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종(고려)

 


'''고려 제21대 대왕
熙宗 誠孝大王
희종 성효대왕
'''
'''묘호'''
정종(貞宗) → '''희종(熙宗)'''
'''시호'''
인목성효대왕
(仁穆誠孝大王)[1]
'''절일'''
수기절(壽祺節) → 수성절(壽成節)[2]
'''성씨'''
왕(王)
''''''
연(淵) → 덕(悳) → 영(韺)
''''''
불피(不陂)
'''왕후'''
성평왕후(成平王后)
'''부왕'''
신종 정효대왕
'''모후'''
신헌선정태후(信獻宣靖太后)
'''능호'''
석릉(碩陵)
'''사망지'''
고려국 양광도(楊廣道) 교동현(喬桐縣) 법천정사(法天精舍)
'''생몰연도'''
음력
1181년 5월 8일 ~ 1237년 8월 10일
양력
1181년 6월 21일 ~ 1237년 8월 31일 (56세)
'''재위기간'''
음력
1204년 정월 가사일 ~ 1211년 12월 계묘일 (7년)
1. 소개
3. 생애
3.1. 즉위 전
3.2. 즉위 초
3.3. 최충헌 암살 시도
3.4. 폐위와 유배
3.5. 폐위 후와 사망
4. 평가
5. 가족관계
6. 기타
7.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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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려 제21대 임금. 묘호는 희종(熙宗), 시호는 성효대왕(誠孝大王).
휘는 처음에는 연, 태자가 되고 나서 바꾼 덕, 이후 다시 바꾼 영(韺)이다. 자는 불피(不陂). 인종의 손자이고 의종명종의 조카이며 신종의 맏아들이고 강종의 사촌동생이다.

2. 묘호, 시호, 존호


처음 시호는 정종(貞宗), 만일 이 묘호가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고려에는 한글로 이라는 묘호를 가진 왕만 3명이 될 뻔했다. 김중구 묘지명에 정종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 비석은 고종 29년인 1242년에 지어진 것이다. 희종이 고종 24년인 1237년에 붕어했으니 최소 사후 5년간 묘호는 정종이었다. 이후 묘호가 희종(熙宗)으로 바뀌었다. 고려사고려사절요에는 언제, 왜 바뀌었는지 기록은 되어 있지 않다.
고종이 올린 첫 시호는 성효대왕(誠孝大王)이며 또 시호를 추가해 공식 존호는 희종 인목성효대왕(熙宗 仁穆誠孝大王). 고려사 희종 세가 총서에는 희종 成효대왕으로 되어 있다.[3]
고려사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당대 기록인 묘지명 등을 보면 생전에 옥좌에서 내려온 뒤 태상왕(太上王)으로 올려진 듯하다. 희종 사후에 고종은 희종을 상황(上皇)이라 불렀다.[4]

3. 생애



3.1. 즉위 전


'''고려의 역대 왕태자'''
왕탁(왕태제)

'''왕영'''

왕지
선정태후 김씨의 소생이며 친동생 양양공(襄陽公) 왕서(王恕)[5], 경녕궁주(敬寧宮主), 효회공주(孝懷公主)가 있다.
즉위 전 종실인 왕우의 딸을 태자비로 맞으려 했지만 권력 강화를 위해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일 욕심에 가득차 있었던 최충수의 겁박으로 무산되고 그의 딸을 왕후로 맞이할 뻔 한다. 하지만 최충헌이 이를 막고 결국 형제 간에 골육상쟁을 벌여 그 과정에서 최충수가 죽으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신종 재위 3년(1200년) 4월, 19살의 나이에 왕태자로 책봉됐다. 앞서 3월에 희종은 자신의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과오를 모른다. 나 또한 스스로 알지 못하니 경들에게 부탁한다. 숨기지 말고 모두 언급해주길 바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왕자를 칭찬했다고 한다. 희종이 무신 집권자 중 최악인 최충헌을 제거하려고 시도했음을 생각해보면 나름 왕자 시절부터 명군의 조짐이 있었다.

3.2. 즉위 초


아버지에게 선양받았던 것이 고려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재위 원년(1204년) 어머니를 태후로 높였고 8살 맏아들인 왕지(王祉)를 왕태자로 봉했다. 자신의 절일을 수기절에서 수성절로 바꿨는데 동문선 제30권 수기절일하전에 보면 희종이 왕태자 전하(王太子殿下)로 불리고 전문(箋文)을 받았다. 즉 수기절은 희종이 왕태자 시절의 절일인 듯하다.
1205년 최충헌을 진강군 개국후(晋康郡 開國侯)로 봉했다. 이어 ''''벽상삼한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상주국 병부어사대판사 태자태사''''로 임명했다.[6]
최충헌이 내세운 임금인 만큼 아무 권력도 없었으며 결국 국가의 주요 중대사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최충헌한테 끌려다녔다.
1208년 최충헌이 새로 지은 암자 모정(茅亭)에 가서 새로 지은 걸 축하해주고 시를 나누었다. 동국이상국집에 이 때 나눈 시, 표문이 남아있다. 당시 참가한 이규보를 포함한 신하들은 희종을 상제(上帝), 자미천(紫微天)으로 비유하고 자신들을 아홉 신선(九門仙)이라 비유하면서 그야말로 놀자판을 벌인다.
또한 최충헌의 집에 갔을 때 천자(天子)의 기운이 만호국후(萬戶國侯)를 밝혀준다며 오황(吾皇)께선 오래 살라는 시를 받는다. 보면 알겠지만 희종은 "천자의 사랑을 받는 후작 최충헌"의 지위를 찬양하고 빛나게 해주는 도구 수준이었다.
최충헌이 길을 헐고 십자각을 짓거나 그의 수하들이 무엇을 하든 막지 못했다. 그러나...

3.3. 최충헌 암살 시도


어쨌든 재위 초반에는 이렇듯 최충헌의 말을 잘 듣는 군주로 '''보였으나,''' 속으로는 최충헌의 전횡을 고까워하고 최충헌을 치려 하고 있었다.
희종 재위 7년(1211년) 12월, 희종은 별궁 수창궁(壽昌宮)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고 최충헌 역시 일을 보기 위해 수창궁에 와 왕을 알현했다. 희종이 편전에 들어가자 최충헌 역시 자신을 시종하러 온 노영의 등 수하들과 함께 그 곳을 떠나려 했으나 중관(中官)[7]들이 최충헌 무리에게 지(旨)[8]가 내려져 술과 음식을 나눠주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믿은 최충헌과 그의 수행원은 궁 안으로 들어갔다. 최충헌은 설마 제 아버지 대부터 자기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임금이 감히 자신을 죽이려 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궁궐 안으로 들어 갔으나 기다리고 있던 건 왕준명 및 승려 열여 명과 부하들이었다. 그들은 최충헌의 수하를 죽이고 최충헌도 마저 죽이려 들었다. 최충헌은 편전으로 뛰어가 당황한 상태로 말했다.

"상께서 신을 구해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희종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편전의 문도 열리지 않았다.
다급해진 최충헌은 급하게 지주사방[9]의 문 사이에 숨어들었다. 승려들은 흩어져 최충헌을 찾았고 한 승려가 지주사방에 들어와 세 번 정도 훑었지만 최충헌을 발견하지 못했다.
도방의 김약진, 최충헌의 사돈인 지주사 정약첨 등이 급보를 듣고 다급하게 수창궁으로 와 승려들과 싸움을 벌였다. 노영의가 최충헌을 끌고 나와 지붕에 올라가 외쳤다.

"우리 공(公)은 무사하다!"

이 말을 들은 김약진은 끌고온 도방 6번 소속 사병들을 궁안으로 들여보내[10] 최충헌을 데려가면서 최충헌 제거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3.4. 폐위와 유배


사실 고려사엔 수창궁 사태의 주동자가 희종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하지만 이 사건이 희종이 있는 궁궐 깊숙한 곳에서 발생했고, 희종이 최충헌을 무시하고 도와주지 않은 점을 보아 최소 이 살해 계획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농후해보인다.
최충헌은 그동안 많은 암살 시도를 겪었지만 이번만큼 본인의 목숨이 가장 위태로웠던 시도는 한 번도 없었다. 김약진이 그에게 말했다.

'''약진''': "제가 병사를 궁 안으로 데려가 모든 사람을 죽이고 대사(大事)도 치루겠습니다."[11]

'''충헌''': "네가 그리 하면 나라가 무슨 꼴이 나겠는가? 훗날을 위해 넌 가볍게 움직이지 마라."

여기서 자신이 왕에게 죽을 고비를 넘겼음에도 왕을 죽이지 않은 최충헌의 남다른 정치 센스를 알 수 있다. 자신의 군주를 죽이면 집권자에게 큰 리스크가 된다. 최충헌이 죽인 전임 집권자 이의민이 폐위된 의종을 죽인 것으로도 엄청난 부담을 짊어졌으니, 최충헌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최충헌은 진상 확인을 하고 왕준명 등 실행자만을 유배하고 희종을 폐위시킨 뒤 강화도[12]로 유배보냈다가 자연도[13]로 옮겼다. 희종은 유폐된 채 매우 힘든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희종은 이어 자연도에서 교동(喬桐)[14]으로 옮겨졌는데 최충헌의 부하가 희종을 찾아가자 그는 자신을 죽이러 온 줄 알고 매우 놀랐으며 부하가 희종의 재산을 확인하자 고작 쌀 6가마가 다였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최충헌 말:

"내가 어지고 용서할 줄을 몰랐다면 왕 부자가 어찌 오늘날까지 목숨을 보전했겠는가? 왕준명의 일을 다시 생각하면 내 머리카락을 곧두서게 한다!"

자신의 목숨을 끊기 직전까지 갔던 그 암살시도 건이 어지간히 무서웠었나 보다.

3.5. 폐위 후와 사망


고려사엔 언급이 없으나 희종은 폐위된 후 표면적으로나마 태상왕(대상왕)에 봉해진 듯 하다.[15] 고종 재위 연간에 사망한 '최보순 묘지명(崔甫淳 墓誌銘)'엔 아직 살아 있던 희종을 대상왕(大上王)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종이 희종의 아내 성평왕후의 시호를 올릴 때 희종을 상황(上皇)이라 칭하기도 했다.[16]
어쨌든 희종은 고종 재위 6년(1219년) 4월에 다시 '''개경으로 가게 된다'''. 그 이유는 삼녀 덕창궁주가 최충헌의 아들 최성[17]과 혼인을 하게 되었기 때문.[18]
그렇게 최충헌의 사돈이 된 그는 '''8년간 개경에서 잘 먹고 잘 산다'''[19]. 근데 재밌는 건 희종은 1219년 4월에 왔는데, 최충헌은 같은 해인 1219년 9월 20일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가능성이 있지만, 기록이 없으니 두사람이 과연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본인들만이 알 것이다.
그러던 고종 재위 14년(1227년)에 희종 복위 시도가 발각되었다. 고려사 최우 열전엔 당시 집권자 최우가 아끼던 무신 노지정[20], 금휘, 김희제[21], 주연지[22]가 서로 모의해 최우를 죽이고 희종을 복위시키려 한 것이다. 최우가 주연지의 집을 조사했을 때 주연지가 희종에게 보낸 밀지가 발견 됐고 밀지 중 한 부분에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 생사를 같이 할 것을 맹세하고 아버지처럼 섬기겠습니다."

결국 희종은 또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교동도로 또다시 옮겨진다. 편지까지 발견된 것을 보아 희종이 최우 일당의 불화를 이용해 나름 복귀 시도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님 주연지 일파가 난을 일으키기 위해 희종을 꼭두각시로 내세웠던 것일지도... 어쨌든 현 인천 교동면으로 유배된 뒤 돌아오지 못하고 근처에 있던 사찰 법천정사에서 승하했다.
유배다닌 기간은 (중간에 개경에서 지낸 기간을 빼면) 18년이었고, 향년 57세였다. 최씨 정권기에 집권한 고려 임금들 중 그나마 최충헌에게 정면 승부를 걸었으나 무참히 실패하고 꽤나 고단한 삶을 산 안습의 임금. 결국 사후에도 개경에 돌아오지 못하고 강화도에 묻혀야 했는데 아이러니하게 그 때문에 무덤은 제대로 남았다. 북한에 무덤이 있는 왕들의 묘는 거의 관리되지 않았는데 희종묘는 남한에 있어 형식적인 관리는 되었기 때문이다.

4. 평가


조선왕조는 고려사동국통감 등에서 '''"고려 희종은 흉적들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은 가상하나, 한치의 실수로 일을 그르쳤다"'''고 안타까워 했다. 왕당파 측 인사들 중 몇명이 최충헌 같은 권신을 제거하는데 흥분해 너무 갈팡질팡했고, 그 속에서 잡음이 생겨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만약 정말 '''수창궁 사변 때 최충헌의 살해를 성공했다면 고려 역사는 그야말로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희종의 측근이 지주사 사무실에 숨어있던 최충헌을 찾아내 암살했다면 최씨 무신정권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하지만 기형적인 무신정권이다 보니 최충헌 하나가 죽는다고 큰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최이나 곧바로 다른 누군가가 최충헌의 자리를 차지했을 수도 있다는 것.''' 어쨌든 희종은 여러모로 결정적이고 동시에 아쉬운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던 것이다.
희종의 암살 시도는 신라 신무왕진골 귀족들과 정면 대결하기 위해 장보고와 손을 잡고 기득권을 싹 갈아버리려 했으나 실패하였는데 자신이 요절하고, 장보고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보면 은근히 공통점이 크고, 조선인종 역시 조광조가 추진했던 개혁을 상당 부분 추진하려 했으나 요절로 끝났다는 점에서 보면 대체로 그런 왕들과 비슷했다.
개혁을 추진하려고 의욕적으로 움직인 것은 좋았으나 단지 그뿐, 결국 실패했다. 대체로 왕의 명분이 아무리 좋아도 명분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실리를 놓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왕이었다는 점에서는 한계점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개혁 관련에 있어서 조선 헌종과도 묘하게 매치되는 듯.

5. 가족관계


  • 태자비 왕씨 / 김씨: 희종이 일개 왕족이던 시절의 아내로 보인다. 태자비의 아버지는 숙종의 4대손 창화후 왕우이며 어머니는 명종의 딸 수안궁주이다. 희종과 자식은 없었던 걸로 보인다. 태자비는 기본적으로 왕족이라 왕씨일테지만 외할머니의 성씨 김씨를 썼을 수도 있다. 희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가 되었다. 허나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올리기 위해 강제로 내쳤다. 고려사 최충헌 반역 열전에 따르면 신종은 노골적으로 싫어했지만 최충수가 두번 세번 떠 보자 결국 충수의 뜻대로 폐비했다고 한다. 태자비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펑펑 울었는데, 선정태후 마저도 같이 울었고, 결국 궁중의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태자비는 평복을 입고 쫓겨났고 이후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 정장성평왕후 임씨(任氏):성평왕후는 생전 희종 7년인 1211년에 왕비 - 함평궁주(王妃 - 咸平宮主)에 봉해졌다. 동문선 37권엔 성평왕후가 위 작위에 봉해진 뒤, 신헌선정태후에게 올린 '사태후표(謝太后表)'[27]가 남아있다. 이 표문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고려 시대엔 왕태후에게도 표(表)를 올렸다. 또한 '왕태후 전하(王太后殿下)'란 표현을 보아 왕태후는 전하 경칭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성평왕후는 스스로를 '첩(妾)'이라 표현했다. 희종과 금슬이 굉장히 좋았던 듯 하다. 아들이 5명, 딸이 5명으로 총 10명의 자식이 있었다.
    • 태자 왕지(王祉): 맏아들. 아버지가 내쫓긴 뒤 폐태자된다. 후 창원후(昌原侯)에 봉해진 뒤 창원공(昌原公)으로 진작된다.
    • 시령후(始寧侯) 왕위(王禕): 둘째 아들. 아버지에게 황친(皇親)[23]으로써 번병(藩屛)[24]에 봉해지고 수사도(守司徒)[25] 검교태위(檢校太尉)[26] 상주국(上主國)을 받았다. 봉지 시령은 현 황해도 신천군이다.
    • 경원공(慶原公) 왕조(王祚): 셋째 아들. 충렬왕 대까지 살았으며 원종 대엔 왕실 어르신으로 많은 지식을 전달했다고 한다. 봉지인 경원은 현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이다.
    • 넷째와 다섯째는 각각 원정국사(圓靜國師), 충명국사(冲明國師): 고려시대엔 꼭 왕자 몇명을 출가시켰다. 희종의 경우 이 두 아들이 승려가 됐다.
    • 맏딸 안혜태후
    • 영창궁주(永昌公主): 둘째 딸. 정간왕의 8세손인 승화후와 영녕공(永寧公)의 어머니.
    • 덕창궁주(德昌宮主): 셋째 딸. 이 궁주가 자신 아버지를 비참하게 내쫓은 최충헌의 아들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과연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의문이다.
    • 가순궁주(嘉順宮主): 넷째 딸. 이 궁주의 딸은 원종의 2비 경창궁주다.
    • 다섯째 딸 정희궁주(貞禧宮主)

6. 기타


최충헌 묘지명엔 희종을 최소한으로만 언급했다. 신종이 최충헌을 불러 태자에게 선위하고 자기한테 공신호가 추가 된 점과 희종이 시도한 본인 제거 작전을 희종은 아무 것도 몰랐다는 식으로 대충 우대해준 뒤 바로 강종으로 넘어간다.
'''한반도 남부에 묻힌''' 4명의 고려 군주 중 1명이다.[28] 능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의 '''석릉(碩陵)'''.
최근 연구에 의하면 성평왕후 임씨도 강화천도 시기에 사망했기에 그녀의 능인 소릉(紹陵)도 희종의 석릉 근처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능묘의 석수, 부장품, 무덤 구조로 보아 정순왕후의 릉인 가릉이 성평왕후의 소릉이고, 바로 위쪽의 능내리 석실 고분군을 가릉으로 비정한 결과도 있다. #

7.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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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 정태우가 희종 역으로 출연했다. 최충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후반부에서 최충헌과 대립하는 안타고니스트로서 활약한다. 태자 시절부터 최충헌에게 불만을 품다가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고 원래 있던 태자비를 폐하자 반발하다가, 오히려 이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고 최충수를 몰래 불러 장인이라고 부르고, 신종의 밀지를 조작하여 보내는 등 최충헌, 최충수 형제의 충돌을 유도한다. 나중에 최충헌에게 밀지가 들통나서 그에 무릎까지 꿇고는 위기를 넘기고, 즉위 후에도 최충헌을 한없이 후대하다가 기회를 엿보고 결국 암살을 꾀하지만 결과는 역사대로.
또 웹툰 와탕카 중 최충헌의 엄청나게 긴 관직명을 소재로 한 이야기에서 잠깐 등장하기도 했다. 폐하...쫌전에 걥니다
코에이 게임 원조비사 원판의 시나리오2에서 고려 국왕으로 등장한다. 모든 능력이 C로, 그냥저냥 평범한 수준. 한글판에서는 엉뚱하게도 희종 다다음으로 왕위에 오르는 고종으로 교체되었다.
[1] 고려사 희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2] 고려사에서 언급은 안되지만 동문선에 실린 수기절일하전에 따르면 수기절은 왕태자 시절 절일로 보인다. 수기절일하전은 수기절 날을 축하하며 올리는 전문이란 뜻이다.[3] 희종의 왕후인 성평왕후가 성(成)자 돌림 시호를 받은걸 보면 이 버전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4] 고려사 종실 열전 희종 후비 중.[5] 이 사람이 공양왕의 직계 조상이다.[6] 품계나 명예직, 훈위를 제외하면 실 직위는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병부어사대판사이다.[7] 환관의 별칭.[8] 임금의 명령을 뜻한다. 보통 성지(聖旨), 선지(宣旨), 왕지(王旨) 등으로 말한다.[9] 지주사는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직위의 장으로 조선의 도승지, 현대의 비서실장급이다. 지주사방은 지주사의 사무실.[10] 놀랍게도 임금이 있는 별궁에 사병들이 제 마음대로 침입한 것이다. 도방의 권력이 엄청나다는 걸 알 수 있다.[11] 대사는 큰 일이란 뜻으로 당연히 왕을 시해하는 것을 의미한다.[12] 현 인천광역시 강화도.[13] 현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도.[14] 현 인천광역시 교동면. 후일 연산군이 유배가서 한 달 만에 죽은 곳이기도 하고, 20세기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15] 명종도 고려사에 없지만 본인 애책문에 태상왕으로 올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16] 사실 고종에게 있어서 희종은 친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장인이었다. 바로 그의 아내인 안혜태후 유씨의 아버지가 바로 희종이었기 때문.[17] 또는 최전. 기록이 많이 엇갈리는 편. 확실히 아시는 분이 수정 요망.[18] 이전에 왕건의 딸 낙랑공주가 경순왕과 혼인한 적이 있으나 제도가 정비되기 이전이었고 족내혼 풍습이 고착화된 이후의 공주가 최초로 족외혼을 한 사례이다.[19] 이걸 조선식으로 비유하자면 '''연산군이나 광해군반정으로 폐위+유배된 후 반정 공신과 혼맥을 맺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서 사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그만큼 최충헌의 권력이 기형적이었던 것.[20] 다른 이름은 노인수. 본인 노인수 열전이 있다. 본인 열전을 보면 알겠지만, 인생 노답으로 산 인간이다.[21] 고려사에 본인 열전이 있다. 근데 본인 열전을 보면 알겠지만, 희종 복귀 시도에 참가하지 않았고 최우의 일방적인 오해였다.[22] 처음 이름은 최산보. 승려였다. 최우 열전을 보면 알겠지만, 점을 치는 땡중이었다.[23] 왕의 친족.[24] 제후의 별칭.[25] 수직으로 삼공 직이다.[26] 검교직으로 검교는 명예직을 뜻한다. 태위는 삼공 직 중 하나로 가장 높다.[27] 태후에게 감사하는 표문.[28] 나머지 셋은 강화도에 묻힌 강종고종. 고양에 묻힌 공양왕. 이중 강종의 후릉(厚陵)은 강화도에 있다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 상세한 위치는 유실되었다. 다만 우왕창왕은 현재의 남한 영토에서 교살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시신 역시 남한 영토 내에 묻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최대 6명. 다만 조선시대 내내 이들은 고려 국왕 취급도 못 받았기 때문에 왕릉은 조성조차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