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해석학
"우리는 '''성령이 말씀하신''' 그 목적에서 우리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는다면, 참된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장 칼뱅-
"교부들은 기독교 신앙을 철학적 진리의 예증이라고 해석하는 것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앙을 지혜의 참된 형태라고 해석함으로써 신앙을 철학의 자리에 정치시켰다. 철학은 그 개념의 단어적 의미를 이 지혜에서 찾았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1. 개요
聖書解釋學
성서해석학. Theological Hermeneutics라고도 한다.
기독교와 성경의 발상지 및 그 문화권에서 생긴 사건과 사용된 말이 어떻게 오늘날 오늘의 문화권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해될 수 있으며 성령의 조명하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능한 원래의 의도대로 명확히 해석하고 밝히는 방법론을 연구 검토하는 학문.
기독교는 예수가 유대인들의 인간적인 관점으로 변질된 성서해석을 본인이 직접 하나님이 처음부터 의도한 원래 메세지로 정확히 해석할 수 있도록 경전을 풀어 설명하였다. 그 가르침을 전수받은 사도들과 사도교부들은 곧 주가 재림할 것으로 믿었기에 묵묵히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그러나 재림이 늦어지게 되면서 영지주의자들, 그리고 로마제국의 민간 종교지도자들, 유대인들로부터 지속적인 고발, 심문, 고문, 사형을 당하자 속사도들과 변증가들은 변호, 고백, 순교를 하면서 복음을 문자로 기록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성령의 감동에 따라 여러 다양한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이후에 A.D 120년 이후 교회가 전면적으로 로마제국에게 탄압받자 편지들 중 변증이 유독 뛰어나고 온전히 그 메세지의 의도가 제대로 담긴 편지들과 증서들, 토막글들이 교회 안에서 존경의 의미로 보관됐다가 신약성서로서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구약성서와 더불어 경전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레네오 주교, 아타나시오 주교는 카르타고공의회 이전부터 신약성서를 경전으로 부르며 그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가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바실리카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교부시대에 이르러 위대한 교회의 변증가들이 성경에 근거해서 끊임없는 변증과 신학논쟁들을 하게 되었다. 신론, 삼위일체론, 기독론, 성령론, 인간론 등의 신학이 교리로 정립되어 교회에 전수되면서 자연스레 강론이나 기도에도 성경을 토대로 한 해석이 각주처럼 달리기 시작하였고, 이게 설교집으로 묶여져서 책으로 나온게 '''성서 주석'''이다.
2. 성서해석학의 역사
사실 성서의 해석은 유대교의 성립부터(기원전 5~4세기 바빌론 유수이후) 접근하는 것이 옳으나, 내용상 방대해질 수 있으며 또한 기독교적 관점보다 유대교적 관점이 주를 이룰 수 있기에 이 문서에서는 생략한다.
교부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이 사목하던 지역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교적 계시와 진리를 바르게 전하기 위해 성경을 해석하였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가 진리라고 믿었으며 이방인들에게는 이질적인 유대적 배경을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설명하는 주해방식을 택하게 되었고 이것이 성서해석의 시작이 되었다. 또한 그들의 메세지를 세상철학의 방법으로 상대방이 익숙한 개념을 입혀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서기 1~3세기의 로마 상류층은 수사학과 시학, 역사학 공부가 기본이며 철학, 법률학까지 빠삭하게 교육받았다. 로마의 직할시로 인정받은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로마인으로 인정받았고 그곳에서 태어난 교부들과 감독들도 자연스레 로마의 교육풍에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당대 철학자들과 논쟁에서도 지지 않을만큼 필력과 어휘력, 지적 수준이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고 변호하기 위해 무척 애를쓰고 노력하였다. 이후 로마에서 공인된 기독교는 여러차례 공의회를 거치며 철저히 성경에 기반해 교리를 탄탄히 다지는 '신학'이라는 학문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교부들 중 세상학문에도 특출난 교부들이 더러 존재했는데, 이들은 어릴 때부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키케로의 국가론, 의무론, 법률론 등등 여러 철학서적들과 지혜서적을 자연스레 읽어왔기에 어떠한 문서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전에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알아야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계시의 책인 성서가 위의 책들보다도 훨씬 더 큰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 교회조직과 성경의 정경화가 미처 이뤄지지 않았던 시대(기원후 70~200년 사이)에서 이러한 교부들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졌다. 이들의 독특하면서도 다양한 성서해석은 후대에 정통 교리로 받아들여진 것도 있었고, 오리게네스, 테르툴리아누스 등과 같이 일부 가려져 선별적으로 인정된 것도 있었다.
2세기부터 교회를 공격한 마르시온의 도전으로 교회 지도자들은 신도들에게 그들의 자의적인 해석을 경고하고 교회의 올바른 전통에 따른 해석을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지역을 관리하는 성직자들인 주교와 사제의 권위가 높아지고 교계제도가 확립된다. 순교자 유스티노스 사제는 최초로 성경을 질서 있게 사용하는 방법을 썼다. 특히 리옹의 주교인 이레네오는 철저히 성경적 해석에 따라 영지주의자들을 비판하였다. 삼위일체론에 위대한 기여를 한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해석을 위하여 순결한 영혼과 그리스도를 따른 덕이 있어야 하고, 문맥에 의해 해석하며, 전체 성경의 유추(믿음의 유추와 동일함)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희랍철학이 왕성했던 알렉산드리아의 교회들은 성서를 신비적, 은유적으로 해석했다. 이 모임이 학파를 이루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전통은 알레고리 해석, 즉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신학이 강하였다. 반면 스토아, 라틴철학이 왕성했던 안티오키아의 교회는 문법적, 문맥적으로 성경을 해석했고, 이 또한 학파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으로 안티오키아 학파의 타르수스의 디오도로스(Diodore of Tarsus)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레고리 해석을 비판하고 성서의 내용에 대한 역사적 확증성과 실재성을 강조하였다. 몹스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Thehodore of Mopsuestia) 역시 알레고리 해석을 주관적인 성경 해석이 될 수 있으므로 성경을 잘못 해석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면서, 신학자는 건전한 신학적 판단에 의거하면서, 문자적 의미를 확고히 하기 위해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인 자료들을 보충자료로 사용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는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와 실제적인 적용에 관심을 가졌다. 키루스의 테오도레투스(Theodoret of Cyrus)는 비유적이고 모형론적인 해석을 수용하면서 언어학적 분석을 하였다.
이들 교부들은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어 양지로 나와 활발한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되면서, 공의회를 통하여 각자의 의견을 토론하고 정통 신앙을 확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통으로 인정받고 교회 학자이자 성인으로 공경받게 된 이들도 있었지만, 아리우스, 네스토리우스등과 같이 이단으로 판결된 이들도 있었다.
9세기 카를 대제의 문예부흥기에 본격적으로 스콜라 철학이 시작되던 시기에는 이전의 교부들이 시도해왔던 해석들, 특히 미학에서도 강조했듯이 신 플라톤주의에 기반한 성서해석들이 교리화되던 것에 반발하여 이슬람 문화에서 보존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연구하여 논리학, 자연철학, 심리철학, 형이상학,윤리학, 천문학, 연금술, 법학, 생태학이 학문으로 개설되고 신학에 대한 대대적인 논의가 재검토되며 신비주의가 태동하게 된다.
13세기 극렬한 변화의 시대에 놓여있던 교회는 기존의 신플라톤주의, 플로티누스의 해석들을 고수하는 편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중심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편으로 나뉘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람은 안셀모, 보나벤투라,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이때의 해석학적 논의들도 스콜라주의, 실재론을 토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성으로 최대한 성서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은 형이상학, 초자연의 영역으로 넘겼다. 결국 초대교회인들의 신앙과 속사도시대의 신앙은 소위 비신자들에게 진리를 더 명확히 전하기 위해 철학이란 도구를 차용했다가 반대로 잡아먹히게 된 형국이 되버렸다.
15세기 윌리엄 오컴을 시작으로 유명론이 나타나면서 "하느님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여 행동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런 하느님을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했다. 오컴에 의하면 신은 제한적(ordered)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점에서만 우리는 신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이 자연 질서에 따라 운행하며 합리적으로 행하는 것들은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인간이 신에 대해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신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인간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오컴은 신학체계를 성경을 통한 계시에 기초하지 않고 자연을 통한 이성에 기초하여 세우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로 주장하였다.
오컴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기존의 신학자들이 이성으로 신학체계를 세우려고 시도하는 것을 비판하였고, 교리는 합리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신의 계시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6세기 르네상스 시기에는 스콜라 신학에 대한 반발과 문헌학과 역사학의 발전으로 고전, 고대의 모습들을 복원하려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다시금 교부들의 신플라톤주의 신학을 재정립해서 문예부흥을 유도하기도 했다.
17세기 종교개혁 시기가 되면서 마르틴 루터는 교회의 권위보다는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였으며, 중세의 4중적 의미의 해석을 버리고 철저히 성경적인 문맥적 해석을 중시했다. 루터는 히브리어 구약성경과 코이네 헬라어 신약성경, 즉 성서가 쓰여진 언어의 사본을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이미 과거의 죽은 언어를 현대의 언어로 표현하면 문법적 손실이 어느정도 일어나게 된다는 점을 인지했지만 그럼에도 많은 대중들이 성경을 읽지도 못하는 것에 탄식하며 번역착수에 들어갔다. 해당 언어 고유의 지리적 해석과 문학적 기법들이 무시될 수 있기 때문에 루터는 번역을 할 때 최대한 단어 하나조차도 성경시대의 의미대로 번역하고자 노력했다. 나머지는 주석이나 각주를 달면서 이해를 도왔다. "성경은 예수를 담은 구유"라는 말에서 잘 드러나 있듯이 루터는 그리스도론 중심의 해석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 뒤에 장 칼뱅이 등장하는데, 장 칼뱅의 기독교 강요와 성서주석들은 칼뱅의 해석학이 여지없이 뛰어남을 증명해주며 현재까지 목사들의 베스트 셀러로 통용되고 있다. 칼뱅은 성서의 영감을 유기적 영감설로 해석하였고 성서에서 추구하는 지상의 국가를 신본주의에 입각한 유토피아적 국가로 상정했다. 또한 역사적, 문법적 해석을 처음으로 사용한 신학자가 바로 장 칼뱅.[1]
이때부터 성서해석학은 교리를 답습하던 현실의 차원에서 한 차원 도약하여 종교개혁자들의 각각 고유한 그리스도론과 종말론 등등의 사상들이 해석에 활용되었다. 이들이 성서 해석을 할 때 일관되게 강조한 명제는 "'''성령이 확실한 해석자'''이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성령의 조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였다.
종교개혁 시기이기에 이러한 문헌해석학이 성장하는 과정 속에 있었기에 성서를 해석할 때 쓸데없이 장황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가능한 짧고 간략한 방식을 유지하려 시도하고 해석시 애매한 점을 제거시켜 단순성을 가지고 독자들에게 쉽게 이해되게 하도록 도왔다. 어떻게보면 이단으로 빠지지 않게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줬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정신이 근대로 넘어오게 되면서 대학의 철학과에서 해석학이 도입되고 고전 비평, 문학 비평 등의 분야가 개척이 된다. 이후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유물론적 해석학을 최초로 신학에 적용시키면서 소위 성서비평학이 탄생하고 역사비평이 설교강단에 적용되기 시작한다.
3. 근대의 성서비평학과 보편적 해석학의 등장
역사 비평적 방법(historical-critical method)은 간략하게 역사적 방법, 또는 역사적 비평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비평적”이라는 말은 성서 연구에 있어서 일체의 교회의 전통이나 교리에 구애받지 않고 거기에서부터 전적으로 자유한 입장을 나타낸다.[2] “역사적”이라는 말은 첫째, 세속적인 역사학에서 적용되는 척도를 성서 연구에도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역사적”이라는 말은 연구의 대상 또는 목표를 가리킨다. 세속적 역사학의 일차적 관심이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느냐?”(What happened really?)에 집중되는 것처럼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시대의 역사 비평적 성서연구에서는 주로 성서에 보도된 사건들이 보도된 그대로 일어났느냐 아니냐를 확증하려는 역사 실증주의적 관심이 지배했다.[3] 그래서 이 당시의 성서비평학은 역사비평에만 머물렀고 그 다음에는 윤리적 해석, 낭만주의적 해석, 식민주의적 해석과 같이 근대적 시대사조를 따라갔다. 이런 비신자들의 세속적 해석에 대항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바로 경건주의자들이었다. 대표적인 사람은 장로교의 존 녹스, 감리교의 존 웨슬리, 루터교의 필립 슈페너.
18세기는 이성을 절대시하는 유물론에 의해 초대교회 시절처럼 성경이 공격받기 시작하자 신앙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학자들이 이것에 맞대응하며 근대철학이 종교에 제시한 주장들에 반박하고 변증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모든 해석은 해석자의 믿음과 신앙에 따라 관점과 시각이 결정되고 그에따른 해석이 나오므로 철저히 성경적인 해석을 위한 보편적인 해석학의 토대를 마련하고 모델을 제시하며, 성경 텍스트의 계시적 권위를 지키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성서해석학의 역사에서 특히 당대의 사조와 흐름을 무비판적으로 흡수하여 이성주의 관점에서 해석을 시도한 슐라이어마허는 근대 이전 아우구스티누스, 마르틴 루터에 이르기까지 성서해석학의 방법으로 널리 활용되었던 문자적, 문맥적 해석 방식에 큰 회의를 품게 되었다. 성서를 더이상 신앙과 은총이 아니라 당시 유럽을 휩쓸던 무신론적 방법론을 도입한 그는 신학에 크나큰 위협이 되었다. 물론 그의 철학적 해석학은 딜타이로 이어지며 일반 학문에 더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계몽주의 시대의 소위 성서비평학 연구는 성서를 교회의 전통과 권위, 그리고 교리로부터 해방시켜 하나의 세속적 문서를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탐구하는 것을 뜻했다. 이러한 연구방법의 맹아는 15·16세기의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에서 희랍·로마의 고전적 문헌을 연구하기 시작하는 데서 생겨났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성서 자체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통과 권위에 정면으로 대립시킴으로써 다음 세기에 있어서 성서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촉진하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국 1870년 제1차 바티칸 종교회의를 통해서 역사 비평적 방법을 공적으로 금지시켰다.
4. 성서적 해석학
성서적 해석학은 성서비평학의 공허한 비평을 비판하고 등장한 안티테제이다."무지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에 하는 것 같이 '''억지로 비틀어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which they that are unlearned and unstable wrest, as they do also the other scriptures, unto their own destruction.)
-베드로후서 3:16 b-
흔히 말하는 성서해석학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로 인해 만들어진 보편 해석학, 일반적으로 철학적 해석학이라고 불리며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를 반영한 관점에서 해석학을 다루는 것이다.[4] 반면 '''성서적 해석학'''은 성서비평학을 일반학문적인 참고자료 정도로 받아들이는 정통주의와 복음주의 계열을 의미한다. 세속적인 성서비평학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성경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닌 성령의 영감을 받은 다양한 저자들이 기록한 특별계시적인 관점을 견지하며 이에 따른 해석학을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5] 따라서 성서적 해석학은 오히려 성경해석학을 보필하고 세워주며, 필요에 따라서는 성서해석학을 검증하는 역할도 한다.
모더니즘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면서 종말을 고하고 자유주의 신학 전통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19세기에 출현했던 자유주의적 성경주석과 신학의 역사비평적 접근은 급진적인 정치적, 과학적 도전들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세상에서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할 수 없음이 입증되었다.[6] 그 이후 신학자들은 성경의 계시를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하는 정통주의, 복음주의 노선과,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가 맞지만 그것의 역사적 실증적 사실여부는 상관없다(?)는, 따라서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고 우리 삶에만 실존적으로 적용하면 그만이라는 하이데거식의 접근방법을 도입하여[7] 반쪽자리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갈라지게 된다. 여기에 대표적인 인물들이 칼 바르트, 루돌프 불트만, 위르겐 몰트만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텍스트와 종교적 문헌을 오로지 역사적으로만 다루는 방법을 초월한 인간학적 토대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성경 메세지와 이 세상의 재해석된 인간의 현존재 사이의 새로운 창조적인 종합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의 실존적인 요구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모든 신학자들이 이와같은 허공에 붕뜬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바르트는 정경비평을 출발점으로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친 문서가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정경으로서 성서를 바라보았지만, 통시적 접근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비평방법들을 도입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저자와 배경은 중요하지 않게 되고 긴 역사를 거친 책을 보는 독자의 관점이 중시되는데, 현대인들에게 친숙한 언어로 해석하는 것을 필수로 하며 현대철학 즉, 실존주의와 현상학, 철학적 해석학, 언어학, 행동주의 연구방법을 모두 차용하는 비평방법들이 등장하게 된다.[8]
이들은 과거의 공시적 접근, 역사적 해석(historical interpretation)을 거부하며, 이른바 통시적 접근, 실존적 해석(theological interpretation)이라고 자신들을 지칭한다. 역사적 해석은 해당 텍스트를 읽을때 문맥적 흐름을 더 명확히 밝히고 참고하기 위해 쓰이며 독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하려고 했던 바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라면, 실존주의적 해석은 루돌프 불트만의 의견으로 '''그 본문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를 말해주는가, 즉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구속력 있는 신적인 건넴말(Anrede)로 들려오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반대로 한스 프라이와 같이 '''우리가 어떻게 그 삶을 따르고 실천함으로 그 이야기에 속할 수 있는지'''를 고심해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성서비평학에서의 성서해석 또는 주석은 역사적 해석에 국한된다. 이러한 해석과 주석은 어차피 평신도를 대상으로하는 설교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요소이다.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그것이 의미가 없다. 들려줘도 '어쩌라고'라는 냉소적인 말밖에 들려오지 않을 것이다. 독자들은 '지금 당장 나에게' 말을 거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성경의 기록들과 텍스트들이 단군 신화와 다를바가 없다면 도대체 그 교훈이 성도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왜 굳이 매주 하루씩 교회를 가서 시간을 낭비해야하는가? 세상에는 그보다 더 재밌고 유익한 수많은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차라리 그것을 듣지 소설에 불과한 고리타분한 책에 관한 설교를 꾸역꾸역 들을 필요가 있는가? 성경이 진실위에 기초하지 않으면 그 '메세지'에 아무런 힘도 없으며, 사실 이들은 더 교묘하게 성경을 진실과는 괴리된 것으로 자기들 스스로 분리시켜놓고 그 '말'들이 대상에게 제발 의미있기를 바라고 애걸하는 것 뿐이다. 반면 성경의 진술대로 그리스도를 '''살아있는 말씀''' 그 자체로 믿으며, 실제로 성령이 우리의 내면에 역사하여 현대인의 여러 중독과 정신병과 죄에 눌린 영혼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의 피로 끊고 새 삶을 살도록 하는 힘이 성서 텍스트에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초대교회부터 이어진 '''정통신앙적 해석학'''이다.
이 문서 또한 편향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글이기 때문에 정답은 없다. 정통신앙적 해석학도 '''교회를 다니는 기존 성도들을 목회하고 지도하기 위해 설교를 이용하는 방법'''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교회는 교인으로 등록하여 예배와 설교에 참여하는 자들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선교적 방법에서 문제가 있다. 예수의 지상명령은 '''가서 제자삼으라'''이지 '''가서 설교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에 대한 관점을 세상학문과 비신자와 소통하고 변증,변호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예배를 드리는 기존 성도들을 정통신앙으로 잘 인도하기 위해서인가 가운데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달렸다. 위에서 강조하는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진 정통신앙적 해석학'''도 굉장한 어폐가 있는데, '''정통신앙적 해석학이 존재하긴 하는가? 각 지역과 문화에 따라 교부들의 성서해석이 달랐으며, 철학에 정통했던 교부들은 오히려 철학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성서해석에 활용했다.''' 그리고 모든 개교회가 '''정통신앙적 해석학'''을 고수할 형편이 못된다. 이 몫은 오로지 목회자에 달린 것이 아니며 성도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당회에 달려있다.
괜히 최근 성서해석학계에서 전례나 성사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만을 강조하게 되면 설교자의 사고에 교인이 무비판적으로 끌려가야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인이 교회를 선택하고 설교자를 비평할 수 있게된 현대사회에서 기존의 정통신앙적 해석을 강조하는 것은 심히 시대착오적인 사고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1] 그의 시대에 이게 가능해진 것은 르네상스 시기의 인문학 원서 연구 유행과 북방 르네상스(알프스 이북을 중심으로 성경이나 주석을 그 시대의 언어로 롤백시켜서 이해하고자 했던 문예운동)의 역사문맥적 이해가 시대적으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2] 따라서 기독교의 진리를 믿지 않는 세속학자의 관점과 해석이 아주 강하게 녹아져있다고 봐도 무방하다.[3] 물론 그것이 실증이 가능하긴 하냐는 일단 뒤로 제쳐두고[4] 신정통주의, 여성신학, 해방신학, 신(新)스콜라주의 등과 같은 유물론적 사고와 마르크스주의를 동반한 신학들이 여기에 속한다.[5] 여기서 성서적이라 하면 기독교의 전통과 체험, 그리고 성령의 조명의 원리까지 포함하여 초대교회부터 이어진 성경적인 해석학의 방법론을 연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6] 결국 세속적인 학문은 그 교조적 신앙의 밑바탕이 유물론이므로 그러한 관점을 가진 해석은 당연히 무신론적이고 유물론적인 해석밖에 나올 도리가 없다. 소위 이성주의니 오늘날에 몰아치는 과학주의라는 유행 또한 마찬가지다. 실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절대화 시켜버리니 마치 수학에서의 함수처럼 정해진 공식대로 출력값이 나오는 셈이다.[7] 어찌보면 매우 유심론적인[8] 그러나 이것은 마치 메세지를 말한 상대방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독자의 관점만 중요하다는 매우 우스꽝스런 상황을 초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