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사지 철당간
1. 개요
충청북도 청주시의 국보.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이라는 명칭으로 국보 제4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보 제106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국보 제297호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와 함께 청주시의 3개 뿐인 국보이다. 또한 용두사지 철당간은 다른 두 국보와는 달리 유일하게 건조물 형태이다.
2. 상세
2.1. 형태
지름 46~39cm[1] , 높이 65cm 가량의 철통 20개를 쌓아 13.1m의 탑을 이루고 있다. 본래는 비어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콘크리트를 채워 보수하였다.# 본래 30개였으나 10개가 소실되어 현재에는 20개이다. 일설에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한다고 10개를 갖고 갔다고 하나 확인된 것은 아니다.
'용두사'''지''''(龍頭寺址)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래 이곳에는 용두사가 있었고, 철로 된 이 당간(幢竿)[2] 은 용두사의 부속으로 깃발(幢)을 매달아두는 곳이었다. 이후 용두사는 없어지고 철당간만이 남았다. 다만 감은사지나 황룡사지는 절의 주춧돌이나마 남아있는 반면, 이곳에는 철당간만이 남아있을 뿐 절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높은 깃발을 세워두면 배 모양을 한 이 도시의 큰 돛 역할을 해 홍수 피해가 덜해질 것이라고 해서 세워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3] 그래서 청주의 별명이 '배 모양의 성'이라고 '주성'(舟城)이기도 하다. 1911년에 배 모양을 하던 청주읍성이 해체되어[4] 그런 모양새는 좀 덜해졌다.
오래되기도 오래됐고, 청주라는 커다란 배의 돛대라는 상징성도 있다 보니 청주시에서 제작한 상징물 중에서 용두사지 철당간의 모양을 형상화한 것들이 있다. 일례로 서원구 사창동 시계탑은 아래 기단 부분이 용두사지 철당간의 모습을 본딴 것이다. 2009년 이전에 지었던 시계탑은 모양이 더욱 철당간과 닮았다.
제3단에는 아래와 같이 글이 새겨져있기 때문에 국립청주박물관에도 복제품이 소장되어있다.
2.2. 이름
오늘날에는 '당간'이라는 단어 자체가 거의 쓰이지 않기 때문에 '철당간'이 한 단어처럼 인식된다. 구글 검색도 그렇고 나무위키에서도 '철당간'이라고 검색하면 대부분의 경우 용두사지 철당간이 검색된다.[5] 그리고 재료 + 물건의 조어 방식이라 사잇소리가 들어가 [철땅간]이라고 읽는다.
이따금씩 '''용두사미''' 철당간이라고 오타를 내는 사람도 있는 모양.
2.3. 위치
청주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수도 없이 많이 봤을 정도로 시내 중심지에 있다. 성안길 한복판으로, 서점 건물과 롯데 영플라자에 낀 작은 광장을 이루고 있다. 무척 작은 광장이기는 하나 이따금 이곳에서 촛불집회가 열리기도 한다. 2008년 촛불집회는 물론이고 # 2016년을 뜨겁게 달군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 당시에도 청주에서는 이곳에서 집회가 열렸다. #
청주 중앙공원과도 가까운 위치에 있다.
오늘날 서점이 있는 자리엔 청주극장이, 롯데 영플라자 자리에는 현대극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기사에 철당간의 옛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많이 있다. 철당간이야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지만 주변 경관이 크게 변해서 신기하다.
동쪽에 상당로와 가까워서 청주시 시내버스 정류장 중 "용두사지철당간"으로 이름이 붙은 정류장(1611)이 있다. 용두사지 철당간은 큰 길을 직접 끼고 있지는 않기에 롯데영플라자 건물 너머 상당로 51번 일대에 정류장이 설치되어있다. 지도로만 보면 정류장과 철당간 사이에 롯데영플라자로 막혀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롯데영플라자(상당로 55)와 그 남쪽 건물 사이에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있다. 바로 맞은편에는 정류장이 없고 남쪽 구남궁병원사거리 더 남쪽으로 '서운동' 정류장이 있다. 북쪽의 맞은편 '도청' 정류장도 꽤 가까이 있는데, 실제 도보 거리로는 '서운동' 정류장이 근소하게 더 가깝다.
2.4. 연대
이 유적은 건립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아래 철당기 맨 끝(이미지 오른쪽)을 보면 준풍(峻豊)[6] 3년 2월 29일에 건립했다고 되어있어 광종 13년(962년)에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가히 1000년도 전의 유물로 현 청주시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7] 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재미있게도 용두사지 철당간의 국보 지정 연도는 1962년으로 건립 연도로부터 딱 1000년이 되는 해이다.
2.5. 용두사 철당기
[image]
아래에서 세 번째 단에 새김이 있다.'''龍頭寺鐵幢記'''
前翰林學生金遠撰兼書 鐫者孫錫
早聆幢竿所製餝佛門之玉樓播盖由來
粧寶殿之神旆其猶也鶴翔碧空龍躍
下霄立之者旁發信心望之者心傾丹
愿 固 知伏魔 鐵 杖挫 賊 霓 旌 / 頃有堂大
等金芮宗者也州里豪族鄕閭冠族偶因染
疾忽約[8]
佛天仰祈則敬造鐵幢俯擔則莊嚴玉刹然而
難停逝水易沒黃泉已間數歲遲延隔時
容易於時從兄堂大等正朝賜丹銀魚袋[9]
金希[10]
一等彼爲還願此繼頹繹令鑄成三十段之鐵筒連立六十尺之幢柱 / 穿雲
捧日貫霧倚空魯氏雲梯難攀龍盖甘
寧錦纜永敞璅繩可謂奉仁心深典亡情切
植金剛之不朽營玉刹之無窮 / 僕者膠柱頑
流剋舟膚物忽蒙勸我聊表短章其詞曰 /
幢竿始立天半 可壓巧成物像莊嚴佛法兄
弟兩 家令脩善業鑄之植之无窮永劫 /
當寺令釋紬大德 檀越兼令金希一正朝金守▨
金釋同釋希▨ 金寬謙大等監司上和尙信學▨▨
前侍郎孫熙 前兵部卿慶柱洪大學院卿韓明
寔柰前司倉慶 奇俊大舍學院郎中孫仁謙鑄大▨▨ /
維峻豊三年太歲壬戌二月二十九日鑄成
'''용두사(龍頭寺) 철당기(鐵幢記)'''
전 한림학생(翰林學生) 김원(金遠)이 짓고 아울러 썼으며 새긴 이는 손석(孫錫)이다.
일찍이 듣건대 당간(幢竿)[11]
이 만들어진 바는 불문(佛門)을 꾸미는 옥 같은 표지이며 번개(幡盖)[12] 의 유래는 법당을 장엄하는 신령스런 깃발이라 하였다. 그 모양은 학이 푸른 창공을 날아 오르고 용이 푸른 하늘을 뛰쳐 오르는 것과 같다. 세운 사람은 크게 신심(信心)을 일으키고 바라보는 사람은 반드시 충정의 정성을 기울일 것이니 진실로 마귀를 항복받는 쇠지팡이요 도적을 물리치는 무지개 깃발(霓旌)임을 알겠다.근래에 당대등(堂大等)[13]
김예종(金芮宗)이라는 이가 있으니 고을의 큰 가문이요 지방의 손꼽히는 집안이다. 우연히 병에 걸려 문득 부처와 하늘에 약속하기를, 우러러 철당간을 삼가 만들기를 빌고, 엎드려 훌륭한 사찰을 장엄할 것을 맹서하였다. 그러나 세월은 멈추기 어렵고 죽음에 빠지기는 쉬워 그 사이에 몇 년이 늦어지고 때는 쉽게 멀어졌다. 이때에 종형인 당대등 김희일(金希一) 등이 저쪽에서 돌이킨 서원이 되게 하고 이쪽에서 끊어진 인연을 이어 마침내 30단의 철통을 주조하게 하고 이어 60척의 당주(幢柱)를 세웠다.구름을 뚫고 해를 받들고 안개를 관통하여 공중에 기대어, 노씨[14]
의 사다리로도 용개(龍盖)에 오르기 어렵고 감녕(甘寧)[15] 의 비단 밧줄로도 옥돌(璅) 줄을 당하기 어렵겠다. 죽은 이를 받드는 마음이 깊고 망한 이를 일으키는 정이 간절하여, 금강(金剛)의 썩지 않음을 심고 옥찰(玉刹)의 무궁함을 영위한다고 할 수 있겠다.나로 말하면 교주(교주고슬)와 같은 완고한 부류요, 각주(각주구검)와 같은 헛껍데기 무리이거늘, 홀연 나에게 권유하니, 짐짓 짧은 글로 표현할 따름이니, 그 내용은 이러하다.
* 幢竿始立天半可壓 (당간이 처음 서서 하늘 가운데를 압도하니)
* 巧成物像莊嚴佛法 (교묘하게 이루어진 물건의 형상이요, 장엄한 불법이로다)
* 兄弟兩家令脩善業 (형제간 두 집이, 선업을 잘 닦아서)
* 鑄之植之无窮永劫 (주조하고 세우니, 영겁토록 무궁하리라)
이 절(용두사)의 영(令)은 석주(釋紬) 대덕(大德).
단월(檀越) 겸 영(令)은 김희일(金希一) 정조(正朝), 김수▨(金守▨), 김석희(金釋希) 대등(大等)[16]
, 김관겸(金寬謙).감사(監司)는 상화상(上和尙) 신학(信學), ▨▨, 전시랑(前侍郎) 손희(孫熙) 대등, 전병부경(前兵部卿) 경주흥(慶柱洪) 대등, 학원경(學院卿) 한명식(韓明寔)[17]
나말(柰末)[18] 전사창(前司倉) 경기준(慶奇俊) 대사(大舍)[19] , 학원낭중(學院郎中) 손인겸(孫仁謙).주대▨▨(鑄大▨▨)
준풍(峻豊)[20]
3년(962, 광종 13) 임술년 2월 29일에 주조하여 완성함.[22] ( / 는 내용상의 구분)
3. 기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이 철당간을 언급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4. 바깥고리
- 한국어 위키백과 :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 답사여행의 길잡이 12 - 충북 : 용두사지 철당간
- 답사여행의 길잡이 12 - 충북 : 용두사터 철당간
- 대한민국 구석구석 :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 대한민국 구석구석 : 용두사지철당간
-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 용두사지 철당간
- 두산백과 : 용두사지 철당간
5. 국보 제41호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현재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두 기둥은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도드라지게 선을 새겨 단조로운 표면에 변화를 주었다. 그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하였고, 돌기둥의 맨 위쪽에는 빗장과 같은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을 단단히 잡아매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간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 하는 고려 광종 13년(962)으로,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우리 문화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이름하였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