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초공작전
1. 개요
1932년 6월부터 1933년 3월까지 9개월 동안 행해진 중국 공산당과 홍군을 상대로 한 국민정부의 4번째 토벌작전. 제4차 위초작전, 제4차 소공작전, 제4차 초비작전이라고도 한다. 그간 행해진 모든 토벌전을 통틀어 가장 높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열하사변을 비롯한 외환으로 제3차 초공작전처럼 중도에 중단되었다.
2. 배경
국민정부는 중국 곳곳의 해방구를 건설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공산당을 제압하기 위해 3차례에 걸친 초공작전을 실시했다. 하지만 지휘관과 병력의 자질 부족, 홍군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능수능란한 반격과 정치공작, 기본적으로 홍군을 비적떼로 경시하고 얕잡아본 국민혁명군 지도부의 오판과 만주사변을 비롯한 외환으로 인하여 3차례의 초공작전은 모두 실패했다.
국민혁명군의 3차례에 걸친 토벌작전을 격퇴한 홍군은 강소성 근방에만 20만 대군과 소총 16만정을 보유한 세력을 성장하는데 성공했고 국민혁명군이 만주사변에 대응하기 위해 철수한 틈을 타서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부대가 길안을 함락시켜 강서성과 강소성 사이의 교통선을 차단했다. 1932년 1월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하자 강서성의 4개 사단이 상하이 방어를 위해 철수했는데 홍군은 이를 틈타 파양, 낙평, 만년, 상요, 과양 일대로 진출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1932년 5월 송호정전협정을 통해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마무리되고 광서 파벌의 반란도 진압된 후인 1932년 6월에야 장제스는 다시 공산당을 토벌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였다. 장제스는 내부를 안정시켜야 외세에 대항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공산당 토벌을 서두르기로 했고 장제스 자신이 1932년 5월말 우한에 악예환 초공 총사령부를 설치한 후 자신이 악예환 초공 총사령관으로 취임했으며 공월민상 초비 총사령부 역시 설치하여 허잉친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장제스는 6월 루산에서 악예환상감 5성 초비회의[1] 를 소집하여 6월 말까지 토벌 부서를 정비하였고 군사공작을 3할, 정치공작을 7할로 배분한다는 원칙을 제시했으며 상하이의 19로군을 복건의 초공을 위해 이동시켰다.
7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공세의 1차 목표는 중앙 소비에트 외곽의 호북, 하남, 안휘에 걸친 대별산맥의 홍군 거점 소탕이었다. 장제스는 천청에게 12개 사단, 16만 명의 병력으로 주공을 지휘하게 했고 차이팅카이에게 6개 사단과 1개 여단을 주어 좌익 공격을, 위한머우에게 6개 사단 1개 여단을 주어 우익 공격을 맡겼다. 여기에는 단순한 군사작전 뿐만이 아니라 대규모 경제 봉쇄 및 홍군이 출몰하는 모든 성에 4개 사단을 동원하도록 하고 각 마을에 자경단을 조직하는 한편 도로를 정비하여 공산당 토벌에 전방위로 몰두했다. 여기에 해군과 공군이 가세하여 총 병력은 60만이 넘었다.
3. 전개
3.1. 상악서 토벌
상악서 근거지에는 허룽의 홍2군과 단덕창의 홍6군이 주둔했는데 이들은 홍2군단으로 재편성되었고 하룡이 총지휘를, 등중하가 정치위원을 맡았다. 홍2군단은 1차 초공작전 때 국민혁명군의 공세로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홍3군으로 축소, 호북 서북 지역으로 이동했다. 제6기 4중전회 이후 중국 공산당 중앙은 1931년 3월 하희를 파견해서 중앙분국을 설치했다. 이들 상악서 소비에트도 제1차 상하이 사변을 틈타 호북성 중부에서 홍호에 이르는 지역으로 확장하여 20개 현을 점령하여 3개 사단 1만 5천명의 정규병력과 1만명의 적위대를 거느렸다. 그리고 호북성 주석 하성준이 총지휘관을 맡은 상태에서 국민혁명군 좌로군 10만명이 접근해왔다.
상악서의 홍군은 처음부터 전력비율이 압도적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분산주의를 취했으나 첫 1개월 동안 지속된 홍호전역에서 홍군은 근거지를 내주며 퇴각하는 것말고 도리가 없었다. 1932년 6월, 하룡이 지휘하는 2개 사단과 단덕창의 1개 사단이 반격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수천명의 병력을 잃고 참혹하게 패주하였다. 홍군은 전체 3분의 1의 병력을 잃어 재기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7월 13일 호북 소비에트를 상대로 시작된 총공격에 하룡이 먼저 포위망을 탈출했고 이어 단덕창과 소수 적위대가 홍호근거지를 버리고 퇴각했다. 정치위원 하희는 홍호에서 호수를 방어선 삼아 농성했으나 공군과 해군을 동원한 국민혁명군의 적극적인 공세에 9월 3일에 방어선이 돌파되었고 9월 8일에는 홍호가 완전히 함락되었다. 10월 하순에 이르러 홍호지역의 홍군 근거지는 완전히 섬멸당했고 탈출한 허룽의 잔존병력 5천명은 호북 북부의 수현에서 홍3군의 잔여병력과 집결한 후 1932년 11월부터 장정0에 들어갔다. 겨우 고등학교 지리교본에 나오는 지도를 가지고 섬서성 낙남에 이르렀으나 서북군 유진화의 공격에 다시 1932년 12월 사천성 동부로 퇴각했고 다시 1933년 1월 호북 서북을 거쳐 호남 서부의 석학에서 휴식을 취했는데 잔여병력이 다시 반으로 격감한 상태였다. 하희는 단덕창을 숙청한 이후 1933년 가을에 국민당 지방부대의 공격에 다시 격퇴당하여 1934년에 이르러서야 생존자 3천명을 이끌고 5월에 상검서 중앙분국을 조직하고 사천,호남,귀주 변계 지역에 상악천검 근거지를 구축했다.
3.2. 악예환 토벌
악동구라고도 하는 악예환 지역에는 허계신의 홍1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1930년 초까지만 해도 이들의 규모는 3개 사단 2천명에 불과했고 리리싼이 창사 폭동을 일으켰을 때 이에 호응했다가 패배했지만 이후 병력을 6천명까지 증강시켰다. 중국 공산당 중앙은 제6기 3중전회를 통해 중앙대표 증중생에게 성 위원회와 중앙분국을 설치하도록 하여 하남, 호북, 안휘의 여러 특위를 영도하도록 했으며 제6기 4중전회 이후 1931년 2월 귀국한 장궈타오가 서기에 임명되어 4월에 악예환 소비에트에 심택민, 진창호 등을 거느리고 파견되었다. 장궈타오는 중공 악예환 중앙분국을 설치, 허계신, 증중생, 광계훈을 숙청하고 진창호와 함께 홍4방면군을 장악했다. 이후 만주사변을 틈타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병력 수가 3만을 넘어섰고 1931년 4군단으로 확대 개편되어 광계훈이 총지휘관에 임명되었으며 11월 7일 악예환소비에트 제2차 대표대회를 열어 다시 제4방면군으로 확대되어 쉬샹첸이 총지휘를, 진창호가 총정치위원을 맡았다. 1931년 12월부터 1932년 5월 사이에 홍4방면군은 황안, 상성 등 4차례 전역에서 승리를 거두어 병력이 5~8만으로 증강되었다.
초공군 중로군과 우로군이 악예환 공격에 나서자 장궈타오는 국민혁명군을 이전과 같은 지방군 출신의 오합지졸로 얕잡아보고 홍25군을 동쪽에, 홍 4군을 서쪽에 배치하며 "국민당 군대가 얼마나 오든지 모두 홍군의 일격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라고 자신만만해했다. 홍4방면군은 6월 중순 평한철로의 신양에서 광수로 출전하여 우한을 위협하는 한편 마성, 미극 등을 포위하면서 쓸데없이 체력과 병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7월 상순, 악예환 소비에트에도 국민혁명군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7월 12일에 곽구가 함락되었으며 8월 7일에 총공세가 시작되어 중로군 2개 종대 6개 사단이 북과 서 방향으로 진군하여 8월 10일에 하구진, 8월 13일 황안과 칠리평, 9월 9일 신집이 함락되었다. 공산군의 정치, 군사적 중심지였던 신집의 함락은 크나큰 타격이었다. 하지만 장궈타오는 퇴각을 하지 않고 주력을 마성에서 철수하여 황안과 칠리평으로 진격시켜 국민혁명군과 정면대결을 하도록 지시했으나 초기의 일부 전투에서 승리했을 뿐 결국 압도적으로 강력한 국민혁명군과의 정면대결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했다. 홍군은 2천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장궈타오는 허겁지겁 당중앙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당중앙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리 만무했고 그나마 지원이 가능한 강서성의 마오쩌둥의 홍1방면군은 "홍4방면군은 병력을 분산해서 각 지역을 보호할 것이 아니라 주력을 집중하여 유리한 지역에서 적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야 한다."라는 조언을 할 뿐이었다.
국민혁명군은 계속 승승장구하여 9월 14일에 상성이, 9월 20일에 14군 단장 웨이리황의 손에 최후의 근거지인 금가색마저 함락되었다. 장궈타오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10월 12일 한밤중 4방면군의 생존자인 3개 사단 2만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근거지를 완전히 포기하고 평한철로를 따라 서쪽으로 철수했다. 4방면군은 2개월 후인 1932년 12월 중순에야 진령과 파산을 넘어 사천성 북부에 진입하여 사천성과 섬서성 성경에 새로운 근거지를 건설했다. 장제스는 웨이리황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여 금가색을 입황현으로 개칭하였다.[2]
부차적 전선이었던 홍군 16군 공하총의 산하인 악남구 소비에트도 처음에는 전황이 지지부진하였으나 9월 중순 삼계구가 함락되고 10월 상순, 전방제대들의 가세로 용항과 연하가 국민혁명군의 손에 들어왔다. 16군과 공하총은 강서 소비에트의 정강산으로 퇴각했다. 1차 목표를 달성한 국민당은 1933년 초, 최종목표인 강서의 중앙 소비에트 공격에 착수했다.
3.3. 중앙 소비에트의 확장
한편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부하린과 그 지지자들을 제거하는 숙청을 단행하고 있었다. 코민테른도 대숙청의 영향으로 자본주의의 도전과 침략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정세 판단을 하게 되었고 1931년 3~4월에 걸쳐 개최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11차 대표대회에서 혁명의 고조가 증가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중국 대륙 주요 지역에서 소비에트와 홍군의 발전과 확대 (...) 그리고 식민지 혁명 운동의 강화"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931년 7월 31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코민테른의 이러한 지시에 고무된 상하이 임시 당중앙은 "한군데 또는 두군데 중심도시"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에 파견된 코민테른 요원 파벨 미프는 스탈린에게 중국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자는 제안을 보냈고 스탈린은 이를 승낙했다. 마오쩌둥은 국민당에 대한 선제 공격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중심 도시 하나를 확보함으로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관점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마오쩌둥은 방어가 잘 되어 있지 않은 소규모 상업도시들을 중심적으로 습격해 약탈물을 확보하는 유격전을 주장하며 지도부의 의견에 맞섰으나 상하이 임시 당중앙은 이를 불쾌하게 여겼다. 결국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1932년 1월,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1만 4천명의 홍 제3군단과 천이가 지휘하는 지방부대 등 총 3만명의 홍군이 1개월 동안 공주(간저우) 공략을 실시했으나 잘 구축된 요새에서 막강한 화력을 바탕으로 저항하는 마곤이 지휘하는 7천명의 국민혁명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오히려 1개 사단에 달하는 병력이 포로가 되는 등 피해만 막심했다."국가가 혁명적 위기에 직면하고 일부 지역에서 소비에트 권력이 성공하고 있는 운동의 현 단계에서 계급 투쟁의 성과는 무엇보다 공산당 자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 중국 공산당은 광범위하게 좌경 기회주의 관점을 적발해 내고, 이론과 실천 면에서 끝까지 투쟁을 완수해야 할 것이다."
1932년 3월 강구 군사회의에서 마오쩌둥이 공주 공략 실패를 비판하며 린뱌오의 홍1군단에 복귀하였다. 1932년 4월 초 린뱌오의 1군단, 펑더화이의 2군단, 동진당의 5군단과 나병휘의 12군을 모아 제1방면군을 조직하여 주더를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홍군은 마오쩌둥의 주도 하에 홍4방면군을 지휘하라는 당중앙의 지시를 무시하고 복건을 침공하여 용암을 점령했고 4월 19일 장주에 이르렀으나 복건으로의 진공이 전략적 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5월말 장주를 포기하고 장주와 그 인근 지역을 철저히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후 퇴각했다. 공산당은 장주 공격을 영웅적 군사 행동을 간주하였고 간저우공략 실패로 인해 사기가 낮아진 홍군의 기를 세워주었다. 장주 공격에 참여한 마오쩌둥의 위상도 올라갔다.
홍군은 6월과 7월에 걸쳐 광동을 침공했다. 하지만 광동군벌 위한머우가 이를 격퇴함에 따라 홍군은 도로 중앙 소비에트로 철수했다. 8~9월에 홍군은 국민정부 지배지역을 여럿 찔러보았으나 소득을 보지 못하고 10월에 공하총의 16군이 합류하자 중국 공산당 군사위원회는 지배구역을 중앙구, 감월변구, 감상변구, 감악상변구, 감동북변구로 개편했다. 10월 홍군은 다시 주더를 총사령관으로 삼고 린뱌오, 펑더화이, 동진당, 나병휘를 대장 삼아 복건을 침공했다. 그해 10월 초 소비에트 중앙국은 영도 확대회의를 개최하여 마오쩌둥을 혹독하게 비판하여 마오쩌둥을 군사지휘의 2선으로 물러나게 했고 이후 홍군은 저우언라이, 주더 등이 지휘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11월부터 동북과의 연락을 위해 11월 16일 자계를, 11월 29일 금계를 공격해 점령했다. 이 상황에서 악예환과 상악서 근거지가 모두 토벌당했고 장제스가 중앙 소비에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3.4. 중앙 소비에트 토벌
1933년 홍군은 복건 침공을 중단하고 동북구의 방지민과 연락하기 위한 동북 방면으로의 진출에 힘썼으나 악예환에 대한 토벌을 마무리한 장제스가 1월 말 직접 난창으로 출정하여 3개월 안에 강서성의 모든 홍군을 숙청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특히 천청이 직접 지휘하는 중앙군 10개 사단 15만명의 주공은 의황에서 광창으로 진격하여 광창을 점령하고 전면공격을 감행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국민혁명군은 루이진의 관문인 광창을 점령하는데 끝내 실패했으며 2월 27일에 52사단과 59사단이 저우언라이와 주더가 지휘하는 홍 3군단의 매복에 빠져 이틀만에 섬멸되었다. 천청은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1개 사단을 추가로 투입했으나 3월 3일 동파에서 행군 중에 습격당해 이들도 전멸당했다. 선봉에 선 3개 사단을 잃어버린 천청은 진격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933년 열하사변이 터지면서 장제스는 공산군 토벌을 중지하고 3월 난창에서 바오딩으로 이동하였다. 일본에서는 홍군과 국민혁명군 사이의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는 보도를 하였다. 소비에트 정부 역시 열하사변 대응을 위해 정부와 협력하겠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선언과 달리 홍군은 정부군이 철수하는 기회를 틈타 3월 황파에서 52,59사단의 잔여부대를 섬멸하였고 52사단장 이명은 중상을 입은채 자결했으며 59사단장 진사기는 포로가 되었다. 또한 여기서 확보한 프랑스제 경기관총과 독일제 자동보병총 1만정으로 무장한 홍군은 대용평에서 1개 사단을, 초대관에서도 11사단과 9사단의 1개 대대를 섬멸하였다. 이로서 큰 타격을 입은 33년 4월 국민혁명군은 철수길에 올랐으며 잔여병력을 점령한 도시를 바탕으로 방어전략을 취했다. 4차 초공작전의 중단으로 2만 8천명의 손실을 입어야했다."홍군은 정부군이 즉각 소비에트 구에의 진출을 정지한다는 조건으로 정부당국과 협력하고 일본의 침입에 대하여 투쟁을 개시할 될 것이다. 인민에게 민주적 권리를 부여하고 중국의 독립과 통일을 옹호하기 위해 무장의용군을 조직하게 될 것이며, 일본은 전 중국의 철저한 해체를 기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흥분한 홍군은 5천명을 동원하여 국민혁명군 2천명이 수비하고 있던 낙안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으나 홍군의 입장에서 공세는 무리수였고 홍군은 2천명의 병력을 잃고 패주했다.
4. 결과
중국 공산당은 1~4차 초공작전 도중에 국민정부군 31만 6천명을 섬멸했으며 19만 8천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총기 16만 5700정을 노획했다고 선전했다. 이는 과장되었음이 틀림없지만 홍군은 크게 고무되어 그 유명한 '홍군의 보급부장은 장제스다', '국민당군은 홍군의 보급소다'라는 이때 나오게 되었다. 승리에 고무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자신들의 영토가 11개성, 300개 현에 걸쳐 있으며 6천만명의 인구를 통치하고 있으며 병력은 30만에 달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명백한 과장이고 실제로는 15만 정도의 군세에 100개현, 인구 1200만 정도가 최대 영역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것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임이 틀림없었으며 10만 이상의 전투 경험 후보자들을 확보한 것은 엄청난 소득이었다. 당중앙은 자신들의 노선인 정면대응 노선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황안, 칠리펑, 신집, 금가채, 상성, 홍호, 용한, 연하 등의 홍군 주요 근거지들이 국민정부군에게 수복되었으며 홍군의 규모가 크게 위축되었다는 점에서 그 당시로서는 가장 큰 성과를 거둔 토벌작전이기도 했다.
5.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러빈, 민음사.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삼화.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인민해방군사, 국방군사전략연구소.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공산당역사 1권 상, 중국중앙공산당연구실, 서교출판사.
- 국공비사 5, 최경식, 군사논단, 한국군사학회.
6. 관련문서
- 제1차 초공작전(1930.12.19~1931.1.3)
- 탕산 사건(1931.2.28)
- 제2차 초공작전(1931.4.1~1931.5.31)
- 1차 양광사변(1931.5.27~1932.1.1)
- 나카무라 사건(1931.6.27)
- 만보산 사건(1931.7.1)
- 제3차 초공작전(1931.7.1~1931.9.20)
- 류탸오후 사건(1931.9.18)
- 만주사변(1931.9.18~1932.3.1)
- 눈강 전투(1931.11.4)
- 천진사변(1931.11.6, 11.26)
- 영월합작(1932.1.1)
- 진저우 침공(1932.1.3)
- 3차 장왕합작(1932.1)
- 마옥산 사건(1932.1.18)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1.28~1932.5.5)
- 송호정전협정(1932.5.5)
- 이시모토 사건(1932.7.17)
- 열하사변(1933)
- 당고정전협정(1933.5.31)
- 폐량개원(1933.4.5)
- 제5차 초공작전(1933.10.16~1934.11.10)
- 복건사변(1933.11.20)
- 대장정(1934~1935)
- 하북 사건(1935.5.2~1935.5.24)
- 장북 사건(1935.6.5)
- 하매 협정(1935.6.10)
- 돈목방교령(1935.6.10)
- 진토 협정(1935.6.27)
- 타다 성명(1935.9.24)
- 히로타 3원칙(1935.10.4)
- 왕징웨이 저격 사건(1935.11.1)
- 법폐개혁(1935.11.4)
- 중미은협정(1935.11.13)
- 기동사변(1935.11.25)
- 12.9 운동(1935.12.9)
- 동정항일(1936)
- 2차 양광사변(1936.6.1)
- 수동사변(1936.11.14)
- 7군자 체포 사건(1936.11.23)
- 서안 사건(1936.12.12)
- 루거우차오 사건(193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