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제점법

 


牛蹄占法
1. 개요
2. 논란


1. 개요


고대 중국으로부터 유래한 점법으로, 모양으로 나라의 길흉을 점치던 점법이었다.
짐승의 등으로 점을 치는 방식 자체는 고대 서아시아북아프리카, 유럽에도 있었다. 고대 한국에서 소의 굽으로 점을 치는 이야기는 『정사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에 나온다.

(부여에서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 길흉을 판단하는 방식으로 소를 죽여서 굽의 모양을 보아 합하는 것을 길하다고 여겼고, 벌어지는 것은 흉한 것으로 여겼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

당나라 역사가 장초금이 쓴 『한원(翰苑)』 고려조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도 우제점법을 실시했다고 한다. 또한 북송의 학자 이방 등이 쓴 『태평어람』에도 고구려에서 우제점을 쳤다는 내용이 있다.

『위략』에 이르기를 … (고구려에서는) 군사가 있으면 역시 하늘에 제사하고 소를 잡아 굽을 보아서 길흉을 점쳤다.

『한원』 고려조

1984년중화민국 학자 궈창청(郭長城)이 당나라 관리였던 두사선이 쓴 『토원책부』를 정리해 펴낸 책에서는 고조선에서도 우제점법을 실시했다고 적어 놓았다.#[1]
경상남도 창원시의 웅천조개무덤에서 6점의 복골(卜骨)이 출토된 것을 두고 삼한에서도 우제점법을 실시했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

2. 논란


2017년 12월 16일에 치러진 서울특별시 사회복지직 9급 공개경쟁임용시험 한국사 과목에서 우제점법과 관련한 문제가 나왔는데, 시험이 끝나고 이와 관련해서 논란이 일었다.

문 5. 다음 자료에 해당하는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 대가(大家)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앉아서 먹는 자(坐食者)가 1만여 명이나 된다. 하호가 멀리서 쌀, 곡물, 물고기, 소금을 져서 날라 공급한다.

◦ 큰 창고가 없고 집집마다 작은 창고가 있어 부경(桴京)이라고 부른다.

— 『삼국지』 —

'''① 전쟁에 나갈 때 우제점(牛蹄占)을 쳐서 승패를 예측했다.'''

② 거처의 좌우에 큰 집을 지어 귀신을 제사하고, 영성과 사직에도 제사했다.

③ 금, 은의 폐물로써 후하게 장례를 치렀으며 돌무지무덤(적성총)을 만들었다.

④ 신랑은 처가 쪽에 머물며 자식이 장성한 다음에야 부인을 데리고 본가로 돌아왔다.

시험이 끝난 뒤 공개된 답은 1번이었다. 몇몇 한국사 강사들은 사료들을 제시하며 고구려에서도 우제점법을 실시했다고 주장했는데, 서울시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는 우제점법을 부여의 풍속으로 설명하고 있다.[2] 교육과정이나 학문적 권위를 가진 개설서 등에서는 모두 부여의 풍속으로 이를 설명하고 있는바, 옳은 답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1번이며 본 문항에는 문제가 없다."며 맞섰다. 강사들 가운데에서도 일부는 『한원』과 『태평어람』, 『토원책부』 등의 사료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서울시의 의견을 지지했다.
이에 한 수험생이 6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교과서에서는 고구려에서도 우제점법을 실시했다고 기재했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한국사에서도 비슷하게 설명한 점을 들어 서울시 제1인사위원회를 상대로 불합격처분 취소소송을 냈다.
2018년 12월에 열린 1심에서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는 "우제점 풍습이 다른 지역에서 발견할 수 없는 부여만의 독특한 풍습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지만, 서울시가 법원의 판결에 불복해 2심으로 이어졌다.
2019년 8월에 열린 2심에서 서울고등법원도 고구려에 우제점 풍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통설에 따른 객관적 역사적 진실이라고 볼 수 없으며, 수험생이 『한원』과 『태평어람』 등의 문헌의 사료적 가치를 나름대로 판단해서 답을 선택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결국 11월행정안전부는 해당 문제가 정답이 없다고 인정하고 점수를 다시 산정해 필기시험 추가합격자의 선발 및 추가 면접시험 기회 등을 골자로 하는 후속 조치를 마련해 각 시도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조치로 추가 면접시험의 기회를 얻게 되는 수험생은 전국 364명이며, 11월 중으로 필기시험 추가합격자를 선발해 12월 중으로 추가 면접시험을 실시할 것이라고 알려졌다.#
[1] 또한 이 책에서는 그동안 동예의 제천행사로 알려졌던 무천이 고조선의 풍속이라고 기록했다.[2] 7차 교육과정 국정교과서 부여편에는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라는 내용이 있지만 고구려편에는 비슷한 서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