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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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기간'''
1483년 2월 23일 ~ 1530년 12월 26일(만 47세)
'''재위 기간'''
1526년 4월 30일 ~ 1530년 12월 26일
'''사망지'''
무굴 제국 아그라
'''능묘'''
카불 바부르 정원
'''종교'''
수니파 이슬람교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청년시절
2.3. 인도 정복기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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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에게 다른 것보다는 드높은 이름을 주시고 흡족한 마음으로 죽게 하소서. 그리고 그 명예가 나의 것이 된다면 죽음이 육신을 거두게 하소서"'''

무굴 제국의 초대 황제. 자하르 알딘 무함마드 바부르(ظهیرالدین محمد بابر, Ẓahīr al-Dīn Muḥammad Bābur). 티무르의 5대손을 자처했다. 본격 '''모험왕'''.

2. 생애



2.1. 유년기


바부르는 1483년 2월 우즈베키스탄 동부 시르 강 상류 페르가나 계곡의 안디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는 티무르의 4대손이었고 어머니 후틀룩 니가르 카눔은 칭기즈 칸의 15대손이었다.[1] 1494년 아버지가 죽자[2]11세의 어린나이로 바를라스 가문을 이어 받아[3] 페르가나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 무렵 티무르 제국은 껍데기만 남은 채 후손들의 권력투쟁과 내분이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바부르 역시 이 틈바구니에 끼게 되었고, 점차 그는 조상인 티무르처럼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여 티무르의 영광을 재현해 보고자 했다.


2.2. 청년시절


그러나 그런 그의 야망은 우즈베크의 샤이바니 칸과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무참하게 패해 고향인 페르가나까지 잃어버리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패배시킨 샤이바니 칸이 사마르칸트를 차지하고 아무 강 이북지역까지 세력을 떨치면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 남쪽의 카불로 달아나야했다. 1504년 카불을 점령해 새로운 근거지로 만든 바부르는 착실히 힘을 기르면서 복수의 때를 노리고 있었다. 1510년 이란의 샤 이스마일의 군대에 샤이바니 칸이 전사하자 기회를 노리던 바부르는 이란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사마르칸트를 정복하였으나… 다시금 힘을 회복한 우즈베크 인들에 의해 다시 사마르칸트를 내주고 카불로 돌아가야 했다.

2.3. 인도 정복기


이 무렵 바부르는 사마르칸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대신 과거 티무르가 정벌했던 남쪽 인도로 타깃을 정했다. 군자금 마련을 위해 그는 과거의 이슬람 정복자들처럼 펀자브 지방을 주로 침략해 약탈해 갔다. 하지만 아직 인도 중심부로 원정을 떠나는 것은 위험부담으로 인해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몇 차례의 인도침입을 통해 그는 당시 아프가니스탄 계가 세운 델리로디 왕조망조가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마지막 술탄이었던 이브라힘은 왕권강화를 위해 귀족들을 억눌렀는데, 이에 펀자브의 아프가니스탄계 지배자였던 다울라트 칸은 바부르에게 군사적 도움을 요청했고 바부르는 서북 인도 지역에 영향력을 미칠 찬스임을 깨닫고 이 제안을 수용한다. 그런데 바부르가 인도진출을 하려고 군사를 준비하던 중에 다울라트 칸의 마음이 변해 바부르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바부르를 치지만 오히려 강력한 바부르의 군대에 다울라트 칸이 패하였으며 바부르는 다울라트 칸의 영토였던 펀자브 지방을 손에 넣었다.
뒤이어 그는 인도 중심부로 쳐들어가 델리의 로디 왕조를 쳐부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고 이에 로디왕조의 이브라힘은 급히 군대를 모아 바부르의 침략에 대비했다. 마침내 둘은 1526년 델리 근처 파니파트에서 격돌하게 되고 이 전투에서 이브라힘의 군대를 박살낸 바부르는 델리와 아그라 지역을 차지해 일주일 후 스스로 인도의 황제(파드샤)임을 선포하게 된다.[4]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는데, 메와르의 라나 상가가 이끄는 라지푸트족아프가니스탄의 저항을 물리쳐야 했다. 당시 메와르의 라나 상가는 말와의 마흐무드 할지를 물리친 자신의 세력을 아그라 근처에 위치한 라야카르 강까지 뻗치고 있었다. 라나 상가 역시 인도 전역에 세력을 떨치는 것을 꿈꾸고 있었고 결국 라나 상가는 바부르를 펀자브로 쫓아내버리기 위해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바부르를 공격한다. 라나 상가의 군대는 숫적으로 바부르의 군대를 압도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바부르의 군대는 크게 동요했으나 바부르는 병사들에게 결사항전할 것을 천명하며 성전을 위한 용기를 호소했다. 그는 또한 전투 전날 모든 술통의 술을 비워버리고 휴대용 술병의 술도 버림으로써 자신이 독실한 이슬람 교도임을 증명해보였다. 이런 바부르의 절실한 호소와 단호한 행동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은 일전을 벌일 준비를 마쳤고 마침내 1527년 2월 16일 아그라에서 40킬로미터쯤 떨어진 칸와에서 양군은 격돌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바부르는 자신이 강점을 가지고 있던 포병대기병대를 적극 이용했으며 결국 라지푸트군은 무수한 사상자만 남긴 채 후퇴해야 했고 겨우 목숨을 부지해 전장을 빠져나온 라나 상가는 자신의 측근에게 독살당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칸와 전투를 통해 델리와 아그라의 지배를 확고히 한 바부르에게 있어서 이제 남은 적은 동부의 웃타르 프라데시 지역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의 세력뿐이었고 이를 위해 바부르는 1529년 아그라를 떠나 동쪽으로 진군해 아프가니스탄 군을 박살내버리고 비하르 지역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앙아시아의 세력이 불안해지자 바부르는 그들에게 다시 비하르와 벵골의 통치를 보장하되 자신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이로써 바부르는 북인도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으나 원정을 마치고 카불로 가던 도중 뜻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였다.[5] 향년 47세, 그의 시신은 아프가니스탄카불로 옮겨져 매장되었고 오늘날도 그의 무덤은 카불에 위치해 있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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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불의 바부르 정원
개인사로는 시크교의 창시자이자 초대 구루인 구루 나나크와 인연이 있다고 하는데 나나크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6]
과거 세계사 관련 서적이나 교과서에서는 보통 이름이 '바'''베'''르'로 표기되곤 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부터 정확한 발음이 알려지면서 바부르로 표기가 정착되었다.
[1] 참고로 이런 이유로 바부르를 몽골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몽골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전통적으로 부계 혈통만을 인정했었다. 또한 중앙아시아 문화와 혈통이 진하게 섞여있어 실제 몽골인과는 혈통적으로 큰 연관이 없다고 봐야한다.[2] 사인이 기가 막힌데, 새하고 놀다 추락사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추락사가 손자 후마윤에게도 일어난 것.[3] 후에 손자 악바르 대제도 증조할아버지의 전철을 밟은 아버지의 뒤를 잇는다.[4] 이렇게 빨리 바부르가 칭제를 한 이유로는 군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였다. 계속된 원정에 지친 바부르의 병사들은 고향인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는데 사마르칸트 점령을 포기한 바부르에게 있어선 인도야말로 자신의 제국을 세울 수 있는 곳이었고 따라서 칭제를 통해 자신의 결정을 확고하게 정했고 또한 병사들의 충성심에 호소해 자칫하면 내란으로 벌어질 수 있었던 병사들의 동요를 겨우 진정시켰다.[5] 바부르의 죽음은 다소 극적인 요소가 있었는데 그의 죽음에는 그가 사랑하던 맏아들인 후마윤이 악성 고열병으로 신음하던 것과 관련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바부르는 후마윤의 병간호를 하며 최선을 다했지만 아들의 병세는 악화되기만 했다. 이에 바부르는 아들 곁에 무릎을 끓은 채 신에게 아들대신 자신이 고통을 받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그 기도 덕분인지는 몰라도 후마윤은 기적적으로 병석에서 일어나 건강을 찾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번엔 바부르 자신이 중병에 걸렸고 결국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사망했다.[6] 출처는 래리 고닉의 세계사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