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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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 광화문 촛불집회
2004년 3월 20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탄핵 반대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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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7일 촛불집회 당시
서울시청 앞 광장'''
'''2016년 12월 3일, 6차 주말 촛불집회 당시
광화문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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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진보 단체만 촛불집회를 하는 것은 아니다.[1]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브라티슬라바에서 주최된 슬로바키아 독립 촛불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행진하는 장면.[2]
1. 개요
2. 역사
3. 관련 문서


1. 개요


Candlelight Vigil
시위·집회 문화의 한 종류.
역사와 전통이 깊은 비폭력 시위 방법 중 하나이다. 외국에서 일어난 유명한 촛불집회 중 하나는 1978년 샌프란시스코의 시의원이었던 하비 밀크가 총격으로 사망한 후 3만 명이 모여 추모를 한 집회이다.[3] 이 사람을 죽인 인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트윙키 변호 문서로.
candlelight vigil은 촛불집회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반대하는 뜻의 촛불집회라는 뜻으로 한정한다면 candle protest나 Candle demonstration 따위의 낱말로도 검색할 수 있다.
주로 촛불집회라고 부르긴 하지만 촛불문화제라 부르기도 하며 촛불과 함께 유머러스한 피켓 등을 들고 참석하기도 한다. 2016년 11월에 보도된 사진들

2. 역사


이 시위가 대중화된 것은 1989년에 일어난 슬로바키아 독립 요구 촛불집회 때문. 당시 슬로바키아 사람들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립하기 위해 프라하(체코의 수도)와 브라티슬라바(슬로바키아의 수도) 지역에 몰려와서 독립을 요구하는 촛불집회를 벌였다. 이 이후 촛불집회가 시위의 한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언론을 통해 확인되는 '한국에서 일어난 첫 촛불집회'는 1974년 9월 26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주관한 시국기도회였다. # 이처럼 초창기 촛불집회는 천주교개신교 등 종교계에서 주로 이뤄졌는데, 6월 항쟁 시기에도 종교계의 주도로 촛불집회가 진행되었다. 6월 15일에는 명동성당에서 촛불집회가 있었고 # #(21:03부터), 6월 22일에는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촛불집회가 있었다. # #(10:14부터) 이외에도 6월 항쟁 시기 전국 각지에서 촛불집회가 있었다. # 이렇게 보면 한국 촛불집회의 역사가 상당히 긴 것을 알 수 있다.
1992년에는 케텔 유료화에 반대하여 촛불집회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PC통신 초창기에 케텔이 하이텔로 바뀌는 과정에서 그때까지 무료였던 서비스가 1달 9,900원을 받는 유료로 전환되었고, 그때까지 공짜로 PC통신을 사용하던 유저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웬만한 시위에는 백골단이나 화염병(속칭 꽃병) 같은 게 나도는 게 일상(...)이었던 시절인 데다가 아직 PC통신 이용자가 수십만 명 정도에 불과했던 때라 큰 화제는 되지 못하였고 그냥 묻혔다(...). 그러나 이 집회는 이용자들의 요구 상당수가 받아들여졌다. 이용자들이 주장한 것은 계속 공짜로 사용하게 해 달라는 것보다는 결제 방식이 신용카드만 있는 등 너무 부실하니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것이었고[4], 하이텔은 이 요구를 수용하여 결제 방식에 지로 선납을 추가하고, 1990년대 후반까지 가입비 면제 정책을 쓰는 등 방향을 수정했다. 그리고 이 촛불집회의 결과로 이용자 이익 단체로 하동연(하이텔동호회연합회)이 설립되는 등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다.
이후 2000년대 들어서는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사건 때,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의 기자(겸 네티즌[5]) '앙마'가 추모의 촛불을 켜자는 주장을 한 것에서 다시 촛불집회가 시작되었다고 알려진다.[6]
집회에는 흔히 수련회에서 사용하는 양초의 불이 꺼지거나 촛농이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 종이컵으로 받침을 해 놓은 형태로, 자신이 직접 가지고 나오거나 아니면 집회를 주관하는 단체에서 나눠 주는 경우가 있다. 단 후자는 마지막에 다음 시위 때 쓸 양초 구입을 위해 모금 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시위 형태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때 일어난 촛불집회를 기점으로 참여자가 많은 양상을 띠게 되었으며, 이후 2008년 5월 한-미 쇠고기 협상 문제로 일어났고, 2011년 6월에는 반값 등록금 공약 논란으로 인한 촛불집회가 서울에서 일어났다. 2013년 6월부터는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의혹과 상관된 촛불집회가 열렸다. 2014년에는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 있는 촛불집회가 열린다.[7] 그밖에도 한미FTA 반대 등 촛불집회 형태를 띤 크고 작은 집회가 상당히 잦아졌다.
2016년 10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언론보도에 의한 여파로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집회인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청계천에서 일어났으며 참여자들은 광화문 광장까지 행진하며 퇴진을 요구했다. 또한 부산, 울산, 전주, 제주도 등 전국 대도시에서도 촛불집회가 일어났다.
단지 의견을 모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의견을 주장하는 것에 불과한 행위였지만, 진보, 보수 할거 없이 많은 국민들이 집회에 참가하여 무려 한국 정치계의 가장 큰 문제점중 하나인 진영론이 무너졌고 국회의원들과 언론들을 크게 움직이게 만들어 대통령의 탄핵 소추와 가결 후 파면, 그리고 새로운 대통령[8]을 선출하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 대사건이자, 평화적 방법을 통한 대혁명으로 일컬어지며 세계적 관심을 받았다.

Demokratie und Asien – das soll nicht zueinander passen? Im Augenblick sieht es eher so aus, als könnten Amerikaner und Europäer von den Koreanern lernen, wie man die Demokratie mit Mut und Leidenschaft verteidigt.

민주주의아시아, 이 둘은 서로 맞지 않는 것인가? 오히려 지금은 이렇게 보인다. '''아메리카와 유럽인들은 한국인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어떻게 민주주의를 용기와 열정을 가지고 지켜내는지 말이다.'''

디 차이트. 2016년 12월 14일. ##, 전문 번역


South Korea just showed the world how to do democracy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워싱턴포스트. 2017년 5월 10일. ##

당시 한국과 정치적으로 깊게 연계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유럽, 남미, 거기다가 아랍권 언론까지 크게 보도하며 세계적인 이슈가 됐다. 심지어 그 당시 세계적 관심을 블랙홀처럼 모을 수 밖에 없던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시기였음에도, 그에 압도당하지 않고 이런 엄청난 관심을 받은 것을 고려하면 국내에서만 임팩트를 가진 것이 아닌 세계정치사적 임팩트를 가진 촛불집회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수많은 해외 인터넷 사이트에도 한국의 촛불시위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심지어 이후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를 반대하던 미국 국민들이 '한국은 촛불시위로 피흘리지 않고 대통령을 탄핵했다더라, 우리도 해야 한다'며 부러워하기도 했고, 김정남 피살 사건이 일어났을때, 언론이 당시 그 지역에 거주하던 북한 주민을 취재하려 하자 취재를 거부하던 북한 주민이 '(난 너희와 인터뷰할 마음 없으니) 너희는 가서 촛불 들고 시위나 해라'라고 했을 정도였으니 이 사건의 인지도는...
게다가 비폭력 시위 역사상 최대규모의 촛불시위면서 성공하기까지 한 시위라는 점 역시 정치사적 의미가 크고, 긴 세월이 흘러도 연구될 역사적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한국에서 촛불집회는 진보 진영에서만 주로 연다는 시각도 있지만[9][10] 보수진영에서도 촛불집회를 연 사례가 있다. 예컨대 참여정부 당시 사학법 개정 반대 촛불집회 등이 있다. 당시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박근혜 한나라당 의원도 종이컵으로 감싼 촛불을 들었다.
도시 건설 시뮬레이션의 고전 명작인 시저 3에서 시민들의 지지도가 떨어지면 시민들이 '''촛불시위를 한다.''' 촛불인지 올리브유 램프인지 표현이 모호하게 되어 있으나 이 게임에서 올리브유는 대도시를 차릴 때나 나오는 고급 자원이고 로마 제국 때도 양초는 있었으니 촛불시위라고 봐도 틀리지는 않을 듯. 처음에는 길거리에서 시민 한 명[11]이 촛불을 들고 태업 시위를 하며 통치자를 규탄하는 문구를 외치지만[12], 더 발전하면 그런 시민들이 수십 명이 떼 지어 몰려나오면서 반달리즘을 시전한다.
요즘은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간편하게 스위치로 불을 켜고 끌 수 있고, 화재의 위험이 없고,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LED 촛불이 점점 더 많이 쓰인다.[13] LED 촛불임에도 왠지 종이컵을 씌운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촛불시위도 시대에 따라 점점 변하는것이다.
2018년에는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 때문에 박근혜 퇴진운동의 영향을 받은 일본 시민들이 촛불집회를 열기도 했다. 한국에서 영향을 받다보니 LED 촛불을 드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동네 상점에서도 구매가 가능해 '''훨씬 접근성이 좋은 사이리움'''을 쓰는 경우가 더 많았다.[14]
2019년에는 8월 23일 고려대와 서울대에서 당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딸의 입시 비리 의혹에 항의하는 대학가에서 촛불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후 9월 9일에는 부산대학교가 동참하였으며 9월 19일에는 연세대가 동참하여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에서 4차 촛불집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날부터 대학생들만의 집회가 아니라 일반인들도 참여하였다. 10월 3일에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1차 대학생 연합집회를 개최하였는데 서울대 촛불집회 측은 여기에 불참하고 범보수 진영이 주최하는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였다. 이후로도 몇차례 전국 대학생 연합 촛불집회가 이어졌으며 마침내 8월 23일 1차 촛불집회가 열린지 53일만인 '''2019년 10월 14일 오후 2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사퇴하였다.'''
한편 위의 촛불집회에 반발한 여권 지지자들의 촛불집회도 이어졌다. 2019년 9월~10월, 사법적폐청산 범국민시민연대 주도로 시작된 검찰개혁 촛불문화제가 9월 16일 시작, 9월 20일 까지(제1차~제5차)서울중앙지검 앞 에서 진행1차2차3차4차5차9월 21일(제6차)집회6차 7차 는 장소를 서초동 대검찰청 앞으로 이동하였다. 9월 28일 집회는 검찰청 누에다리에서 서초역 사거리 까지 약 600m 정도 거리에 시민들이 꽉 찼다. 10월 5일 (제8차)8차, 10월 12일(제9차)9차 서울특별시 서초동 서초역 사거리를 중심으로 예술의 전당 방향, 교대역 방향, 검찰청 방향 (메인 무대), 서리풀 터널 방향 4방향에 스크린을 설치했다. 8차, 9차 집회때는 예술의 전당 방향(약 1km), 교대역 방향(약 500m), 서리풀터널 방향(약 300m), 검찰청 방향(약 600m) 총 약 2.4km 길이의 서초대로, 반포대로에 시민들이 꽉 찼다. 문화제에 참여한 시민들은 ''조국수호, 검찰개혁, 공수처설치, 언론개혁'' 등을 외쳤다.
2019년 10월 19일~12월 14일, 검찰개혁 촛불문화제는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사퇴 한 뒤 서초동에서 여의도로 자리를 옮겼다. 10월 19일(제10차)10차 에는 서강대교 방향, 여의도역 방향(메인 무대) 2방향에 스크린을 설치했다. 참여한 시민들은 ''검찰개혁, 공수처설치'' 등을 외쳤다. 이때 부터 12월 14일(제15차) 까지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을거쳐 자유한국당 당사까지 행진을 하였다. 10월 26일(제11차)11차에는 여의대로(여의도 공원 근처) 로 자리를 옮겼으며, ''검찰개혁 공수처설치'' 요구와 함께 계엄령 문건에 대해 특검 요구도 등장 했다. 11월 2일(제12차)12차 에도 위와 동일하게 진행했다. 그리고 약 4주간 쉬다가 11월 30일(제13차)13차 에는 ''검찰개혁 국민총궐기''라는 제목으로 집회를 하였다. 위치가 살짝 변경되었다. 그리고 12월 7일(제14차)14차은 ''정치검찰 해체, 패스트트랙 수사'' 라는 피켓도 등장했다. 자리는 다시 11차, 12차 진행 장소로 이동 하였다. 12월 15일(제15차)15차은 10차 진행 장소로 이동, 마지막 집회를 진행하였다.

3. 관련 문서



[1] 이 사진은 노무현 정부 당시 사학법 반대를 외치며 한나라당 의원들이 시위하는 장면. 왼쪽에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과 오른쪽에 박근혜 당시 국회의원이 나란히 서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근혜는 촛불집회로 촉발된 탄핵을 당했다.[2] 이들은 이내 물대포와 경찰들에게 진압되었다.[3] 하비 밀크는 게이였으며 동성애자 인권 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4] 아직 체크카드나 계좌 자동이체 등의 서비스가 없던 시절이다.[5] 오마이뉴스 자체가 일반 시민(또는 네티즌)과 기자 사이에 있는 경계를 없앤다는 언론이기 때문에, 기자이기는 하지만 네티즌인 것이다.[6] 다만 미선이 효순이 사건 당시 첫 촛불 추모 자체는 미군 교회에서 시작했다.[7] 이때부터 촛불의 의미가 조금씩 달라졌다. 사고 직후에는실종자들에게 희망이 있을 거라 믿으며 돌아오길 바라면서, 시간이 지나 희망이 사라진 후에는 추모의 의미로 변했다. 그리고 정부가 유가족들을 탄압하고 언론이 구조 실패와는 별 관련 없는 유병언에 대해 사소한 것까지 보도하는 등 자꾸 딴소리를 하거나 유족들을 조롱하며, 공권력으로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것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의미가 확장됐다.[8] 이 사건 때문에 문재인 정부를 '촛불정부'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9] 다만 2008년 촛불집회나 2011년 촛불집회는 민주당이 주도하지 않고 상당히 나중에 끼어든 사례로, 특히 2011년에는 옛 열린우리당 정권이 등록금 상승 현상을 지켜보고만 있었다는 이유로 배척받았던 바가 있다.[10] 오히려 민주당에서 주도한 경우보다는 아닌 경우가 더 많다. 2008년 촛불집회 초기만 해도 민주당의 참여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으며 FTA 때나 세월호 때도 민주당이 주도하지 않았다.[11] 으로 표현된다[12] 이걸 치안대원이 '''칼로 찔러 죽인다.'''[13] 일부 아이돌 팬들은 촛불시위때 그 그룹의 응원봉을 들고 나오기도 한다![14] 주최측에서 LED 촛불과 사이리움 두 가지를 전부 취향에 맞게 쓰라고 나눠주기도 했다. 울오 같은 거 쓰면 한국 촛불시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광량이 나온다. [15] 2008년 한미 FTA 개정에 관한 문제로 발생했던 시위. 2016년 이전까지 '촛불집회'라고 하면 대부분 이 시위를 가리켰다.[16] 2016년 12월 3일,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 집회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약 232만명이 모여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참가한 시위가 되었다. 다만 주최측 추산으로 정확한 통계는 집계하기 힘들다.[17] 4.16연대가 주도하는 자유한국당 해산 요구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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