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다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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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인 사피 영묘
페르시아어, 아제르바이잔어 اردبیل
영어 Ardab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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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 서북부 아르다빌 주의 중심 도시. 타브리즈에서 동쪽으로 150여 km 떨어진 해발 1500m 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아제르바이잔 국경과는 20여 km 거리이다. 이란령 아제르바이잔의 문화적 중심지로, 2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현재 인구는 약 60만명인데, 대부분 아제르바이잔 인이며 주요 사용 언어 역시 아제르바이잔어이다. 특산물로 카펫이 매우 유명한데, 위키피디아에 해당 항목이 따로 문서화 되어 있을 정도이다. #
아르다빌은 사파비 제국의 창건자 이스마일 1세의 6대조인 셰이크 사피 앗 딘이 사파비야 종단을 세운 곳으로, 제국의 뿌리로 여겨졌다. 사피가 묻힌 셰이크 영묘 일대는 쉬아 무슬림의 성지 중 하나로 유명했고 14세기 페르시아 건축의 대표작으로 손꼽혀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아르다빌 국제공항이 위치해 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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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란 산 (해발 4811m)
아르다빌 서쪽에는 만년설에 덮힌 사발란 산이 있는데, 조로아스터교의 선지자 조로아스터가 은둔하며 경전을 집필한 곳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아르다빌이란 지명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아베스타에서 언급된 '아르타빌라', 즉 성스러운 도시에서 비롯되었다. 현재의 도시는 5세기 후반 사산 제국의 샤한샤 페로즈 1세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란 북부 일대는 캅카스 너머 훈족 등의 유목민족들에게 공격받았는데, 페로즈 1세는 아르다빌을 요새화하고 마르즈반(병마절도사)의 치소로 삼아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방어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도시는 황제의 이름을 따서 바단 페로즈로 불리기도 하였다.
642년, 아르다빌은 조로아스터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대가로 이슬람 제국군에 항복하였다. 한편, 북방 유목민족의 위협은 이슬람 시대에도 지속되었다. 4대 칼리파 알리 때에 총독이던 알 아사트는 그에 대비하기 위해 마라가에 주둔하던 아랍 군대를 도시로 옮겨 정착시켰다. 8세기 들어 우마이야 왕조는 캅카스의 하자르 칸국과 극명히 대립하였다. 730년 경 하자르 칸국군이 알란 관문을 통해 남하하여 아르다빌 외곽 평원에서 아르메니아 총독 알 주라흐를 전사시켰다. 그들은 아르다빌을 함락하고 디야르바크르까지 공격한 후에야 회군하였다. 비록 마르완 2세가 반격에 성공하였지만 하자르 칸국과의 전쟁은 우마이야 조의 몰락을 촉진시키는 요소 중 하나였다.
2.1.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9세기 전반, 이란 서북부에선 아부 무슬림을 추종하는 호람딘의 반란이 터졌다. 이때 아르다빌은 아바스 왕조의 장군들인 아프신과 부가 알 카비르가 주둔하는 진압군 사령부로 기능하였다. 838년에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이미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쇠퇴하였다. 아르다빌은 시아파인 지역 우체국장이 다스리던 시기를 지나 아제르바이잔 총독에서 사실상 독립한 사즈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창건자이자 아바스 조의 총독이던 아불 카심 유수프는 총독부가 있던 마라가 대신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중앙에 위치한 아르다빌을 수도로 삼았다. 비록 919년, 아바스 왕조의 군사령관 무니스가 아르다빌 성문에서 유수프를 격파, 생포하고 도시를 점령하기도 했지만 곧 복권되었다.
929년, 유수프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알 무자파르가 아르다빌에서 살해되며 사즈 왕조는 해체되었고 다일람 계열의 살라르 왕조가 아제르바이잔의 새 주인이 되었다. 937년 경 아제르바이잔은 사즈 왕조의 신하였던 쿠르드 족장 다이삼과 시아파 지여르 왕조에 충성하는 다일람 군대의 침공을 받아 혼란에 휩쌓였다. 그러나 941년, 살라르 조의 마르주반은 그들을 격퇴해내었고 다이삼에 호의를 보였던 아르다빌의 성벽을 허물어버렸다.[4] (943년) 그럼에도 그는 957년 사망할 때까지 아르다빌을 수도로 삼았다. 11세기 아르다빌은 셀주크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12세기 들어 셀주크 조가 분열되자 아제르바이잔 일대는 아타베그 정권인 엘디귀즈 왕조가 들어섰는데, 아르다빌은 그 수도였다. 엘디귀즈 조는 그리스도교 왕국인 조지아 왕국과 대립하였다. 그러던 1209년, 타마르 대왕의 조지아 군대가 아르다빌을 함락하였고 1만 2천명에 달하는 무슬림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겨우 재건되었나 했더니 1220년에는 호라즘 제국 원정을 수행하던 몽골군에 의해 함락되어 초토화되었다. 이로써 이란령 아제르바이잔의 중심 도시는 아르다빌에서 몽골에게 순순히 항복하고 일 칸국의 수도로 변모한 타브리즈, 그리고 신도시로 지어진 술타니야로 넘어갔다. 여담으로 14세기 아르다빌에선 쥐가 많아 쥐잡이용 고양이 판매가 흥했다고 한다.
2.2. 사파비 제국
- 사파비야 문서 참고.
이스마일의 후계자인 타흐마스프 1세는 아르다빌에서 왕실의 카펫을 주문하였고 동생 모하메드를 그 총독으로 선임하였다. 그의 치세인 1570년 영묘 복합단지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아르다빌은 오스만 제국과의 국경과 가까운 관계로 그와의 전쟁에서 종종 함락되기도 하였다. 오스만 군에게 타브리즈를 상실한 타흐마스프 2세는 아르다빌로 피신하였으나 결국 카즈빈을 거쳐 테헤란으로 도주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1725년, 아제르바이잔 일대는 오스만령이 되었다가 1730년 나디르 샤에 의해 수복되었다. 1736년, 결국 찬탈한 나디르 샤는 수니파였고 아르다빌의 시아파 영묘가 지니던 막대한 재산을 압수하였다. 이때부터 순례객들에 대한 복지가 폐지되었고 19세기 초까지 영묘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2.3. 근대
19세기 초엽, 카자르 왕조의 왕자 아바스 미르자가 아르다빌의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러시아 제국의 남하에 대비하여 프랑스 장교 가르단 (1807~1809년 이란에서 파견 근무)과 함께 아르다빌을 요새화 하였다. 그럼에도 5차 러시아-페르시아 전쟁 중이던 1827년, 아르다빌은 러시아 군에게 점령되었고 이때 사피 도서관에 소장 중이던 수천권의 귀중한 필사본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반출되었다. 19세기 초반 도시의 인구는 약 4천명이었다고 한다. 19세기 후반, 아르다빌의 총독으로 부임한 나시르 웃 딘은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전쟁을 겪으며 손상된 사피 영묘를 보수하였다. 이때 러시아 군의 약탈에서 살아남은 문서들은 테헤란으로 옮겨졌다. 1910년 경 이란 헌법 혁명 당시 입헌파 장군 라힘 칸의 수중에 있던 아르다빌은 1917년 혁명까지 러시아 제국군이 진주하였고 이후엔 오스만 제국군이 주둔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