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규(1142)

 

1. 개요
2. 생애

王珪
(1142 ~ 1228)

1. 개요


고려의 문신. 자는 숙개(叔玠)이고 원래 이름은 왕승로(王承老)다. 시호는 장경(莊敬).

2. 생애


영해공 왕만세의 7세손인 왕충의 아들로 태어난다. 의종 2년(1148) 7세의 나이에 동궁의 학우(學友)가 된다.[1]
관직에 나가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군기주부동정에 임명된다. 중서문하성에서 나이가 어린 점을 들며 이 인사를 논박하는데 의종이 "그 아버지가 임금을 보좌한 공이 있는데 어찌 상례에 구속될 수 있겠는가?"[2]라며 묵살한다. 그렇게 의종 시기에 관직이 여러번 바뀌어 병부원외랑, 전중시어사를 지낸다.
의종 23년(1170) 정중부, 이의방 등이 난을 일으키자 왕규는 모친을 뵈러 가야 한다며 일찍이 떠났기에 화를 피한다. 명종이 즉위한 뒤에는 남경유수로 발령돼 선정을 베푼 일이 있다. 명종 3년(1173) 김보당의 난이 일어났다가 진압되고 폐위됐던 의종은 이의방에게 죽는다. 이의방은 사서에서 '무릇 문신은 모두 주륙했다.'[3]라고 표현할 정도로 연루된 문신들을 모두 제거하려 했다. 김보당의 매부 이세연(李世延)이 연좌돼 죽임을 당하는데, 이세연의 누이가 왕규의 배우자였기에 왕규까지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왕규는 무신정변의 주도자 중에서도 온건파였던 정중부의 도움으로 그의 집에 숨었고, 또 죽음을 피하게 된다.
정중부의 집에는 과부가 된 딸이 하나 있었는데, 왕규는 이 과부와 눈이 맞아 사통하다가 본처 이씨를 버리기에 이른다. 명종 4년(1174) 정중부 부자가 이의방을 제거한 뒤에는 권신의 사위라는 지위와 함께 복직한다. 명종 7년(1177) 왕경이 생일회사사로 금나라에 갔다가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주를 지나다가 정주중랑장 김순부에 의해 억류된다. 김순부는 낭장 용순을 죽이려고 했는데 용순이 개경으로 도망가자 지나가던 왕규를 인질로 삼아 정중부를 움직이려고 한 것이다. 왕규는 자신을 억류한 김순부로부터 뼈아픈 말을 듣는다.

공은 사대부 출신(衣冠之族)인데 지금 전처를 배반하고 권세가에 결혼해 의탁함으로 구차하게 살기를 꾀하니, 명분과 의리는 이미 이지러졌구려. 장차 무슨 낯으로 사대부들과 함께 조정에 서려는 것이오?"[4]

문신인 왕규가 본처를 버리고 정중부의 딸과 결혼함으로 무신들에게 영합하고 있다는 비판으로, 이를 들은 왕규는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의주분도관 왕도(王度)가 김순부를 설득한 끝에 왕규는 풀려났으며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명종 26년(1196) 11월 판각문사로 있을 때 팔관회에서 인주도령 중랑장 자충(子冲)으로부터 무례한 인사[5]를 받는다. 자충은 다른 북계의 도령(都領)들과 함께 팔관회 때문에 개경에 불려왔는데, 이의민이 죽은 뒤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탐색하기 위해 소란을 일으킨 것이다. 자충이 도령들 앞에서 한 말에 따르면 자신을 죄주면 조정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을 두려워하는 것[6]이라고 한다. 자충은 탄핵된 끝에 벌을 받는데, 당시는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이 권력을 잡고 있었으므로 자충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닌 셈이다.
신종 때 최충헌의 반대파 숙청이 계속되는 중에도 왕규는 어사대부(1202), 참지정사(1203)로 승진을 거듭해 여러 번 문하시랑 동중서평장사에 임명된다. 희종 원년(1205) 가벼운 병을 앓자 "족하다는 것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7]라며 글을 올려 은퇴할 것을 청한다. 은퇴한 뒤에는 유유자적하며 지냈고, 고종 15년(1228)에 87세의 나이로 죽는다. 고종은 사흘간 조회를 멈추고 왕규에게 시호를 내린다.

[1] 의종과 장경왕후 아들 효령태자는 이듬해인 의종 3년(1149) 4월에 태어나므로 시기가 맞지 않는다.[2] 其父有佐命之功, 豈可拘常例耶?[3] 凡文臣一切誅戮.[4] 公, 衣冠之族, 今背舊室, 托婚權門, 以圖苟活, 名義已虧. 將何顔, 與士大夫, 共立於朝乎?[5] 길게 읍()할 뿐 배()하지 않았다.(長揖不拜)[6] 如將罪我, 是朝廷有人, 否則是畏我也[7] 知足不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