은행에 예금되었던 스페인(!)의 예산조차 건드리지 않는 등 금융업의 생명인 신용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어 Guerra de los Ochenta Años
영어 Dutch Revolt / 80 Years'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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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부르고뉴 공국의 지배에 이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스페인 왕국에 귀속되었던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반란/독립전쟁. 1568 ~ 1648년간 일어나서 80년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전쟁의 후반부는 옆 동네의 30년 전쟁과 긴밀하게 엮여 종종 30년 전쟁의 일부로 취급받기도 한다.
북부의 홀란트 - 제일란트 - 프리지아 일대는 칼빈파 개신교도들의 주도로 독립하였으나 남네덜란드 일대는 여전히 스페인의 지배 하에 남았다가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이후 오스트리아의 지배와 통합 네덜란드 왕국 시기를 거쳐 1830년 벨기에 혁명으로 떨어져 나간다.
교과서 등에는 슈말칼덴 전쟁, 위그노 전쟁과 함께 구교와 신교 간의 갈등 중 하나로만 제시되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었다. 전쟁은 1기와 2기로 나뉘는데, 1기인 1581년에 네덜란드 공화국이 세워진다. 두 단계 사이에는 안트베르펜 조약으로 인한 10년의 휴전기가 성립되었다. (1609 ~ 1619년)
네덜란드는 그 휴전기에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며 제국주의적 식민제국을 세웠고,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1619년에 30년 전쟁의 일환으로 재개된 2차 전쟁도 이겨낸 네덜란드는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완전히 독립을 인정받았고 17세기 유럽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2.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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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지명으로서의 네덜란드(혹은 저지대)는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즉 베네룩스 지역을 통칭하는 지리적 용어로 현재 프랑스의 국경지대에 있는 릴까지 포함하여 총 17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네덜란드 지역은 프랑크 왕국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의 하로트링겐 공국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내 하로트링겐 공국은 브라반트 등 여러 제후국으로 분열되며 사라지고 말았다. 한때 브라반트 공국이 네덜란드의 패권을 잡기도 했으나 네덜란드 각 제후국은 대체로 특정 가문에게 오랜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네덜란드 17개 주로 이어졌다.
15세기 이후 부르고뉴 공국이 네덜란드 남부 지방을 통치하게 된다. 그런데 부르고뉴 공국의 남자 자손이 끊겼고 유일한 후계자는 여성인 마리 드 부르고뉴였다. 부르고뉴와 네덜란드를 둘러싸고 프랑스가 눈독을 들였으나 마리는 프랑스를 뿌리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태자인 "마지막 기사(the last knight)" 막시밀리안 1세에게 도움을 청하여 그와 결혼하면서 저지대의 땅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에 이어 부르고뉴 공작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1519년)가 된 카를 5세는 네덜란드 남부에 있는 헨트 출생이었다. 최초의 네덜란드 출신 황제라는 점 때문에 처음에 카를 5세는 지역 주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나 이러한 기대는 곧 무참하게 꺾이고 말았다. 프랑스, 이탈리아, 교황청, 오스만 제국, 독일 개신교 세력 등 각지에서 수많은 적들과 동시다발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카를 5세는 막대한 전비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자신의 직할 영지에 대폭적인 증세를 실시했다. 카를 5세의 명목상의 영토는 엄청났지만 그가 실제로 과세를 할 권한이 있는 직할 영지는 의외로 그리 넓지 않았는데, 카스티야와 네덜란드가 거의 다였다. 가문의 본령인 오스트리아와 그 주변의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크라인, 티롤, 슈바벤, 알자스는 1521년부터 동생 페르디난트 1세의 영지였다. 1526년 보헤미아, 실레시아, 크로아티아, 서헝가리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떨어졌지만 이 역시 페르디난트 1세의 영지였다. 옛 부르고뉴 공국 중 유일하게 카를 5세 수중에 있었던 프랑슈콩테는 프랑스 영토 한가운데 있어서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했고 아라곤과 이탈리아에서도 카를 5세는 과세권이 없었다. 결국 카를 5세에게 집중적인 수탈을 당했던 곳은 카스티야와 네덜란드였다.
유례없이 가혹한 징세에 시달리게 된 네덜란드인들은 1539년 마침내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카를 5세는 원수지간이었던 프랑수아 1세에게 양해까지 구해가며 프랑스 영토를 가로질러 고향의 폭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한편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발표되며 시작된 종교개혁의 물결은 네덜란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자유와 관용을 중시했던 네덜란드에서 개신교는 빠르게 확산되었는데 특히 북부 지역에 칼뱅파 개신교가 널리 스며들었다. 그러자 카를 5세는 1550년 4월 29일 '피의 칙령(Bloedplakkaat)'을 내려 개신교 신자를 모조리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이 칙령이 현재 네덜란드어로 남아있는 것은 그의 직할 영지 중 네덜란드에서 집중적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이었다.[3]
1556년 카를 5세가 퇴위한 후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는 카를의 장남이자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상속되었다. 카를 5세는 가혹한 통치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네덜란드를 자신의 고향으로 여겼다. 카를 5세의 모국어는 플람스어와 벨기에식 프랑스어였고 거의 평생 벨기에식 프랑스어로 의사소통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태어나서 골수 가톨릭으로 자라난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를 식민지 취급했고 즉위하자마자 아버지보다 더욱 가혹한 과세와 종교 탄압 정책을 실시했다.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우선 자신의 이복 누이인 마르게리타(Margherita di Parma, 1522~1586)를 네덜란드 섭정에 임명하였고 성직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주교의 숫자를 늘리는 등, 네덜란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일련의 개혁을 시도한다. 문제는 도시 시민들 입장에선 이는 고유한 자치권에 대한 침해이고, 귀족들의 입장에서도 사제에게 높은 자질이 요구되는 등 '왕의 폭정'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알바 공과 같은 스페인 파견 총독들의 실정과 전쟁으로 인한 수탈, 거기에 네덜란드에 주둔한 스페인 군대의 약탈 등으로 반발이 거세진다. 빌럼 판 오라녜를 위시로 한 귀족들은 일련의 자유를 요구했으나 펠리페 2세는 요지부동이었다.
3. 독립 전쟁
3.1. 1기 (1566 ~ 1609년)
펠리페 2세의 억압적인 통치가 이어지자 처음에 네덜란드의 지도층인 에흐몬트, 흄, 오라녀 공 빌럼 등은 펠리페 2세에게 억압적인 통치를 완화해줄 것을 지속적으로 탄원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네덜란드인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펠리페 2세에 대항한 반란의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반란을 경고하는 네덜란드 귀족들의 청원을 무시했다.
1566년 마침내 개신교도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칼뱅주의자들은 성당에 있는 성인들의 성상을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성당과 성상 등을 파괴하는 성상파괴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최남부 혼트스호터[4] 에서 최북부 흐로닝언까지 저지대의 성당들이 모두 파괴되었다.[5]
성상 파괴 운동을 반역으로 간주한 펠리페 2세는 악명높은 알바 공(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톨레도)이 지휘하는 대군을 파견하여 네덜란드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알바 공은 네덜란드의 법과 의회를 완전히 무시하고 철권통치를 실시했다. 알바 공은 "피의 법정"이라 불린 특별 종교재판을 열어 수천명을 처형했다. 네덜란드의 지도자였던 에흐몬트, 호르너 같은 귀족들까지 모두 사형당했다. 이들은 네덜란드의 지도자였지만 펠리페 2세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스페인의 강압 통치를 완화해보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알바 공은 이들이 개신교도들에게 관용을 배풀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또다른 귀족 출신 지도자인 오라녀 공 빌럼은 알바 공의 탄압을 피해 아내의 친정인 작센으로 피신했다가 1568년 군대를 이끌고 네덜란드로 귀환했다. 이로서 본격적인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시작된다. 오라녀 공 빌럼이 이끄는 네덜란드군은 1568년 5월23일 헤일리헤를레 전투에서 처음으로 스페인군에게 대승을 거두었고 빌럼은 네덜란드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때를 기점으로 홀란트와 제일란트 일대는 사실상 스페인의 지배가 무력화되었다. 그러나 이내 빌럼 공의 재산이 바닥나게 되었고 알바 군에게 패배한 뒤 빌럼의 군대는 해산되었다. 스페인 역시 재정이 고갈되고 있었기에 네덜란드 전쟁은 소강기에 접어들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등으로 국고가 바닥난 스페인 궁정은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70년 네덜란드에 더욱 가혹한 과세를 부과했다. 네덜란드 의회가 이를 거부했으나 알바 공은 이를 무시하고 증세를 강행했다. 이에 네덜란드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가혹한 세금을 피해 외국으로 도망가는 이들이 늘어났다.
빌럼 공은 1572년 다시 스페인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켰고 이에 네덜란드는 다시 반란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빌럼은 델프트와 홀란트를 탈환하였다. 빌럼 공의 주도로 네덜란드의 지도자들이 회동하였고, 홀란트와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프리슬란트 4개 주는 연합하여 스페인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였고, 다른 북부주들도 여기에 동참했다. 네덜란드의 상황이 악화 일로로 치닫자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을 해임하고 레퀴상스를 총독으로 임명했다(1573년). 레퀴상스는 전임자에 비해 유화적인 정책을 폈다.
그러나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해외에서 여러 전쟁을 벌이다가 1575년 또다시 파산하고 말았다. 이에 스페인 궁정은 군대에 급료를 지불하지 못했고 이에 네덜란드에 주둔하고 있던 스페인군은 1576년 네덜란드 각지를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특히 악명 높은 "안트베르펀 약탈"이 발생하자 많은 네덜란드인들이 독립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남부 벨기에 지방의 가톨릭 교도들도 스페인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느니 반군에 가담하기로 했다. 1576년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을 축출하기 위해 네덜란드 북부와 남부가 서로간의 종교의 차이를 불문하고 협력하기로 하는 '''겐트(헨트) 협약'''이 체결되었다. (1576년 11월 8일)
신대륙에서 들어온 금은으로 곧바로 재정을 확충한 스페인은 독실한 가톨릭교도이자 강경진압파였던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를 사령관으로 한 진압군을 파견하였고 1578년 1월 31일에 벌어진 젬블루 전투에서 2천여명의 스페인 기병대가 2만에 달하는 네덜란드 군대를 습격하여 1만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에노, 아르투아 등 남부의 가톨릭 주들은 겐트 평화조약을 파기한 후 아라스 동맹을 결성하여 스페인에 충성할 것을 결의하였다(1579년). 이에 반해 북부의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흐로닝언 4개 주는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여 스페인 및 아라스 동맹에 대항할 것을 결의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반트, 플란데런 등 6개 주가 추가로 위트레흐트 동맹에 참가하여 총 10개 주가 스페인에 대항하게 되었다.
위트레흐트 동맹의 네덜란드는 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1세를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엘리자베스는 이에 회의적이었고 엘리자베스의 대안으로 네덜란드는 앙주 공작 프랑수아를 국왕으로 추대했다. 프랑수아는 국왕 추대를 수락하는 조건으로 네덜란드가 스페인에게서 완전 독립을 선언할 것을 요구했고 어차피 스페인에 충성할 생각이 없던 네덜란드는 이를 받아들여 1581년 7월 26일 헤이그에서 국가원수(Stadtholder) 빌럼 판 오라녀가 주축이 되어 네덜란드 지역의 종교적 자유의 선언과 동시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인 프랑수아를 국왕으로 추대한다는 것에 반대의 움직임이 거셌으며 설상가상으로 스페인군 사령관 파르네세의 맹공으로 인해 네덜란드 측이 크게 밀리게 되었다. 플란데런과 브라반트 절반을 빼앗기고 수도였던 안트베르펀까지 함락당하자 국왕 프랑수아는 네덜란드를 떠났으며 지도자였던 빌럼은 1584년 스페인의 자객 가톨릭 신자 발타자르 제라르(Balthazar Gerard)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위기에 몰린 네덜란드는 다시 한번 엘리자베스를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엘리자베스는 네덜란드 측을 지원만 해줬을 뿐 이를 거절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네덜란드는 국왕이 존재하는 왕국이 아니라 국가원수가 다스리는 공화국 체제로 가게되었다. 1587년 빌럼의 셋째아들 마우리츠 판 나사우가 20살의 나이로 군사령관 직책에 올라 네덜란드의 지도자가 되면서 네덜란드 7개주 연방공화국(Republiek der Zeven Verenigde Nederlanden), 즉 네덜란드 공화국이 출범하게 된다.
마우리츠가 지도자가 될 당시의 네덜란드는 스페인 군의 공세로 고작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프리슬란트의 4개 주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마우리츠는 스페인이 영국 및 프랑스와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 네덜란드에 제대로 신경쓰지 못하는 사이 차근차근 영토를 되찾기 시작했다. 마우리츠의 노력으로 네덜란드는 스페인에게 빼앗긴 헬러, 흐로닝언, 오버레이설의 3개 주와 브라반트의 절반을 되찾았다. 또한 오랜 전쟁으로 인해 안트베르펀을 위시로 한 플란데런 일대가 몰락하고 암스테르담을 위시로 한 홀란트 지역이 경제적으로 번성하면서 네덜란드는 전성기로 접어들게 된다.
전성기로 접어든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 하에 남아있는 남부 지역을 되찾아야 하는가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고 1600년 플란데런을 마지막으로 찔러본 후 남부 지역에 대한 공세를 사실상 포기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네덜란드는 림뷔르흐 일대를 제외하면 현재의 국경과 대략 일치하는 국경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브뤼셀 등 스페인령 벨기에에서 개신교가, 네덜란드에선 가톨릭 신자가 많았으나 이 과정에서 개신교 신자는 네덜란드로[6] , 가톨릭 신자는 스페인령 벨기에로 대거 이동하였다.
3.2. 휴전 (1609 ~ 1619년)
계속되는 전쟁에 스페인은 경제적 부담이 막중했고 네덜란드 역시 전쟁에 지쳤기는 마찬가지라 1609년 안트베르펀에서 양국은 12년간의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12년의 평화 기간 동안 네덜란드는 전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등 빠르게 발전하면서 경제적 문화적 전성기를 향해 달려갔다. 12년의 휴전이 끝나기도 전인 1619년, 이미 1618년부터 재개된 30년 전쟁의 여파로 스페인과의 전쟁이 재개되었으나 이미 스페인은 전성기에서 내려오던 상황이었고 네덜란드는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던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스페인은 30년 전쟁으로 인해 위그노 전쟁의 혼란을 끝내고 부활을 선언한 프랑스와도 전쟁을 치뤄야 할 판이었다. 다만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스페인이 그냥 물러선 것은 아니었다. 1659년의 피레네 조약 이전까지는 아직 시글로 데 오로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황금세기, 스페인 패권)가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스페인은 강했다.
3.3. 2기 (1619 ~ 1648년)
1620년경부터 총공세에 돌입한 스페인 군대는 벨기에 일대의 네덜란드 군을 격파하고 1624년 8월부터 브레다를 포위, 이듬해인 1625년 6월에 도시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화가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작품인 브레다의 항복이 이 사건을 묘사한 그림이다.
하지만 상승세던 스페인 군대는 현재 네덜란드 동부의 도시인 그론로 포위전 (1627년)에서 패하였다. 게다가 네덜란드의 서인도 함대는 쿠바 인근에서 벌어진 마탄자스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고 막대한 보물을 싣고 있던 선박을 나포하는 쾌거를 올렸다. (1628년)
1631년에는 9.12-9.13에 걸쳐 벌어진 슬라크 해전(?)에서는 스페인군 5,500명이 안트베르펀에서 나룻배 100척에 탑승해 로테르담 남쪽의 구레-오버플라케 섬에 상륙하려 했으나 네덜란드 나룻배 40척이 이를 차단했고, 해전에서 밀린 스페인군은 간신히 해안에 상륙했지만 그곳엔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용병 연대(2천)명과 네덜란드 농민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스페인군 4천이 포획되었다.
1635년부터 30년 전쟁의 신교 측에 프랑스가 직접 참전하자 대세는 결정되었다. 1639년의 둔스 해전에서 네덜란드 함대는 됭케르크에 상륙하려던 스페인 아르마다를 격파하였고,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네덜란드 내륙의 스페인 군대는 남쪽으로 퇴각하였다.
다만 1618년~1648년 포르투갈령 브라질(이베리아 연합)의 바이아와 페르남부쿠를 점거하였으나 실패하고, 1646년에 스페인령 필리핀을 빼앗으려던 네덜란드 함대는 2번에 걸친 해전에서의 패배로 필리핀에서 철수하였다.
3.4. 종전 (1648년)
스페인은 대세를 거스르지 못했고 결국 1646년에 네덜란드와의 협상 테이블에 끌려나왔다. 1648년에 체결된 뮌스터 조약으로 북부 7개 주와 브라반트의 절반은 '''네덜란드 공화국'''으로서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의 베스트팔렌 조약은 네덜란드를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켜 주었다.
장장 80년 동안 원조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인 서구 세계 최강국과의 전쟁 끝에 얻어낸 독립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공화국은 남부 네덜란드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해야 했으며 결국 이를 계기로 독립국을 세운 북부(네덜란드)(네덜란드 공화국)와 스페인의 지배가 유지된 남부(벨기에 + 룩셈부르크)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나뉘게 되었다.
4. 영향
한편 종교적으로 불관용적이지만 "잘나가던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살던 유대인과 이슬람 계열의 주민들이 종교재판소 등에 의해 이교도로 몰려 재산을 빼앗기고 학살당하는 등 핍박을 당하자 그나마 자유로운 분위기의 네덜란드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에겐 네덜란드인들이 종파주의를 한 발 물러나게 할 정도의 기술과 노하우가 있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오랜기간 대부업을 하여 귀금속 가공 기술과 금융업에 대한 노하우가 많았고, 이는 네덜란드의 해운업 발전과 맞물려 무역업을 크게 발전시키고 초기 자본주의 형성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이 네덜란드도 독립 이후엔 종교적으로 굉장히 불관용적이었다.(...) 종교의 자유란 개신교 신자의 자유일 뿐이었고, 가톨릭 신자에게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가톨릭은 1581년에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1848년에서야 네덜란드 헌법에는 근대적 의미의 종교적 자유가 명시되었다. 그리고 가톨릭이 해금된 건 1853년부터다. 물론 가톨릭 신자들이 다수이던 시절에도 네덜란드는 개신교에 비교적 관용적인 지역이었고, 따라서 장기간에 걸쳐 개신교화가 진행된 이후에도 가톨릭에 비교적 관용적인 지역으로 있을 수 있었다. 비록 완벽하게 개개인 단위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지는 않았을지언정, 네덜란드 사회에는 '가톨릭 공동체'와 '유대교 공동체' 등이 존재한다는 게 사회적으로는 묵인되어 있었고 당대 유럽의 종파주의 국가들보다는 '그나마' 관용적인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대륙의 귀금속 광산에 빨대를 꽂은 스페인과 수십년을 싸우면서도 네덜란드의 경제는 지속적으로 발전했는데, 어업과 상업은 물론 금융업도 큰 지분을 차지했다. 스페인이 몇 번이고 파산을 선언하는 동안(=빚 안 갚겠다. 불만 있으면 우리 스페인군에게 항의하시오),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은행에 예금되었던 스페인(!)의 예산조차 건드리지 않는 등 금융업의 생명인 신용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1] (1585~1604, 1625~1630)[2] (1596~1598, 1635~1648)[3] 그의 직할 영지 중 카스티야는 종교개혁의 여파가 적었고, 독일에서는 1521년 이후 그의 행정권이 미치는 영지가 사실상 없었다.[4] 지금의 프랑스 오드프랑스주 옹쇼트(Honschoote)[5] 휴전 이후 남부 지역의 성당은 교황청과 스페인의 지원으로 성상이 모두 복구되었지만, 네덜란드 공화국에서는 천주교를 완전 금지하고 개혁교회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에 남아있던 일부 성상들까지 깔끔하게 철거되었다.[6] 예외적으로 네덜란드 공화국이 장악한 브라반트 북부는 완충지대 겸 정부 직할지여서 정부에서 개신교 신자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래서 지금도 네덜란드령 브라반트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