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학린
吳學麟
(1009~?)
1. 개요
고려의 관료. 오인정, 죽림고회 오세재의 조상으로 고창 오씨의 시조다.
2. 생애
본관은 고창. 목종 12년(1009) 태어났고 정종 원년(1035) 문헌공 최충이 지공거로 주관한 과거에서 진사로 급제한다. 나중에 관직이 한림학사에 이르렀는데, 최충 문하의 과거 동기인 김숙창(金淑昌), 김정(金正), 김양지(金良贄)도 모두 학사를 역임했다.
경자년인 문종 14년(1060) 요나라 도종에게 보내는 국서 '재걸장(再乞狀)'[1] 을 썼다. 그 내용은 국경 관련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는 것. 고려와 거란은 도종 이전 흥종 시기 압록강을 국경으로 확정했는데, 문종 9년(1055)부터 거란의 군사시설[2] 이 하나둘씩 압록강 남쪽에 세워졌다. 고려에서는 동경유수에 국서를 보냈고, 이듬해 병신년(1056)에는 도종이 조서를 보내 국경 너머에 작은 정자를 세웠지만 침탈하려던 것은 아니라고 변명했다. 그래도 건물이 철거되지 않자 1057년에 또 국서를 보냈고, 3년 뒤인 이 시점에서 다시 문제 해결을 촉구한 것이다.
흥복사(興福寺)[3] 를 노래한 시가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보한집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