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공작전

 


'''中央苏区反围剿战爭'''
Encirclement Campaigns
1. 개요
2. 배경
2.2. 홍군의 조직과 마오쩌둥의 정강산 투쟁
2.3. 리리싼 노선의 등장과 대도시 공략 전략
2.4. 유격근거지의 형성
2.4.1. 중앙근거지
2.4.2. 상,악,공 근거지
2.4.3. 악,예,환 근거지
2.4.4. 홍호, 상, 악서 근거지
2.4.5. 민,절,공 근거지
2.4.6. 광서 우강, 좌강 근거지
2.4.7. 그 밖에
3. 전개
4. 관련문서
4.1. 인물
4.1.1. 국민정부
4.1.2. 중화소비에트공화국
4.2. 사건
5. 참고 문헌


1. 개요


초공작전은 1920년대 말부터 중국 각지에 소비에트 지구를 건설한 중국 공산당을 섬멸하기 위한 국민정부의 군사작전을 말한다. 마오쩌둥의 강서 소비에트를 대상으로 치러진 5개 초공작전이 가장 유명하지만 각 지역에서 강서 소비에트를 제외하고 여러 소비에트를 향한 산발적인 토벌 작전이 행해졌었다.
강서 소비에트를 향한 공격은 초기에는 홍군을 토비로 업신여긴 국민혁명군의 오만과 전술적 미숙, 홍군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인전술에 휘말려 오히려 많은 무기만 잃고 실패하여 홍군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고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할 정도였으나 차차 국민혁명군의 대응전술이 발전하면서 홍군도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1차 양광사변, 1932년의 제1차 상하이 사변, 1933년의 열하사변 등은 홍군의 숨통을 잠시 트여주었으나 당고정전협정으로 일본 제국의 확장을 일시 저지하고 내부적 혼란을 단속한 장제스가 1934년 제5차 초공작전을 발동하면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멸망하고 중국 공산당은 대장정이라 불리는 머나먼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거의 멸망 직전에 몰린 공산당이었지만 1936년 장쉐량이 일으킨 서안 사건으로 장제스가 2차 국공합작을 수용하면서 공산당은 기사회생한다. 강서 초공전쟁이나 위초작전, 소공작전, 초비작전이라고도 한다.

2. 배경



2.1. 국공결렬취추바이 노선


4.12 상하이 쿠데타1차 국공합작의 붕괴가 시작되었고, 1927년 7월 왕징웨이의 우한 정부도 국공결렬을 선택했다. 공산당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민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국민당 좌파를 자극하는 노농 급진행동을 자제하자는 타협적인 공식 입장을 고수했으나 국민당과 완전히 결별하면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분공을 맞이한 공산당은 우한 정부군의 동정에 동원된 장파쿠이의 2방면군에 소속된 윈다이잉 휘하의 친공산당 부대들을 빼내어 난창에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려고 기도했다. 덕분에 11군 24사단장 엽정 휘하의 5개 연대, 20군장 하룡 휘하의 6개 연대, 주더의 교도단 2개 중대 등 1만 6천명의 병력과 차이팅카이의 부하 5천 명을 흡수하여 상당한 군세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확보한 군세를 바탕으로 1927년 8월 1일 공산당은 난창 폭동을 일으켜 저우언라이, 장궈타오, 리리싼 등을 국민당 혁명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고 정부를 수립하였으나 국민당의 반격으로 난창의 소비에트 정권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잔존한 공산당 부대들은 마오쩌둥이 지휘하는 유격대와 합류했다.
난창 폭동의 실패 이후, 공산당은 무창봉기를 준비함과 동시에 8.7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1927년 8월 7일 우한에서 구추백, 마오쩌둥, 쑤자오정, 장태뇌, 채화삼, 향충발 등 22명의 공산당 지도자와 코민테른 대표 비소 로미나제가 참석했다. 8.7 긴급회의는 국공합작의 실패를 천두슈의 '우경기회주의노선'에게 돌리며 중국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명의로 이러한 내용을 담은 <전체 당원 동지들에게 보내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는 천두슈를 멘셰비키를 몰아 비판하며 그 때문에 계급투쟁이 미진했다고 비난했다. 또한 북벌의 협조를 위해 토지개혁과 노농무장화를 태만히 한 것도 비판의 대상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8.7 긴급회의는 천두슈를 퇴진시키고 구추백을 총서기로 삼아 임시정치국을 결성, 노동자와 농민을 무장시켜 봉기를 촉구하는 새로운 당노선을 채택했다. 또한 반제투쟁, 계급투쟁, 사회혁명을 상호대리적인 것을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 지적했다. 그러므로 국민혁명은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를 관철시키면서 진행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입장이 완성되었다. 또한 실패했던 난창기의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노농무장화를 통한 무장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당면과제로 삼는다는 방침에 따라 공산당은 도시에서 노동자를, 농촌에서 농민을 무장화하여 폭동을 일으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마오쩌둥도 8.7긴급회의의 결정에 따라 임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어 후난에 파견, 후난 추수폭동을 지휘했다. 그리고 계획대로 9월에는 후난, 후베이, 장쑤, 광둥 등지에서 추수폭동이 발생하였는데 공산당의 기대와 달리 준비부족과 농민들의 소극적인 반응으로 난관에 직면했으며 국민당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모두 토벌당하고 말았다. 마오쩌둥도 이때 후난성 전적위원회를 구성하여 장사 노동적위대, 농민자위대를 동원하여 장사를 공격했으나 중도에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이에 당중앙은 마오쩌둥을 우경군사기회주의자라 비판하며 임시정치국 후보위원 자리에서 정직시켰다.
연이은 봉기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1927년 11월 당중앙은 상하이에서 임시정치국확대회의를 개최하고 구추백의 연속혁명론에 입각하여 더욱 급진적인 정책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구추백은 9월 추수폭동의 실패는 대중의 지지가 낮아서가 아니라 공산당 간부들의 조직력과 노력이 부족했다고 비판하며 마오쩌둥을 비롯한 실무책임자들을 탓했다. 그리고 더 이상 우한 국민정부를 비롯한 국민당 좌파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판단 하에[1] 여기서 그때까지 사용되던 국민당의 깃발이 폐기되었으며 중국의 상황이 직접적인 혁명의 정세에 놓였고 대중의 혁명열기가 높다는 낙관적인 전망에 따라 노동자와 농민의 무장봉기를 심화, 확대하여 노농소비에트를 수립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이리하여 펑파이가 광둥의 해풍과 육풍현에서 농민봉기를 일으켜 해륙풍 소비에트를 수립했고 1927년 12월 11일 중국공산당 광둥성위원회가 섭검영의 부대와 광저우의 노동자적위대를 동원해 광저우를 점령하고 광저우 코뮌, 혹은 광저우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한 광저우 폭동을 일으켰으나 국민당의 반격에 3일 만에 패배, 장타이레이를 비롯한 주요 봉기지도자들이 처형되었으며 수천명을 잃고 패주해야 했다. 해륙풍소비에트도 1928년 2월말에 함락됨으로 구추백 노선의 실패가 자명했으며 공산당 지도부는 산간오지로 패주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또한 도시 지역에 형성된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도 파괴 및 지하화되었다. 1928년 6월 모스크바에서 중국공산당 6차 당대회가 열렸고 구추백 노선은 좌경모험주의노선이라 비판받았으며 구추백은 퇴진했다. 이 시기의 의의로는 철저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홍군이 창설되었다는 것이었다.

2.2. 홍군의 조직과 마오쩌둥의 정강산 투쟁


한편 8.7긴급회의의 결의에 따라 공산당에 합류한 국민당 부대들을 개편하고 노동자, 농민군을 중심으로 '당대표제를 갖춘 공농혁명군'을 건설할 것이 결정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난창 기의에 참여했던 잔여 병력들이 공농혁명군으로 개편되었다. 우선 주더의 부대가 공농혁명군 제1사로 개편되었고 동랑의 부대가 공농혁명군 제2사로 개편되었다. 후난 추수봉기에서 패퇴했던 마오쩌둥도 1927년 9월 29일 강서성 영강현 삼만현에서 벌어진 삼만개편[2]에 따라서 잔존 병력을 공농혁명군 1군 1사단 1연대로 개편했고 부대 내부의 민주제도 도입, 구타 근절, 사병의 발언권 보장, 사병위원회 설치함으로 규율을 정리했고 각 부대에 당 조직을 설치하여 당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이후 1928년 5월 공산당은 군사공작대강을 발표, 공농혁명군을 모두 홍군으로 개칭하고 당대표제에서 정치위원제로 전환했다. 이후 광저우 기의 때 홍군이란 명칭이 정식으로 사용되었고 도시를 노린 기의들의 잇단 실패에 일찍이 호남농민운동시찰보고 등을 올리며 농촌 중심 혁명을 주장했던 마오쩌둥은 자신의 전략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여러 공산부대들과 국민당 내부에서 숙청된 부대들이 합류함으로 홍군의 규모는 확대되었다. 1928년 1월엔 주더가 후난에서 국민당과 싸우다 퇴각하여 마오쩌둥에 합류함으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홍군 제4군이 결성되었다. 마오쩌둥은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정강상을 근거지로 삼아 국민정부군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며 유격전 전략의 유용성을 입증해보였다. 자세한 것은 정강산 투쟁 문서 참조.
1929년 12월 열린 고전회의에 참석한 마오쩌둥은 현 상태론 국민당과 싸워 이길 수 없으니 건군노선을 확정하고 홍군을 건설하는데 주력했다. 이때 그 유명한 3대 기율(명령에 절대 복종, 인민의 것은 사소한 것이라도 뺏지 않는다, 모든 노획품은 공적인 것.)과 8항(말을 부드럽게 한다, 공정히 물건을 사고판다, 빌린 물건은 되돌려준다, 물건을 파손하면 배상한다, 사람을 때리거나 욕하지 않는다, 덜 익은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부녀자를 희롱하지 않는다, 포로를 학대하지 않는다.)이 만들어졌으며[3] 마오쩌둥의 16자 전법(적이 공격하면 나는 후퇴하고 적이 후퇴하면 나는 추격하며 적이 머무르면 나는 어지럽히고 적이 피로하면 나는 타격한다.)도 창안되었다. 이후 홍군은 중앙정부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을 중심으로 민심을 확보하는 한편 세력을 확장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마오쩌둥이 정강산에서 유격전을 벌일 당시에 장제스는 2차 북벌에 매진하고 있던 시점이라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1928년 6월 강서성 주석 주페이더가 양여현의 6단과 호남성 소속의 2단을 보내 정강산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7월에 이르러 허젠 소속의 호남 독립 제5사단장 펑더화이가 반란을 일으켜 공농홍군 5군을 자처하며 정강산에 합류해버리자 정강산 근거지는 자꾸 확대되어 연화, 영신, 예릉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국민정부는 11월 6일 주페이더에게 호남, 강서 양성 초비 총지휘관 자리를 주어 정강산을 공격하게 했다. 1929년 1월 1일 허젠이 대리 총지휘에 취임, 1월 하순부터 10여개 단을 동원해 작전에 들어갔다. 국민당의 조밀한 압박을 눈치챈 마오쩌둥은 정강산을 포기하고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마오쩌둥과 주더가 지휘하는 홍4군은 복건 서부로,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홍5군은 북상해 호남, 호북, 강서 변방을 향했다. 마오쩌둥은 장정승, 부백취 등의 토착 공산당을 규합하여 상항, 무평, 용암을 점령하고 장정을 공격하였다. 장정에서 곽봉명이 지휘하는 1개 여단이 참패했고 곽봉명은 전사했다. 홍군은 많은 무기를 노획해 무장을 강화했다. 때마침 1차 장계전쟁, 1차 장풍전쟁, 중동로 사건, 2차 장풍전쟁이 이어져 국민당은 마오쩌둥을 토벌할 여력이 없었고 마오쩌둥은 복건을 넘어 강서의 흥국, 영도, 서금 등을 잇달아 함락하고 정부군의 공격엔 유격전을 대응하여 중앙 소비에트 지구를 설립했다.

2.3. 리리싼 노선의 등장과 대도시 공략 전략


1928년 2월 코민테른은 집행위원회를 개최, 중국에서의 혁명이 퇴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인정하며 노동운동의 활성화, 당조직의 재건, 토지혁명의 확대, 홍군의 건설에 주력함으로 새로운 혁명고조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이런 2월 결의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모스크바에서 6차 당대회를 열고 10대 정치강령을 발표, 1. 제국주의적 지배의 종식, 2. 외국자본의 기업과 은행 몰수, 3. 중국의 통일과 민족자결권 확립, 4. '군벌적' 국민당 정권 타도, 5. 소비에트 정권의 수립, 6. 8시간 노동제, 실업구제와 사회보장제도의 실시,7. 모든 지주계급의 토지에 대한 몰수와 경작 농민들에게 토지 분배, 8. 병사생활의 개선, 9. 모든 잡세의 폐지와 통일적인 누진제의 실시, 10. 소련과 세계무산계급과의 연합을 내세웠다. 또한 '반혁명세력'이 강성한 상황에서 전면적 무장봉기를 시도한 것이 잘못이라면서도 앞선 봉기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퇴조기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곧 고조기가 도래한다면서 홍색정권의 수립과 농촌근거지를 확대하고 도시지역엣의 노동조합운동의 회복과 당조직의 강화를 강조했다. 또한 천두슈의 '우경기회주의노선'과 구추백의 '맹동주의, 명령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당의 무산계급화를 주문, 향충발을 총서기로, 저우언라이를 조직부장으로, 리리싼을 선전부장으로, 항영을 노동부장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당 지도부를 결성했다.
리리싼은 1930년 창사 폭동을 일으켜서 도시에서의 혁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1930년 9월 중국 공산당 제6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소집되었다.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구추백과 저우언라이가 중심이 된 3중 전회에서 리리싼의 전국적 총봉기계획과 홍군의 도시진공계획을 중지할 것을 결정했고 리리싼의 모험주의적인 전술상 과오를 비판하며 도시가 아니라 농촌에서 혁명활동을 하여 차차 도시를 포위하자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고 기존의 도시 쟁취 전략을 시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잠시나마 창사를 점령하기도 했던 전과 때문에 공산당은 리리싼을 중심으로 꽤 견고하게 조직된 상황인지라 리리싼의 노선상 과오는 크게 비판되지 않았고 리리싼 노선에 대한 비판을 억제하는 양상이 보였기에 리리싼을 모험주의적이라 불신했던 코민테른은 1930년 11월 16일 리리싼의 원칙적 과오를 지적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코민테른은 리리싼을 트로츠키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원칙적 과오를 저질렀다고 비판했고 혁명의 불균등발전에 대한 인식 미비,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과소평가, 혁명무장력에 대한 과신으로 무모한 무장봉기를 획책해 중대한 손실을 저질렀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코민테른의 지적에 중국 공산당은 1930년 11월 말 중앙정치국회의를 개최하고 3중전회의 결정을 수정하여 리리싼 퇴진을 결의했다. 그리고 1931년 1월의 4중전회에서 왕밍, 진방헌, 심택민 등의 스탈린동방노동대학과 손일선중국노동대학을 나온 국제파, 소련유학파가 당권을 잡고 차 당대회 노선을 재확인, 농촌에서 홍군을 건설하고 토지혁명을 통해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해 도시지역의 노동운동과 당조직을 재건한다는 방침을 강조했다.

2.4. 유격근거지의 형성


[image]
중국 공산당의 유격지들
홍군의 무력투쟁하면은 마오쩌둥의 정강산 투쟁이 제일 유명하며 후일 마오쩌둥의 강서성 중앙 근거지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수도가 되지만 마오쩌둥의 중앙 근거지 외에도 공산당은 여러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다.

2.4.1. 중앙근거지


마오쩌둥의 근거지. 강서성 남부와 복건성 서부 지역에 위치했으며 강서성 근거지는 홍군 제4군에 의해 1929년 1월에, 복건성 근거지는 1929년 2월부터 12월에 걸쳐 홍군 제4군에 의해 건설되었다. 1930년 3월 복건 서부와 강서 남부를 합쳐 노농병소비에트정부가 수립되어 6월 노농홍군 1군단이 설립되었고 8월에 1군단과 3군단이 합쳐 홍1방면군이 되었다. 주더가 총사령관, 마오쩌둥이 총정치위원으로 있었다.

2.4.2. 상,악,공 근거지


상은 호남, 악은 호북, 공은 강서를 말한다. 1928년 7월 홍군 제5군이 호남성 평강과 류양, 강서의 만재와 수수 일대에 수립한 근거지다. 1930년 2월부터 홍군 제5군이 호북 동남쪽 방면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세력을 확대해 홍군 제3군단으로 발전했다.

2.4.3. 악,예,환 근거지


악은 호북, 예는 하남, 환은 안휘를 말한다. 1927년 10월 황안, 마성, 육안을 중심으로 수립되었으며 1930년 2월 호북, 하남, 안휘 특구가 설치되었다. 1931년 이곳의 모든 병력이 제4방면군으로 개편되었으며 서향전이 총지휘를 맡았다. 장궈타오도 이곳 악예환 근거지 소속이었다.

2.4.4. 홍호, 상, 악서 근거지


홍호는 호북성의 담수호를 말하며, 상은 호남, 악서는 악의 서부지역, 즉 호북 서북을 말한다. 1927년부터 1930년 사이 호북 남부와 장강 북안 사이의 홍호 유격근거지에서 홍군 제6군이 설립되었으며 호남 서남부와 호북 서남부 유격근거지에서 홍군 제2군이 설립되었고 1930년에 이르러 이들이 제2군단으로 합편되었고 하룡이 총지휘를, 관향응이 정치위원을 맡았다.

2.4.5. 민,절,공 근거지


민은 복건, 절은 절강, 공은 강서를 말한다. 1927년 난창 기의에서 패배한 방지민 부대가 무장폭동을 일으켜 형성했다. 중원대전 와중에 세력을 확장했으며 1930년 동북 노농민주정부가 설립되고 홍군 10군을 편성했다.

2.4.6. 광서 우강, 좌강 근거지


1차 장계전쟁 이후 1929년 10월 중국공산당이 농민군과 경비군 제4대대를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켜 수립했다. 1929년 12월 우강노농민주정부와 홍군 제7군이 수립되었고 1930년 2월 경비군 5대대가 홍군 제8군으로 개편되었다. 이곳의 홍군은 이후 중앙홍군과 합류했다.

2.4.7. 그 밖에


그 외에 섬서, 광동, 강소, 하북, 산서, 사천 등에 유격근거지들이 퍼져 있었으며 1930년 기준으로 124개 현에 걸쳐 6만명의 유격대가 있었다.

3. 전개



3.1. 제1차 초공작전


중공 세력이 연일 확장되자 국민정부중원대전이 마무리되어가던 1930년 여름부터 공산당에 대한 토벌을 준비했고 1930년 12월 제1차 초공작전을 시행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해당 문서 참조.

3.2. 제2차 초공작전


1931년 장제스는 두번째 토벌작전을 시행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제2차 초공작전 문서 참조.

3.3. 제3차 초공작전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건국


1931년 6월, 국민정부는 공산당을 상대로 세번째 초공작전을 개시했지만 1차 양광사변만주사변을 비롯한 내우외환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토벌전을 격퇴한 중국 공산당은 1931년 11월, 강서의 중앙 소비에트에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3.4. 제4차 초공작전


해당 문서 참조.

3.5. 제5차 초공작전


[image]
강서 소비에트의 붕괴와 대장정의 시작
해당 문서 참조. 결국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멸망하고 중국 공산당은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대장정에 나서게 된다.

3.6. 대장정



3.7. 제6차 초공작전


장제스는 1936년, 섬서성 옌안의 중국 공산당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했지만 그해 12월 12일 서안 사건으로 감금당하고 만다.

4. 관련문서



4.1. 인물



4.1.1. 국민정부



4.1.2. 중화소비에트공화국



4.2. 사건



5. 참고 문헌


  • 모택동 대 장개석, 이건일, 도서출판 삼화.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다큐멘터리 중국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마오쩌둥 평전, 로스 테릴, 이룸.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러빈, 민음사.
  •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상, 장융, 존 핼러데이, 까치.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북스.
  • 코민테른과 대장정, 오토 브라운, 일월서각.

[1] 우한 정부는 7월부터 난징 정부와 통합을 결정하고 협상에 들어갔으나 복잡한 사정에 의해 진전이 없다가 장제스의 하야와 더불어 9월에 통합을 최종 결정하였다.[2] 앞을 보면 알겠지만 삼만은 숫자가 아니라 지명이다.[3] 삼대기율 팔항주의는 처음에는 삼대기율 육항주의였으나 이후 수정, 추가되어 1929년부터 삼대기율 팔항주의로 자리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