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
1. 王威
임금의 위엄이라는 의미로 가끔 쓰이기도 하는 단어. 보통 왕권이란 단어가 있고 아래 단어와 헷갈려서 잘 쓰지 않는 편.
2. 王位
보통 사람들이 왕위하면 생각하는 왕의 자리라는 뜻의 왕위. 이것을 얻기위해서 일어났던 일들은 아래 있는 나무위키에 개설되어 있는 목록들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2.1. 관련 항목
2.1.1. 실제의 예
2.1.2. 가상의 예
3. 후한 말의 무장
王威
생몰년도 미상
3.1. 정사
정사 주석 한진춘추에서 유종이 항복한 후 "조조는 이미 장군의 항복을 얻었고 유비는 달아났기에, 필히 해이해져 방비를 하지 않을 것이니, 가벼운 무장으로 단기로 나갈 것입니다. 만약 제게 뛰어난 병사 수천만 주셔서, 험준한 곳으로 요격하면, 가히 조조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조조를 사로잡으면 위엄은 천하에 진동하니, 앉아서 범처럼 걸어나간다면, 중원이 비록 넓다 한들, 격문을 돌리는 것만으로 평정할 수 있으니, 다만 한번의 승리만을 거두어서 금일 보전하여 지키는 게 아니게 될 것입니다. 이같은 기회는 만나기 어려우니 놓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등장은 없다. 유종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담으로 왕위의 진언은 코에이 삼국지나 각종 조조 신격화로 익숙해진 우리가 보기에는 완전히 개소리지만, 《자치통감》에 주를 단 호삼성은 자치통감의 이 구절에 주를 달아 유종이 왕위의 말을 들었으면 조조는 거의 끝났을 것이라는 평을 남겼다. 사실 이 계획이 성공한다고 해도 [1] 무능한 유종이 천하를 통일할 가능성은 낮았겠지만 조조 본인이 끝장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유종은 내심 항복에 반대하는 입장이긴 했지만 그만큼 큰 일을 벌이기에는 담이 작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조조는 광적으로 유비를 추적하는데 집착해 선봉군은 치중도 내버렸을 정도였고 선봉, 치중, 본대가 완전히 뿔뿔히 나뉘어져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각개격파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는 왕위가 단순한 유표군 장수 A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군사적 식견을 가지고 있는 무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이 발언에서 몇 가지를 알아낼수 있는데 첫째, 유표가 생전에 조조에 대한 투항을 거부했던 것처럼 유기와 유비뿐만 아니라 친조조 세력인 채모, 괴월 등에게 추대받아 형주를 이어받은 유종 세력 내부에서조차도 반조조의 기류가 분명하게 존재했다는 것, 둘째, 당시 유종이 조조군에 항복했어도 정예 수천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런 군세를 요청할만한 위치에 있는 장군이 반조조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즉, 유종 세력 내부에서도 물주인 양양의 괴씨, 채씨 호족들 외에 조조에 적극적으로 찬동한 세력만 있었던게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심지어 채모의 근거지인 양양의 호족들과 백성 등 양양의 형주 사람들 대부분이 항복을 기습적으로 결정한 유종과 채모를 비롯한 채씨 세력을 버리고 유비에게 귀부하고 유종과 채씨 세력은 그걸 전혀 막지 못했으며, 적벽대전 이후 유종의 급작스런 항복으로 덩달아 항복했던 유표의 부하 관리[2] 와 군사들 대부분이, 적벽에서 패했다해도 아직 황제의 권위를 등에 지고 있는 조조를 버리고 손권도 아니고 유기의 뒤에 있다가 그가 죽자 자연스레 그 세력을 흡수한 반조조 세력의 상징 유비에게 귀부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는 왕위 같은 이가 정예 수천으로 유비 쫒는데 정신 없는 조조를 치자는 발언을 한 것과 더불어 항복한 유종 세력에서도 반조조 세력이 상당했고, 이걸 유비가 대안이 되어 모조리 흡수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유종의 후견인인 채모는 '''조조의 절친'''이었다. 그래서 유표도 기껏 원소와 동맹을 하고도 이런 채씨 일족의 영향력을 고려했는지 조조의 통수를 후리지 않았고 유기와 유종의 후계다툼에서 유비가 유기 편을 들고 있고 채모가 유종의 편을 들고 있는지라 유종은 자신의 후견인의 말을 안들을 수 없는 형국이었다. 만일 조조가 끝장난다고 해도 채모가 등을 돌려버리면 유종으로서는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서 형주의 영유권만을 영영 잃는 상황이 도래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만일의 위험을 버리고 조조 휘하에서 벼슬을 받아사는 길을 선택한 모양이다. 물론 이럼으로서 후일 조조에게 유경승의 아들들은 개돼지와 같다고 평가받는 굴욕을 당하지만 말이다.
3.2. 연의
연의에서는 채모에 의한 유비 암살작전에서 괴월의 계책에 의해 문빙과 함께 조운을 무장들만의 술잔치로 따로 유혹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악역 부하 A 정도의 모습이였다. 하지만 후에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정사와 마찬가지로 조조를 공격하자고 주장했으며 이에 채모가 자신을 꾸짖자 채모를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말하며 채모와 다투는 등, 슬슬 충신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청주자사로 강제 부임하는 채부인과 유종을 유일하게 따르며 호위한다. 하지만 조조가 그 둘을 죽이려고 우금에게 군사를 딸려 보내자 보내자 우금을 상대로 유종을 지키려다가 죽고 만다. 물론 유종과 채부인도 죽는다. 곱게 죽지는 못했지만 문빙과 함께 몇 안 되는 유표의 충신으로 연의에서는 더 비장한 캐릭터가 되었다.
3.3. 미디어 믹스
삼국지 시리즈에는 충신 보정을 받지 못하고 무관쪽 능력치조차 70을 넘는 것이 없는 허접으로 나온다. 삼국지 1편과 4편, 5편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삼국지 3에서는 왕위 그냥 문관. 내정이나 시킬만 하다. 참고로 초반 시나리오에서는 왕위가 2명인데 나머지 1명은 바로 조앙(趙昂昂)의 이름이 오역된것.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5/무력 70/지력 55/정치력 49. 분전, 몽충을 가지고 있긴 하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1/무력 65/지력 60/정치력 54/매력 64에 특기는 회복 뿐.
삼국지 12에서의 일러스트는 검을 든 채 유종과 채부인을 죽이러 온 우금과 조조군을 상대로 맞서려는 모습이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0/무력 70/지력 62/정치력 52. 특기는 순찰 1 단 하나. 전수특기도 당연히 순찰이며 전법은 창병공격진.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0, 무력 70, 지력 62, 정치 50, 매력 64로 전작에 비해 정치력이 2 하락했다. 개성은 지리, 주의는 패도, 정책은 성벽확장 Lv 3, 진형은 어린, 안행, 전법은 저지, 구축, 강습,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은 모두 없다.
[image]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도 등장하여 문빙과 함께 유비를 호위하는 조운을 따로 분리시키려 하는 것으로 첫 등장.
삼국지 영걸전에서는 양양 전투에서 레벨 27의 중기병으로 등장한다. 일기토도 없는지라 비중은 공기. 나름 네임드 기병대지만(무 40 지58 통36) 양산형 기병대(무50 지30 통40)보다 지력을 제외하고 능력치가 후달린다. 양양 전투 이후 등장은 없다. 어째선지 일러스트가 문관형이다.
용랑전에서는 조조를 원망하며 청주로 쫓겨나는 채부인과 유종에게 "염려 마십시오. 이 왕위가 있는 한은 반드시 조조의 목을 쳐서..."라고 말하나 갑자기 나타난 흑장호에게 채부인, 유종과 함께 살해당한다.
4. 후경의 심복
王偉
(? ~ 552)[3]
후경의 심복이자 후한#s-3.5의 전략가.
따로 열전은 없으나 양서 제56권 후경등전(侯景等傳)에 왕위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548년, 왕위는 소정덕(蕭正德)과 함께 후경을 따랐으며 소연과의 전투에서 식량을 늘리기 위해 여기저기를 약탈했으나 반란군 수가 급격히 증가했고 식량은 바닥이 났다. 그러자 왕위는 후경에게 조언을 해 협상을 하도록 했다.
이후 후경이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를 자칭하자 왕위는 후경에게 칠묘(七廟)를 세워야 한다고 간언했는데 후경이 왕위에게 칠묘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왕위가 답했다.
그러자 후경이 답하니천자가 제사를 지내는 칠대 조상의 사당을 말합니다. 위패를 만들어야 되니 원컨대 감히 칠대 선조님들의 휘(諱)를 여쭙겠습니다.
이에 모든 신하들은 후경을 한심하게 여겨 몰래 웃음을 참지 못했고 왕위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 후표를 제외한 나머지 6개의 위패에 그냥 아무렇게나 이름을 적어 넣었다.할아버지 이전 조상들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못 봤다. 오래전에 삭주 땅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은 후표(候票)인데 그 먼 삭주 땅에서 어떻게 이 먼 건강까지 와서 밥을 먹는단 말이냐?
후경이 진패선과 왕승변(王僧辯)에게 패하여 후한이 멸망하자 왕위는 소역에게 채포되어 강릉(江陵)으로 압송되었는데 소역은 왕위의 재능을 높게 평가하여 그를 용서할려고 하였으나 이후 소역이 분노하여 왕위는 기둥에 혀를 박고 내장이 찔려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후 주석진(周石珍), 엄단(严亶) 역시 죽음을 맞았으며 그의 부친과 모친이 살해당하고 부인마저 처형되었다.
[1] 유종이 어리다는건 연의의 창작. 유종의 나이는 밝혀진 바가 없으며 유기랑 동복 형제였다는 사실, 유표가 사망 시 60대 후반의 고령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의외로 꽤 많았었을 가능성도 있다.[2] 가장 유명한게 오호대장군의 일원인 '''황충'''.[3] 후경, 주석진의 사망 년도가 552년이다.